2013. 1. 4. 13:24

한국 사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여러 경제·사회지표들을 시계열적으로 놓고 보면 2012년과 2017년의 대선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부터 10년이야말로 향후 수십년간 한국의 운명을 가를 전환의 시기이고, 그래서 우리는 두 번의 진정한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실패할 경우 예상되는 일들은 이런 것들이다.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시장에 의한 사회의 포획’은 거의 완결단계에 이를 것이고, 사람들은 무한경쟁에서 매번 승리함으로써 제자리에 있거나 아니면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고령화로 인해 세금 내는 사람은 줄어들고 부양받을 사람은 늘어나는 인구구조의 변화를 체감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약 10년 뒤다. 제대로 된 한국형 복지국가의 틀을 만들 유일한 기회가 지금부터 10년인데, 복지 포퓰리즘으로 나라 망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이 일을 해낼 리는 만무하다. 세대 갈등은 세대 전쟁으로 비화할 것이다. 한국의 2030세대는 심각한 세대 차별을 겪고 있고, 이번 대선에서 세대별 지지후보는 40대를 변곡점으로 해서 뚜렷하게 갈린다. 만약 2030세대의 미래가 50대 이상의 표심에 의해 선택‘당한다면’ 10년 후 그들은 자신들의 우울한 현재를 기어코 선택해주었던 선배들을 힘들여 부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인 조건들이 지금보다 훨씬 나빠지기 때문에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도 훨씬 적어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가진 희망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의 진정한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민주정부란 개혁과 진보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정부이다. 개혁이란 투명성과 효율성, 그리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신뢰가 핵심이다. 진보란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가 국민 전체의 삶을 제대로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의 뿌리인 노동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언론과 사상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며,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 다시 한번 도전하여 공동체에 기여할 기회를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진보이다. 개혁과 진보가 두 개의 바퀴가 되어 굴러가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정권교체가 된다 하더라도 다른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지 않는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진보된 세상을 만들고, 투명하고 효율적인 개혁을 통해 그 달라진 세상에 대한 신뢰를 얻어내고, 그만큼의 신뢰를 자산으로 삼아 또 조금 더 진보된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세상이 달라진다. 그래서 개혁과 진보는 함께 가야 하고, 신뢰가 없으면 세상의 진보도 없다.

 

안철수 현상이 처음 등장할 무렵인 2011년 10월30일치 <한겨레> 보도를 보면 정치세력 선호도에서 한나라당 40.0%, 제3세력 39.3%, 민주당 11.1%라는 결과가 나왔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안철수를 비롯한 제3세력이 민주당보다 훨씬 더 개혁적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개혁의 내용을 이루는 투명성과 효율성, 그리고 신뢰는 문재인보다 안철수의 자산이다. 집권 경험과 제1야당이라는 제도적 자산은 문재인의 것이다. 안철수의 개혁과 문재인의 제도적 자산이 합쳐질 때 비로소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진보의 내용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희망의 크기가 훨씬 작아진 2017년은 두 사람에게도, 혹은 제3의 후보에게도 한층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이자 유일한 희망은 두 사람의 지지층이 화학적 결합을 완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의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33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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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23

그는 스스로 기자라 자칭했지만 기자들은 그를 줄곧 '왕초'라 불렀다. 기자치고는 생긴 것이 조폭 두목인데다, 평소의 언행이 언제 어디서건 기자들의 폐부를 찌르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발행인 고 장기영 사주를 일컫는 이야기다.

70년 초 내가 김포공항을 출입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출국 차 공항에 나타난 왕초가 출국대합실을 통과하던 중 'LADIES'라 쓴 여자 화장실 간판을 흘깃 보더니 눈빛이 바뀌었다. 하필이면 간판 중간의 I자가 빠져 있었다. 이를 본 왕초, 벽력같은 쇳소리로 공항 측의 태만과 무관심을 질타했다.

그의 탑승을 돕던 김포공항장과 항공사 지점장들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바뀌었다. 왕초는 이어 나를 부르더니 "이봐, 그것도 하필이면 한가운데 글자가 빠졌지 않았나 말이야! 저 경우 한 가운데가 제일 중요한 부위야!"라 호통 쳤다. 그를 수행하던 공항직원들 모두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기자들이 당시 왕초를 무서워한 건 평소 그의 엄청난 독서에 기가 질렸기 때문인데, 당시 한국일보 도쿄특파원의 고정 업무가운데는 일본에서 화제에 오른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를 구입, 서울의 왕초한테 당일로 직송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왕초 명언과 기략은 바로 이 독서의 산물이었다. 다음은 그 명언 가운데 한 토막.

"일본 한 지방의 번주(藩主)가 다른 쪽 번주한테 서찰(書札)을 보낸다. 서찰을 품에 넣은 졸(卒)은 사흘 밤 사흘 낮을 쉬지 않고 달려, 저쪽 번주한테 전한 후 탈진상태로 죽어간다. 그러자 서찰을 받은 번주는 졸을 당장 목 베라고 호통 친다. 하루 반이면 충분히 올 거리를 사흘 걸려 왔다"는 죄다.

그러나 이 호통으로 그 졸은 살아났다는 것이 왕초의 요지다. "가만 놔두면 그 졸은 과로와 기아로 십중팔구 죽게 마련이라는 것". 목 베라고 호통치고 기압을 넣었기에 살아났다는 얘기로, 3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내겐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사자후였다. 그는 스스로가 신문에 글쓰기를 즐겼고, 휘하의 기자를 평가하는데도 그 기자가 쓴 글로 평가했다. 심금을 울린 기사를 읽었을 경우 주석(酒席)이든 꼭두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전화를 걸어 그 기자를 격려했다. 이런 풍조는 자칫 기자들에게 역기능으로까지 번져 글 못 쓰는 사람은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묘한 악습까지 낳았지만, 왕초가 그 정도로 글을 중시했다는 반증도 된다. 이 점,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와 흡사한 대목인데, 리콴유 역시 자기를 만나려는 숫한 외국 원수 가운데 그 흔한 자서전이라도 한 권 쓰지 않은 지도자는 면담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던 인물이다.

대선이 정확히 3주 후로 다가왔지만 나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정작 누굴 찍어야할지 판단을 유보한 상태다. 이 딜레마를 풀 해법이 있다면 딱 하나, 여야 후보가 쓴 수필을 단 한편만이라도 읽었으면 싶다. 사람의 분별력이 글을 통해 나타남을 왕초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 모두 독서를 통해 상당한 지식을 쌓은 데다, 한 후보는 퍼스트레이디를, 다른 후보는 청와대 도승지까지 역임한지라 둘 다 경륜이나 사고의 깊이 면에서도 이미 검증을 거친 걸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분별력이다. 더구나 지난 6월 말 세계 일곱 번째의 '20-50그룹' 반열에 성큼 진입한 지금의 우리 입지에서 지도자가 지닐 분별력이야 말로 지식이나 경륜을 훨씬 웃도는 가장 절박한 덕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분별력이라는 것이 글쓰기를 통하지 않고는 쉬 검증이 되지 않다는 걸 왕초는 그의 가장 협객다운 쾌변(快辯)으로 남긴 것 같다. 그 왕초의 표현대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 '빠트려서는 안 될 제일 중요한 부위'가 바로 지도자의 분별력이라 생각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302101151157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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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23

11월 15일 전 세계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중국의 제5세대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출범했다.

중국은 30여 년 전 덩샤오핑(鄧小平)이 깔아 놓은 개혁 개방의 노선 위에서 경제는 수출 주도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정치는 기술자와 테크노크라트 출신 지도자가 임기를 지키는 관행을 확립했다. 외교는 마오쩌둥의 혁명적 정책을 수정하여 미국과도 암묵적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매년 10%씩 폭발적 경제성장을 이루어 주요 2개국(G2)에 진입했다.

중국은 이미 베이징 올림픽, 상하이 엑스포, 유인위성 발사, 항공모함 진수 같은 실적들로 중화민족주의의 자긍심을 고취해 한 세대 안에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그 뒤편에는 연안과 내륙의 격차, 부실 대기업 문제, 노사관계, 사회보장 문제, 물 자원과 환경 문제 등 해결하기 힘든 난제가 산적해 있다.



혹자는 시장경제체제인 한국보다도 중국이 더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양극화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은 소득배분 상태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한국보다 더 불안하다. 상위 10% 계층의 소득이 하위 10%의 26배나 된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10배에 불과하다.

여기에 정치 상황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공산당 1당 체제의 권력독점은 부패와 투명성 문제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소요사태가 연간 18만 건이 넘는다. 고속성장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금년 성장률은 7.5%로 떨어지고 앞으로 연간 8% 달성 목표에 빨간불이 켜졌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도 한국처럼 2016년부터는 급격하게 인구의 고령화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15∼64세의 생산가능인구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30년 전 도입한 1부부 1자녀 인구정책의 결과 청년 한 사람이 부모와 조부모, 외조부모 등 총 6명을 부양해야 한다. 경제성장의 추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건비는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급격한 인구 고령화는 1990년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20년 이상 장기 정체를 겪고 있는 근본 원인이다. 한국도 곧 다가올 인구 고령화에 적극 대비해야 하지만 특히 중국의 경우엔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소득 2만 달러의 선진화 단계에 진입하기 전에 고령사회를 맞을 경우 잠복된 사회적 갈등과 구조적 난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게 된다.

이제 출범한 시진핑 체제는 냉철한 미래 예측과 과감한 정책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반도 통일 문제도 냉정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금 북한의 3대 세습체제로는 개혁 개방을 하기도 어렵고 안 하기도 어렵다. 북한은 이미 기회를 잃어버렸다. 북한 정권이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 채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계속할 경우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낡은 명분 때문에 언제까지 질서파괴자의 대부 노릇을 할 것인가. 성공한 대한민국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이 순리라면 억지로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면 동북아 경제협력의 단절된 고리가 자연스럽게 복원될 것이다. 중국의 낙후된 동북 3성이 한반도 경제와 연결되면 한중 양국에는 제2의 경제활성화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

1983년 중국 민항기사건에 이어 1985년에 중국 어뢰정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뢰정사건을 처리한 지 한 달 후 덩샤오핑 지도자는 한중 수교 추진 지침을 외교 책임자들에게 내렸다. 대한민국을 신뢰할 만한 대화상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20년 전 체제가 다른 한중 양국이 관계 정상화를 통해 모두 폭발적 경제성장을 이루었듯이 한반도 통일은 양국을 부흥시킬 것이다. 특히 두 나라 모두 안고 있는 고령화라는 인구 재앙을 극복할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것이다.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한중 수교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

 


http://news.donga.com/3/all/20121201/51231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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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22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우리 경제성장률이 2.2%, 내년 성장률은 3.0%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얼마 전 한국은행이 하향 조정한 전망치보다 더 낮은 것이다. 지난 3분기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1.6%에 그쳤다. 과거에도 우리 경제가 이 같은 저성장을 기록한 적이 있으나 당시에는 오일쇼크, 외환위기, 카드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등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지금 상황은 결정적 계기도 없이 서서히 성장이 주저앉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이제 저성장 시대로 들어서는 것인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최근 우리 경제의 저성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추세적 성장률 하락이다. 우리 경제는 한창 활기차던 청장년의 시대를 지나 이미 초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민주화 이후 노태우 시대 8.7%, 김영삼 시대 7.4%, 김대중 시대 6.0%, 노무현 시대 4.3%, 이명박 시대 3.0%라는 숫자가 이런 추세적 하락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공급과 투자 증가율이 점점 둔화돼 현재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이미 4% 아래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순환적 요인에 의한 저성장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침체를 지속해 왔다. 미국·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한 것은 가계·금융기관·국가의 부채가 과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이들의 부채 감소와 대차대조표 조정이 일어나야 하나 이것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 팽창적 재정, 통화정책으로만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 근본적 구조조정은 외면함으로써 앞으로 상당기간 부채 조정이 더 지속돼야 하고 따라서 회복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 위기 직후 세계경제를 견인했던 중국마저 최근 성장률이 크게 내려앉아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저성장을 면키 어렵게 됐다.

셋째, 세계경제의 구조적 성장률 하락이다. 세계경제의 고성장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분석이 최근 나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장에 익숙해 있지만 과거 세계경제는 정체를 지속했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지난 약 200년간의 높은 성장세는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예외다. 노스웨스턴대의 로버트 고든 교수는 세계경제가 가장 빠른 성장을 지속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25년간이며 이는 19세기 초 증기기관 발명에 의한 1차 산업혁명보다 전기, 내부연소엔진의 발명, 그리고 상하수도를 실내로 끌어들여온 2차 산업혁명의 효과가 시차를 두고 인간생활에 훨씬 더 큰 변화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때문이란 분석을 최근 내놓았다. 이에 비해 주로 정보기술(IT) 분야에 국한된 3차 산업혁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간 생산성과 성장률을 반짝 높였으나 2차 산업혁명의 효과에는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상하수도 없는 집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페이스북 없이 살 것인지를 물으면서 그는 어느 쪽이 인간생활에 더 큰 폭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혁신과 발명의 개척지가 줄어들면서 이제 세계경제의 성장세는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지금과 같은 저성장이 지속된다면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양극화, 가계부채 등 내부적 문제가 점차 악화돼 결국 경제사회적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큰 과제다. 두 가지 측면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경제가 잠재성장률 이하로 성장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한다. 재정 지출을 늘려 경기를 일단 부양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야 대선후보가 모두 복지지출을 늘리겠다고 하니 이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증세를 통해 복지지출을 확대하더라도 재정 승수효과에 의해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보육, 간병, 의료 등 복지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늘려 복지전달체계와 소득분배를 개선하게 되면 사회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중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의 빠른 하락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범위한 제도적·구조적 개편이 필요하다. 임금체계의 개선, 정년 연장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를 유도해 노동 공급 하락을 막고, 교육 개혁과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생산성을 높여나가야 한다.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지식 수준과 사회적 합리성을 제고해야 한다. 지식은 합리성 위에서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체질과 구조는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세계경제 환경도 그렇다. 이제 경제정책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복지 확대를 포퓰리즘이라고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얼마나 성장과 분배에 도움이 되도록 설계하는지를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45681&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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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8

요즘 중국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말이 ‘칼날 위의 춤(刀尖上舞蹈)’이다. 첫 항모인 랴오닝(遼寧)함 함재기 젠(殲)-15가 엊그제 항모 이착륙에 성공하자 중국 언론이 쏟아낸 수사(修辭)다. 칼날 위에서 춤추는 것처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9호가 그 어렵다는 우주정거장과 수동 도킹에 성공했을 때도 이 같은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으니 시진핑(習近平)시대 자긍심은 강도가 더 세졌다.

사실 중국이 이런 표현을 할 만도 하다. 함재기가 바다 상공에서 항모에 착륙하려면 무려 65개 과정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고 한다. 활주로 길이가 200여m로 육상의 15분의 1에 불과하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초인적 정확성을 실행에 옮길 함재기 조종사 선발은 우주인보다 더 까다로웠다. 물론 미국 항모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미국도 수천 명의 인명을 잃고서야 확보한 함재기 이착륙 마법이지 않은가. 이런 첨단 기술이 중국 손에 들어갔으니 중국의 항모전단이 세계 바다를 누빌 날은 시간문제다.

그럼 요즘 한국은 어떤가. 나로호 발사 성공에 위안을 좀 받으려 했더니 무기 연기돼 그마저 기약하기 힘들게 됐다. 대신 사회 전체가 칼날 위에서 막춤을 추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것도 발 밑이 예리한 칼날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 상황에 너무 무감각해진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중화부흥을 외치며 군사력 증강에 올인하고, 일본도 이에 맞서 우경화 망령을 되살리는 형국이다. 그뿐인가. 혈기방장한 북한의 김정은은 군을 숙청하고 미사일 부대를 휘젓고 다닌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어느 지도층도 한반도 주변을 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는 게 낫겠다. 지난 10월 주중 대사관 국감 때 베이징(北京)에 온 의원님들의 질문이다. “중국에서 강남스타일이 인기가 있나요.” “요즘 대사관 당직영사 전화는 몇 대인가요.” 중국의 부상이 우리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단 한 번의 고민이라도 해봤다면 이런 유치원생 같은 질문 안 했을 거다.

과연 나라를 이끌겠다는 대선 주자들은 어떤가. 선거가 코앞인데도 한반도 주변 상황을 유권자에게 알리고 국가안보에 대한 전략과 의지를 밝히는 후보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에다 현직 대통령의 한심한 사저 스캔들과 검찰의 상하 박치기 싸움에 이르면 맥이 빠진다. 한국 특파원을 지낸 중국 기자 한 명이 『중국 기자가 본 한국』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한국의 민주화, 열정, 신바람 모두 부럽다. 그런데 가끔 한국은 주변을 안 보고 냅다 질주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 그의 말인 즉 칼날 위의 막춤은 언젠가 발바닥을 베이게 돼 있다는 거다. 그러나 베이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베이징에서 바라보는 한국 대선이 너무 조마조마하다.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45700&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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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7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여야 모두 부정적이다. 차기 대선 주자들도 김정은과의 대화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남북 관계의 평가는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의 입장을 분리해야 그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다. 과거 북한 정권이 주민의 외부 정보 접촉을 완전 차단할 때의 남북 관계란 정권 간의 관계로 한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쪽에서 일어난 일이 북한 내부로 확산하고 있어 주민 입장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북한 주민이 한국의 대북정책을 직접 피부로 느끼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남한 내에서 평가절하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 내 반체제 인사들과 주민 속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 기간 북한은 남한의 역대 어떤 정부 때보다 가혹하게 대남(對南) 압박 정책을 시도했다. 외견상 이명박 정권이 북한을 압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부터 세운 대남정책이 '묻지 마 압박과 협박'이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이 그 사례다. 이 기간 북한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시장 확대를 막으려고 단행한 화폐개혁이 실패하여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등 고위 인사들이 처형당했다. 인민들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북한 정권을 믿지 않게 되었다. 모든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북한 당국의 민심 왜곡도 더 이상 주민들에게 통하지 않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급사(急死)한 것도 어떻게 보면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협박을 끝까지 잘 막아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시장의 확대로 북한 인민들의 삶은 어려움 속에서도 안정을 찾고 있지만 대외 지원에 의존해왔던 권력 집단은 심각한 위기에 내몰렸다. 권력도 유일적 독점체제에서 장성택·최룡해·김경희 등으로 분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강성 군부의 수장(首長)인 인민군 총참모장 리용호가 수하들과 함께 숙청된 것은 군부 내 불만이 폭발 수위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정은 정권은 대외 지원이 끊기자 '울며 겨자 먹기'로 변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이권을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정부의 간섭을 줄이고 독립채산제를 강화해 버는 만큼 근로자들의 월급을 올리는 조치들이 지속적으로 내려지고 있다.

김씨 왕조의 기득권에서 제외되는 다수의 북한 엘리트들은 3대 세습의 성공 여부가 외부의 경제 지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한국의 차기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처럼 대대적인 대북 지원을 하게 되면 경제난에 몰린 김정은은 이를 체제 안정에 100% 활용하여 기사회생의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억지로 진행하는 경제개혁도 즉각 중단할 것이다.

북한 정권은 스스로 변화할 정권이 아님을 지난 15년 세월이 증명하고 있다. 북한을 잘 아는 중국조차 북한에 대해 무상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변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 평가는 북한 정권과의 대화·교류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북한 주민이 원하는 바가 얼마나 해결되었는가로 남북 관계를 평가할 때가 왔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조선일보 객원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30/20121130029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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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6
나도 어지간히 '개그콘서트'를 즐겨보는 국민의 일원이다. 그걸 챙겨 보야야 하는 이유 가운데엔 어영부영 몇 주 건너뛰었다간 눈 뜬 소경이 되기 십상인 탓도 있다. 물론 대중문화가 언어의 생태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개콘 만한 위력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다. 단지 몇 주 개콘을 걸렀단 이유로 말귀가 어두워져 눈만 끔벅대는 처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별난 한국 사회의 단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요즘 개콘에서 가장 큰 인기몰이를 하는 코너는 단연 '네 가지'일 것이다. '여배우들'과 짝을 이루는 이 신종 '자학 개그'는 통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보는 이를 시원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열등함 혹은 그들의 말을 빌자면 '없는' 것, 갖지 못한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통쾌한 기분이 없지 않다. "누굴 진짜 돼지로 아나! 오해하지마라. 마음만은 홀쭉하다"고 을러대는 개그맨의 호통은 후련하다. 그렇지만 '네 가지'의 인기를 가능케 한 세태를 생각하면 그리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는 노릇이다. 우리가 자학 개그에 열렬히 호응하기까지엔 그만한 찝찝한 사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짐작컨대, 자학개그의 재미는 부족한 것을 가진 자들이 느끼는 주눅든 심정을 속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키 높이 깔창을 신고 다녀야 하는 단신의 사내의 눈치이든, 시골 출신이라 아무래도 사투리에 신경 써야 하는 촌놈의 눈치이든, 눈칫밥을 먹고 살던 이가 외려 당당한 체하는 장면은 보는 이를 짜릿하게 해준다. 굳이 내가 그런 처지가 아닌데도 개그맨들의 넉살좋은 입심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져본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을 닦달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세태에 대한 반동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자기를 키우고 다듬어 가는데 열중하든, 설령 그런 매뉴얼은 거들떠도 본 적이 없어도 스펙을 관리하고 연봉을 올릴 방안을 궁리하든, 이 모두는 '자기'라고 불리는 것을 현명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명령과 상관이 있을지 모른다.

자기관리라고 부르는 이 윤리적인 협박은, 물론 그에 서툰 이들을 향한 혐오와 원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찌질하다"란 말 자체가 암시하듯 어느새 달갑지 않은 사람은 자기관리에 허술한 인물로 바뀌고 말았다. 낯빛 좋고 몸 좋고 매너 좋은 사람은 물론 그럴 만큼 열심히 노력을 한 사람이란 대접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았을 때 건네는 말이 "자기관리 열심히 하였네요"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자기관리의 윤리가 최고의 윤리로 자리 잡았을 때, 그 윤리적 자세는 당연히 규탄해야 할 적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기관리라는 윤리적 덕성을 위반한 못난 자들의 역은 누가 떠맡아야 할까. 그 자리를 맡을 최고의 후보는 단연 뚱보와 흡연자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으뜸으로 치는 세계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음험하게 창궐하는 이러한 혐오와 환멸은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무능한 자를 향해 흘러들어간다. 뚱보가 왜 환멸스런 사람일까. 비만한 사람이 아름답지도 성적인 매력도 없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뚱보와 흡연자는 자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인물의 전형인 셈이기 때문이다. 뻔히 건강을 해칠 것을 알면서 극구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야말로 너무나 역력히 자기관리의 윤리를 위반하는 악인 아닐까. 그런 탓에 송구한 낯빛으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빨다 보면, "그래, 나는 골초다"라고 어깃장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 고개를 쳐들지 않을 수 없다. 실은 자학개그의 주인공들은 '네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여야 옳을 지도 모른다. 자기도 제대로 못 가누는 찌질한 윤리적 패배자의 이름, 골초를 덧붙여서 말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29210258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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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5

모든 선거판은 말싸움 판이다. 말싸움은 이름에서 시작된다. 1970년대에 경찰관 출신 박병배 씨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상대 당은 박씨를 '박살 났다 박병배!'라고 불렀다.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 박실 씨는 선거 때 '박해 받은 실력자'라고 이름을 알렸다. 이름을 이용한 홍보나 비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반대세력은 박근혜가 '나그네'가 될 거라고 말한다. 또 나라를 보수ㆍ독재 시절로 되돌릴 것이라며 '빠꾸네'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문재인 후보를 빨갱이도 아닌 '빨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더하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고 문재인을 '문죄인'이라고 쓴다. 또 1주일을 '월화수목김정일'이라고 표기한 문죄인 내복까지 인터넷에 올렸다

안철수가 사퇴한 이후에는 "'안'이 안 보인다고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문'을 열면 그 '안'에 더 크고 넓은 세상이 펼쳐집니다."라는 말을 쓴 트위터리안이 있다. 안철수가 이미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렀다고 하자 '안철수'는 원래 절대 철수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좋아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장난은 재미있고 기발하기도 하지만, 정작 후보들의 말솜씨는 어떤가? 한 원로 언론인은 최근 어떤 글에서 세 후보(안철수 포함) 모두 어쩌면 그렇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연설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썼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두 남성 후보, 초등학교 저학년 담당 여교사가 교과서를 읽는 듯한 여성 후보, 그들은 단조로운 연설로 유권자들의 감동을 사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철수의 사퇴 회견도 감동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만, 그 내용에 어울릴 만한 정도의 극적 긴장과 감동까지는 아니었다. 사퇴가 일정한 격식을 갖춘 단일화의 한 과정이 아니라 정치에 갓 입문한 사람의 일방적 철수선언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목소리와 어조, 입 모양부터가 대중연설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최근에 끝난 미국 대선을 떠올리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롬니 후보는 멋진 웅변 대결로 유권자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오바마의 랩 송과도 같은 힘찬 연설은 그가 어떻게 매력 있는 정치인이 됐는지 알게 한다. 요즘 일본에서는 하시모토 토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명쾌한 화법과 독특한 제스처로 유권자들을 끌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히틀러의 연설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고 전율을 느낀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타계 이틀 전인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사자후를 토한 해공 신익희의 연설이 명연설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은 과거와 같은 현하웅변(懸河雄辯)이 대세를 좌우하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떠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연사는 기술과 연습이 필요하다. 타고난 목소리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일국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들에 대한 무례이며 경시행위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끔 어법이 안 맞거나 맞춤법이 틀리는 엉뚱한 휘호로 구설수에 올랐는데, 대중연설과 휘호는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서 적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후보들과 그 캠프 참여자들은 말을 잘 못하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자 새누리당은 놀라면서도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철수의 정치쇄신 공약을 흡수하겠다고 하는데, 사퇴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하면서 좀 어른스럽게 통 큰 논평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런 점은 민주통합당도 마찬가지이다. 통합진보당의 행태야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웅변도, 감동도 없고 상대를 비난하는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과거나 계속 들추는 대선 판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임순철 논설고문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292106448194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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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2
“히야, 분대장 동지, 저… 저길 보십시오. 산에 염소들이 있습니다.”

이동 중 잠시 멈춰선 북한군 차량 행렬에서 한 병사가 벌떡 일어나 감격스럽게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도 환호했다.

“와, 진짜네. 여긴 아직 염소가 있구나…. 천국에 왔다야….”



주변에 있던 민간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얘들은 염소 처음 보나.”

1990년대 중반 경제난이 닥치기 직전 북한의 내 고향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 병사들은 주둔지 변경을 명령받고 강원도에서 막 도착했던 참이다.

병사들이 왜 염소를 보고 놀랐는지는 1년도 안 돼 드러났다. 마을의 염소는 물론 닭 돼지 토끼 등 가축의 씨가 말라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용감한 ‘공산군’은 주인이 못 나오게 문에 자물쇠까지 걸고 훔쳐 갔다. 도둑질로 처벌받은 군인은 없었다. 몇 년 뒤 군인들이 ‘선군(先軍)시대’가 왔다고 기고만장해 돌아다닐 즈음 우리 마을도 집안에서 키우지 않는 가축은 내 것이 아닌 시대가 됐다.

그 뒤부터 나도 다른 지방에 갔다 산에서 염소를 발견하면 “히야, 여긴 아직 염소가 있네” 하고 감탄하게 됐다.

1998년인가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졌다.

“산에 토끼와 염소 떼가 흐르게 해 인민들이 고기와 우유를 맘껏 먹게 하시오.”

이 지시를 집행한다면서 북한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마당에 스위스에서 토끼 종자는 물론 풀씨까지 수입하기도 했다.

하나 설사 하느님의 지시라 한들, 군복 입은 도둑 떼가 흐르는 산에 염소 떼까지 흐르게 하는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그렇다고 지시를 거역할 수도 없고…. 하지만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는 법이다. 농장은 염소 새끼를 몇십 마리 사다 놓았고 얼마 뒤 방목공이 우리에서 함께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대로 군인들이 다 훔쳐갔다. 지시를 지킨 것도 아니고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닌 걸로 끝난 셈이다.

다음 해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양어장을 대대적으로 건설해 인민들이 민물고기를 많이 먹게 하시오.”

숱한 돌격대가 만들어져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전국 도처에 수영장만 한 구덩이를 수없이 파 놓았다. 하지만 전기와 사료가 없는데 양어가 되나. 다 아는 사실을 김정일만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고 목을 걸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결국 이 지시도 수많은 물웅덩이를 전국에 남긴 채 끝났다. 파지 않았으면 옥수수라도 심어 먹지.

사람들이 “장군님, 우리가 언제 민물고기를 먹겠다고 했습니까”라고 수군댔다. 그로부터 얼마 뒤엔 지방 사람은 구경도 하기 힘든 전기로 난방을 하는 타조 농장도 새로 건설됐다.

고려 시절 문인 이규보가 북한에 환생해도 똑같이 썼을 것 같다.

“사람이 사노라면 우스운 일 하도 많아/낮에는 바빠서 다 웃지 못하고/밤중에 이불 속에서 혼자 웃노라/손뼉을 치며 소리 내어 웃노라.”

이달 2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선 대규모 축산기지를 만들기 위해 떠나는 수천 명의 평양시 돌격대원들을 바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강원도 세포, 평강, 이천에 수만 정보의 인공 풀판과 자연 풀판을 만들어 가축을 기르겠다고 한다. 하필 이 겨울에 삽 메고 강원도로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게 보이는 건 둘째 문제다.

그 지역은 돌을 열 개 던지면 아홉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고 할 정도로 여러 개의 사단이 몰려 있는 곳이다. 반면 공급은 가장 안 좋아서 군관들조차 먹을 것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김정은이 지금 고깃덩어리들을 키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걸 보며 북한 주민들은 이불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주성하 국제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21130/512046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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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2

최근에 보고 정신이 번쩍 든 수치가 있었다. 2.2%.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망한 올해 경제성장률 수정전망치다. 그동안 이런 성장률은 미국·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다. 지난해 연말 KDI가 전망했던 올해 성장률은 3.8%, 다른 기관들도 3.5~3.8% 선이었다. 후한 전망치는 아니었는데도 1년 내내 이를 싹뚝싹뚝 잘라먹으며 3분기에 2.5%로 낮추더니 또 0.3%포인트를 깎았다.

KDI가 내놓은 내년 전망치는 3.0%. 다른 기관들도 2.8~3.2% 선이다. 물론 전해 연말에 내놓은 전망치가 맞아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내년 결말은 달라질 거다. 어쩌면 1%대도 볼 수 있을 거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구가하던 개발연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터라 한 자릿수 성장률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는데, 이젠 뒷걸음질치는 것까지 봐야 할 형편이다.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참 인생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개발연대는 운도 좋았다. 세계시장은 팽창기였고, 우리만 잘 하면 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보다 세계시장이 더 우울하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의 3대 시장인 유로존의 경제위기는 헤아려볼 엄두도 나지 않고, 미국과 중국도 제 코가 석 자다.

미국에서는 오바마노믹스가 강건하니 양적완화 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이 와중에 원화강세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의 중국은 국가만 부유한 ‘국부민궁(國富民窮)’에서 벗어나 국민을 부유하게(富民) 하고 내수를 진작시키겠단다. 잘만 되면 중국에 큰 내수시장이 열릴 거다. 그런데 그동안 ‘세계의 공장’ 중국에 자본재와 중간재를 주로 팔았던 우리에게 중국의 내수시장 팽창이 유리한지 의문이다. 한 마디로 두 시장에서 재미를 보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말이다.

내년엔 정부가 바뀐다. 박근혜-문재인 중 한 진영이 집권할 거다. 한데 양 진영 공약을 보면, 벌 대책은 없는데 쓸 궁리는 무한정이다. 과거문제에 매달려 투닥거리는 양 진영은 ‘따뜻한 복지’에 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낸다. ‘지금은 복지확장기’(박근혜)란다. 공약대로라면 아이는 낳기만 하면 나라에서 키워주고, 대학도 반값에 다니고, 나이 들면 나라가 돈을 주고, 병들어도 걱정이 없다. 누가 되든 지상낙원이요, 나라가 따뜻하게 보호해 주니 국민은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이 말, 실은 국민들이 별로 안 믿는 눈치다. 시장 아주머니들도 “대선용 공약(空約)을 뭘 믿느냐”며 혀를 끌끌 찬다. 한 독자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강한데, 정치인들은 맨날 눈물을 닦아준다는 둥 하느냐. 이런 정치인들이 요즘 내탓은 않고, 남탓만 하는 풍토를 부추기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는 e-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정말 뒷수발 자처하는 따뜻한 정부일까? 이날까지 나라에다 밥 달라며 떼쓴 적이 없다 보니 정치인들의 따뜻한 표정이 오히려 낯설다. 원래 한국인은 나라에 위기가 오면 자기가 할 일부터 찾는 습성이 있다. 외환위기 당시 ‘금을 모으자’는 한 마디에 엄동설한에 줄까지 서가며 금을 바친 국민이다. 이런 만만찮은 국민을 두고, 무슨 이유로 아이마냥 보호하겠다며 후보마다 ‘선량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나서는지 모르겠다. 경제도 암울하고, 능력도 안 되면서.

물론 보육료 주면 살림에 보탬 되고 좋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나라의 활력을 되찾으려면 국민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인은 누구나 나갈 방향만 알면 자신을 희생하며 그 길로 매진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만 잘하면 됐던 ‘게임의 룰’이 바뀌는 바람에 방향을 잃었다.

우리가 대통령후보에게서 듣고 싶은 건 뜬구름 잡는 지상낙원타령이나 과거의 잘잘못이 아니다. 정확한 현실인식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 그리고 국민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제대로 미래 청사진을 그리고, 국민에게 어려운 길로 가달라고 촉구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한국인은 강하고 미래를 원한다는 것을 후보들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양선희 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33663&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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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1

23일 오후, 안철수 후보 사퇴 직후. 카카오톡 문자가 하나 날아들었다. “안철수 후보 사퇴했어요.” 대학생 아들이었다. 평소 정치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 아들이 문자까지 보낸 걸 보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밤늦게 퇴근하자마자 아들은 안철수 얘기를 꺼냈다.

종로에서 친구들과 만났는데 갑자기 “안철수, 안철수”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 가봤단다. ‘안철수로 단일화됐나’ 하고 기대하다 사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해 돌아서는데 옆에서 누군가 “이제 문재인 찍어요”라고 홍보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은 “문재인은 아닌데…”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막상 투표장에서 박근혜를 찍을지, 문재인을 찍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안철수 지지자들은 상당 기간 공황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이 안철수 현상이다. 지난해 9월 서울시장 선거 이후 그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지금도 안철수가 문재인을 지지하느냐 마느냐에 정치권이 목을 매고 있다. 이런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가 만든 것일까. 아니다. 안철수가 아니어도 안철수 현상은 있었다. 안철수 현상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이들에 잠재된 불만이다. 안철수가 그것을 들어주고 달래주는 ‘힐링’을 통해 드러냈을 뿐이다. 안철수가 사퇴하건 말건, 누구를 지지하건 말건 기존 정치권이 변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제2의 안철수가 나오게 돼 있다.

안철수 현상은 왜 생겼나. 한마디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통계청의 10월 고용동향을 보자. 전체 실업률은 2.8%지만 청년(15~29세) 실업률은 6.9%다. 청년 실업률만 늘어나는 추세다. 청년들은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불안하다. 20대 고용률이 57.0%. 43개월 만의 최저치다.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해도 중산층이 74%에서 67%로 줄었다. 빈곤층은 두 배로 늘었다. 그마저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이라 고용돼 있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97년 0.264에서 지난해 0.313으로 나빠졌다.

물론 이런 양극화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가 몸살을 앓는 현상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존의 사회 질서, 기득권층, 특히 이런 체계를 만들어온 정치권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1차 위기는 마르크스의 경고와 혁명의 위협을 받으며 넘겼다. 그 과정에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보호조치들이 따르고, 복지에 눈을 떴다. 그러나 경제가 세계화하고, 지식형 산업이 주도하게 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하다.

아이는 아프면 울음을 터뜨린다. 치료를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의사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진통제만 처방할 수는 없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나 재벌 때리기가 당장은 후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일자리가 생기고, 분배 구조가 안정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비전과 큰 그림 없이 내놓는 사탕발림 공약은 진통제에 불과하다.

지난해 가을 안철수와 함께 청춘콘서트를 다니던 시골의사 박경철을 만났다. 그는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대통령이 집권하면 경제는 더 어려워집니다. 기존 체제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집권해 진보세력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 나라가 곧 거덜 납니다. 그러면 정권을 내놓고 30년간은 진보세력이 집권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집권해 국민에게 고통을 나누자고 호소해야 합니다.”

성장동력을 살려내 일자리를 만들고,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거판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안철수 현상이 안철수를 통해 터져 나온 건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사회구조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것을 뒤집어 달라는 요구다. 기존 정당은 국민보다는 정파, 국가의 미래보다는 권력 쟁취에 매달렸다. 새로운 비전도 없이 상대방을 헐뜯어 이기려 했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서라도 제3 후보에게 길을 열어줘야 하는 이유다.

기존 정치권은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단일화 협상조차 세력 간 권력투쟁으로 몰아갔다. 옳다고 생각해도 상대 당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반대했다. 이념 과잉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가 그런 꼴이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안철수를 기다린다. 차기 대통령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우리에겐 행운이다.

 

김진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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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1. 4. 13:10

이 광란 속에서 제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붙잡기로 했어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치들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편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될 때도 있었다. "제 엽서가 잘 전해질지 알지도 못한 채 무턱대고 씁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카뮈-그르니에 서한집(1932~ 1960)'을 읽는다면, 우리는 '쯧쯧, 저런 안타까운 시절도 있었구나' 할 것이다. 소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와 산문집 '섬'으로 국내에 알려진 장 그르니에가 주고받았던 편지 모음이다. 카뮈는 마흔넷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3년 뒤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르니에는 카뮈의 고교 시절 스승이었다.

당시 이들이 서로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일주일 이상이 필요했다. 전란 통에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는 한 달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막 선생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손에 닿기까지 멀리 돌아온 편지였습니다'라고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우리는 손가락만으로 실시간 대화를 나눈다. 논쟁을 벌이고, 연애를 하고, 점심 먹을 식당 정보도 찾아낸다. 세상 소식에는 모르는 것이 없어졌다. "제 편지를 받으셨는지요? 선생님의 소식이 궁금합니다"라고 애타게 묻던 카뮈 시절과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정보 독점으로 밥벌이하던 시대는 벌써 무너졌다. 사건 배후에 감춰진 '모종의 음모'도 금방 알아내고 전파된다. 어떤 자리에서 내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가, "정말 언론인 맞으세요?" 소릴 들은 적도 있다. 옛날에는 세상 소식이 며칠 끊겨도 별 탈 없었는데, 요즘 살아가려면 이렇게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해졌다. 시시콜콜한 연예인 가십을 놓쳐도 삶의 한쪽 기둥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됐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소식과 근거 없는 낭설, 타인의 신상정보, 막말과 독설의 수집에 유독 집착하는 부류도 생겨났다.

이런 정보의 풍요(豊饒)라면 카뮈의 시대보다 우리가 지식과 이성에서 전진해야 옳다. 27세의 카뮈는 이런 편지를 썼다. '적어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이 광란 속에서 제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붙잡고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치들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최소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가치들만이라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지하철로 출근하니, 삶의 가치에 고민하던 카뮈 또래의 나이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직장인은 고스톱에, 여대생은 단조로운 벽돌깨기 게임에, 또 술이 덜 깬 직장인은 어젯밤 놓친 예능 프로에 열중했다. 마치 전염처럼 한 명 예외도 없었다. 어떤 삶을 살다 가야 하는지를 요즘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인기 있는 학자나 작가들도 대부분 트윗을 날리며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만 바쁘다. 거기에 쏟는 시간과 열정으로 세상을 좀 더 깊이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잡담만 오갈 뿐 사상과 철학을 말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본질과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색은 부질없는 일처럼 됐다.

패스트푸드가 편리한 것은 분명하지만 몸에 꼭 이로운 것은 아니다. 정신의 양식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손쉽게 주울 수 있는 정보와 유희(遊戱)만으로는 결코 인간을 균형 있게 성숙시키지 못한다. 편한 맛에 중독되면, 매스컴에서 퍼뜨려놓은 대로 우르르 쫓아가고 반응할 뿐이다. 허위의 말일수록 더 화사하다. 내용이 없는 언어일수록 더 선동적이다. 금세 우리 눈을 현혹하고 입속에 침이 고이도록 한다.

카뮈는 22세 때 공산당 입당(入黨)을 제안받고 편지를 썼다. '제게는 인간을 괴롭히는 불행과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명철한 의식을 유지할 것이며 절대 맹목적이 돼 넘어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카뮈 때보다 지금이 더 '명철한 의식'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맹목적이거나 속기 쉬운 대상이 된다. 가령 대선 후보마다 자신을 뽑아야 '세상이 바뀐다'고 하지만, 이는 후보나 그 주변에 들러붙은 '파리 떼'의 위세만 바뀔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뀐 적도 없고 바뀌지도 않는다. 아마 다음 정권에서는 세금은 늘고 수입은 줄고 빚은 늘어나는 것만 예정돼 있을 것이다.

진정 세상이 바뀌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우리 개인들의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 자신의 휩쓸리는 모습을 냉정하게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젊어서 가끔은 어려운 책도 읽고,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도 참아내면서 말이다. 21세의 애송이 카뮈도 '제 자존심은 대부분의 경우 속 빈 허영이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 자신을 명철하게 판단해보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한낱 매스컴 스타를 '메시아'인 양 맹목적인 추종을 반복하면, 조작된 이미지에서 제대로 본질을 보지 못하면, 허위와 진실을 구분해내는 힘이 부족하면, 우리에게는 늘 그런 수준의 세상만 주어질 것이다.

 

 

 

최보식 선임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29/20121129008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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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08

“국민 여러분. 남북은 그동안 비밀리에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평양에서의 정상회담 뒤 국군포로 납북자 10명 이상의 고향방문 또는 송환을 요구했지만 북측은 ‘일단 평양에 오면 우리 장군님이 잘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는 모호한 약속만 되풀이합니다.”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싱가포르에서 만나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양해각서(MOU) 초안을 들고 왔지만, 다음 달 실무조건을 논의하던 당국 간 개성 회담이 결렬됐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위대한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 이런 대(對)국민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어땠을까.

이 대통령이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해 북에 살고 있는 우리 국민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고향 구경을 시켜 주고 싶습니다. 제가 휴전선을 넘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봤다면 ‘별 성과가 없더라도 잘 다녀오라’고 했을 국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북한 최고지도부를 대화의 테이블에 앉히고 변화를 요구했더라면….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북한 지도부가 남측의 조문을 요구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동양 특유의 ‘조문정치’를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류우익 통일부 장관을 정부 조문사절로 보내거나 원하는 모든 민간인의 조문을 허용한다고 ‘통 큰’ 화답을 했더라면 북측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유일 독재자의 사망이라는 정변이 난 판에 남한 사람들이 평양에 한꺼번에 몰려오면 체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북한 지도부는 ‘미안하지만 다 오시면 대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평소 장군님이 좋아했던) 누구, 누구누구만 들어오시면 좋겠다’고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던 ‘진정한 종북(從北) 좌파’의 실체를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올해 6월 4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공개통첩장을 내놓으며 남한 7개 주요 언론사의 좌표를 공개하고 미사일 공격 위협을 했을 때는 어떤가. 남한의 자유 언론이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해 곱지 않은 표현을 일부 썼을지언정 청와대와 정부중앙청사, 국회가 있는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에 밀집한 언론사들을 미사일로 공격하겠다는 위협은 비록 공갈일망정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 그 자체였다.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당시 상황을 전쟁 선포로 규정하고 상응하는 ‘군사적 대응 공갈’로 맞받아 북한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면 북한도 한국 정부를 다시 봤을 것이고 국민들 마음도 든든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이명박 정부 5년의 남북관계를 돌이켜보면 아쉬운 대목이 적지 않다. 북한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에 쫓기면서도 대화와 도발의 ‘이중전술’ 시계추를 빨리하며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훼손하더라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회복하겠다던 이명박 정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근본 원인은 체제 차이에 있다. 독재자가 마음대로 대남정책을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는 북한과, 위정자가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뭐든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와 바람직한 통일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에게도 ‘한국판 이중전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다음 정부 대통령과 대북정책 수장(首長)은 대화와 도발의 카드를 양손에 들고 북한을 뒤흔드는, 좋게 말해 ‘영리한’, 좀 거칠게 말해 ‘사악한’ 전략가일 필요도 있어 보인다.

신석호 국제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1129/51174858/1

 

 

Posted by 겟업
2013. 1. 4. 12:19

얼마 전 연달아 만났던, 배우자 간병을 맡고 있는 70대 남자 어르신들의 인상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순정남’이라고 하겠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순정 다 바치는 70대 남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77세 P 씨였다. P 씨는 파킨슨병과 치매를 앓고 있고 의식마저 불분명한 아내(73)를 10년째 혼자 돌보고 있었다. 다행히 외부 정보에 밝고 주변의 도움도 잘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자마자 등급판정을 신청해 1등급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방문요양서비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일 4시간)와 방문간호(1주일에 1회)를 받고 있었다.



이 시간 외에는 P 씨 혼자 아내를 돌보는데 수발이 얼마나 극진한지 방문간호사가 “환자가 이런 상태로 1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 같다. 이 모든 게 할아버지의 지극 정성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더 대단한 것은 병든 아내를 돌보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아내 옆에서 쓰기 시작한 붓글씨로 각종 상을 휩쓸었고, 요즘엔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라고 한다. 수지침과 뜸 기술도 익혔고, 책(비망록)도 2권이나 출판했다.

P 씨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다 보니, 주변에서 요양시설 입소를 권유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지만 P 씨는 “마지막까지 집에서 아내를 돌보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집에 있어야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그에게 “요양시설로 매일 찾아가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자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집하고는 다르지요. 안사람을 잠시라도 못 보면 못 견딜 것 같아요.”

어르신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등급판정 조사를 하는 건강보험공단 직원이나 재가(在家)서비스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들에 따르면 P 씨 같은 분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우자에 대한 70대 남자 어르신과 여자 어르신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마지못해 의리 지키는 여자

 

남자 어르신 중에는 배우자가 누워 있는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면서 수발을 하는 등 정성을 다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 어르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오히려 거동이 불편한 남편 앞에서 “내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인간 수발까지 해야 하느냐?”라고 넋두리를 퍼붓거나 노골적으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남편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순정을 다 바치는 남자 어르신’과 ‘마지못해 의리를 지키는 여자 어르신’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른 남녀 관계의 반전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70대 남자들의 ‘순정’이라는 게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순정남의 두 얼굴이랄까?

요즘 세간에 충격을 준 뉴스를 장식한 70대 남자 어르신들을 보라. 치매에 걸린 아내를 살해한 사람은 78세의 남편이다. 얼마 전에는 72세 어르신이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열두 살 난 외손자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뇌성마비 아들을 두고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들은 살인이라는 강력범죄의 가해자이면서도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동정심도 자아내는 게 사실이다. 끔찍한 행동의 이면에 ‘치매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라거나 ‘사랑하는 딸을 위해 외손자를 데리고 간다’라는 식의 ‘책임감’과 ‘사랑’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책임감은 과도할 뿐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가부장적’ 책임감이다. ‘파괴적’이고 ‘빗나간’ 사랑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인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든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사실,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성장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편이나 부모(조부모)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기만의 잘못된 논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뇌성마비 외손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만났던, 20대 중증 장애인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 부모가 모두 똑같이, 매일 힘들기만 할 거라는 생각도 일종의 편견이지요. 그 할아버지는 그런 엄청난 행동을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딸의 생각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자기만의 城에 갇힌 파괴적 사랑

우리나라 70대 어르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끈 집요함과 고집, 성실성을 가진 세대라는 점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결핍의 시기를 겪어 오느라 노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변화나 삶의 위기에 대해 성찰하는 ‘유연성’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하는 ‘사회성’이 매우 부족한 세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 아무리 대단한 순정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랑은 누군가의 삶을 피곤하게 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70대의 ‘순정’이 위험한 이유이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http://news.donga.com/3/all/20121129/51174956/1

 

 

Posted by 겟업
2013. 1. 4. 12:18

『티핑 포인트』 등의 저서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맬컴 글래드웰은 2년 전 흥미로운 글 한 편을 잡지 ‘뉴요커’에 발표했다. ‘혁명은 왜 트윗되지 않을까’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21세기의 이른바 트위터 혁명을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과 대비시킨다. 필자는 후자가 강력한 연대에 바탕을 뒀던 반면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느슨한 연대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익명의 선의를 집결하는 활동이라면 몰라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회적 혁명은 SNS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흔히 ‘아랍의 봄’ 같은 혁명에 SNS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과 상반된 시각이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건 어느 대학 강의실에 청강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 교수는 굳이 양자택일을 하자면 글래드웰의 반대편에 설 사람이었는데, 학생들의 필독 자료로 이 글을 제시했다. A4 용지로 9쪽 분량의 짧지 않은 글이다.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흑인민권운동의 일화와 배경은 물론 자신이 반대하는 주장 역시 풍부하게 소개했다. SNS의 사회적 영향을 토론하는 데도, 그와 다른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기에 충분했다.

SNS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정보의 유통 속도와 확산 방식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건 분명하다.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그랬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를 발표한 직후 문재인 후보의 반응은 그의 트위터에서 가장 먼저 확인됐다. 하지만 SNS의 짧은 글이 수시로 촉발하는 논란의 양상은 이번에도 씁쓸했다. 안철수 후보 사퇴 직후 한 연예인은 트위터에 ‘종북’이라는 단어를 섞은 반응을 올렸다 도마에 올랐다. 두둔할 생각도,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여느 사람들처럼 TV에서 보여준 연예활동이 전부다. 그런데도 집중포화 같은 반응이 빚어지는 건 역시나 놀라운 현상이다. 트친(트위터 친구)이나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아니라 실제 친구 사이, 친구가 아니라도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는 자리였다면 같은 경우라도 다른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으리라고 본다.

얼마 전 아는 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이내 후회했다.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을 잃고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담담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뭐라도 공감을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행동에 옮긴 일이라고는 습관처럼 글 하단의 ‘좋아요’를 누른 것뿐이다. 그때의 심경은 결코 좋지 않았다. ‘나도 슬퍼요’ ‘마음이 아파요’라고 댓글까지 적기가 무안했고, 다시 ‘좋아요 취소’를 누르기도 민망했을 따름이다.

SNS는 광장에서 확성기를 잡지 않고도,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지 않고도 의견을 전파하는 길을 넓혔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에서 풀어야 하는 일이, 140자의 단문을 쓰고 올리는 것보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이 더 많은 게 인간사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20860&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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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2:17

중국이 기침만 해도 한국 경제는 독감에 걸리는 시대다. 의존도가 너무 높다. 전체 수출의 약 24%가 중국으로 간다. 중국 소비자가 국내 업계의 판도를 바꾸기도 한다. 그런 중국 경제가 주춤하고 있다. 올 3분기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7.4%로 7분기 연속 하락세다. 당연히 대중국 수출이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매년 두 자릿수를 기록했던 수출증가율은 올 들어 9월까지 0%(전년동기 대비) 수준으로 떨어졌다. 바로 이런 시기에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막이 올랐다. 시진핑 시대의 한·중 경제협력은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우선 중국의 거시경제 지표부터 살펴보자. 중국 정부는 성장률 둔화 우려에 9월부터 강력한 부양카드를 빼들었다.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를 다시 허가했고 화폐 공급도 늘렸다. 중앙정부는 이미 3분기에만 총 5조 위안(약 872조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승인했다. 정부가 결심만 한다면 투자 재원 조달은 문제가 아니다. 국유 금융기관을 동원하면 되니 말이다. 지방정부는 이를 잘 안다. 정부의 의도를 읽고 한 발 앞서 간다. 중국 정부의 움직임으로만 본다면 경제지표가 나쁠 때가 역설적이게도 좋은 사업기회이며 호황이 지속하면 오히려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경제가 완연히 회복 조짐을 보이면 이미 경기 과열과 구조 악화를 우려하는 중국 정부의 규제가 기다리고 있어 사업 환경은 악화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경기부양에 의지를 갖기 시작한 지금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의 대외경제 영역 역시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중국은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보호주의 공세와 환율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또 60만원짜리 애플사의 아이패드를 중국에서 조립하면서 1대당 불과 1만2000원 남짓의 임금을 지급하는 데 분노하고 있다. 베이징 당국으로서는 좀 ‘약한’ 협력 상대가 필요하다. 중국 기업이 필요로 하는 표준화된 비용 절감형 기술은 바로 한국 기업이 가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윈-윈 협력이 가능한 이유다. 한국 경제는 선진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경제’의 어려움에 비유되나, 샌드위치 맛을 결정하는 핵심은 가운데 낀 내용물이다. 1000만 개를 훌쩍 넘는 낙후된 중소기업을 현대화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한국과의 산업협력이 절실하다.

관(官) 주도형 경제의 폐단과 극심한 빈부격차의 극복은 시진핑 시대의 당면 과제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시진핑은 혁신과 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카리스마에 있어 덩샤오핑(鄧小平)에 훨씬 못 미친다. 고질적인 정(政)·산(産) 유착과 공권력의 남용을 서서히 개선해 갈 수밖에 없다. 중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 역시 역발상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빈부격차는 현지화와 차별화 전략이 모두 통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다. 중산층 비율이 아직 낮다고 하나 14억 인구대국 중국의 중간 소득계층은 2억 명이 넘는다. 럭셔리 소비시장도 우리에게는 매력적이다.

낙후된 중국의 농업경제 역시 한국의 농업투자 기회를 제공한다. 12월 1일부터 발효되는 한국의 협동조합기본법은 투자협동조합 설립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농촌경제를 연결할 수 있는 토대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농업을 빼달라는 소극적 자세를 넘어 투자환경을 제공하라는 공격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 경제는 분명 한국 경제에 기회와 위험요인으로 동시에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차이나 리스크 관리가 가능하다면 중국 경제의 과도기적 상황이 오히려 한국 경제 재도약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물론 독감에 견딜 수 있도록 우선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오 승 렬 한국외대 중국학부 교수 경제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20869&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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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2:15

누구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인가?

 

27일 0시를 기해 대선 레이스의 막이 올랐다. 주자는 7명이다. 새달 19일, 대한민국 유권자는 선택해야 한다. 대다수는 박근혜나 문재인 중 한 사람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사표일망정 ‘제3의 후보’에게 마음을 주거나, 아예 선택을 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선택의 잣대다. 어떤 ‘감별’의 기준으로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다.

 

병아리 감별에도 나름의 관찰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대한민국호의 선장을 뽑기 위한 감별이다. 그 기회를 헌신짝처럼 버리거나,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다. 누가 진정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감인지, 누가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인물인지를 가려내는 정성이 필요하다. 좋은 사회, 좋은 나라는 절로 오는 법이 없다. 외모, 느낌, 인격, 공약(정책) 등 저마다의 기준으로 눈을 부릅떠야 한다.

 

나는 그 감별의 잣대로 가장 먼저 ‘인권 감수성’을 들고 싶다. 인권은 모든 것의 대전제다. 시대정신보다 앞자리에 놓인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일자리와 성장 등 우리가 추구하는 정책과 방향은, 궁극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일 뿐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 제1조의 정신에 누구의 삶이, 누구의 행동과 말이 가장 잘 부합하는지, 또 누구의 정책이 그것을 잘 보장하려 하는지, 그것을 따지면 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참정권은 물론 노동권, 교육권, 건강권, 주거권 등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인 ‘사회권’의 제도화를 위해 누가 가장 힘쓸 것인가?

 

둘째로 꼽고 싶은 감별의 기준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누가 민주주의에 충실했고, 누가 민주주의를 더 심화시킬 것인가? 민주주의는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지켜주는 한 사회의 주춧돌이다. ‘야만의 체제에 대한 거부’다. 따라서 그것은 투표행위만이 아니다. 경제적 위협과 공포로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하는 이념이며, 내 삶과 일자리를 결정하는 구체적인 체제이기도 하다. 성장이란 이름으로 결코 저울질할 수 없는 게 자유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유토피아를 만들지는 못해도 민주주의 없이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정당정치의 미성숙, 낡은 선거제도 등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우리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퇴행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래서 세번째 감별의 눈이 필요하다. 누가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그들과 더불어 하려고 하는가? 누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결함을 치유하고 그것을 뿌리내릴 대안과 능력을 갖고 있는가? 곧 복지와 민주주의가 만나는 복지민주주의를 누가 이룰 것인가? 민주주의의 발전은 인권의 발전이며, 그 제도화가 복지다. 자본주의 체제 속 민주주의는 시민(주체)의 참여와 복지(국가) 없이는 지속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유지·발전시키는 건 시민의 참여이며, 복지는 민주주의 심화의 지렛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민주주의 체제나 결함 있는 민주주의 체제의 복지 수준은 뿌리내린 민주주의 체제의 복지수준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권, 민주주의, 복지는 실상 감별과 선택의 잣대 이전에 우리 사회와 시민이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할 우리 시대의 핵심 ‘가치’다. 스무날 남짓한 선거운동 기간, 이 세 가지 눈으로 다시금 후보들을 꼼꼼히 살펴보자. 최종 선택은 물론 자유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833.html

 

 

 

 

Posted by 겟업
2013. 1. 4. 12:14

최근 러시아에서 남북한 통일이 자국 국익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물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달 말 러시아의 ‘국가 에너지안보재단’ 주최 포럼에서 나온 이 같은 주장은 모스크바가 아시아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그래서 무척이나 신선한 내용이었다.

주제 발표자로 나온 드미트린 라빈 러시아 국제관계대학교(MGIMO) 교수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댔다. 우선 러시아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극동·시베리아 개발의 핵심인 에너지 및 교통망 구축 프로젝트는 모두 북한 통과를 전제로 하는데, 불확실성이 큰 현재의 북한 정권이 지속할 경우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로 북한 리스크가 사라지면 러시아로서는 교통운송·에너지·인프라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의 투자 유치를 위한 보다 유리한 여건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반도 통일은 동북아 내 러시아의 영향력 제고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라고 라빈 교수는 역설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러시아가 대중국 의존을 줄이고 동아시아 내 발언권을 강화하려면 다자협력체제가 필수적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역량이 크게 강화된 통일한국을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 및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러시아가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경우 역내 입지가 훨씬 단단하게 굳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같은 러시아 학자의 주장은 역사적 맥락에서 사뭇 주목할 만하다. 소련 해체 이후 20여 년간 내치와 수성에만도 버거워하던 러시아가 이제 대내외적 역량을 정비하고 눈을 외부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 까닭이다. 더불어 이러한 장기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한국을 지목했다는 것을 러시아 저명 학자가 직접 말했다는 점이다.

라빈 교수는 “현재 러시아는 100년 전 실패한 극동에서의 주도권 획득 정책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무력을 통한 영토 확장에 급급했던 제국주의 시절이라면 러시아의 동진정책은 한반도에 위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 국가와의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낙후된 시베리아 지역 개발과 에너지 수출 확대를 추구하는 지금 러시아의 신(新) 동진정책은 한국에 위기가 아닌 기회가 분명하다. 북한과의 다양한 경제협력을 기반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진출하려는 한국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 국제정치 학계에서는 주변 열강 중 한반도 통일에 가장 긍정적인 활약을 해줄 수 있는 이웃은 러시아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왔다. 문제는 러시아가 기대만큼 제 몫을 해주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빈 교수의 발언은 남북한을 보는 모스크바의 시선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러시아는 요즘 들어 한·러 가스관 사업에 대해 전례 없는 적극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최근 협상 때는 안전 문제 등과 관련된 한국 측 요구를 성의 있게 들어주고 이를 수용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예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또 지난 9월에는 북한의 채무를 대폭 삭감해주는 등 대북 영향력 증대에도 큰 의지를 나타냈다.

그간 한·러 관계는 완벽한 상호 보완적 경제구조라는 점을 비롯한 갖가지 중요성이 언급돼 왔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많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현 정권이 한·미 동맹에 중점을 두면서 더욱 심화한 듯한 느낌이다. 이런 대미 경도 외교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이웃인 러시아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방치한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이 진정 동북아 시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안정적인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윈-윈 할 수 있는 장기적 협력 프레임을 짜는 게 절실하다.

 


이 유 진 러시아 변호사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08749&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4. 12:09

아홉 평 집터에는 타다 남은 나무기둥들이 을씨년스럽게 꽂혀 있었다. 찬바람이 과자봉지와 천 조각 등을 날려보내며 죽음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전남 고흥의 한 조손(祖孫)가정에서 화재참사가 일어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촛불을 켜고 잠자다 여섯 살 소년과 예순의 할머니가 숨지고 할아버지도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소년·할머니의 유골은 인근 야산에 매장된 상태였다.

지역 경찰관에게 화재 당시의 기막힌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촛불은 새벽녘 일어나 요강을 찾는 소년을 위해 할머니가 켜 놓은 것이었다. 그 작은 불꽃이 낡은 벽지를 타고 방안 전체로 번져나갔다. 불똥이 얼굴에 떨어지면서 화상을 입고 뛰쳐나온 할아버지는 곧바로 구조신고를 할 수 없었다. 궁핍한 여건 때문에 휴대전화는 없고 집 전화 역시 수신 전용선이었다. 할아버지는 뺑소니 사고로 두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이런 다리를 끌고 몸통으로 기어가며 인근 5촌집에 가 구조를 요청했지만 운명은 이미 정해진 시점이었다. 구호 사각지대에 놓인 극빈층의 ‘참혹 동화’였다.

가난-가정 해체-심신박약-자활의지 상실…. 소년의 가정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재혼하자 할아버지는 소년을 외손자가 아닌, 아들로 호적에 올려 양육해왔다. 교통사고로 근로능력을 잃은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안방에 자리를 깔았다. 공장에서 일하던 할머니 역시 정신이 혼미해져 일자리를 잃었다. 집안에서 술에 의존해 사는 두 노인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흥 참사는 숱한 ‘복지 퍼즐’을 던져준다. 긴급 에너지공급 서비스만도 그렇다. 한전은 2005년 이후 요금이 밀렸더라도 극빈층 가정의 전기를 함부로 끊지는 않는다. 전력공급제한기를 달아 최소한의 전기는 공급한다. 소년의 집도 그랬다. 그런데도 할아버지·할머니는 왜 공짜인 제한전력을 마다하고 개당 500원 하는 촛불을 사서 쓰다가 변을 당했을까. 할아버지는 “한전이 전기 사용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전은 “매뉴얼대로 설명해줬다”고 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일까. 취재 결과는 ‘둘 다 참일 수 있다’였다. 소년의 집을 방문한 한전 검침원은 전력제한기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그 방식대로 직접 TV까지 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후 전기밥솥을 연결했을 때 전기가 나가고 말았다. 이에 할아버지·할머니는 전기를 못 쓰게 됐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에러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전기밥솥에 전기는 왜 나간 걸까. 전력제한기의 순간 한도는 220W다. 형광등 2개, 25인치 TV 1대, 미니냉장고 1대를 동시에 쓰는 수준이다. 전력소모량이 큰 전기밥솥이나 전기장판은 감당하기 어렵다. 전자제품의 전력소모량이 커지는 추세지만 2005년에 정한 한도는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다. 220W라면 신형 냉장고 한 대를 감당할 수준에 불과하다. 한전 광주·전남지역본부 김상언 차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도가 낮다는 생각이 들어 관련 문제점을 본사에 보고했다”고 했다.

지방정부가 전기제한 조치를 당한 극빈층에게 50만원 한도에서 체납전기료를 지원해 주는 제도도 있지만 소년의 가정은 혜택을 받지 못했다. 반년 동안 고작 15만원을 체납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는 지방정부와 한전 간의 정보 불통 때문이었다. 한전에서 전기료가 밀린 사람들에게 전력제한조치를 해도 이 명단이 자동 통보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방정부에서는 곧바로 긴급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실제로 고흥군 이은영 복지지원팀장은 “지난달 도에서 내려온 전력제한 가정명단에 소년의 가정은 빠져 있었다”고 했다.

고흥 사건은 복지의 우선순위와 기본원칙을 돌아보게 한다. “죽고 나면 복지는 필요가 없는 만큼 복지의 근본은 생명존중”(박준영 전남도지사의 지시내용)이라는 언급처럼 인명구호·구휼이 역시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계층적으로 극빈층, 연령대로는 아동 등을 우선 지원순위에 두어야 한다. 복지 신설에 앞서 기존 제도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복지는 알코올의존증 노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더 친절해져야 한다. 시대에 맞게 기준을 조정하는 유연함도 지녀야 한다. 여러 기관이 정보를 나누며 촘촘한 복지망을 짜야 한다.

불과 사흘이지만 촛불 참사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숱한 복지 구멍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이 심층 연구한다면 복지현장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고흥발 베버리지 보고서’가 만들어질 만도 하다.

 

 

 

이규연 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08722&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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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2:07

중국 내 외국인 유학생 29만명, 한국인 유학생 6만여 명… 1위
100년 전 유학 숱하게 보냈던 일본은 활력 잃고 유학생 급감
韓流와 한국 기업의 기세처럼 우리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

 

이달 중순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거리를 걸으니 공해로 얼굴이 푸석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동차엔 양보란 없었고, 사람은 불친절이 몸에 밴 듯했다.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는데 종업원이 다가와 "문 닫을 시간이니 빨리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래도 북부 도시보다는 공기가 덜 매캐하고 인심이 덜 팍팍하다는 게 오래 산 사람들 이야기였다.

이런 곳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한국 학생 180명을 만났다. 한국인 안평모 교장이 2003년부터 운영하는 남경에코국제학교 학생들이다. 이들 중 주재원 자녀를 제외하고 "중국 대학에 진학해 중국을 배우겠다"는 뜻으로 홀로 유학 온 학생은 60명에 달했다. 물론 학생 의지보다 부모님 의욕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자식의 미래를 중국에 건 것이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이런 불편한 도시에 아이를 홀로 보낼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 통계를 뒤져봤을 때 한국인에겐 이런 걱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올 초 중국 교육부 발표를 보면 중국 내 외국인 유학생 29만명 중 6만2442명이 한국 학생이었다. 2위인 미국인 유학생의 2배에 달한다.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기에 "앞으로 너희가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뻔한 덕담으로 들렸겠지만 진심이었다. 일본·미국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만큼 남의 장점을 쏙쏙 빼먹으면서 발전한 나라도 드물다. 안에선 서로 싸우면서 매몰되는 듯하지만 밖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역동적이고 도전적이다.

100년 전 일본이 지금의 한국 같았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이 내보낸 유학생은 2만4700여명에 달했다. 유학생 최다 배출국이었다.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이 서구 열강에 뿌린 유학생 43명 가운데에 6세 소녀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유학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의 눈부신 발전은 유학생들이 '원숭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문물을 이식하고 강대국의 가교 역할을 한 결과였다. 일본이 차고 있던 쇄국(鎖國)의 족쇄를 풀어준 것도 유학생이었다.

지금 중국 내 일본인 유학생은 한국인 유학생의 절반도 안 된다. 미국 내 일본인 유학생은 한국인 유학생의 28%에 불과하다. 남에게 배울 것이 없는 나라가 됐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은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에도 1980년대까지 많은 유학생을 내보냈다. 유학생 숫자가 급감한 것은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사회가 활력을 잃기 시작한 이후였다.

해외 유학생은 국가의 희망과 국민의 역동성을 거의 정확하게 반영한다. 일본의 우경화를 '폭주(暴走) 노인의 몸부림' 정도로 관망할 수 있는 것도 100년 전 일본의 역동성을 지금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춤추게 하는 한류(韓流)는 100년 전 유럽과 미국이 열광하던 자포니즘(Japonism)만큼 화려하고, 한국 기업의 시장 장악력은 전후(戰後) 일본 기업의 기세를 느끼게 한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난징에서 만난 한국 학생들에게 '애국(愛國)'이란 구닥다리 같은 말도 꺼냈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97년 외환위기 때 겪은 기억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망한 나라였고, 원화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무심히 찾아가던 단골 카레 집 앞에서 500엔짜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발길을 돌렸을 때, 학비 송금을 못 받아 일본을 떠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보았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라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유학은 작은 경험에서도 큰 것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낭비'라고 해도 괜찮다.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유학은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선우정 사회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27/20121127026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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