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에서 남북한 통일이 자국 국익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물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달 말 러시아의 ‘국가 에너지안보재단’ 주최 포럼에서 나온 이 같은 주장은 모스크바가 아시아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그래서 무척이나 신선한 내용이었다.
주제 발표자로 나온 드미트린 라빈 러시아 국제관계대학교(MGIMO) 교수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댔다. 우선 러시아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극동·시베리아 개발의 핵심인 에너지 및 교통망 구축 프로젝트는 모두 북한 통과를 전제로 하는데, 불확실성이 큰 현재의 북한 정권이 지속할 경우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로 북한 리스크가 사라지면 러시아로서는 교통운송·에너지·인프라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의 투자 유치를 위한 보다 유리한 여건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반도 통일은 동북아 내 러시아의 영향력 제고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라고 라빈 교수는 역설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러시아가 대중국 의존을 줄이고 동아시아 내 발언권을 강화하려면 다자협력체제가 필수적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역량이 크게 강화된 통일한국을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 및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러시아가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경우 역내 입지가 훨씬 단단하게 굳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같은 러시아 학자의 주장은 역사적 맥락에서 사뭇 주목할 만하다. 소련 해체 이후 20여 년간 내치와 수성에만도 버거워하던 러시아가 이제 대내외적 역량을 정비하고 눈을 외부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 까닭이다. 더불어 이러한 장기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한국을 지목했다는 것을 러시아 저명 학자가 직접 말했다는 점이다.
라빈 교수는 “현재 러시아는 100년 전 실패한 극동에서의 주도권 획득 정책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무력을 통한 영토 확장에 급급했던 제국주의 시절이라면 러시아의 동진정책은 한반도에 위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 국가와의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낙후된 시베리아 지역 개발과 에너지 수출 확대를 추구하는 지금 러시아의 신(新) 동진정책은 한국에 위기가 아닌 기회가 분명하다. 북한과의 다양한 경제협력을 기반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진출하려는 한국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 국제정치 학계에서는 주변 열강 중 한반도 통일에 가장 긍정적인 활약을 해줄 수 있는 이웃은 러시아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왔다. 문제는 러시아가 기대만큼 제 몫을 해주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빈 교수의 발언은 남북한을 보는 모스크바의 시선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러시아는 요즘 들어 한·러 가스관 사업에 대해 전례 없는 적극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최근 협상 때는 안전 문제 등과 관련된 한국 측 요구를 성의 있게 들어주고 이를 수용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예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또 지난 9월에는 북한의 채무를 대폭 삭감해주는 등 대북 영향력 증대에도 큰 의지를 나타냈다.
그간 한·러 관계는 완벽한 상호 보완적 경제구조라는 점을 비롯한 갖가지 중요성이 언급돼 왔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많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현 정권이 한·미 동맹에 중점을 두면서 더욱 심화한 듯한 느낌이다. 이런 대미 경도 외교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이웃인 러시아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방치한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이 진정 동북아 시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안정적인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윈-윈 할 수 있는 장기적 협력 프레임을 짜는 게 절실하다.
이 유 진 러시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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