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스스로 기자라 자칭했지만 기자들은 그를 줄곧 '왕초'라 불렀다. 기자치고는 생긴 것이 조폭 두목인데다, 평소의 언행이 언제 어디서건 기자들의 폐부를 찌르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발행인 고 장기영 사주를 일컫는 이야기다.
70년 초 내가 김포공항을 출입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출국 차 공항에 나타난 왕초가 출국대합실을 통과하던 중 'LADIES'라 쓴 여자 화장실 간판을 흘깃 보더니 눈빛이 바뀌었다. 하필이면 간판 중간의 I자가 빠져 있었다. 이를 본 왕초, 벽력같은 쇳소리로 공항 측의 태만과 무관심을 질타했다.
그의 탑승을 돕던 김포공항장과 항공사 지점장들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바뀌었다. 왕초는 이어 나를 부르더니 "이봐, 그것도 하필이면 한가운데 글자가 빠졌지 않았나 말이야! 저 경우 한 가운데가 제일 중요한 부위야!"라 호통 쳤다. 그를 수행하던 공항직원들 모두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기자들이 당시 왕초를 무서워한 건 평소 그의 엄청난 독서에 기가 질렸기 때문인데, 당시 한국일보 도쿄특파원의 고정 업무가운데는 일본에서 화제에 오른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를 구입, 서울의 왕초한테 당일로 직송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왕초 명언과 기략은 바로 이 독서의 산물이었다. 다음은 그 명언 가운데 한 토막.
"일본 한 지방의 번주(藩主)가 다른 쪽 번주한테 서찰(書札)을 보낸다. 서찰을 품에 넣은 졸(卒)은 사흘 밤 사흘 낮을 쉬지 않고 달려, 저쪽 번주한테 전한 후 탈진상태로 죽어간다. 그러자 서찰을 받은 번주는 졸을 당장 목 베라고 호통 친다. 하루 반이면 충분히 올 거리를 사흘 걸려 왔다"는 죄다.
그러나 이 호통으로 그 졸은 살아났다는 것이 왕초의 요지다. "가만 놔두면 그 졸은 과로와 기아로 십중팔구 죽게 마련이라는 것". 목 베라고 호통치고 기압을 넣었기에 살아났다는 얘기로, 3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내겐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사자후였다. 그는 스스로가 신문에 글쓰기를 즐겼고, 휘하의 기자를 평가하는데도 그 기자가 쓴 글로 평가했다. 심금을 울린 기사를 읽었을 경우 주석(酒席)이든 꼭두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전화를 걸어 그 기자를 격려했다. 이런 풍조는 자칫 기자들에게 역기능으로까지 번져 글 못 쓰는 사람은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묘한 악습까지 낳았지만, 왕초가 그 정도로 글을 중시했다는 반증도 된다. 이 점,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와 흡사한 대목인데, 리콴유 역시 자기를 만나려는 숫한 외국 원수 가운데 그 흔한 자서전이라도 한 권 쓰지 않은 지도자는 면담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던 인물이다.
대선이 정확히 3주 후로 다가왔지만 나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정작 누굴 찍어야할지 판단을 유보한 상태다. 이 딜레마를 풀 해법이 있다면 딱 하나, 여야 후보가 쓴 수필을 단 한편만이라도 읽었으면 싶다. 사람의 분별력이 글을 통해 나타남을 왕초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 모두 독서를 통해 상당한 지식을 쌓은 데다, 한 후보는 퍼스트레이디를, 다른 후보는 청와대 도승지까지 역임한지라 둘 다 경륜이나 사고의 깊이 면에서도 이미 검증을 거친 걸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분별력이다. 더구나 지난 6월 말 세계 일곱 번째의 '20-50그룹' 반열에 성큼 진입한 지금의 우리 입지에서 지도자가 지닐 분별력이야 말로 지식이나 경륜을 훨씬 웃도는 가장 절박한 덕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분별력이라는 것이 글쓰기를 통하지 않고는 쉬 검증이 되지 않다는 걸 왕초는 그의 가장 협객다운 쾌변(快辯)으로 남긴 것 같다. 그 왕초의 표현대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 '빠트려서는 안 될 제일 중요한 부위'가 바로 지도자의 분별력이라 생각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302101151157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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