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직후 전국이 시위에 휩싸인다면 신임 대통령은 어떻게 할까? 힘으로 진압한다면 일은 간단하겠지만 독선적이란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요구를 대충 들어주고 달래서 해산시키려 든다면 욕은 덜 듣겠지만 남은 임기 내내 반대파에 끌려다닐 수 있다. 거의 5년 전 한국을 휩쓸었던 광우병 촛불시위 때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선택을 목격했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리더십을 보여준 지도자가 있다.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2006~2010 재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서 남편 후광 없이 집권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61)가 주인공이다. 2006년 3월 11일 취임한 바첼레트는 그해 4월 공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시위로 골머리를 앓았다. 5월이 되자 79만 명이 동시에 수업을 거부하고 대형 시위를 벌였다. 취임 초 65%를 넘나들던 대통령 지지율은 40% 중반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런데도 바첼레트 대통령은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시위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제진압 명령을 내리지도, 적당히 타협하는 미봉책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시위는 내가 미처 몰랐던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할 일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기회”라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조했다. 그는 전국의 모든 정파·종교·인종·지역을 망라한 전문가·교사·학부모에 학생 대표까지 참여하는 교육개혁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해법 마련을 일임했다. 그러자 시위가 그쳤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자문위 최종 보고서가 나왔고 이는 교육개혁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바첼레트는 칠레에서 30년 만에 처음 벌어진 대규모 시위사태를 충돌의 장이 아닌 각계각층의 목소리와 의견을 모으는 대통합·대타협의 장으로 바꿔놓은 정치력을 인정받았다. 바첼레트의 리더십을 연구해온 울산대 이순주(중남미 정치학) 교수는 “‘국민은 투표할 권리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할 권리도 원한다’는 취임사 내용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쪽 편만 들지 않고 생각이 다른 국민 사이의 갈등 해결을 대통령의 임무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바첼레트 리더십의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바첼레트는 2002~2004년 중남미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 때도 이런 대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봉급이 적은 군인들에게 연금을 보장해주고 원하는 장비와 해외평화유지군 파병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자 군부 수장인 육군참모총장이 스스로 “다시는 군이 민주주의를 뒤엎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군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국가 과제인 정치 중립을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필요할 때는 한껏 단호했다. 교육개혁자문위가 한창 활동 중이던 2006년 8월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에 돌을 던지자 최루탄과 물대포 등으로 강경 진압했다. 쿠데타로 집권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이 그해 12월 숨지자 독재자에게 국장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군사장을 명령했고, 군 기지 외에는 조기 게양도 거부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대신 여성 국방장관을 정부 대표로 보냈다.
학생시위 때처럼 국민대타협을 내세울 때와 피노체트의 장례식처럼 원칙을 앞세울 때를 구분할 줄 아는 융통성 있는 리더십은 바첼레트를 대통합의 지도자로 만든 힘이 됐다. 그는 2010년 84%의 지지율 속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퇴임했다. 선거 때 자신을 찍지 않았던 유권자의 과반수가 퇴임 때는 지지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는 돼야 대통합의 리더십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조만간 첫 여성 대통령을 맞는 한국에서도 대타협·대통합이란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박근혜 당선인이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고루 존중하면서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만 이룰 수 있는 목표다. 선거에서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았던 국민의 지지까지 얻어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대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이를 대통령이 할 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멀리 칠레에 좋은 참고사례도 있지 않은가.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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