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12:45

왜 미국 사람들은 기출문제를 구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일까
슬쩍 남몰래 구해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가는 데 유리한데
왜 저렇게 어리석을까… 그런데 정말 어리석은 걸까


한국 학원들이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문제를 유출해 한국 시험이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게 왜 '유출'인지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과거 시험문제를 구해다 공부시켰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잘못인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이른바 기출(旣出) 문제집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어느 시험에나 다 있지 않은가. SAT는 문제를 보관하고 있다가 해마다 그중 일부를 출제하는 문제은행 방식이다. 과거 문제를 계속 모으면 사실상 시험문제를 미리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허술하게 시험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잘못이고, 과거 시험문제 공부를 안 하는 학생들이 바보인 것이지, 왜 공부한 학생들이 잘못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한국식 사고방식일 것이다. 미국에 있는 SAT 주관 기관은 그 오랜 역사 동안 이런 '한국식 사고방식'과는 부딪쳐 본 적이 없었다. 미국 대부분의 학생·학부모는 몰래라도 SAT 과거 문제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은행 방식이 유지돼 왔을 것이다. 사실 미국 시험 기관은 누군가 과거의 문제들을 모아서 집중 훈련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미국 사람들은 지나간 SAT 문제를 모을 생각조차 않을까. 미국에서도 좋은 대학 나오면 인생 사는 데 유리한 것은 우리와 다를 게 없다. 큰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전에 나왔던 시험문제를 구해 공부하는 것인데, 슬쩍 남몰래 그렇게 하면 훨씬 유리한데 왜 그걸 안 하는지 정말 이상하다.

수많은 미국 학생이 이렇게 오래 시험을 치러왔는데도 문제가 없었다면 법 규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혹시 그들은 지나간 문제를 모으는 것을 정당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 사회 전반에 '남보다 유리한 조건, 공정하지 않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보다 넓고 깊게 퍼져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西歐) 사회 대부분이 그렇다. 캐나다 학력평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로 규정돼 있는 것 중 하나가 '시험 출제 경향을 미리 연습시키는 것'이다. 남보다 먼저 출발하지 말라는 거다.

서구엔 우리가 보기에 어리숙한 것 같은 사람이 많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지름길'을 찾아낸다. 그 지름길은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 약삭빠른 정도인 길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훤히 보이는 그 지름길이 서구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는 영리한 것 같고, 그들은 좀 어리석은 것 같다.

어느 한국 부모가 아이를 뉴질랜드 중학교에 보냈다. 방학 때 귀국한 아이에게 엄마가 말했다. "너 다음 학기 체육에 수영이 있던데 너 수영 못하잖아. 수영 학원에 가자." 아이가 펄쩍 뛰었다. "안 돼요, 그거 치팅(cheating)이에요!"

치팅은 부정행위, 다시 말해 남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 혼자 먼저 학원에서 수영을 배우는 것을 치팅으로 느꼈다. 초등학교를 한국에서 나온 완전한 한국 아이다. 그 아이가 서구 사회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지름길'을 치팅이라며 거부했다. 서로 남을 앞지르기 위해 지름길을 찾고 또 찾다가 마침내 초등학생에게 고교 수학 선행학습까지 시키게 된 나라에서 보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할 일이다.

미국 유학 생활에 관한 책에서 읽었다. 한 미국 고교가 시험 중이었다. 우리와는 달리 반마다 다른 과목 시험을 쳤다. 한국 유학생이 시험이 끝나고 다른 반 한국 친구를 복도에서 만났다. 두 학생은 별 생각 없이 각자 친 과목 시험 얘기를 나눴다. 누가 그걸 듣고 학교에 알렸다. 두 학생은 퇴학당했다. 죄명은 치팅.

반면 우리는 이제 치팅에 거의 무감각해진 상태다. 우리 대학생들은 커닝을 낭만으로 여긴다. 로스쿨생도 돈 주고 대리시험을 의뢰한다. 많은 사람이 "학자만 아니면 논문 표절 좀 하면 어떠냐"고 한다. 출판사는 책 사재기로 베스트셀러를 제조한다. 다 열거할 수도 없다. 한국에선 무슨 수로든 지름길로 가 남을 앞지르는 게 하나의 풍토가 됐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어시험을 주관하는 회사는 매년 전 세계에 있는 위탁회사 관계자들을 모아 회의를 연다. 그 회의에선 그 한 해에 세계에서 새로 등장한 시험 부정행위를 공개하고 주의시키는데, 그 거의 전부가 한국 사례라고 한다. 얼마 전 서울에서 적발된 시험 커닝 조직은 초소형 카메라, 초소형 이어폰, 스마트 시계를 동원했다. 정말 머리 좋고 영리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가 한국에 와 한 말이다. "내 경험으로 가장 머리 좋고 영리한 학생들은 나이지리아 출신들이었다." 좀 바보 같은 영국 학생들이 세계 최고의 나라를 만들고, 저 영리한 나이지리아 학생들은 세계 최악의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였다.



양상훈 논술위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09/2013050900932.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