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4. 15:48

지난 몇 년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주최하고 개발 원조 등을 통해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케이팝이나 한국어, 한국 음식은 물론이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한국적 발전모델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꾸준히 투자하고 노력한 결과다. 원조 수혜국(受惠國)에서 공여국(供與國)으로 전환하게 만든 경제적 기반뿐 아니라 한국국제협력단(KOICA),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등을 통해 원조를 하고 한국을 알리는 사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중복 지원-고압적 자세 문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기도 했다. 정부 부처 간 불필요한 경쟁과 업무 중복은 물론이고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과거의 원조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례도 있다. 또 고압적 자세를 보여 수혜자들이 불쾌감을 갖기도 하고 국내 관료적 시각과 잣대를 적용함으로써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면서 개발외교와 공공외교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지만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경제나 군사력 등 하드 파워(Hard Power) 면에서는 세계 10위권이지만 문화적 파워나 국가브랜드 가치는 한참 못 미친다. 대표적 평가지수인 안홀트 국가브랜드지수(NBI)를 보면 한국은 현재 49위로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출범하였던 2009년의 39위에서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

21세기 외교는 정치 안보나 경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공외교나 개발외교가 더욱 중시되는 것이 국제사회의 추세다. 공적개발원조(ODA)나 해외 한국학 진흥 사업 등도 외교 차원에서 추진되어야만 국력에 걸맞은 이미지와 역할, 그리고 브랜드 파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선 여러 사업을 조정하고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 공공외교의 경우 외교통상부 내에 이를 담당할 3차관직을 신설하거나 공공외교청을 설치하여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과학기술부, 농림수산식품부 등에 분산되어 있는 한류 확산, 한국학 진흥, 한식 세계화 등을 통합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개발외교의 경우도 외교부 내에 개발협력 차관이나 본부장직을 설치하여 외교부 개발협력국, KOICA, 그리고 각 부처에 분산되어 있는 ODA 업무를 관장하여야 한다.

현재 무상원조와 유상원조로 이원화되어 있는 구조도 대다수 선진국처럼 하나로 통합하고 무상원조의 비율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분명한 업무 분담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학 진흥 사업의 경우 현재 국제교류재단과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으나 재단은 원래의 역할인 해외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학술회의 개최 등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연구원은 고유 기능인 연구와 학술활동에 집중하고 해외 지원 사업은 재단으로 이관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단순 원조보다 한국적 모델 개발을

아울러 공공외교와 개발외교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저개발국 지원은 공공외교적 성격이 강하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결합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실례로 해외 개발 원조의 경우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서 한국적 모델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이나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전문가들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개발외교나 공공외교를 할 때 수혜자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관료적 타성에 젖어 고자세를 보인다면 지원을 해주고도 마음의 상처를 남기거나 한국을 위해 뛰는 이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 겸손과 나눔의 미덕을 발휘해 한국이 진정한 리더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장



http://news.donga.com/3/all/20130114/52276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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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4. 15:48

폴란드의 겨울은 잿빛이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해방 기념일인 1월 27일이 되면 독가스실로 끌려간 희생자들의 발걸음을 재현하는 ‘죽음의 행진’으로 아우슈비츠의 거리는 더욱 음울해진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자비로운 신이여, 유대의 어린이들을 학살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소서. 이 수용소를 만든 자들과 이곳에서 학살을 자행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마소서.”

유신 시절에 10대 초반의 소녀였던 어느 대중작가가 대통령 당선인을 겨냥해 “나치 치하의 독일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신 치하의 지식인들은?”이라는 독설을 쏟아냈다. 수백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세계대전까지 일으킨 나치를 유신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뒤틀린 의식의 억지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 나온 김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엘리 위젤이 자전적 소설 『밤(La Nuit)』에 쓴 일화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나치 수용소에서 어린 소년이 교수형으로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한 주인공은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분노에 이어 마음속에서 신비한 음성을 듣는다. ‘신은 지금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신의 죽음 같은 절망 속에서 불멸(不滅)의 신성(神性)에 담긴 소망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수용소의 문이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된 위젤은 분노의 보복 대신에 인간성 회복과 인종 간 화해를 위한 일에 헌신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밤의 기억을 안고 그는 새벽빛의 여생을 살았다.

수용소에서 온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시몬 비젠탈은 50년 동안 1100여 명의 나치 전범을 추적해 잡아낸 ‘나치 사냥꾼’이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어느 날 비젠탈은 중상으로 죽음에 임박한 나치 친위대원의 병상 앞으로 불려간다. 숨을 헐떡거리던 친위대원은 비젠탈의 손을 붙잡고 눈물로 참회의 고백을 한다.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참을 망설이던 비젠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비록 죽어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흉악한 범죄를 쉽사리 용서할 수는 없었다. 참회와 용서 사이에서 방황했던 이 특이한 경험은 비젠탈의 영혼에 깊은 충격으로 남는다. 훗날 살인마 아이히만이 남미에서 체포됐을 때 즉각적인 처형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비젠탈은 이렇게 호소했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복수의 처형대가 아니라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나치 수용소에 걸어 들어가 동족과 함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 여성 에티 힐섬은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마저 증오심을 이 세상에 보탠다면 이미 살기 힘든 세상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증오심일지라도….”

나치의 만행을 온 몸으로 겪은 위젤과 비젠탈과 힐섬의 엄숙한 지성에 비하면 철없는 나이에 유신 시절을 보냈을 독설 작가의 지식이란 것이 어떤 차원의 것일지는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어제의 날들에도 낮과 밤이 있었고 빛과 어두움이 있었건만 굳이 어두웠던 밤의 기억만 더듬는 것은 성실한 지성의 태도가 아니다. 어제의 아픔만을 헤집는 ‘입술의 진보’로 내일의 가치를 지향하는 진보의 지성을 대신할 수 없다.

찌들도록 가난했던 시절 숙명처럼 단단히 달라붙은 궁핍의 세월을 처연(悽然)하게 살아낸 어른 세대도 4·19 혁명에 거리를 내달리고 유신 독재에 분노를 터뜨리던 저항의 젊음이 있었다. 그러나 누천년을 이어온 절대빈곤을 이 땅에서 몰아낸 열정과 지도력에는 겸허히 머리를 숙일 줄 안다. 이것이 어제의 낮과 밤을 고르게 품어 안은 균형의 역사의식이 아닐까. 1970년대 초반까지 남한보다 경제력이 앞섰던 ‘주체’의 북한은 식량원조로 근근이 연명하는 비(非)주체의 빈곤국으로 전락했다. ‘이밥에 소고기국’은 3대 세습체제의 60년 단골 구호다.

위젤이라면 1월의 행진에서 ‘자비로운 신’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 것’을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젠탈이나 힐섬이라면 아마도 ‘잊지 않되 용서할 수 있기를’ 기원하지 않을까. 새해 첫 달을 ‘생명의 행진’이 아닌 ‘죽음의 행진’으로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우리의 1월도 희망찬 생명의 행진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신임 대통령의 임기 5년 내내 연좌제를 떠올리는 유신의 논란으로 지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증오는 평화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장님과 이빨 빠진 사람들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경고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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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4. 15:47

오는 17일 서울 한 호텔에선 흔한 듯하되 결코 범상치 않은 모임이 열린다. 국내 기업인과 서울 주재 중국·일본 회사 임원 200여 명이 모이는 첫 3국 기업인 신년 교류회다. 필경 굳은 악수와 덕담이 오가고 푸짐한 음식에 웃음꽃이 필 게다. 지극히 평범한 새해 풍경이다. 하나 특별함은 그 시작에 있다.

지난해 11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중·일 관계가 최악이던 때였다. 중국에선 격렬한 반일데모와 함께 일본 상점과 회사가 습격을 당한다. 정부 간 채널은 물론 양국 간 상거래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이 무렵 서울에 위치한 한·중·일 협력사무국에 중국 측 제안이 들어온다. 서울에서 중·일 기업인들 간 교류의 장을 열어 달라는 거다. 꽉 막힌 양국 간 숨통을 한국이 나서 틔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옛날엔 턱없는 일이었다. 주변 강국에 치일 뿐 한국이 이들 분쟁에 나설 힘이라곤 없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이게 한국의 서글픈 자화상이었다. 얼마나 자학해댔는지 ‘한국 새우론’은 수많은 외국 언론과 미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열혈청년단체 ‘반크’가 “한국은 새우가 아니다”며 이미지 개선운동을 벌였을까.

이런 한탄 속에서도 한국의 국력은 무럭무럭 자랐다. 시선도 조금씩 변했다. 2006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당선은 중대 계기였다. 당시 뉴욕 외교가를 누비던 최영진 유엔대사(현 주미대사)는 이랬다. “전에 새우였다면 이젠 바닷가재는 된 느낌”이라고.

7년 지난 요즘, 한국은 가재에서 고래 사이를 유영하는 돌고래로 진화된 분위기다. 최근 국제회의에 다녀온 이들의 소감은 한결같다. 하품 해대기 일쑤인 참석자들이 한국만 나오면 귀를 쫑긋한다고.

그럴밖에. 세계적 불황 속에서 괜찮은 경제 성적에 삼성·현대의 성공, 거기에다 한류, 김연아, 싸이 등 경이로운 성과를 내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한국 아닌가. 이젠 ‘애플·삼성 싸움에 일본 기업 새우등 터진다’는 기사가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박근혜 당선인의 ‘중견국 외교론’도 이런 자신감 위에 세워졌을 터다. 한국도 당당한 중견국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하자는 거다. 사실 중견국은 꽤 된 개념이다. 16세기 이탈리아 정치가 지오바니 보테로는 모든 나라들을 제국·중견국·소국으로 나눴다. “타국 도움 없이 자립할 국력을 지닌 나라”가 그의 중견국 정의였다.

이를 제2차 세계대전 후 재등장시킨 건 캐나다였다. 루이 생로랑 전 총리는 “이해관계 많은 강대국도, 힘없는 약소국도 아닌 중견국만이 국제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 공감을 끌어낸다. 1956년 수에즈운하 분쟁이 터지자 유엔평화유지군 창설을 제안한 것도 캐나다였다. 그 덕에 레스터 피어슨 당시 외무장관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중견국 한국은 뭘 해야 하나. 전문가들의 제안은 우선 강대국 간 소통과 타협을 끌어내는 ‘교량국가’ 역이다. 요즘 중·일이 한국에 손 내미는 경우가 잦다 한다. 한·중·일 자유무역협정 체결 건이 단적인 예다. 적극적인 일본은 한국에 망설이는 중국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다.

다음은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들에 경험과 지식을 나눠주는 거다. 이들은 한국의 성공을 거버넌스와 부패 척결의 승리로 파악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법정에 선 건 한국인들에겐 더없는 수치다. 하나 이들에겐 엄정한 사법제도의 상징으로 비춰진다는 거다. 그래서 한 해 4000명 이상의 후진국 관리들이 한국을 배우자며 날아온다.

경계할 건 과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동북아 균형자(balancer)론’을 들고 나왔다. 미·중 가운데에서 세력의 균형추 노릇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뜻은 갸륵하나 힘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균형자 외교가 뭔가. 19세기 최강의 영국이 폈던 정책이다. 막강한 해군력을 지렛대로 유럽 열강 중 한쪽이 세지면 반대편과 손잡아 균형을 되찾곤 했다. 게다가 요즘 서구 학계에선 초강대국 미국의 확대를 막으려는 러시아·중국 같은 반미 세력을 균형자로 부른다. 그러니 오해와 웃음을 살밖에.

다행한 건 부끄러운 경험이 교훈도 준다는 사실이다. 외교정책을 세울 때 정치하게 생각하고 오버하지 말라는 가르침 말이다.



남정호 순회특파원·글로벌협력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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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4. 15:45

요즘 일본 공영방송 NHK에는 후쿠시마(福島)의 관광 명소 아이즈와카마쓰(会津若松)시의 자연 풍광, 역사 유적, 지역 축제 등이 거의 매일 등장한다. NHK가 지난 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야에의 사쿠라'라는 역사 드라마를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이 드라마는 19세기 말 아이즈와카마쓰가 배경이다.

NHK가 52번째 역사 드라마의 배경으로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은 원전 사고로 고통받고 있는 후쿠시마를 돕기 위해서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져 울상을 짓던 후쿠시마는 관광 특수(特需)에 대한 기대로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고 있다. 지역 주민은 신품종 벚꽃에 드라마 주인공 여배우의 이름을 붙이는 등 특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분주하다. 대하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과 소품을 소개하는 드라마 전시실도 곧 문을 연다.

후쿠시마가 잔뜩 기대를 하는 것은 그동안 입증된 역사 드라마의 관광 효과 때문이다. 역사 드라마에 등장했던 지역은 어김없이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1년간 방영되는 역사 드라마에는 그 지역의 유적과 자연 풍광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NHK는 매주 드라마 말미에 등장인물과 관련된 장소와 유적을 교통편 등과 함께 소개한다. NHK 드라마를 보면 외국인도 그 지역에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드라마 자체가 그 지역에 대한 거대한 간접광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가 지역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했다. 1997년 방영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경우 드라마 배경이 된 히로시마·야마구치·시마네현을 드라마와 관련해 방문한 관광객이 900만명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은 드라마 관광 효과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시청률에 울고 웃는다. 2008년 방영된 '아쓰히메(篤姫)'의 경우 가고시마에 10여개의 관광투어 상품이 만들어졌다. 철도회사도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는 관광열차를 운영하고 지역의 음식점은 관련 음식과 특색 있는 기념품을 만들어낸다.

지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찍기는 쉽지 않다. 유명배우들의 스케줄 조정이나 제작 비용도 걸림돌이다. 그런데도 NHK가 매년 거액을 들여 역사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들도 역사 드라마 출연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광고 모델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 스타 고리키 아야메(剛力彩芽)는 조연으로 출연하는데도 감격해 눈물을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즐겨 보는 대하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큰 영광"이라고 했다. NHK는 아침 드라마도 전국을 골고루 돌면서 촬영지로 선택한다.

한국도 역사 드라마의 지역 관광 활성화 효과를 기대해 지방자치단체가 거액의 자금을 지원, 세트장을 짓는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사후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가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NHK 역사 드라마는 세트장보다는 숨겨진 유적과 풍광을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또 오픈세트는 다른 드라마 촬영에 재활용한다. 한국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역사 드라마의 제작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차학봉 도쿄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13/20130113012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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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4. 15:45

'아시아문제? 일단 리콴유에게 상의하라!'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지켜온 불문율의 하나다. 베트남전에 올인 하던 존슨 대통령이 리콴유를 백악관으로 초청, 그로부터 한 수를 배운다. "월남과의 전쟁에서 과연 미국이 이길 수 있는가?"라는 존슨의 질문에 리콴유의 답변은 짧되 따끔했다. "군사적 견지에서만 보자면 베트남 전쟁의 승산은 희박하다." 

닉슨도 리콴유를 백악관에 초청, 역시 베트남 해결의 대안을 묻자 그는 우선 중국으로 향한 미국의 모든 문호를 개방할 것과 비 전략상품들에 대한 교역의 시작을 제의했다. 닉슨은 바로 그 다음 해 베이징을 방문, 본인의 말대로 "세계를 뒤바꾼 7일"이 되었다.

중국을 방문하려던 레이건 대통령이 가는 길에 타이완을 방문해도 괜찮겠냐고 리콴유에게 묻자 "타이완을 방문해서는 절대 안 된다. 중국에 가기 전에 중국의 총리인 자오쯔양이나 총서기 후야호방을 워싱턴으로 먼저 초대해야한다"고 답변. 이 역시 그대로 실현됐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의 눈은 이토록 신산(神算)에 가까워, 이웃집 숟가락 수효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1998년 3월 미 부통령 먼데일이 클린턴의 메시지를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에게 전달 후 귀로에 싱가포르에 기착, 리콴유에게 물었다. "당신 생각에 마르코스는 영웅인가 악한인가? 또 수하르토는 어떤가?" 다음은 리콴유의 답변. "마르코스는 영웅으로 시작했지만 악한으로 끝났다. 수하르토는 다르다. 지금의 그를 인도네시아의 대 술탄으로 보면 정확하다. 부인도 그곳 술탄 왕가의 공주다. 수하르토는 따라서 자녀들의 특권을 술탄이 누릴 당연한 권리로 여길 뿐,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리콴유의 총기는 고르바초프를 만난 후 크렘린 궁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그가 남긴 기록으로 더욱 빛난다. "이처럼 존경할 만한 인물이 그토록 사악한 체제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다니…이 얼마나 행운인가! 그가 다른 크렘린 지도자처럼 군사력을 동원, 소련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던들 세계의 여타 지역에 막대한 손상을 야기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고르바초프도 중국의 '거인' 덩샤오핑에 비하면 한 수 처지는 걸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천안문 사태의 해결사 덩샤오핑을 만난 후 리콴유가 남긴 언급을 보자. "전쟁과 혁명의 베테랑으로서, 그는 천안문 학생시위가 중국을 다시 혼란과 무질서로, 또 그 여파가 향후 100년에 미칠 위험한 사태로 판단한 것이다. 한평생을 혁명 속에 살아온 그는 천안문사태에서 혁명의 초기징후를 감지한 것이다. 책으로만 혁명을 접해왔던 고르바초프와는 바로 이점에서 달랐다."

귀신이 귀신을 알아보듯 그 덩샤오핑이 리콴유를 먼저 알아봤다는 점도 흥미롭다. 통일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덩은 인근 국가에 미칠 '도미노 논리'를 우려, 74세의 노구를 끌고 싱가포르를 찾은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소?"덩샤오핑의 질문에 리콴유가 비장의 해법을 제시한다. "동남아 화교를 상대로해온 중국의 라디오방송을 당장 중단하면 됩니다. 혈연적 유대를 너무 노골적으로 호소하면 인근 국가들의 의심을 증대시킬 뿐입니다." 

동남아 공산당에 대한 중국의 방송은 즉시 중단됐다. 어디 그 뿐인가. 세계 3,000만 명의 화교를 상대로 화상(華商)이 결성된 것도 그 자리에서 나온 리콴유의 아이디어를 덩이 살린 덕이다. 화상이 매년 중국에 투자하는 돈은 세계 각국이 중국에 투자하는 해외투자 전체 액의 60~70%에 달하는 거액이다. 

리콴유를 자랑하려는 글이 아니다. 박근혜 당선인더러 어서 그를 만나 사회적 통합과 일자리창출의 해법을 묻도록 권하고 싶어서다. 리콴유가 평소 개탄해온 대로 '만사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속성에 비춰, 지금처럼 국내에서 아무리 지지고 볶아야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고맙게도 그는 아직 살아있고, 선친 박대통령을 존경했던 인물이 아니던가.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1/h201301112102141157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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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4. 15:43

최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환자가 부쩍 늘었다. 2010년에 8만 명이라고 하더니 2011년에는 12만 명이 넘었다. 러시아와 몽골·중국 등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의 환자들이 대부분인데, 최근에는 중동지역의 환자가 빠르게 늘어 2010년 950명, 지난해 1800명을 기록했다.

아랍에미리트(UAE) 정부는 자국 국민을 대상으로 장기이식·심장수술 등 고치기 힘든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국가 예산으로 해외 치료를 보내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그 숫자가 연간 6000~7000명에 이른다. 대상 국가는 독일·영국·싱가포르 등 의료 선진국과 서비스가 좋은 태국으로 한정돼 있다. 한국은 1년 동안의 끈질긴 협의와 설득 끝에 2011년 UAE와 보건협력 약정을 체결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해 12월 환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의뢰받은 환자가 100명을 넘어서는 등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면 좀 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를 알리는 노력이다. 최근 양국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지만 UAE 사람에게 한국은 아직도 미지의 나라, 먼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비행 거리로 8시간여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으로 느끼는 거리는 그 배가 넘는다. 자동차와 휴대전화 등 한국 상품의 품질이 선진국을 넘어 세계 수위를 다투고 있는 것은 UAE 국민이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환자와 그 가족들이 여행하기에 얼마나 안전하고 편리하며 믿을 만한 나라인지에 대한 확신은 아직도 부족하다. 한 번이라도 한국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이것이 입소문으로 UAE 사람들에게 인식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부터는 현지 언론과의 협력, 의료 관광화하기 위한 복합상품의 개발, 우리의 의료 수준과 서비스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 등 관계기관과 의료계의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의 문화적 수용성을 키우는 일이다. 중동에서 가장 개방된 UAE 국민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지만 자신의 아픈 부분을 정확하게 의사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능숙한 아랍어 통역이 필요하다. 통역 서비스가 원활하게 지원돼야 하는 것이다. 생소한 나라인 한국을 치료지로 선택한 사람에게 도착해서 떠날 때까지 전 기간에 걸쳐 친절하고 상세한 안내 서비스도 제공해야 한다. 교통수단 제공은 필수다. 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먹는 음식과 기도실 여부가 여행지를 결정할 때 아주 중요한 요소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공간과 ‘할랄’이라는 특수한 방식으로 요리한 음식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랍 사람들은 한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것이 관행으로 돼 있다. 환자가 치료받을 때 다른 가족들이 쇼핑센터나 놀이공원에 갈 수 있도록 복합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

셋째, 환자 유치(inbound)뿐만 아니라 우리 병원의 현지 진출(outbound)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UAE는 그동안 구미 선진국의 병원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부분적인 성공에 그친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 유명 병원이 진출했지만 의료진의 구성과 의료의 질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의료 수준이 높으면서도 파견의사 비중도 높일 수 있는 한국 병원의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시장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적절한 파트너 선정 등 신중한 준비가 필요하지만 나름 중동의 의료 허브를 꿈꾸는 UAE에서 우리 의료산업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UAE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원전 수출과 유전 개발 등을 계기로 최근 전략적 동반자로 발전하고 있다. 와중에 의료 협력은 양국 국민·비즈니스의 접촉면을 더욱 넓히는 중요한 촉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권태균 주아랍에미리트 대사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360681&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4. 4. 15:42

지난 연말 신세를 많이 진 이웃의 초등학생 아이에게 물감을 선물하려고 문구점에 갔다. 제법 규모가 큰 문구점엔 물감의 종류가 꽤 다양했다. 미술 문외한인 기자에게 좋은 물감의 기준은 색상의 종류가 다양해서 값이 좀 나가는 것이다. 한국에선 대개 18가지나 24가지 색(色) 물감 세트를 산 기억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 문구점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물감은 10가지 색을 넘는 것이 없었다. 주인아저씨께 물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섞어서 색을 만들면 되잖아요. 어릴 때는 그게 더 좋아요." 물감을 사서 집에 와 보니 검정·파랑·노랑·초록 등 가장 기본적인 색 10가지만 들어 있었다. 하얀색 물감 튜브만 다른 것보다 컸는데, 색의 명도나 채도를 조절할 때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국에선 어릴 때부터 훨씬 다양한 종류의 색상으로 구성된 물감을 쓰는 경우가 많다. 녹색도 초록·진한 초록·연두·청록 등으로 세분화돼 있고, 파란색도 파랑·하늘색·군청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런 '맞춤식 색깔'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개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속 하늘을 색칠할 땐 무심코 '하늘색'이라는 이름의 물감만 사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은 십중팔구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하늘색'이라고 알던 그 색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를 프랑스 화단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화가에게 했더니 그는 "프랑스 아이들은 나무 하나를 그려도 그 형태와 색이 너무 다양해서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뭇가지는 갈색, 잎은 초록색으로 정형화된 한국 아이들의 그림과 달리 프랑스 아이들은 검은색 나뭇잎, 붉은색 나뭇가지, 거꾸로 선 듯한 나무둥치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아이는 그림도 학원에서 주입식으로 배워서 그런가 보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프랑스는 미술 분야에선 세계 최고다. 전문 화방(畵房)에 가면 수십 가지 색상으로 된 물감을 판다. 그런 프랑스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10가지 색 물감을 쓰도록 하는 이유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이 옷차림이다. 우리나라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 해엔 미니스커트, 어느 해엔 롱 부츠로 '복장 통일'을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패션의 도시'라고 하는 파리에는 이런 유행이라는 게 없다. 오히려 비슷한 스타일은 '촌스럽다'며 기를 쓰고 피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머플러 하나로 자신만의 멋을 내는 게 파리지앵들이다. 프랑스가 세계 명품 시장을 이끄는 것은 최신 유행을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적인 유행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품이란 결국 희소성이 중요한 가치일 것이고, 남과 다른 개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미술이나 패션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의 품격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개성과 독창성, 차별화 같은 가치가 좀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이성훈 파리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07/2013010702700.html



Posted by 겟업
2013. 4. 4. 15:42

일본 뉴스가 늘어나봤자 좋을 일이 없다더니 요새가 꼭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아베 신조 총리의 등장 이후 한일관계를 좀 아는 사람치고 말하지 않고, 글 쓰지 않은 이가 없다. 그렇다고 똑 부러지게 해결된 것도 없다. 이번 갈등은 왠지 오래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이 달라져서다.

가장 큰 변화는 한국의 불만이나 항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일본 지식인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또 그 얘기냐”고 불평하면서도 듣는 척은 했는데 요즘은 응대에 짜증이 묻어난다. ‘우경화(右傾化)’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아베의 총선 압승을 한사코 “민주당에 실망해 자민당을 택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극우(極右)라는 말에 특히 거부감이 심하다. G2(주요 2개국)라는 용어에도 불만이 많다. 한국이 중국만 우대하고(속으로는 중국에 아부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홀대한다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이 경계할 나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 일당독재에다 국방비를 펑펑 써대는 중국 아니냐고 되묻는다.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일본, 키워드는 ‘폐색감(閉塞感)’이란 단어다. ‘고립감’이나 ‘무력감’ 정도의 뜻이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에 추락하는 국제적 위상, 엎친 데 덮친 대지진, 초고령화로 활기를 잃어가는 사회, 일본은 몹시 외로움을 타고 있다. 희미하나마 아베에게서 옛 시절의 영화(榮華)를 보고 몰표를 던진 것은 아닌지, 하고 분석해 본다. 20, 30년 전 잘나가던 일본이 아니라 요즘의 프레임으로 일본을 봐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이 나온다.

아베 총리가 준비한다는 ‘아베 담화’는 파란을 일으킬 것이다. 한일이 얽힌 쟁점은 크게 독도, 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보통국가론, 우경화 등이다. 아베 담화는 이 모든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다. 일본의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 일본군 위안부의 국가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교과서를 편찬할 때 이웃국가를 배려한다는 미야자와 담화(1982년)는 나름대로 완충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독도, 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제국주의에서 빚어진 일란성 다생아로 보지만 일본은 쪼개서 대응한다. 독도는 국제법으로, 교과서는 문부과학성의 권한으로, 일본군 위안부는 개인의 선택으로 접근한다. 결론은, 그래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거다. 추정컨대 ‘아베 담화’는 미래와 화해를 얘기하면서도 3대 담화의 취지마저 후퇴시킬 가능성이 크다.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오는 평지풍파다. 한국으로서는 타협할 수 없는 이들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줄기차게 일본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보통국가론은 재단이 복잡하다. 헌법을 고쳐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개편하고, 방어만 한다는 전수(專守)방위개념을 없애며,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자국이 공격받은 것으로 간주해 반격할 수 있는 집단적자위권을 확보하겠다는 게 보통국가론의 요지다. 언뜻 들으면 무섭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갖고 있는 권리인 데다 하겠다면 마땅히 제어할 방법도 없다. 문제는 일본이 또다시 패권주의로 달려갈 가능성이다. 일본은 절대로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패전 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일본은 주변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개학이 다가오는데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숙제를 미뤄왔다. 우경화 논란에 대해 일본은 “일본 전체가 우경화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일리가 없지 않다. 문제는 사회지도층이다. 아베 총리는 요즘 자신의 발언들이 “우익은 극소수”라는 기존의 주장을 얼마나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까 모르겠다. 

일본과의 관계를 단칼에 회복시킬 수술방법은 없다. 산업구조는 노동집약적인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경박단소(輕薄短小)로 옮아가는 게 대세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거꾸로 가야 할 듯하다. 두 나라 모두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고(重), 정치가 삐걱대도 사람-물건-돈의 교류는 두텁게 하며(厚), 일본의 가치를 남북통일 때까지 길게 내다보고(長),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공동 대응한다는 대국적인 견지에서(大)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병을 다스리며 함께 사는 한방적 해법이다.

이지메(집단괴롭힘)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일본어는 이미 국제공용어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주변국을 이지메하다 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요즘은 뉴욕타임스가 아베의 과거사 부정을 ‘수치스러운 충동’이라고 질타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히키코모리가 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골방을 박차고 나와 ‘공기를 읽길’(분위기를 파악하길) 희망한다. 현실에 걸맞은 일본을 만들자는 ‘일본의 리얼리즘’이라는 논의도 과거회귀나 현상타파에 머물지 말고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미래상을 상정해야 맞다. 그게 진정한 리얼리즘이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며 국제사회에 숱한 기여를 해온 선진국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보통국가’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존경받는 ‘보통이상의 국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훌륭한 이웃과 더불어 살고 싶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http://news.donga.com/3/all/20130107/52094834/1



Posted by 겟업
2013. 4. 4. 15:41

[토요판/리뷰&프리뷰] 다음주의 질문
복덕방·노인정은 보수강경파 독무대
진보 생활논객 못 키우면 희망 없어

“자네, 나 좀 보세. 연말 선거 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젊은 사람들은 안철수를 좋아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가.”지난해 8월 경북 상주의 한 시골마을인 고향을 찾았을 때였다.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김 할아버지(88)가 마을 어귀에서 정치부 기자를 불러세워놓고는 박근혜 대통령론을 역설했다. 자신의 정치 강연에 대해 가타부타 반응 없이 듣기만 하자, 그는 “이 나라가 어떻게 발전했는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철이 없다”면서 언성을 높였다. 정치권 돌아가는 얘기나 전망 등을 듣고 싶어하던 과거 태도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아저씨, 안철수는 연말 대선에 나오겠죠? 안철수와 민주당 후보가 단일화하면 박근혜를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엠비가 워낙 인기가 없잖아요.”

지난 7월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난 친구의 중3 아들(15)이 똘망지게 말했다. 이 녀석도 정치판 돌아가는 소식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녀석은 아빠를 따라 지난 3년간 중부 아프리카에서 지낸 뒤 당시 막 귀국한 참이었다. 친구는 “얘는 아프리카에 있을 때 나꼼수를 매회 내려받아서 다 들었지. 지금은 나보다 정치 뉴스를 더 많이, 또 깊이 안다네”라면서 허허 웃었다.

돌이켜보면 이 두 장면은 2012년 대선을 상징하는 듯하다. 18대 대선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세대대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청년층의 야당 후보 쏠림은 10년 전인 2002년 대선 때보다도 더 강해졌다. 20대만 보더라도 투표율은 56.5%(2002년)에서 65.2%(2012년)로 8.7%포인트, 야당 후보 지지율은 59.0%에서 65.8%로 6.8%포인트가 올랐다. 변화에 대한 청년층의 갈망과 정치 각성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층의 야당 성향화는 나꼼수를 비롯한 각종 팟캐스트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등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생도 팬이 될 정도의 쉬운 언어로 재미있게 정치를 설명함으로써 정치를 외면해온 젊은층을 단기간에 정치 주체로 변화시킨 것이다.

반면에 50대 이상 노년층의 여당 성향화 역시 눈부시다. 이들은 이제 과거처럼 ‘깬’ 자녀들의 안내대로 한 표를 던지는 손쉬운 포섭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수는 김 할아버지처럼 자기 확신을 지닌 ‘노인 전사’로 탈바꿈했다. 노년층의 이런 변화는 종편 등 24시간 방송 채널의 등장과 연관이 깊다. 서울 지역의 새누리당 한 재선 의원은 “은퇴한 장년층들은 종편 등의 시사 프로그램을 종일 본다. 그래서 완전히 우경화됐다. 이들을 섣불리 설득하려 했다가는 큰코다친다”고 말했다.

청년층의 정치의식 강화로 일상생활의 모습이 바뀐 것은 거의 없지만, 우경화된 장년층의 등장은 생활 터전인 골목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동네 사랑방인 복덕방이나 노인정, 찜질방은 보수 강경파 노인들의 독무대가 됐다. 팔순이 가까운 노모를 통해 가끔 듣는 아파트 경로당의 분위기도 똑같다. 야당이 강한 가난한 동네임에도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북한에 또 퍼주기 한다. 이정희 때문에 박근혜를 찍어야 한다’는 등의 여당 정치선전이 노인정 담론을 주도했다. 여기에 반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대선에 패배한 민주통합당이 9일 비상대책위원장을 선출하기로 하는 등 전열 재정비에 한창이다. 친노가 물러나고 비노 쪽 인사가 맡아서 당을 잘 수습하면 5년 뒤가 보장될까? 안철수 영입이나 진보세력과의 합체 등 야권 재편이 되면 미래 비전이 있을까?

안 하는 것보다야 도움이 되겠지만, 갈수록 기울어지는 ‘골목 정치’ 환경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면 2014년 지방선거,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도 별 희망이 없다. 시공간의 경계가 없는 청년들과 달리 골목 안에 사는 노년층과 장년층에게는 에스엔에스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골목 정치가 필요하다. 동네의 보수 정치꾼들과 얼굴을 맞대고 논쟁을 벌일 생활의 진보 논객들이 있어야 한다. 각종 동네 사랑방에서 ‘왜 북한과의 교류가 퍼주기가 아닌지, 이정희와 문재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반박하고, 진보가 실생활에 얼마나 큰 이익과 도움이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활정치다. 동네 논객인 풀뿌리 당원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재교육해야 한다. 소멸되고 있는 뿌리를 방치한 채 상부조직과 얼굴만 예쁘게 꾸민다고 될 일이 아니다.

김종철 정치부 기자




Posted by 겟업
2013. 4. 4. 15:35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한방에 모아놓고 가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들려준다면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인은 ‘아내가 있다’, 일본인은 ‘불륜상대가 있다’는 뜻으로 노래제목을 이해할 것이다. 같은 한자문화권에서 ‘愛人(애인)’이라는 똑같은 한자를 놓고도 이처럼 뜻이 다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모든 번역은 오역(誤譯)”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 국민의 오랜 역사와 경험, 고유한 정서가 축적된 언어를 다른 나라말로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문화는 항상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이 순서가 뒤집어진 것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을 한 1868년부터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서는 철학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번역 붐이 일어난다. 한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지금 쓰는 현대 한자어의 상당 부분은 이 시기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개인, 신혼여행, 철학, 과학, 시간 등과 같은 한자어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 신조어들이다.

‘대번역시대’를 거치면서 급속한 서구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후 러시아를 꺾고 열강(列强) 대열에 합류한다. 그 후 100년 이상 유지된 한중일의 문화헤게모니 서열은 번역력(力)의 차이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번역력은 일본과 비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이다. 서양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로마 고전조차도 대개 일본어나 영어로 된 것을 재번역했다. 두 번의 ‘오역’을 거치다 보니 뜻이 잘 통하지 않거나 생경한 표현투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올해 74세의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는 ‘국보급’ 번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그리스-로마 원전 번역가다.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시절인 1990년대 중반부터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가 지금까지 번역해낸 그리스-로마 고전은 60여 종에 이른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헤로도토스의 역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이다.

대단한 점은 이 같은 역작의 절반이 그가 2004년 단국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 나왔다는 것이다.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천 교수는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 등산을 하는 것을 빼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택에서 번역작업을 하는 데 보낸다. 그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번역해내는 그리스-로마 원전의 분량은 1페이지에서 1페이지 반 정도. 매우 더디면서 인내심과 체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을 그에게 물어보니 “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1개월가량 번역작업을 쉰 적이 있는데, 마음도 불안해지고 건강도 오히려 나빠져 이후로는 절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됐다”는 것이었다.

한 인문학자는 그를 “정말 번역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순수한 분”이라고 평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인문학 연구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인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가 2년 전 천 교수에게 연구교수 직을 제안했다. 연 3600만 원씩 2년간 7200만 원을 지원받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천 교수는 “인문학 분야에는 어렵게 생활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으니 나 대신 그들을 지원하라”며 고사했다. “그럼, 행사에 잠시 와서 자리를 좀 빛내 달라”는 재단 측의 거듭된 요청에, 천 교수는 너무나 미안하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거기에 다녀올 시간이면 원전을 스무 줄 이상 번역할 수 있는데….”

‘웰에이징’은 멋지게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다.


천광암 경제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90018/1



Posted by 겟업
2013. 4. 4. 15:35

성탄 휴가 기간 중에 투자 분야에서 근무하는 한 미국인 동료로부터 한국에 대해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질문은 간단했다. 어떻게 한국이 국제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던 부패하고 불투명한 시스템에서 상당히 개방되고 투명한 비즈니스 환경의 모범으로 변모하게 됐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많은 미국인처럼 그는 부패로 인한 변덕과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하는 규칙 적용에 실망하고, 중국이 언제쯤, 어떻게 이른바 ‘한국 사례’를 따르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했다.

‘한국 사례’는 최근 들어 부쩍 더 자주 들리는 용어다. 국제 원조 전문가들은 어떻게 다른 나라들이 개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뀐 한국의 길을 따를 것인가를 궁금해한다. 아프리카의 전문가들은 자기 나라가 그렇게 갈망하는 올림픽·월드컵·월드엑스포 같은 글로벌 이벤트를 개최한 한국의 사례에 감탄한다. 중국이 이른바 소프트파워 확산 실패에 난처해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강남스타일’은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사례’는 여러 요인에 기인하겠지만 그중 두 가지 요소가 가장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1987년의 민주화와 97년의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전자는 한국인이 일상적인 생각에선 이젠 거의 떠올리지 않는 요소다. 후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평균적인 한국인은 거의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97년 외환위기는 한국인의 경제와 가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으며 이전까지 성장을 견인했던 경제체제의 결함을 보여줬다. 한국인은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고통스러운 개혁방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경제체질을 개선해 미국 등이 5년 전 말려들어간 글로벌 재정 몰락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민주화는 지금과 같은 한국의 탄생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해서가 아니라 개방성과 준법, 투명성을 한국 사회의 목표로 삼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88년 올림픽이나 중산층의 출현 같은 다른 요인도 있지만 민주화와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지금 전 세계가 ‘한국 사례’를 입에 올리는 시대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일상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상당수 한국인은 아마 이번에 독재자의 딸을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한 자국의 정치 시스템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새로운 사례를 하나 더 만들었다.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여성을 자국의 최고위직으로 선출한 전례가 없다. 아시아 정치에선 스캔들이 하나의 규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필리핀·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선 최근 선거에서 당락을 좌우할 만한 부정은 없었다. 미국에서와 같은 투표소의 혼란도 없었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후보를 그렇게 보지 않았겠지만, 전 세계는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출마한 것 같아 보이는 조용한 신사를 주목했다. 이 후보는 전직 대통령에게 충성하며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정치적 비전을 따르려고 했다. 아울러 세계는 정치라는 추악한 세계에 들어갈 아무런 필요도 없었으나 97년 이 나라가 외환위기에 빠지자 정치 입문을 결심했던 한 여성도 주목했다. 이 여성 후보는 정치적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공약으로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서게 됐다.

대선 후보의 성격을 이렇게 순진하게 묘사한다면 한국인들이 웃겠지만 인식은 종종 현실을 구현한다. 실제로 전 세계는 두 대선 후보가 정치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것보다 국민을 위한 공직 봉사에 진실로 관심이 더 많아 보이는 것으로 인식했다.

여기에 더해 다음달 대통령에 취임할 박근혜 당선인은 한국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이미 청와대에 거주한 적이 있다. 정치에서는 권력에 굶주린 사람이 더 권력을 갈망한다. 이를 위해 다른 가치를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주는 권력에 취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대통령을 가지는 것은 신선한 일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이미 북한을 방문해 그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본 사람 가운데 최초의 청와대 주인이 될 것이다. 이는 전임 대통령들처럼 평양에 꼭 가야겠다는 외곬의 생각에 매달려 고통스러워할 가능성이 별로 없을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박 당선인이 한국을 최근의 경제 불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경제 관련 경험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설혹 대통령 당선인이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대화가 마지막에 이르자 내 친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한국의 경험은 중국이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먼지를 잘 보여준다. 일부 한국인은 대통령 선거 결과에 실망해 있겠지만 한국은 다시 한번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례가 되고 있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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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4. 4. 15:33

'"저는 테리 존스 목사라고 합니다. 9·11에 대해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낮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평화가 깨졌다. 백발 스포츠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이 유명 극우 백인 목사는 광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9·11 테러를 '급진 이슬람의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우리는 '미국인'으로서 이슬람 공동체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설이 계속되면서 '급진 이슬람'이라던 그의 타깃은 어느새 슬쩍 이슬람 전체로 바뀌고 있었다. "이슬람은 억압의 종교, 거짓과 속임수의 종교, 폭력을 조장하는 종교입니다."

한 백인 여성이 듣다못해 "노(No)!"라고 소리쳤지만,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언을 이어갔다.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어울리는 광장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히잡을 쓴 한 무슬림 여성은 아이들의 손을 잡아끌고 도망치듯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찌푸린 표정으로 연설을 듣고 있던 한 백인 남성이 갑자기 노래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사의 연설과 남성의 노래가 허공에서 뒤섞였다. 노래는 비틀스의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All you need is love)이었다. 노래가 후렴구에 다다르자 남성이 소리쳤다.

"여긴 자유의 나라예요, 여러분. 다 함께 노래를 불러요!"

노래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늘어나는 듯싶더니, 이내 합창을 이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고, 광장을 짓눌렀던 '충돌'의 공포는 사라졌다. 저주(詛呪)의 연설은 노래에 묻혀 이제 들리지 않았다. 연설을 제지한 이들이 목사와 같은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이었기에 그 울림은 더욱 컸다.

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촬영했다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독자 코너에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 영상을 보면서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목소리를 높였던 수많은 '테리 존스'들이 떠올랐다. 한쪽에 투표하면 '반(反)대한민국 세력이고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려는 세력'이라고 말한 어느 '언론인', 다른 쪽에 투표하면 '독재자에게 열광하는 이웃'이라고 주장한 어느 '소설가'가 그들이다. 불행히도 그때 우리는 각자 자기 진영을 향해 "노"라고 외치지 않았다. 긍정의 노래로 저주를 덮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침묵하거나, 심지어는 SNS로 이러한 주장을 퍼 나르며 적개심과 분열을 키웠다. 용기가 없었거나 상대방을 찌르는 독설이 주는 쾌감을 즐긴 것이다.

그래 놓고 "너만 옳으냐" "말이 안 통한다"고 서로를 꾸짖었다. 헛된 소리다. 내가 옳으면 상대가 반대한민국·공산화 세력이 되고, 상대가 옳다면 내가 독재자에 열광하는 이웃·'꼰대'가 되는 상황에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정 '대통합'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침묵을 깨고 먼저 '우리 편'을 향해 용기 있게 외쳐야 한다. "노"라고. 필요한 건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장상진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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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4. 4. 15:31

2013년의 새해가 밝았다. 매년 밝아오는 새해 아침이지만 오늘 계사년(癸巳年) 아침에 맞는 붉은 태양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다시 도약하느냐, 아니면 변방의 이류국가로 주저앉느냐를 가르는 첫 관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 올해 건국 65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를 토대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가라는 자부심은 온데간데 없이 나라가 이념과 세대, 지역과 계층으로 갈려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이 와중에 저출산과 고령화로 성장동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양극화는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결과는 우리나라가 처한 엄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올해부터 새로운 각오로 산적한 현안을 풀어나가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는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세계를 주도해온 미국·유럽 위주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급격하게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은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재정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은 당분간 세계의 중심무대로 복귀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이제 세계가 기대하고 있는 곳은 아시아뿐이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서도 아시아에선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국이 강건하게 버티고 있는 가운데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신흥국들이 성장의 용틀임을 시작했다. 바야흐로 위대한 아시아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시대의 본격적인 대두는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자칫 잘못하면 중국의 위세에 눌리거나 후발개도국들에 치일 위험이 큰 반면, 잘 활용하면 대내적인 갈등을 해소하면서 안정적인 번영을 뒷받침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아시아 시대의 도래라는 기회를 잡아 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설 것인지, 아니면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놓쳐 주저앉고 말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순간을 맞았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 아시아 시대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우선 정치적·사회적인 대통합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 국민이 반으로 갈려 사사건건 대립한다면 기회는 대한민국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주변의 아시아 각국이 아무리 융성해도 우리가 내부분열을 추스르지 못한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통합의 첫걸음은 인사의 탕평(蕩平)이다. 지연과 학연으로 맺어진 저급한 패거리 인사를 탈피하지 못하면 분열의 골은 깊어지고, 대립의 각은 날카로워진다. 인위적인 자리 배분을 통해서라도 누적된 인사의 악습을 깨트려야 한다.

통합을 위한 또 하나의 길은 공감과 소통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 반대편에 선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자면 가진 자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 재산을 가진 사람, 명예를 가진 사람부터 솔선해서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이 국익을 향해 한 방향으로 모일 때 비로소 재도약의 기회가 열린다.

아시아 시대라는 기회는 거저 오지 않는다. 그 기회를 살릴 능력이 있어야 꽃을 피운다. 기회를 살리는 능력은 창의적인 발상에서 나온다. 아시아를 그저 싸구려 제품의 수출시장으로만 보는 구태의연한 사고로는 새로운 아시아 시대를 선도할 수 없다. 또 영세한 국내시장만 바라보는 천수답식 관행으로는 저성장의 질곡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새롭게 떠오르는 아시아 중산층을 겨냥해 아시아 전역을 우리의 내수시장으로 삼겠다는 창의적 발상과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 아시아인들을 열광케 한 한류와 K팝, 우수한 정보통신기술(ICT)은 그 가능성이 무한함을 보여준다. 그러자면 청년들이 수출주도 대기업과 내수중심 영세자영업이라는 고착된 고용구조에서 벗어나 기발한 아이디어와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창업에 나서도록 하는 새로운 기업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새로운 일자리가 있고 미래의 성장동력이 있다.

 그러자면 우선 국내의 각종 규제를 과감히 푸는 한편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조속히 체결하고, 한국을 아시아인들이 몰려드는 매력적인 허브로 만들어 청년 창업의 마당을 획기적으로 넓혀야 한다.

 아시아 시대라고 하지만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치 환경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국제정치 환경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시아 시대의 꿈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파워 하우스(power house)’로 떠오른 한·중·일 3국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곧 2기(期) 행정부를 출범시킬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비롯해 새 진용을 갖추게 된 한·중·일의 리더십이 어떤 구상과 의도를 갖고 상호작용 하느냐에 따라 아시아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영토와 과거사 문제에 매몰돼 3국 간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버려둔다면 이는 굴러온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을 둘러싸고 위험천만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우발적 사고는 언제든지 무력충돌로 비화할 수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금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군비 강화에 나섬으로써 동아시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미국이 일본과 손잡고 역내(域內) 대(對)중국 포위망을 강화하고, 이에 반발한 중국이 핵과 미사일을 갖춘 북한의 도발을 방치하는 사태는 우리로선 최악의 외교·안보 상황이 될 것이다. 누구도 주권은 포기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현상유지’를 토대로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서 영토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미·중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한국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피하려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발전시키면서도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남북관계 개선도 필요하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과 제재를 가하면서도 대화의 문은 열어둬야 한다. 북한이 먼저 변하지 않는 한 대화와 교류는 없다는 식의 경직된 자세는 우리 자신의 입지를 좁히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남북 간의 신뢰는 말만으로 구축될 수 없다. 접촉이 필요하고 행동이 뒷받침돼야 한다. 성큼 다가온 아시아 시대를 도약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신뢰에 기초한 지속가능한 남북관계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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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4. 4. 15:24

12년간 외국을 떠돌다 조국 터키로 돌아온 망명시인 '카'는 동쪽 끝 국경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소녀들의 잇단 자살 사건을 취재해 달라는 신문사의 요청을 받고 국경도시 카르스로 떠난다. 카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방문 소식을 다룬 한 지방신문 기사를 읽는다. 3일에 한 번씩 발행하는 이 신문은 "카가 극장에서 미발표작 시 '눈(雪)'을 낭송했다"고 그의 동정을 예측보도했다. 극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기사에 나온 시를 쓴 적도 없는 카는 어이없어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뒤 그는 신문이 예고한 대로 극장에서 '눈'을 낭독한다. 신문 발행인은 그것이 이 도시에 들어온 카에게 예정된 운명이라고 말한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 '눈'에 나오는 얘기다.

카가 겪은 이상한 경험은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지역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터키인들의 숙명을 상징한다. 터키에서 태어난 이상 그곳의 소녀들은 히잡을 벗으라는 서구식 학교의 교칙과 전통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이슬람 교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된다.

아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사정도 다를 게 없다. 우리에게도 대륙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한반도에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맞는 운명이 있다. 우리 문학도 그런 점을 주목했다. 이문열의 '변경', 최인훈의 '광장' 등이 이념의 충돌지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초상을 그렸다. '변경'은 아버지의 월북 이후 남한에 남겨진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비극적 과정을 그렸고, '광장'은 남과 북의 체제 어느 한쪽에 속할 것을 강요당한 젊은이의 고통을 다뤘다. 터키의 소녀들이 히잡을 벗을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고민했다면, 최인훈과 이문열의 소설에서 한국인은 남과 북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갈등했다. 6·25 전쟁 이후 지난 60년의 우리 역사는 한·미 동맹의 울타리 안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발전하는 길을 선택한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한국은 미·중 가운데 선택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새로운 운명을 맞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중국은 축전을 보내면서 "중국과 관계를 더 밀접하게 하는 것이 박 당선인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한·미 동맹의 틀을 깨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미 동맹 못지않게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요구다. 미국도 향후 한·미 동맹의 위상 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가 지난 10일 발표한 '글로벌 트렌드 2030'은 한국이 통일되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중국에 다가가는 '전략적 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머리에 북한을 이고 살아가는 우리로선 생존과 평화를 보장받고 장차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을 지키면서도 통일 후 한국이 중국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쪽으로 외교의 지평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김태훈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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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4. 4. 15:23

지금 인류에게 진실로 필요한 건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좋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작년 6월7일 일본 여성들 수십명이 총리 관저를 찾았다. 한동안 전면 정지 상태에 있던 원전의 재가동을 정부가 허가할 움직임을 보이자 항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후쿠시마 원전 부근에 삶터가 있는 어머니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눈물과 분노로써 묘사하고, 이 참극에도 원자력을 단념하지 않는 정부의 자세를 격렬히 규탄했다. 한 어머니는 “우리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역사가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역사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비통하게 말했다.

생각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서 원자력 기술의 개발과 응용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근대적 기술에는 근원적인 폭력성 혹은 파괴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실제로 거의 모든 근대적 기술이 인간생활에 혜택을 주는 만큼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흔히 혜택은 단기적이고, 피해는 장기간 지속되게 마련이다.

근대적 기술의 이 근본적 한계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간단히 답하면,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서구 근대의 ‘과학적 이성’이라는 것이 “모든 자연은 계산을 통해서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자폐적이고 근시안적인 자연관 위에 구축돼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는 부분적·단기적으로는 합리적이되 전체적·장기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어왔다.

그러한 사고의 극단적인 산물이 원자력 기술이다. 원자력 기술은 방대한 전력생산 기술로서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핵폐기물 처리를 비롯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생태적 비용은 인류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 핵심적 비용에는 물론 생물체에 대한 치명적인 손상이라는 문제가 있다. 지구 탄생 이후 최초의 원시 생명이 출현하기까지 10억~20억년이 경과해야 했던 것은 방사능이 제거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방사능은 지구 생물체와 절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자 허먼 조지프 멀러는 일찍이 ‘방사선과 유전’(1964)이라는 논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빈번한 핵실험에 의한 대기 중 방사능 증가로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이 축소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멀러의 이 경고가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핵실험 이외에 420기가 넘는 상업용 원자로, 그리고 스리마일·체르노빌·후쿠시마에서의 핵사고로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이 심각히 오염되었다. 게다가 작년 5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가 발표한 연구에 의하면, 세계의 원전에서 중대사고가 터질 확률은 10~20년 만에 한번이다. 만약 이 연구가 옳고, 원자력 시스템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앞으로 100년 안에 북반구 전역은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한, 광대한 방사능 오염지대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

원자력이란, 군사용이든 민생용이든, 이 지상에서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될 기술이다. 세계적 반핵활동가 헬렌 칼디콧의 말이 아니더라도, 원자력의 근간에 있는 것은 ‘광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정치가·관료·경제인·과학자·언론인은 한사코 원자력을 장려·옹호해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원자력이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널리 유포된 거짓말을 그들이 믿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원전의 건설과 유지, 폐기를 모두 고려한다면 원자력의 경제성이란 완전히 허구임이 이미 명확해졌다. 그런데도 원전에 집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전 비즈니스를 둘러싼 강고한 기득권 체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체제에서 절박한 것은 단기적인 이윤추구이지 생명과 자연의 보호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결합돼 있는 산업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생명의 논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번 대선 후보들의 세 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 원전을 포함한 환경문제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근대국가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전개돼온 정치체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장·확대에 불가결한 기술혁신을 위한 테크놀로지는 자본과 국가 모두에게 요긴한 존재이다. 설령 그 기술의 궁극적 결과가 세계의 파괴일지라도 단기적인 이익에 골몰한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핵폐기물 처리와 같은 것은 자신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원전을 옹호·지지하는 자들의 근본적인 정신구조다. 사실상 오늘날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정치와 경제, 법질서 전체가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계’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지금까지 일본이 지향해온 것은 서구 근대문명을 단시간에 모방하여, 자신도 세계 열강의 일원이 되기 위한 대국주의(결국은 제국주의) 노선이었다. 그 길을 따라 정신없이 달린 끝에 전쟁 참패라는 좌절을 겪었으나 다시 전후의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태는 대국이 되고자 하는 꿈의 허망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후쿠시마 이후 널리 공개된 사실이지만, 지진의 나라 일본에 54기의 원전 건설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 전개된 데에는 단순한 전력 확보 이외에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잠재능력을 보유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발언력을 높이려는”(기시 노부스케) 것이었다.

군국주의를 통한 제국 건설의 꿈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경제대국 일본은 후쿠시마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애당초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토대를 둔 경제발전과 대국 지향 노선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다. 후쿠시마 사태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원자력이라는 광기의 기술에 의존하는 정치·경제 체제의 필연적인 붕괴를 상징하는 파국적 재앙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모든 근대국가, 서구 근대문명을 무반성적으로 모방해온 모든 신흥 산업국가의 공통한 운명이다. 이것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후쿠시마 핵사고는 스리마일이나 체르노빌 핵사고와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 차이의 배경은 후쿠시마 핵사고가 경제성장 시대의 종말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이후에도 맹목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경제성장을 위해서 원자력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작태임이 확실하다.

지금 인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실로 ‘좋은 삶’ 혹은 ‘좋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좋은 사회’란 무엇보다 안심하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여야 한다. 그러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도 존재한다. 그중 빠뜨릴 수 없는 나라는 물론 독일이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독일이 원전의 단계적 폐기를 거국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이뤄진 탈핵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간소한 생활양식을 추구하고, 활발한 대안에너지 개발 등 진지하게 미래에 대비해온 국민적·국가적 차원의 지혜와 합리성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상황은 아직 절망적이다. 원전 강국이라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재앙을 직접 겪은 일본 정부도 별로 나을 게 없다. 후쿠시마의 어머니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쓴 탄원서를 접수한 바로 다음날 노다(野田) 당시 총리는 오이(大飯) 원전의 재개를 결정했다. 시급한 것은 동아시아 주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궐기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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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4. 15:22

우리나라 사람 6명 중 1명은 연간 소득이 998만원도 안 되는 빈곤층이다. 특히 선진국보다 3배나 많은 자영업에서 과잉 경쟁을 벌이는 50대 이상은 빈곤층 비율이 가장 높은 계층이다. 50대 자영업자 176만명 중 74%는 영세한 '나 홀로 자영업자'다. 베이비부머들이 퇴직 후 재취업이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지만, 집을 담보로 빌린 대출금과 퇴직금을 까먹으며 빈곤의 한계선상에 놓인 게 현실이다. 한발만 삐끗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인데도 그들을 받쳐줄 사회안전망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보수는 경쟁과 성장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대개 가진 자와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편다. 반면 분배와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는 노동자, 농민 등 경제적 약자에 기울기 마련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이 진보를, 가진 자들은 보수를 지지하는 게 옳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거꾸로다. 한국갤럽이 대선 투표 당일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농업ㆍ임업ㆍ어업 종사자는 55 대 29, 자영업자는 52대 42의 압도적인 비율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4월 총선에선 월 소득 100만원 이하 계층의 76.2%가 보수 여당을 찍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20대 80 사회'에서 80에 속하는 사람들이 20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니 진보가 보수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이런 계급배반 투표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미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인 캔자스나 웨스트버지니아주가 보수 공화당의 아성으로 꼽힌다. 가난한 사람들(50대 이상 비율이 가장 높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뭘까. 역사학자 토머스 프랭크는 미국의 보수 세력이 1960년대부터 자산가와 보수 기독교,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보수적 가치를 전파해왔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의 원인인 경제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낙태와 동성애 등 보수적 가치관에 물들어 공화당을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으로 믿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다를 게 없다. 보수는 거대 언론과 대학, 연구기관을 장악하고 있다(김재철 MBC 사장의 퇴진을 막기 위한 보수의 눈물겨운 노력을 생각해보라). 교육기관은 경쟁 만능의 시장경제를 절대선으로 가르치고, 거대 언론은 이념 안보 종북 등 보수의 담론과 의제를 반복해서 전파한다. 교회는 빈곤을 경제구조가 아닌, 신앙을 통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가르친다. 애국심과 권력에의 복종을 부추겨 보수화를 이끄는데도 선수다.

보수의 언어는 감성적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행복, 민생, 화합 등이 보수진영의 핵심 키워드였다. 진보의 언어는 이성적이다. 보편적 복지나 증세 등은 가슴보다는 머리로 인식해야 하는 단어다. 그런데 인간은 이익에 따른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프레임에 따른 감정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프레임으로 판단하는 것이지, 주머니 사정이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견해도 비슷하다. 사람이 무엇을 판단할 때 이성보다는 본능적 직감에 의존하며, 이성은 직감이 먼저 판단한 것을 논리적으로 변명할 때만 이용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이성적 언어로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보는 보수도 진실을 알면 돌아설 것이라 굳게 믿고 이성적 언어로 계속 설득하려 든다. 하지만 보수(보수화된 서민)에겐 이런 접근이 통하지 않는다. 진보가 집권하면 국가안보가 위태롭게 될 것이며, 복지 포퓰리즘 탓에 나라 곳간이 금세 절단 날 것이라는 보수적 프레임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논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는 보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야유하고 조롱하고 힐난하며, 분노와 증오의 언어로 공격해대기도 한다. 이러니 가난한 보수에게 진보는 잘난 체하는 지식인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진보는 선악의 이분법 구조나 흑백논리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안티 5060운동에 나설게 아니라, 그들과 만나고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수십 년 간 국민 대중을 지배해온 보수의 감성적 언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5년 후도 기약하기 어렵다.



고재학 경제부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2/h20121230195932118700.htm



Posted by 겟업
2013. 4. 4. 15:21

풀을 뜯어 먹다 죽은 어린 소녀의 시신, 길가에 널브러진 시체를 뜯어먹는 개, 쌀 한 줌에 몸을 팔아야 하는 여인의 울부짖음…. 중국 펑사오강(馮小剛) 감독의 영화 ‘一九四二(1942)’의 장면들이다. 1942년 발생한 허난(河南)성 대기근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2012년의 끝자락, 중국 지식인들은 1942년이라는 과거 굴레에 빠져 고민하고 있다.

영화 상영 한 달, 중국 신문과 방송은 대기근의 진실을 쏟아내고 있다. 당시 허난성은 1년 이상 지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1000만 명은 유랑을 떠나야 했다. 가뭄으로 인한 천재(天災)였다지만, 사건을 키운 것은 인재였다. 국민당 관리들의 사건 축소 및 은폐, 금융권의 정부 지원금 갈취, 언론 탄압, 인민의 피를 빨던 친일파의 행각 등이 연일 언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대기근 논쟁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공산당 집권기인 1958년부터 시작돼 62까지 이어진 ‘1962년 대기근’이 그것이다. 1942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사였다. 1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게 정부 공식 발표지만, 전문가들은 전국적으로 3000만 명을 훨씬 초과할 것으로 분석한다. ‘인육을 거래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로 전해질 정도다.

1942년과는 달리 1962년 대기근은 인재의 요소가 컸다. 일본군의 침략도 없었고 가뭄도 심각하지 않았다. 정부 창고에는 곡식이 쌓여 있었고, 식량을 수출하기까지 했다. 인민일보 등 기관지는 ‘올해도 풍년’이라며 마오쩌둥(毛澤東)이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의 성과를 늘어놓았다. 그 사이 3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어야 했던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50년 전 내 할아버지·할머니가 굶어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공산당에 묻고 있다. 그러나 당은 말이 없다. 진실을 폭로한 서적은 여전히 출판 금지 목록에 올라 있고,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백서 한 권 없다. 지식인들은 기근의 이유를 안다. 무리한 공업화 추진, 관리들의 농업 생산량 허위보고, 농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 후커우(戶口)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의 솔직한 반성인 것이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취임 이후 높아지고 있는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와 맥을 같이 한다. 많은 지식인은 ‘2013년을 정치민주화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장첸판(張千帆) 베이징대 교수 등 지식인 71명이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한을 공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시 총서기 취임 이후 세 번째 공개 서한이다. 내년 시작될 시진핑 시기의 중국 정치가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영화 ‘1942’는 이 흐름을 보여주는 문화 코드였던 셈이다. 2013년의 문턱에 선 중국 지식인들은 지금 치열하게 ‘아듀! 1942’를 외치고 있다. 새 정치에 대한 갈구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301165&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4. 4. 15:20

12월 22일 수교 20주년을 맞은 한국과 베트남 양국 관계의 발전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수교 교섭에서 우리는 대국들 옆에 위치한 두 나라가 ‘소나무가 무성해지면 잣나무가 즐거워한다’는 고사성어를 협력의 키워드로 삼자고 제의하고 “악연(惡緣)이라도 유연(有緣)이 무연(無緣)보다 낫다”고 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측은 “우리는 현명한 민족이다. 과거에 집착해서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화답했다. 

1964년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철수를 피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베트남전쟁이 끝날 무렵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잃을 것은 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남북통일’이라고 지원을 요청한 사실이 베트남 파병의 전략적 의미를 웅변해 주었다. 

베트남 파병의 역사적 결단을 내리기 전날 밤 청와대 응접실에서 육영수 여사가 줄담배를 피우며 고뇌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따라다니면서 10번이나 재떨이를 옮겼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1996년 베트남을 공식 방문한 김수한 당시 국회의장이 도므어이 당서기장에게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하길래 그 일화를 언급했다고 한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은 우리 경제사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끈 현대, 한진 등 주요 기업이 베트남 현장에서 도약을 시작했다. 국민들의 의식도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적극적 정신으로 바뀌었다. 우물 안 개구리 한국인들이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다. 

통일 후 베트남은 국가 발전을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베트남은 문맹률이 낮고, 젊은 노동력을 가진 8000만 인구의 근면한 나라다. 1986년부터 도이머이 신경제정책으로 개혁·개방의 길을 택했다. 경공업은 물론이고 중공업과 첨단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이 나라는 한국의 개발 경험과 경제협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이에 한국 정부와 기업은 자신의 성취를 나누기 위해 적극 협력해 왔다. 

한국의 베트남 누적투자가 총 240억 달러이며 한국의 진출 기업에 취업하는 베트남인이 60만 명에 달한다. 베트남은 한국 정부의 최우선 개발원조대상국이다. 양국 간 무역액이 1992년 5억 달러에서 2011년 186억 달러로 37배 증가하였다. 베트남 체류 한국인이 13만 명이고, 한국 체류 베트남인이 11만 명에 달한다. 그중 시집온 베트남 여성이 4만7000명이다. 한국의 신생아 100명 중 2명이 베트남계다. 

중국을 둘러싼 15개국 중 한국과 베트남은 문화적 유사성이 강하다. 열사의 중동은 물론이고 극한의 시베리아에서도 일할 수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 한국인과 베트남인뿐이라고까지 한다. 양 국민은 수천 년간 독립을 유지해온 데 대해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13세기 쿠빌라이 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 당시 3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대규모 침공을 격퇴한 데 대해 높은 긍지를 지니고 있다.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던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대해 형제애와 같은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2009년부터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고 미래를 향한 협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양국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상생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개발협력의 성공적 모델을 만들 것이다. 장차 동아시아에 패권적 구조를 대체하는 지역협력체제가 이루어질 때, 두 나라는 역동성 있는 중견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한-베트남 수교 당시 아주국장)



http://news.donga.com/3/all/20121229/51914064/1



Posted by 겟업
2013. 4. 4. 15:20

얼마 전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을 만났을 때 그가 물었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나는 현충사를 떠올리며 "충남 아산 아니냐"고 했다. 그는 "그게 아니라 서울, 그것도 도심인 중구 인현동"이라고 했다. 을지로와 충무로 사이다. 그 뒤 나도 여러 사람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 아산이라고 답했고, 더러는 충무(통영), 아니면 모르겠다고 했다. 서울이라고 맞힌 이는 거의 없었다.

충무공은 1545년 3월 8일(음력) 한성 건천동에서 출생했다. 지금의 인현동1가 31-2 자리다. 그는 10대 중반에 아산 외가로 갔다가 22세에 돌아왔고, 이후 전시(戰時)를 제외한 생의 대부분을 한성에서 보냈다. 두 차례 백의종군을 결심한 곳도 한성이었다.

'서울 이순신'에 대한 흔적은 1985년 명보극장 앞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 李舜臣 生家址)'라고 쓴 표석이 사실상 전부다. 중구청이 7년 전부터 탄생일에 여기서 다례를 연다. 아산과 통영을 비롯해 그가 흔적을 남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하고 규모 큰 행사들이 치러지는 데 비하면 조촐하다. 서울은 600년 고도(古都)답게 숱한 인물이 태어났다. 청계천에서 남산 사이만 해도 허균·임경업·박팽년·윤선도·류성룡·한명회 등의 생가 위치가 확인된 상태다. 하지만 대부분 '죽은 기록'이다.

올해 한국에 온 외국인이 100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5년 동안 평균 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정부는 다음 목표를 2020년 2000만명으로 잡았다. 일본인의 꾸준한 증가, 경제성장에 힘입은 중국인의 급증, 한류(韓流) 인기를 감안하면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관광의 질(質)이다. 한국관광공사 조사를 보면 작년에 관광객의 80% 이상이 서울을 다녀갔다. 주요 방문지 1~3위는 명동(67%), 동대문시장(56%), 남대문시장(46%)이다. 주목적이 쇼핑과 식도락인 것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반면 우리가 외국에 가는 주목적은 자연경관과 명소 탐방이다. 셰익스피어, 에펠, 로미오와 줄리엣, 워싱턴과 링컨, 서태후 등 명소마다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 와서 사람 얘기를 듣고 감동하고 기억하는 외국인은 드물다. 내세울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발굴과 스토리텔링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한국 관광에서 쇼핑과 식도락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한류도 시들해지면 어떻게 될까.

관광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수익은 물론 국가 브랜드와 민족 자긍심 향상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려면 호텔 객실 증설만큼이나 새로운 관광자원 발굴이 시급하다. 특히 서울 도심에 숨은 역사문화 자원부터 개발할 필요가 있다. 중구를 예로 들면 충무공기념공원, 주자소박물관, 서소문성지 역사문화공원, 혜민서 기념광장 등 15가지 사업을 선정해 관광 명소화(化)를 추진하고 있지만 재원이 부족해 속도를 내기 힘겹다. 새 정부는 할 일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도 눈길을 주었으면 한다.



이충일 도시문제 전문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28/2012122802241.html



Posted by 겟업
2013. 4. 4. 15:18

역대 정권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학자→관료 교체가 반복돼
'모양새'가 '민원 처리력'에 밀려 새 경제 진용은 '실행력'이 중요
은행가·기업인도 잘 살펴봐야 국제금융에 정통한 보좌관 필수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한 지 넉 달도 안 돼 청와대 비서진을 개편했다. 쇠고기 광우병 괴담이 촛불 시위로 한창 번질 때였다.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던 김중수 현 한국은행 총재도 물러났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인 김 수석이 왜 쇠고기 파동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비서실장이던 류우익 현 통일부 장관과 함께 정치적 희생물이 됐다. 후임은 경제 관료 출신인 박병원 현 은행연합회 회장이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늘 이런 방식으로 바뀌었다. 김대중 정권 때는 경제학자 출신인 김태동 경제수석이 돌연 물러나고 경제 관료 출신인 강봉균씨(전 민주당 의원)가 들어섰다. 취임한 지 석 달이 채 되기 전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첫 경제수석에 경제학자인 박승 중앙대 교수를 영입했지만 10개월 만에 문희갑 경제기획원 차관(전 대구시장)으로 교체됐다. 김영삼 대통령도 초대 경제수석에는 박재윤 서울대 교수를 임명했다. 그러나 박 수석이 겉돌고 있다는 말이 나돌더니 경제 관료 출신인 한이헌 공정거래위원장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역대 대통령의 첫 번째 청와대 경제수석은 모두 경제학 교수나 연구원 출신이었다. 번듯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갖춘 인물들이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족한 경제 지식을 감싸줄 '학문적 병풍'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첫 경제수석은 언제나 단명(短命)했다. 박재윤 수석의 재임 20개월이 역대 정권의 초대 경제수석 중 최장수 기록이다. 그리고 그들의 후임은 관료 출신이 맡는 인사 패턴이 매번 반복됐다. 관료 집단에 거부감이 강했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청와대 정책실장 자리를 신설해 진보학자인 이정우 경북대 교수를 임명했다가 10개월 만에 관료 출신인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교체했다.

관료 출신 경제수석들은 대체로 권력자와 상대하는 처신술에 능숙하다. 자신이 권력자를 대신해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민첩하게 파악한다. 어떤 통로로 경제 부처나 재계에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해야 할지도 잘 안다. 경제학자 출신이 "그건 앞뒤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며 3단 논법으로 설명하려고 덤빌 때 공무원 출신은 "그건 경제 논리에 맞지는 않지만 한번 챙겨보겠습니다"며 골칫거리를 깔끔하게 해치운다. 경제 현안에 정치적 해법을 작동시키는 솜씨도 뛰어나다. 경제수석을 지낸 어느 인사는 '대통령 앞에서 할 말, 안 할 말을 잘 가리고 결정이 내려지면 물불 안 가리고 처리하는 능력'을 경제 관료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반면 경제학자 출신은 '눈치 9단'의 순발력을 가졌다고 해도 추진력 결핍증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최고 권력자나 실세(實勢)에 밉보인 기업을 적당히 세무조사로 주무르며 골탕을 먹일 줄 모른다. 대통령이 애정을 표시하는 단체에 예산을 늘려주며 체면을 살려주는 기본기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대개 눈치 없이 논리를 따지며 일 처리를 미적거리다 몇 달 만에 경제수석 자리에서 퇴출되고 만다.

역대 정권의 경제수석 인사를 통해 얻어진 진실은 간단하다. 대통령이 첫 경제수석으로 경제학자 출신을 선택하면 경제를 불황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보려고 작심했다는 뜻은 아니다. 대통령의 장식품으로서 모양새를 갖추려고 그런 인물을 선택했다고 보면 된다. 취임 후 몇 달 지나 권력층 내부에서 경제수석에 대한 불평이 커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사(人事)를 비롯한 실세들의 갖은 민원과 청탁을 경제수석이 순탄하게 처리하지 못한 죄가 훨씬 크게 작용한다.

인수위 명단이 공개되면 박근혜 정권의 경제정책을 맡거나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미칠 인물 후보군(群)이 떠오를 것이다. 그중 누구는 장관이 되고, 누구는 경제수석으로 기용될 것이다. 이들을 보면 한국 경제의 5년을 얼추 짐작할 만하다.

대통령은 계약기간 5년짜리 시한부 권력자다. 최고 권력자의 경제정책을 이끌어갈 진용은 모양새보다는 실행력을 기준으로 짜되 이론가는 주변에 배치하면 된다. 다만 행동력을 갖춘 집단은 경제 관료만 있는 게 아니라 은행가나 기업인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혹독한 외환 위기를 겪고서도 1년이 더 지난 2009년 12월이 돼서야 국제경제보좌관을 임명했다. 한국이 수출로 그토록 많은 흑자를 내더라도 외환 파동을 거치고 나면 한꺼번에 털어먹는다는 21세기 경제의 기본 이치를 알지 못했다. 외환 위기로 두 번 급소를 얻어맞은 나라는 다음번 금융 위기 때 가장 노리기 쉬운 사냥감이 된다. 국제금융에 정통한 전문가야말로 한국 대통령에게는 항상 곁에 둬야 할 필수품이 됐다.

송희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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