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인류에게 진실로 필요한 건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좋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작년 6월7일 일본 여성들 수십명이 총리 관저를 찾았다. 한동안 전면 정지 상태에 있던 원전의 재가동을 정부가 허가할 움직임을 보이자 항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후쿠시마 원전 부근에 삶터가 있는 어머니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눈물과 분노로써 묘사하고, 이 참극에도 원자력을 단념하지 않는 정부의 자세를 격렬히 규탄했다. 한 어머니는 “우리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역사가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역사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비통하게 말했다.생각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서 원자력 기술의 개발과 응용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근대적 기술에는 근원적인 폭력성 혹은 파괴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실제로 거의 모든 근대적 기술이 인간생활에 혜택을 주는 만큼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흔히 혜택은 단기적이고, 피해는 장기간 지속되게 마련이다.근대적 기술의 이 근본적 한계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간단히 답하면,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서구 근대의 ‘과학적 이성’이라는 것이 “모든 자연은 계산을 통해서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자폐적이고 근시안적인 자연관 위에 구축돼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는 부분적·단기적으로는 합리적이되 전체적·장기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어왔다.그러한 사고의 극단적인 산물이 원자력 기술이다. 원자력 기술은 방대한 전력생산 기술로서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핵폐기물 처리를 비롯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생태적 비용은 인류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 핵심적 비용에는 물론 생물체에 대한 치명적인 손상이라는 문제가 있다. 지구 탄생 이후 최초의 원시 생명이 출현하기까지 10억~20억년이 경과해야 했던 것은 방사능이 제거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방사능은 지구 생물체와 절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생물학자 허먼 조지프 멀러는 일찍이 ‘방사선과 유전’(1964)이라는 논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빈번한 핵실험에 의한 대기 중 방사능 증가로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이 축소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멀러의 이 경고가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핵실험 이외에 420기가 넘는 상업용 원자로, 그리고 스리마일·체르노빌·후쿠시마에서의 핵사고로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이 심각히 오염되었다. 게다가 작년 5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가 발표한 연구에 의하면, 세계의 원전에서 중대사고가 터질 확률은 10~20년 만에 한번이다. 만약 이 연구가 옳고, 원자력 시스템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앞으로 100년 안에 북반구 전역은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한, 광대한 방사능 오염지대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원자력이란, 군사용이든 민생용이든, 이 지상에서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될 기술이다. 세계적 반핵활동가 헬렌 칼디콧의 말이 아니더라도, 원자력의 근간에 있는 것은 ‘광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정치가·관료·경제인·과학자·언론인은 한사코 원자력을 장려·옹호해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원자력이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널리 유포된 거짓말을 그들이 믿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원전의 건설과 유지, 폐기를 모두 고려한다면 원자력의 경제성이란 완전히 허구임이 이미 명확해졌다. 그런데도 원전에 집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전 비즈니스를 둘러싼 강고한 기득권 체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오늘날 자본주의체제에서 절박한 것은 단기적인 이윤추구이지 생명과 자연의 보호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결합돼 있는 산업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생명의 논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번 대선 후보들의 세 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 원전을 포함한 환경문제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근대국가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전개돼온 정치체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장·확대에 불가결한 기술혁신을 위한 테크놀로지는 자본과 국가 모두에게 요긴한 존재이다. 설령 그 기술의 궁극적 결과가 세계의 파괴일지라도 단기적인 이익에 골몰한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핵폐기물 처리와 같은 것은 자신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원전을 옹호·지지하는 자들의 근본적인 정신구조다. 사실상 오늘날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정치와 경제, 법질서 전체가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계’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돌이켜보면,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지금까지 일본이 지향해온 것은 서구 근대문명을 단시간에 모방하여, 자신도 세계 열강의 일원이 되기 위한 대국주의(결국은 제국주의) 노선이었다. 그 길을 따라 정신없이 달린 끝에 전쟁 참패라는 좌절을 겪었으나 다시 전후의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그러나 후쿠시마 사태는 대국이 되고자 하는 꿈의 허망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후쿠시마 이후 널리 공개된 사실이지만, 지진의 나라 일본에 54기의 원전 건설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 전개된 데에는 단순한 전력 확보 이외에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잠재능력을 보유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발언력을 높이려는”(기시 노부스케) 것이었다.군국주의를 통한 제국 건설의 꿈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경제대국 일본은 후쿠시마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애당초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토대를 둔 경제발전과 대국 지향 노선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다. 후쿠시마 사태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원자력이라는 광기의 기술에 의존하는 정치·경제 체제의 필연적인 붕괴를 상징하는 파국적 재앙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물론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모든 근대국가, 서구 근대문명을 무반성적으로 모방해온 모든 신흥 산업국가의 공통한 운명이다. 이것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후쿠시마 핵사고는 스리마일이나 체르노빌 핵사고와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 차이의 배경은 후쿠시마 핵사고가 경제성장 시대의 종말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이후에도 맹목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경제성장을 위해서 원자력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작태임이 확실하다.지금 인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실로 ‘좋은 삶’ 혹은 ‘좋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좋은 사회’란 무엇보다 안심하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여야 한다. 그러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도 존재한다. 그중 빠뜨릴 수 없는 나라는 물론 독일이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독일이 원전의 단계적 폐기를 거국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이뤄진 탈핵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간소한 생활양식을 추구하고, 활발한 대안에너지 개발 등 진지하게 미래에 대비해온 국민적·국가적 차원의 지혜와 합리성이었다.그러나 동아시아의 상황은 아직 절망적이다. 원전 강국이라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재앙을 직접 겪은 일본 정부도 별로 나을 게 없다. 후쿠시마의 어머니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쓴 탄원서를 접수한 바로 다음날 노다(野田) 당시 총리는 오이(大飯) 원전의 재개를 결정했다. 시급한 것은 동아시아 주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궐기이다.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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