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수교 20주년을 맞은 한국과 베트남 양국 관계의 발전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수교 교섭에서 우리는 대국들 옆에 위치한 두 나라가 ‘소나무가 무성해지면 잣나무가 즐거워한다’는 고사성어를 협력의 키워드로 삼자고 제의하고 “악연(惡緣)이라도 유연(有緣)이 무연(無緣)보다 낫다”고 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측은 “우리는 현명한 민족이다. 과거에 집착해서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화답했다.
1964년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철수를 피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베트남전쟁이 끝날 무렵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잃을 것은 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남북통일’이라고 지원을 요청한 사실이 베트남 파병의 전략적 의미를 웅변해 주었다.
베트남 파병의 역사적 결단을 내리기 전날 밤 청와대 응접실에서 육영수 여사가 줄담배를 피우며 고뇌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따라다니면서 10번이나 재떨이를 옮겼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1996년 베트남을 공식 방문한 김수한 당시 국회의장이 도므어이 당서기장에게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하길래 그 일화를 언급했다고 한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은 우리 경제사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끈 현대, 한진 등 주요 기업이 베트남 현장에서 도약을 시작했다. 국민들의 의식도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적극적 정신으로 바뀌었다. 우물 안 개구리 한국인들이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다.
통일 후 베트남은 국가 발전을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베트남은 문맹률이 낮고, 젊은 노동력을 가진 8000만 인구의 근면한 나라다. 1986년부터 도이머이 신경제정책으로 개혁·개방의 길을 택했다. 경공업은 물론이고 중공업과 첨단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이 나라는 한국의 개발 경험과 경제협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이에 한국 정부와 기업은 자신의 성취를 나누기 위해 적극 협력해 왔다.
한국의 베트남 누적투자가 총 240억 달러이며 한국의 진출 기업에 취업하는 베트남인이 60만 명에 달한다. 베트남은 한국 정부의 최우선 개발원조대상국이다. 양국 간 무역액이 1992년 5억 달러에서 2011년 186억 달러로 37배 증가하였다. 베트남 체류 한국인이 13만 명이고, 한국 체류 베트남인이 11만 명에 달한다. 그중 시집온 베트남 여성이 4만7000명이다. 한국의 신생아 100명 중 2명이 베트남계다.
중국을 둘러싼 15개국 중 한국과 베트남은 문화적 유사성이 강하다. 열사의 중동은 물론이고 극한의 시베리아에서도 일할 수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 한국인과 베트남인뿐이라고까지 한다. 양 국민은 수천 년간 독립을 유지해온 데 대해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13세기 쿠빌라이 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 당시 3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대규모 침공을 격퇴한 데 대해 높은 긍지를 지니고 있다.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던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대해 형제애와 같은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2009년부터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고 미래를 향한 협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양국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상생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개발협력의 성공적 모델을 만들 것이다. 장차 동아시아에 패권적 구조를 대체하는 지역협력체제가 이루어질 때, 두 나라는 역동성 있는 중견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한-베트남 수교 당시 아주국장)
http://news.donga.com/3/all/20121229/51914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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