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간 외국을 떠돌다 조국 터키로 돌아온 망명시인 '카'는 동쪽 끝 국경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소녀들의 잇단 자살 사건을 취재해 달라는 신문사의 요청을 받고 국경도시 카르스로 떠난다. 카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방문 소식을 다룬 한 지방신문 기사를 읽는다. 3일에 한 번씩 발행하는 이 신문은 "카가 극장에서 미발표작 시 '눈(雪)'을 낭송했다"고 그의 동정을 예측보도했다. 극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기사에 나온 시를 쓴 적도 없는 카는 어이없어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뒤 그는 신문이 예고한 대로 극장에서 '눈'을 낭독한다. 신문 발행인은 그것이 이 도시에 들어온 카에게 예정된 운명이라고 말한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 '눈'에 나오는 얘기다.
카가 겪은 이상한 경험은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지역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터키인들의 숙명을 상징한다. 터키에서 태어난 이상 그곳의 소녀들은 히잡을 벗으라는 서구식 학교의 교칙과 전통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이슬람 교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된다.
아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사정도 다를 게 없다. 우리에게도 대륙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한반도에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맞는 운명이 있다. 우리 문학도 그런 점을 주목했다. 이문열의 '변경', 최인훈의 '광장' 등이 이념의 충돌지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초상을 그렸다. '변경'은 아버지의 월북 이후 남한에 남겨진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비극적 과정을 그렸고, '광장'은 남과 북의 체제 어느 한쪽에 속할 것을 강요당한 젊은이의 고통을 다뤘다. 터키의 소녀들이 히잡을 벗을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고민했다면, 최인훈과 이문열의 소설에서 한국인은 남과 북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갈등했다. 6·25 전쟁 이후 지난 60년의 우리 역사는 한·미 동맹의 울타리 안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발전하는 길을 선택한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한국은 미·중 가운데 선택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새로운 운명을 맞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중국은 축전을 보내면서 "중국과 관계를 더 밀접하게 하는 것이 박 당선인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한·미 동맹의 틀을 깨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미 동맹 못지않게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요구다. 미국도 향후 한·미 동맹의 위상 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가 지난 10일 발표한 '글로벌 트렌드 2030'은 한국이 통일되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중국에 다가가는 '전략적 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머리에 북한을 이고 살아가는 우리로선 생존과 평화를 보장받고 장차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을 지키면서도 통일 후 한국이 중국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쪽으로 외교의 지평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김태훈 국제부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30/20121230012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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