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테리 존스 목사라고 합니다. 9·11에 대해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낮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평화가 깨졌다. 백발 스포츠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이 유명 극우 백인 목사는 광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9·11 테러를 '급진 이슬람의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우리는 '미국인'으로서 이슬람 공동체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설이 계속되면서 '급진 이슬람'이라던 그의 타깃은 어느새 슬쩍 이슬람 전체로 바뀌고 있었다. "이슬람은 억압의 종교, 거짓과 속임수의 종교, 폭력을 조장하는 종교입니다."
한 백인 여성이 듣다못해 "노(No)!"라고 소리쳤지만,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언을 이어갔다.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어울리는 광장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히잡을 쓴 한 무슬림 여성은 아이들의 손을 잡아끌고 도망치듯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찌푸린 표정으로 연설을 듣고 있던 한 백인 남성이 갑자기 노래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사의 연설과 남성의 노래가 허공에서 뒤섞였다. 노래는 비틀스의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All you need is love)이었다. 노래가 후렴구에 다다르자 남성이 소리쳤다.
"여긴 자유의 나라예요, 여러분. 다 함께 노래를 불러요!"
노래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늘어나는 듯싶더니, 이내 합창을 이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고, 광장을 짓눌렀던 '충돌'의 공포는 사라졌다. 저주(詛呪)의 연설은 노래에 묻혀 이제 들리지 않았다. 연설을 제지한 이들이 목사와 같은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이었기에 그 울림은 더욱 컸다.
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촬영했다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독자 코너에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 영상을 보면서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목소리를 높였던 수많은 '테리 존스'들이 떠올랐다. 한쪽에 투표하면 '반(反)대한민국 세력이고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려는 세력'이라고 말한 어느 '언론인', 다른 쪽에 투표하면 '독재자에게 열광하는 이웃'이라고 주장한 어느 '소설가'가 그들이다. 불행히도 그때 우리는 각자 자기 진영을 향해 "노"라고 외치지 않았다. 긍정의 노래로 저주를 덮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침묵하거나, 심지어는 SNS로 이러한 주장을 퍼 나르며 적개심과 분열을 키웠다. 용기가 없었거나 상대방을 찌르는 독설이 주는 쾌감을 즐긴 것이다.
그래 놓고 "너만 옳으냐" "말이 안 통한다"고 서로를 꾸짖었다. 헛된 소리다. 내가 옳으면 상대가 반대한민국·공산화 세력이 되고, 상대가 옳다면 내가 독재자에 열광하는 이웃·'꼰대'가 되는 상황에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정 '대통합'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침묵을 깨고 먼저 '우리 편'을 향해 용기 있게 외쳐야 한다. "노"라고. 필요한 건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장상진 뉴욕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31/2012123102106.html
'교양있는삶 > 사설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화문에서/천광암]용어설명: 웰에이징(well-aging) (0) | 2013.04.04 |
---|---|
[세상읽기] ‘한국 사례’ 전 세계가 주시한다 (0) | 2013.04.04 |
[사설] 통합과 창의로 아시아 시대를 주도하자 (0) | 2013.04.04 |
[조선데스크] 변경에서 살아남기 (0) | 2013.04.04 |
[특별 기고] 후쿠시마의 교훈과 ‘좋은 삶’ (0) | 2013.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