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4. 15:35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한방에 모아놓고 가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들려준다면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인은 ‘아내가 있다’, 일본인은 ‘불륜상대가 있다’는 뜻으로 노래제목을 이해할 것이다. 같은 한자문화권에서 ‘愛人(애인)’이라는 똑같은 한자를 놓고도 이처럼 뜻이 다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모든 번역은 오역(誤譯)”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 국민의 오랜 역사와 경험, 고유한 정서가 축적된 언어를 다른 나라말로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문화는 항상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이 순서가 뒤집어진 것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을 한 1868년부터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서는 철학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번역 붐이 일어난다. 한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지금 쓰는 현대 한자어의 상당 부분은 이 시기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개인, 신혼여행, 철학, 과학, 시간 등과 같은 한자어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 신조어들이다.

‘대번역시대’를 거치면서 급속한 서구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후 러시아를 꺾고 열강(列强) 대열에 합류한다. 그 후 100년 이상 유지된 한중일의 문화헤게모니 서열은 번역력(力)의 차이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번역력은 일본과 비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이다. 서양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로마 고전조차도 대개 일본어나 영어로 된 것을 재번역했다. 두 번의 ‘오역’을 거치다 보니 뜻이 잘 통하지 않거나 생경한 표현투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올해 74세의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는 ‘국보급’ 번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그리스-로마 원전 번역가다.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시절인 1990년대 중반부터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가 지금까지 번역해낸 그리스-로마 고전은 60여 종에 이른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헤로도토스의 역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이다.

대단한 점은 이 같은 역작의 절반이 그가 2004년 단국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 나왔다는 것이다.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천 교수는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 등산을 하는 것을 빼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택에서 번역작업을 하는 데 보낸다. 그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번역해내는 그리스-로마 원전의 분량은 1페이지에서 1페이지 반 정도. 매우 더디면서 인내심과 체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을 그에게 물어보니 “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1개월가량 번역작업을 쉰 적이 있는데, 마음도 불안해지고 건강도 오히려 나빠져 이후로는 절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됐다”는 것이었다.

한 인문학자는 그를 “정말 번역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순수한 분”이라고 평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인문학 연구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인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가 2년 전 천 교수에게 연구교수 직을 제안했다. 연 3600만 원씩 2년간 7200만 원을 지원받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천 교수는 “인문학 분야에는 어렵게 생활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으니 나 대신 그들을 지원하라”며 고사했다. “그럼, 행사에 잠시 와서 자리를 좀 빛내 달라”는 재단 측의 거듭된 요청에, 천 교수는 너무나 미안하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거기에 다녀올 시간이면 원전을 스무 줄 이상 번역할 수 있는데….”

‘웰에이징’은 멋지게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다.


천광암 경제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90018/1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