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신세를 많이 진 이웃의 초등학생 아이에게 물감을 선물하려고 문구점에 갔다. 제법 규모가 큰 문구점엔 물감의 종류가 꽤 다양했다. 미술 문외한인 기자에게 좋은 물감의 기준은 색상의 종류가 다양해서 값이 좀 나가는 것이다. 한국에선 대개 18가지나 24가지 색(色) 물감 세트를 산 기억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 문구점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물감은 10가지 색을 넘는 것이 없었다. 주인아저씨께 물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섞어서 색을 만들면 되잖아요. 어릴 때는 그게 더 좋아요." 물감을 사서 집에 와 보니 검정·파랑·노랑·초록 등 가장 기본적인 색 10가지만 들어 있었다. 하얀색 물감 튜브만 다른 것보다 컸는데, 색의 명도나 채도를 조절할 때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국에선 어릴 때부터 훨씬 다양한 종류의 색상으로 구성된 물감을 쓰는 경우가 많다. 녹색도 초록·진한 초록·연두·청록 등으로 세분화돼 있고, 파란색도 파랑·하늘색·군청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런 '맞춤식 색깔'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개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속 하늘을 색칠할 땐 무심코 '하늘색'이라는 이름의 물감만 사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은 십중팔구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하늘색'이라고 알던 그 색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를 프랑스 화단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화가에게 했더니 그는 "프랑스 아이들은 나무 하나를 그려도 그 형태와 색이 너무 다양해서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뭇가지는 갈색, 잎은 초록색으로 정형화된 한국 아이들의 그림과 달리 프랑스 아이들은 검은색 나뭇잎, 붉은색 나뭇가지, 거꾸로 선 듯한 나무둥치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아이는 그림도 학원에서 주입식으로 배워서 그런가 보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프랑스는 미술 분야에선 세계 최고다. 전문 화방(畵房)에 가면 수십 가지 색상으로 된 물감을 판다. 그런 프랑스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10가지 색 물감을 쓰도록 하는 이유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이 옷차림이다. 우리나라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 해엔 미니스커트, 어느 해엔 롱 부츠로 '복장 통일'을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패션의 도시'라고 하는 파리에는 이런 유행이라는 게 없다. 오히려 비슷한 스타일은 '촌스럽다'며 기를 쓰고 피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머플러 하나로 자신만의 멋을 내는 게 파리지앵들이다. 프랑스가 세계 명품 시장을 이끄는 것은 최신 유행을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적인 유행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품이란 결국 희소성이 중요한 가치일 것이고, 남과 다른 개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미술이나 패션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의 품격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개성과 독창성, 차별화 같은 가치가 좀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이성훈 파리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07/20130107027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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