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에 해당되는 글 1071건

  1. 2013.04.05 [세상읽기] 중국이 북핵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이유
  2. 2013.04.05 [동아광장/김병종]더 많은 ‘박 군수’를 만나고 싶다
  3. 2013.04.05 [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내 행복의 비밀, 남의 행복 인정하기
  4. 2013.04.05 [삶의 향기] ‘서울해법 ’이 뜨는 이유는
  5. 2013.04.05 [박해현의 문학산책] 작가 200번 초대해 밥 먹인 佛 미테랑
  6. 2013.04.05 [사설] '박근혜 敎育과 文化'가 다음 세대 나라 운명 결정한다
  7. 2013.04.05 [서소문 포럼] 일본제 사주기가 독도를 지킨다
  8. 2013.04.05 [조용헌 살롱] [875] 方外之士의 섬―제주도
  9. 2013.04.05 [강명구 칼럼] “그 사람 참 쿨하잖아”
  10. 2013.04.05 [@뉴스룸/김희균]10만원의 나비효과
  11. 2013.04.05 [고정애의 시시각각] 박근혜의 노란 봉투
  12. 2013.04.05 [야! 한국사회] 가난을 착각하다
  13. 2013.04.05 [야! 한국사회] 남자의 자존감과 연애
  14. 2013.04.05 마광수 "책장사라니… 수업교재도 안사는 요즘 대학생에 실망"
  15. 2013.04.05 [특파원 칼럼/배극인]나뭇잎 파는 마을
  16. 2013.04.05 [@뉴스룸/염희진]창조관광의 역할모델 온고푸드
  17. 2013.04.05 [횡설수설/김순덕]“노키아 몰락은 핀란드의 축복”
  18. 2013.04.05 [횡설수설/정성희]영국 무상의료의 그늘
  19. 2013.04.05 [기고/전택수]문화가 ‘창조경제’의 중심에 서야 한다
  20. 2013.04.05 [@뉴스룸/주성하]북한 언제까지 재입북 대우할까
2013. 4. 5. 14:10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다음달 초엔 중국에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린다. 두 나라 모두 민생(民生) 개선이 현안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안정된 외부 환경이다. 하나 민생을 개선할 능력도, 또 의지도 없는 북한이 잇따른 핵 협박으로 이 같은 한·중의 바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북핵(北核)을 막지 못한 지난 20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북한의 최대 후견국 중국에 대한 실망과 비난도 많이 나온다. 중국에 속았다는 말도 있고, 더 이상 중국을 믿지 말자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감정이 앞선 ‘중국 무용론(無用論)’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핵을 막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돼야 하며, 그 노력에 중국이 빠진다면 아무런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

현재 필요한 건 중국을 설득해 우리와 보조를 맞추도록 하는 일이다. 중국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현실적 사고를 하는 중국엔 보다 현실적 이해 문제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 중국이 말하는 중국의 ‘핵심이익(核心利益)’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은 지난달 28일 중국 수뇌부가 참여하는 정치국 집단학습을 열었다. 주제는 ‘평화발전의 길을 걷자’. 중화권 언론은 시진핑 시대의 외교 노선이 드러났다고 평했다. 시진핑은 이 자리에서 중국의 핵심이익을 확고하게 지켜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중국의 핵심이익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1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방중 시 미·중 공동성명에 실리면서다. 이 같은 중국의 핵심이익 운운이 관심을 끄는 건 이것이 침해를 받을 경우 중국이 무력 동원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중국의 핵심이익인가. 외교담당 국무위원인 다이빙궈(戴秉國)가 2010년 말에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중국의 국가체제, 정치체제 및 정치적 안정으로 여기엔 공산당 영도, 사회주의 제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이 포함된다. 둘째는 주권보호와 영토보전, 국가통일이다. 셋째는 중국 경제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첫 번째 핵심이익은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한 사회 안정이다. 따라서 다당제를 외치거나 서구식 민주화를 주장하는 재스민(茉莉花) 운동은 단속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핵심이익 중 주권보호 및 영토보전엔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釣魚島)의 영유권 문제, 또 티베트와 신장 등 소수민족 지역의 분리독립 움직임 문제 등이 포함된다. 대만 문제는 국가통일과 연계된 핵심이익이다.

북한 핵 개발은 바로 세 번째 핵심이익인 중국 경제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중국은 2002년부터 20년간을 ‘전략적 기회의 시기(戰略機遇期)’라고 말한다.

발전에만 매진할 경우 빠르면 시진핑 시기에 국내총생산액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수 있다. 1840년 아편전쟁 이래 끝 모를 추락을 거듭했던 중국이 마침내 180여 년 만에 세계 넘버 원의 자리를 탈환하는 것이다. 시진핑이 외치는 중국의 꿈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적어도 양적으로는 실현된다. 이 같은 중국의 꿈 달성을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 외부 환경은 절대적으로 안정돼야 한다. 중국이 이제까지 웬만한 북한의 불장난을 참아 왔던 이유다.

그러나 북한의 3차 핵실험, 그리고 이젠 핵을 실전배치 단계로 이어가려는 북한의 움직임은 중국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안정된 외부 환경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핵을 머리 위에 얹고 살아야 하는 한국이 안전을 위해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MD) 체제에 가입하겠다고 한다면 중국이 이를 무슨 말로 만류할 수 있나. 또 한국과 일본, 대만으로 이어지는 핵 도미노 현상이 꼭 불가(不可)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인가.

중국엔 악몽과도 같은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적 행동으로 옮겨지기는 힘들다고 중국은 판단할 것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중국이 꼭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다. 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당사자로선 어떻게든 자구책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이성적인 북한의 핵에 맞서야 하는 한국 및 주변국들의 자구책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됐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에 긴장을 고조시키면 시켰지 완화시킬 내용은 아니다.

이 경우 중국이 마음 놓고 ‘발전’에만 매진할 수 있을까. 중국이 사활(死活)을 걸고 지키려 하는 중국의 세 번째 핵심이익이 심대한 침범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제 중국은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과거 북핵의 위협이 현실화되지 않았기에 소극적 조치를 취해 왔다면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선 지금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중국의 꿈을 달성하겠다는 시간표를 멀리 뒤로 밀어놓든지, 아니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단호한 행동에 나설 것인지 중국의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사실 중국의 꿈은 경제력 같은 하드 파워에서만의 성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세계의 문명을 이끌 소프트 파워의 증진을 함께 뜻한다. 그런 중국이 북한의 핵 인질이 돼서는 안 된다. 중국은 북핵 해결의 중심 역할을 통해 국제 사회의 존경을 받는 리더가 돼야 한다.


유 상 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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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4. 5. 14:09

최근 박우량 전남 신안군수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신안군 프로젝트 중 문화예술부문과 관련해 내게 일종의 자문을 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신안군 자랑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신안군으로 말하자면 1000여 곳의 천혜의 아름다운 섬을 가진 곳으로….”

이 첫마디에 ‘이 양반 뻥이 좀 센 사람이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0여 곳의 섬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개 군이 섬 1000여 곳을 거느리고 있다면 그게 어디 군인가 제국이지 싶었던 것이다.(나중 알고 보니 박 군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1000곳 하고도 4곳이 더 있었다.) 

그는 그 섬 한 곳에 몇천 평 규모로 김환기 미술관을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색깔 있는 미술관을 몇 개 더 구상하고 싶다고 했는데 미술관 이야기는 그의 멀티프로젝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활화산처럼 신안 비전을 쏟아냈고 그 실천방안까지 조목조목 열거했다. 말이 자문이지 일방적으로 신안 홍보를 듣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치고 들어가 비슷한 사례일 것으로 짐작되는 일본 나오시마(直島)에 대해 설명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총괄한 나오시마 베네세 문화예술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고 있으니 참고해보라고 말하는데 “다 알고 있다”며 “나오시마 정도를 신안에 비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신안군의 1년 관광객이 이미 몇십만 명이어서 (이 또한 설마 싶은 대목이었다.) 나오시마의 관광객을 추월했고 이뿐만 아니라 그만큼의 돈을 쏟아부은 이윤이 그 정도라면 자신은 그것을 흑자 경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사로이 이윤이니 경영이니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경영자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거 무슨 군정을 회사경영처럼 생각하느냐고 말하려는데 동석한 한 지인이 나를 쿡 찌르며 최근 박 군수가 CEO들이 받는 무슨 상을 받은 바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다만 우리가 나오시마에 꿀리는 것은…” 갑자기 박 군수의 목청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안도 같은 건축가에게 작품을 맡기기 어려운 현실적 여건이라는 것이었다. 자금도 그렇지만 크고 작은 모든 공사에 공개입찰을 해야 하는 감시와 불신의 시스템 속에서 안도의 나오시마 같은 총괄적 건축미학을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고질적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데 문제는 교수님들 같은 분이 입을 닫아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뜻밖에 화살은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다시 슬로시티 얘기가 나와 영국의 코츠월드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는 한번 참관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불꽃 튀는 얘기를 주고받자니 그 맛있다는 목포 홍어 삼합에는 젓가락 갈 새도 없었는데, 그는 오후 9시쯤 “미안하지만 먼저 좀 일어나야 되겠다”고 했다. 아마 다음 약속이 잡혀있는 듯했다. 보나마나 거기 가서도 “신안은 1000여 곳의 아름다운 섬으로…”로 시작하여 속사포처럼 자랑을 쏟아놓을 것이다. 

박 군수의 이 일방적이고도 사뭇 무례하기까지 한 자리가 그래도 유쾌했던 것은 한 지자체장이 가진 열정과 비전, 그리고 자기 고장에 대한 강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5기를 넘기면서 희망적인 것은 부쩍 박 군수 같은 패기와 열정의 소유자를 자주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일례로 고동주 전 통영시장은 어떻게 하면 통영을 보다 아름답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고장을 만들지에 참으로 골몰한 사람이었다. 통영의 한 골목시장 횟집에서 그와 윤이상 음악제며 청마거리, 남망산 조각공원 등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명환경농업과 공룡축제로 일거에 고성의 존재감을 드높인 이학렬 경남 고성군수나 신안의 박 군수와는 정반대 스타일이지만 침착하고 조용하게 복합문화 장기비전을 펼쳐가는 이환주 남원시장.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 그래서 제1회 세라토닌 문화상을 수상한 조유행 하동군수도 인상적인 지자체장들이었다. 그리고 금산에 세계적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로 하여금 기념비적인 복합 문화회관을 짓게 하여 문화예술의 활기를 불어넣은 김행기 전 금산군수와 과천 문화예술축제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성장시킨 여인국 과천시장 또한 훌륭한 문화 리더들이다. 

광역 지자체장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였다. 특히 경기도 문화의 전당을 모체로 해 모세혈관 문화운동 등 신선한 운동을 펼쳤는데 문화예술의 거의 전 영역에서 전문가를 뺨치는 식견과 추진력을 갖춘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 땅은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이 이어가며 삶을 담아가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 지자체장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이 점을 인식하여 살기 좋은 곳, 아름다운 곳, 문화예술이 들꽃처럼 만발하는 곳으로 만들기에 열성을 다한다면…’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그래서 떠난 사람들마저 돌아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주면 오죽 좋을까.


김병종 서울대 교수·화가



http://news.donga.com/3/all/20130226/53301503/1


Posted by 겟업
2013. 4. 5. 14:08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작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할 때가 있다. 연구를 스스로 해본다는 기쁨에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임하지만, 곧 할 일이 많다는 것에 압도된다. 학생은 강의도 들어야 하고 시험도 봐야 하기에 진척이 느릴 때가 많다. 자주 진행 상황을 물어보기도 하고, 조력자도 붙여 주고, 조언도 하지만 잘 진행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답답해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필자가 30대 때만 해도 끝까지 기다려 주지 못하고 중간에 개입했다. 그러면 얼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논문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에너지가 30대만 하지 못하기도 하고, 더 중요하게는 조금 완성도가 낮게, 더 오래 걸려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작으나마 하나를 자기 힘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학생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고, 기억에 남는 일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비록 한숨은 나오지만 기다리면서, 되도록 보이지 않게 돕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작은 행복을 인정하는 법을 연습하게 된 것이다. 

남의 행복을 인정하기란, 그것도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의 행복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몇 해 전,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인간의 감정을 탐구한 재미있는 연구가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내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불운한 일을 겪었을 때 드는 오묘한 기쁜 감정이 바로 ‘샤덴프로이데’이다. 

연구에서는 피험자에게 자신이 열등감을 느낄 만한 아주 잘나가는 인물을 제시하고, 이 인물에게 불운한 일이 일어났을 때 느낀 감정을 평가하고 동시에 기능성 뇌자기공명영상을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과 함께, 뇌의 보상회로가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보상회로는 마약 등을 복용하였을 때에 쾌락의 감정과 함께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이다. 아마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궁금한 내용이었기에 최고 저널인 사이언스에 실렸을 것이다. 

이 연구는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가 가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답을 일부 제공한다. SNS에서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사람은 없다. 한 환자가 얘기해 준 사례가 있다. ‘강남구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명절을 맞아 가기가 싫다. 가면 같이 골프 치러 가야 하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 주시겠다고 불편하게 하신다’라는 글을 올린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환자는 이 멘션을 읽으면서 명절에 시댁에서 설거지만 하루 종일 할 자신을 생각하며 갑자기 우울해졌다고 한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시어머니가 본인의 집안을 무시하는 것 같아 항상 마음이 불편한 며느리일 개연성이 있지만 SNS에서 이런 어두운 면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SNS에는 이런 유의 잘난 글들이 많다. 

‘행복하다’는 남의 글들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우울해질까?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까지는 착한 남편, 말 잘 듣는 아들을 보면서 행복했는데, 친구가 한 부분에서 나보다 더 행복하면, 마치 내 행복이 줄어드는 듯 생각돼서일 것이다. 

SNS 때문에 우울하다는 환자에게 SNS를 모두 탈퇴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돌아볼 시간, 자기 자신의 행복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계수해 볼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렇다면 SNS에 행복한 모습을 끊임없이 올리는 사람은 좀 나은 처지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가끔은 모두가 볼 수 있는 인터넷에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보이는 행동은 일종의 노출증은 아닐까 생각하게도 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노출을 하는가? 자기 자신 그대로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일종의 ‘비준’을 해 주어야 비로소 나 자신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서이다. 

이런 성격 특성의 극단적인 예가 ‘연극성 인격 장애(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이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왜 한국에만 들어오면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늘어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남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풍토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의 행복과 내 행복, 남의 성취와 내 성취를 비교해 내 것이 더 커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즉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고 항상 어느 누구는 우울하고 불행해야만 하는 구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의 행복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으면 나를 나 자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가 더 똑똑하지 못하고, 내가 더 돈이 많지 못하고, 내가 더 권력이 있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옆의 넓은 경작지가 남의 것인들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내 몇 평 안 되는 밭을 일구는 것을 뜻한다. 

남의 행복을 인정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내 영향력을 넓히고, 내 성취를 더 높게 하는 데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작은 빵집 주인의 작은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대기업에서 제빵 사업에서 철수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의 행복을 인정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다른 이의 행복을 더 키우려고 노력한다면 신기하게도 내 행복이 커질 때가 많다. 

몇 해 전에 위에서 말한 샤덴프로이데 논문이 실린 같은 저널에 다른 논문이 하나 실렸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만큼 행복감에 중요한 것이,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라는 논문이다. 미국 인구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대상군을 평가했을 때에, 번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이 쓰면 쓸수록 행복감이 높아졌다. 유아들조차 다른 이에게 맛있는 과자를 주었을 때, 자기가 받을 때보다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록펠러는 50대 중반에 앞으로 1년 이상은 더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다 병원에서 벽에 걸려 있는 글귀를 보았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라는 것이다. 평범한 글이지만 그의 뇌리에 박혔다. 이 글을 보고서는 입원비가 없어 울고 있는 사람의 입원비를 비밀리에 대신 내주었고, 그때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록펠러는 이후 많은 자선사업을 했고, 의사들의 말과는 다르게 90세 이상이 되기까지 장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아침 신문에 실린 이 글을 보면서 “가장 가까운 이의 행복이나 보장하라”라고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건강의학과 의사



http://news.donga.com/3/all/20130226/53301658/1

Posted by 겟업
2013. 4. 5. 14:07

내가 가르치는 서울시립대학에서 1년을 지내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 네덜란드 건축가가 그곳에서 책을 냈다. 네덜란드는 현재 세계 건축의 흐름을 주도하는 나라다. 책 제목은 서울(Seoul)과 해법(Solution)을 합성한 ‘서울해법(Seoulutions)’이다. 한 손에 잡히는 포켓북이지만 네덜란드 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스위스 건축대학에 초청을 받아 특강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토박이처럼 살았다. 북촌 언덕배기 연립주택에 자리를 잡고, 어린 아들을 동네 유치원에 보냈다. 착실한 준비와 부지런한 발품 덕분에 서울을 누구보다 빨리 읽어냈다.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한 책을 숙독하고 도착하자마자 중고 스쿠터를 사서 몰고 다녔다. 청량리 밖 우리 대학은 물론이고, 서울 사람들도 가보지 않는 외곽의 공장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늘 메고 다니는 큼직한 가방에는 지도와 노트가 들어 있었다.

그런 그를 강하게 끌어당긴 곳은 저층 주택과 상업공간이 얽힌 홍대 앞이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이름난 건축가들의 작품, 궁궐과 한옥이 어우러진 북촌, 초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즐비한 테헤란로가 아니었다. 앞마당에 치과의원을 덧댄 단독주택, 다가구·다세대 주택 1층 주차장을 채운 카페, 주택을 개조한 상점 위에 사무실과 텃밭을 올린 복합건물, 기찻길 옆 시장 위에 들어선 예술가 스튜디오 등등이 그의 관심사였다. 어찌 보면 재미있고 어찌 보면 혼란스러운 풍경이다. 이러한 서울의 독특한 건축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형화했다.

왜 이 건축가는 이론과 비평의 언저리에 있는 일상적 풍경에 주목하는 것일까.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서양의 근대도시처럼 질서 정연하게 바꿀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유럽 도시에서 찾기 어려운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이곳에서 느꼈다. 건폐율, 용적률, 건축선, 사선 제한과 같은 법 규정을 적용하면 서울에서 최대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의 범위가 나온다. 들쑥날쑥하게 생긴 이 외곽선을 ‘실루엣’이라 부르고, 이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그는 주목했다. 최고 수익을 얻기 위해 합법과 편법 사이를 줄타기하는 이런 ‘기지(機智)의 건축’은 그들의 교과서에 없다. 우리는 이런 역동성을 정비(整備)의 대상으로 믿어왔다. 그래서 우리들은 도시 관리의 선진 사례를 배우러 유럽을 부지런히 다녀왔다.

유럽의 도시·건축법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서는 꽃집을 카페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와 달리 지역지구제(zoning)를 지역이 아니라 필지 하나하나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붕 모양, 색상, 재료, 창문 크기까지 지정한다. 이런 제도에서는 도시의 역사성을 보존할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실험하기는 어렵다. 최종 결정권을 쥔 정치인은 민원이 두려워 규정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해법’을 내놓으며 이 건축가는 네덜란드 도시·건축제도의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선진 도시라고 믿었던 암스테르담의 건축가가 서울을 배우자고 하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서울해법’에서 다룬 홍대 앞은 근대화·도시화 과정에서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된 단독주택지다. 이 사업은 비뚤비뚤한 민간 필지를 곧게 펴는 대신 땅을 조금씩 떼어 길과 공원을 만드는 도시계획 방식이다. 1930년대 말부터 이 사업으로 조성한 지역은 서울 도시화 면적의 40%에 육박한다. 이제 이곳의 저층 주택들은 노후화되고 있어 20여 년 이내에 대부분 정비의 대상이 된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새로운 ‘서울해법’이 필요한 때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베버(1864~1920)는 저서 『도시(The City)』에서 아시아에는 진정한 의미의 도시는 없었다라고 단언했다. 우월감에 눈먼 단견이다. 현재 세계 30대 거대 광역도시 중 16개가 아시아에 있다. 요즈음 유럽의 건축가와 도시 계획가들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유다. 베버가 살아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중에서도 서울은 잠재력이 큰 도시다.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때론 밖으로 물러나면 잘 보인다. ‘서울해법’이 그렇다.


김 성 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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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4. 5. 14:06

관저서 작가와 대화 즐긴 대통령 작가 집도 남몰래 종종 찾아가
점심 식사 하면서 주로 얘기 들어… 허리띠 푼 채로 문학 토론하고
민심 듣고 새 아이디어도 얻어… 세속 이득 무관한 문화적 윤활유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 전 프랑스 대통령의 딸 마자린 팽조는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미테랑이 여비서와의 혼외정사로 낳아 오랫동안 숨겨뒀던 딸이다. 팽조는 미테랑 재임 중에 '국가 기밀'로 분류돼 숨어 살았지만, 언론의 추적 보도로 스무 살에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는 1998년 스물네 살에 장편 '첫 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2002년 팽조를 파리의 쥘리아르 출판사에서 만난 적이 있다. "왜 소설을 쓰기로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미테랑의 딸이란 사실 때문에 타인들 앞에서 내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며 입을 열었다. "내면 속으로 퇴각해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벽을 쌓은 채 소설을 쓰는 것에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소설책 앞 장에 '아버지에게'란 헌사(獻辭)를 붙인 까닭을 물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문학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준 이에게 첫 작품을 바치는 법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스탕달·졸라를 좋아했던 아버지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미테랑은 젊은 시절에 시와 소설을 썼던 문학 청년이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미테랑의 외교 보좌관은 그를 가리켜 '읽으면서 인생을 보낸 사람'이라고 했다. 미테랑은 '글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년필에 푸른색 잉크를 담아 원고 쓰기를 좋아했다. 미테랑은 1960년대부터 1981년 대통령 당선 때까지의 정치 생활을 담은 책 '정치학'을 비롯해 서른 권을 펴낸 저술가였다.

미테랑의 딸 팽조에게 14년 동안 집권한 아버지의 업적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유럽 통합, 사형제 폐지, 사회개혁' 등을 꼽더니 '루브르 박물관 개보수와 국립도서관 건립 같은 문화적 역사(役事)'라고 답했다. 미테랑에겐 늘 '문화 대통령'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생전에 그는 "모든 도시에 가면 나는 황제 혹은 건축가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금을 긋고 결정하고 (새 건물을) 심는다"라고 말했다.

미테랑은 '문화 대통령'이기에 앞서 '문학 대통령'이었다. 그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으로 불러 같이 밥 먹기를 좋아했다. 그는 민가(民家)에서 쓰던 식탁을 엘리제궁으로 가져와 마치 자기 집으로 초대한 양 작가들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내에 소설 '연인'으로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다. '누보 로망'이라는 실험소설 운동을 이끈 뒤라스는 미테랑과 함께 독일군 점령기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기에 막역한 사이였다.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을 좋아했던 미테랑은 뒤라스 소설이 취향에 맞진 않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문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모은 책도 나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미테랑이 좋아한 다른 작가는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로 이름을 떨친 프랑수아즈 사강이었다. 미테랑보다 열아홉 살이나 어렸던 사강은 기존 관습과 권위에 저항하는 젊은 세대의 감각을 대변한 작가였다. 미테랑은 사강을 '매력적인 작은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발칙함과 도발성을 존중했다. 사강은 아버지뻘 되는 미테랑을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남자'라고 회상했다.

미테랑이 퇴임한 뒤 측근들이 정리해 보니 그가 재임 중 작가와 지식인을 식사에 초대한 횟수가 200번이 넘었다고 한다. 미테랑이 개인적으로 몰래 만난 경우는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미테랑은 엘리제궁에서만 작가를 만난 게 아니었다. 종종 작가의 집을 직접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국내엔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도 미테랑이 존경한 작가였다. 투르니에는 파리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생 레미 슈브류즈에 있는 중세의 수도원을 개조한 집에서 살았다. 미테랑은 그곳까지 가서 홀로 사는 작가가 구워주는 스테이크를 맛있게 비웠다.

미테랑이 작가의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늘 밥맛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 시오랑이 늙고 병들었을 때 미테랑이 그 집을 찾아가 식사한 적이 있다. 시오랑이 미테랑에게 불편한 소리를 자꾸 해서 분위기가 어색했다고 한다.

아무튼 미테랑은 작가를 만나선 주로 듣는 편이었다. 대화 주제도 허리띠 풀고서 거론할 만한 인생과 사랑, 문학과 역사에 집중됐다. 하지만 측근을 통해선 들을 수 없는 민심의 동향을 알게 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미테랑이 나눈 작가와의 밥 한 끼는 뒤끝을 남기지 않았기에 오래 계속됐다. 미테랑과 함께 밥을 먹은 작가들이 세속적으로 이득을 본 게 없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문학을 즐겼고, 작가들은 대통령에게 문학의 즐거움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 생각의 윤활유를 제공했다.

미테랑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생활을 즐기면서 그런 만남을 바탕으로 문화 정책을 세우고 실천해 문화 대통령이 됐다. '아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게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게 낫다'고 공자가 말했다. 문화 대통령이 되는 데도 정도(正道)로 삼을 만한 말이다.


박해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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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13:55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취임사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국민과 함께 경제 부흥, 국민 행복, 문화 융성을 통해 희망의 새 시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위대한 도전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창조 경제를 통해 경제 부흥을 이루겠다"면서 "창조 경제는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의 상당 부분을 교육과 문화에 할애해 가며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교육과 문화 부문의 창달(暢達)에서 찾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박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모든 학생의 잠재력을 찾아내는 일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면서 "희망의 새 시대를 여는 일은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21세기는 문화가 국력인 시대이며 국민 개개인의 상상력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인종과 언어, 이념과 관습을 넘어 세계가 하나 되는 문화, 인류 평화 발전에 기여하고 기쁨을 나누는 문화, 새 시대의 삶을 바꾸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했다.

교육은 미래를 여는 열쇠다. 교육은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그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 주인이다. 세계 각국을 석유·석탄·철광석·희귀금속 등 천연자원의 부존량(賦存量) 순서대로 배치해보면 세계 각국의 선진화 서열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비례(逆比例) 관계가 눈에 띈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일수록 국민 간에 부(富)가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자유는 억압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이다. 세계의 선진화 서열은 그 나라의 교육 수준, 그 교육이 배출한 국민의 역량(力量)과 비례관계에 있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짜 강국(强國), 진짜 선진국은 교육이 앞선 나라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21세기 국가 전략은 교육 혁신으로 모이고 있다.

미국·영국 같은 나라는 경쟁 교육 체제 속에서 뒤처진 학생들의 학력을 어떻게 끌어올리느냐를 과제로 삼고 있고, 복지 선진국 북유럽국은 전인적(全人的) 교육 체제 아래서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를 어떻게 길러내느냐를 고심한다. 나라마다 처한 환경과 여건이 모두 달라 정답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지식 습득을 중시하는 한국 교육이 그동안 큰 성과를 냈고 세계 많은 나라가 한국 교육을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전쟁의 폐해를 딛고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데는 교육의 힘이 컸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초등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한 지 10년 만에 초등학교 취학률이 50%에서 95%로 사실상 완전 취학이 이뤄졌다. 같은 기간 문맹률이 80%에서 20%로 떨어졌고 대학생 숫자는 8000명에서 10만명으로 12배가량 늘었다. 이 대통령의 집권 기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유학생이 4800여명, 단기 연수 기술 훈련생이 2300명, 군 장교와 하사관이 1만명이다. 이 대통령이 1950년대 구축한 교육 인프라를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1970년대의 고속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2010년대 대한민국 교육의 모습은 2030년대 이후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20년 후, 30년 후 나라 청사진에 맞춰 교육 철학과 목표, 방법론을 재정비해야 한다. 산업화 시대엔 중등교육의 대중화를 통해 산업 현장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국가 경제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키우려면 학교에선 획일적인 교과 교육을 벗어나 학생의 소질과 적성을 찾아내는 교육을 하고 사회에선 학벌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풍토를 다져야 한다.

문화는 수원지(水源地)와 같다. 수원지가 풍요로워야 논밭이 기름지고 온갖 곡식이 무럭무럭 자란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것은 경제력이나 군사력 같은 하드 파워가 월등해서만은 아니다. 팝송·영화·청바지 등 문화라는 소프트 파워가 뒷받침해준 덕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조선시대 세종 때나 영·정조 때처럼 문화가 약동하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을 때 나라도 안정되고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은 경제 면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범생 국가가 됐다. 수출과 수입이 엇비슷한 규모를 이루며 교역량이 1조달러를 넘어선 세계 여덟째 무역 대국이다. 그러나 문화 면에선 여전히 발신(發信) 규모가 수신(受信) 규모에 턱없이 못 미치는 '역조(逆調)' 상태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면서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나라의 교육 개혁과 문화 융성은 예산을 집중 지원하고 제도를 바꾼다고 대통령 임기 5년 안에 결실(結實)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기적인 성과를 위한 투자보다는 작은 묘목을 크고 튼튼한 나무로 키워낼 기름진 토양을 만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50년 후 장래를 결정지을 씨앗을 오늘 심는다는 마음으로 나라 교육과 문화의 토대를 다져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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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13:54

백년 전 일본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의 강치(바다사자의 일종)잡이 실력이 신통치 않았던 건 한·일 관계에선 큰 불행이었다.

나카이는 1904년 독도의 일본 편입을 요청, 분쟁의 씨를 뿌린 장본인이다. 그는 조선엔 전기도 없던 1885년 배 위 공기통과 연결한 헬멧을 쓰고 바닷속 해산물을 잡던 첨단 벤처사업가였다. 다만 강치 잡는 솜씨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독도에 널린 강치 사냥에 나섰다 다른 어부들에 밀려 수확이 변변치 않았다. 결국 그는 강치 천국 독도를 독점하기로 결심한다. 나카이는 당초 이 섬을 한국 땅으로 믿은 듯 조선에 독점허가를 신청하려 했다. 하나 소속이 불확실하단 걸 알곤 생각을 바꾼다. 섬을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뒤 독점하려 한 것이다. 그는 독도에 대한 영토편입 요청서를 일본 당국에 냈다. 일본 내각은 이를 승인한 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관보에 싣는다. 다케시마의 날이 2월 22일이 된 사연이다. 나카이가 강치만 잘 잡았다면 독도 분쟁은 없었을지 모른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대통령 취임식은 늘 다케시마의 날 사흘 뒤에 열려야 한다. 한국 대통령의 임기 시작은 2월 25일. 일본이 계속 다케시마의 날을 부각시키면 취임 직전부터 양국 간 정면충돌을 피할 길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출범한 아베 정권은 여러모로 한국의 신경을 건드려 왔다. 지난 22일엔 시마네현에서 열린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차관급을 파견, 양국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과거 한국은 일본을 운명적인 적국으로 여겨 왔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먼 나라와는 친교를 맺되 인접국은 친다”는 전략은 외교 철칙으로 존중됐다. 신라가 당과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역사부터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원칙대로면 일본은 결코 우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 인식도 변하는 법. 일본의 이미지도 배울 건 배우면서 따라잡아야 할 경쟁자로 변했다. 비슷한 경제 여건으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으레 일본 기업이었다. 이 탓에 일본의 불운이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한 적도 많았다. 지진으로 일본의 반도체·자동차 공장이 타격을 입으면 그 덕을 국내 기업이 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작금의 일본 침체는 과연 박수칠 일인가. 고소할진 몰라도 이문을 따지면 결코 환영할 일은 못 된다. 일본 경제의 부진이 한국의 수출에 나쁘다는 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일본이 건전한 ‘좋은 이웃(good neighbor)’으로 유지돼야 한국도 좋다는 거다. 중국산 생선에 치명적인 납덩이가 든 경우는 허다했다. 반면 일본산 식품에서 그런 문제가 있었단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철저한 위생을 중시하는 일본의 덕을 인접국인 한국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본이 경기침체로 병들면 그 해악은 한국에 미치게 된다. 제주평화연구원이 1990년부터 15년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일본 국내총생산이 커지면 한·일 간 마찰은 줄고, 실업률이 늘면 양국 간 갈등은 격해지는 걸로 나왔다. 내부 불만이 쌓이면 외국과의 갈등을 일으켜 지지도를 올리는 ‘관심전환이론(diversionary theory)’의 교과서적 케이스다. 그러니 일본 경제가 허덕일수록 극우파들이 기승을 부려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 핏대를 올릴 게 자명하다. 거세진 일본 내 우경화 바람도 이 나라가 궁핍해졌단 방증이다.

이뿐 아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 조사 결과 한국의 이미지가 중국·일본과 함께 움직이는 걸로 나왔다 한다. 베네룩스 3국, 스칸디나비아 3국 식으로 해외에선 한·중·일 세 나라를 한 통속으로 본단 뜻이다. 이런 탓에 ‘메이드 인 재팬’이 시시해지면 덩달아 한국산에 대한 인식도 나빠질 수밖에 없다.

요즘 일본의 침체와 한국의 도약이 맞물려 양국 관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와 있는 느낌이다. 이런 판에 일본이 독도·위안부 문제로 도발한다고 단세포적으로 맞불을 놓고 흥분할 일이 아니다. 길게 보면 불매운동 아닌 일본제 사주기가 독도 수호에 도움이 된다는 대승적 안목을 가질 때도 됐다.


남 정 호 글로벌협력 담당·순회특파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773196&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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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13:53

도망갈 데가 있어야 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생명을 보존하곤 하였다. 지리산은 인삼 빼고는 온갖 약초가 다 있는 산이다. 현재는 지리산 남쪽의 악양과 화개에 쪽에 귀촌(歸村)과 귀농(歸農) 인구가 모여든다. 하동군의 악양은 도시에서 살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산나물을 뜯고 섬진강에서는 은어도 잡을 수 있고, 동네 앞에는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는 천혜의 동천복지(洞天福地)가 악양이다. 악양에는 외지에서 유입된 가구만 해도 대략 300~400가구나 된다.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의 해방구가 지리산인 줄만 알았더니, 최근에 보니까 바다 건너 제주도가 신세대 방외지사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지리산은 정년퇴직한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탈출구라고 한다면, 제주도는 청년 세대와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제주도는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해방감과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조천면 '선흘'이라는 오래된 마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가 내려와 동네 가운데에 '세바'라는 카페를 차리면서 젊은이들의 명소가 되었다. 제주 시골의 토속과 클래식이 조화를 이룬다. 대안교육을 모색하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빵집인 '선흘반못'도 기운이 좋다. 이 동네에는 동백나무 숲인 곶자왈도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다. 유달리 바다 색깔이 푸르게 보이는 김녕의 월정리는 서울 홍대 앞에서 활동하던 인디밴드 멤버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모래사장과 인접한 지점에 스산하게 자리 잡은 카페가 '아일랜드 조르바'와 '고래가 될'이다. 낯선 이국의 어느 해변가에 떠돌이로 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표선면 가시리에는 외국 작가들도 많이 와 있다. 조각, 페인팅, 사진작가 등 다양하다. 가시리에서 숙박을 할 수 있는 '타시텔레'는 티베트·네팔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다. 현경면 저지리에는 화가, 연극, 디자인을 하는 예술인들이 많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기도 한 곳이다. 산방산 근처의 모슬포와 사계리도 글 쓰는 작가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도시에서 비전을 찾지 못한 젊은 세대와 예술가, 문화인, 명상가들이 제주로 '문화 이민 러시'를 이루고 있는 중이다.


조용헌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2/24/20130224011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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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13:52

21세기를 사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 청년들의 삶은 어떠할까. 그들은 어떤 희망과 고뇌를 안고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늘 마주하는 희망과 고뇌는 심리적 태도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21세기 청년세대들이 그리는 삶의 모습, 나란 주체의 모습은 근대화 초기와 달리 다양하고 다층적이다. 고도경제성장 이후 정체된 사회를 살고 있는 세대의 희망과 고뇌는 그들 부모 세대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지금 청년세대들이 처한 물질적 삶의 조건은, 현재도 힘들지만, 미래에는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일본 사회만 두고 볼 때 이들의 부모 세대인 50, 60대들은 잃을 것보다는 얻을 게 많은 삶을 살았다(less to lose, much to win). 반면 청년들은 자신의 부모들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 가능성이 희박하다(much to lose, less to win). 물론 그런 한국, 일본과 달리 현재 중국의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부모세대보다 더 유복한 생활을 누릴 것이다, 고도경제성장이 지속되는 한이라는 전제가 따르지만.(참고로 미국의 경우 남북전쟁 이후 1980년 레이건 집권 때까지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더 잘살았다.)

고도성장이 끝나고 거품경제를 통과한 작금의 일본에서 청년세대는 활력을 잃었다. 도전하고 꿈꾸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일본 어른 세대의 우려는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런 일본과 달리 한국의 청년들은 중진국 문턱에서 ‘헉헉’ 숨을 쉬며 상승이동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청년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않은 듯하다. 많은 젊은이가 오늘도 부자 되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활력이 부재한 일본,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한국, 부자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 믿는 중국. 이런 현실 조건 위에서 세 나라의 청년들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일본, 한국, 중국, 세 나라 청년세대가 공통적으로 내릴 만한 답은 “쿨한 사람” 정도가 아닐까 싶다. 중국은 ‘쿠’(酷)라고 음차해서 쓴다. “그 사람 참 쿨하다”라고 하면 칭찬이다. 인간관계에서 우선 끈끈함과는 거리를 두고, 떠날 때는 질척거리거나 미련을 두지 않는다. 행동거지로 보면 세련되고 나름의 멋을 중요시하고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이지 않다. 오히려 위악적일 때가 있다. “나를 해칠 권리는 나밖에 없다”라고 툭 내던지는 위악. 그건 특히 일본 젊은이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쿨하게 살려고 하는 젊은 세대는 성실, 열정, 도전 등 근대화 시기를 대표했던 상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육식남은 사절이다. 경쾌하지만 경박하지 않고자 하며, 허식과 위선을 미워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하고자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현실을 뛰어넘는 사랑과 같은 신파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 코믹 러브처럼 경쾌한 사랑이 좋다. 싫으면 떠나면 되니까. 부모세대가 가족주의 문화 안에서 살았다면, 이들은 무엇보다 ‘나’를 중심으로 살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은 “내 인생을 가족에게 바쳤다”라며 울먹이는 엄마에게 “엄마도 이젠 자기 삶을 살아~”라고 담담하게 위로한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쿨하게 살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혼자라서 외로워 보인다. 자신의 내면을 늘 들여다보면서 허위와 위선을 미워하고, 인간관계에서 깔끔하지만, 이들에게는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다. 일본 영화에서 서늘할 정도로 외로운 주인공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살면서 쿨하기는 어려운 걸까 싶다.

많은 것이 불확실하고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많은 사회적 조건에서, 동아시아 청년세대의 선택으로서 ‘쿨한 사람’은 타당하고 나름 아름다운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큰 희망은 아니지만 절망하지 않기 위한 경쾌한 선택으로서. 가끔씩 부모에게 기대고, 활력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 진정성을 갖춘 삶의 태도로서.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52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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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13:51

여기 2010년에 태어난 아이 셋이 있다. 한국 나이로는 4세, 정부의 무상보육 기준에 따르면 만 2세다. 

3월부터 전면 무상보육이 시작되니 이 아이들의 부모는 경제력과 상관없이 보육료나 양육수당을 매달 받는다. 어린이집에 보낸다면 기관으로 28만6000원을 지원하고, 집에서 키우면 부모 통장으로 현금 10만 원을 주는 식이다. 연령별로 다르지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면 12만∼19만 원 정도 이득이라 대다수 부모는 자녀를 기관에 보내려 한다. 

부자 아빠를 둔 덕에 월 110만 원짜리 영어유치원에 갈 예정인 A는 지난주 괌 여행을 다녀왔다. A의 엄마와 일명 조리원 동기(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2∼3주 머무는 동안 인연을 맺은 엄마끼리 이렇게 부른다)들이 “몇 푼 안 되지만 공돈이 생길 테니 아이한테 바람이나 쐬어주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다.

부모가 맞벌이라 어린이집이 절실한 B. 무상보육으로 어린이집 대기자가 넘치는 바람에 보육료 지원을 못 받는 사설 기관에 계속 다니게 됐다. B의 엄마는 “남들 다 받는 보육료 못 받고 생돈을 내려니 아깝다. 그나마 양육수당 10만 원이라도 받으니 도움이 된다”고 했다.

끼니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닌 이들에게 양육수당 10만 원이 미치는 영향은 그저 이 정도다. 그런데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저소득층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할머니, 엄마와 서울 변두리 월세방에 사는 C. 일주일 내내 같은 옷을 입을 정도로 집에서 돌보지 못한다. 할머니와 엄마 모두 돈을 버느라 생후 6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녔다. 얼마 전 엄마가 알코올 중독 상태가 되면서 일을 접는 바람에 월세 내기 빠듯할 지경이 됐다. 10만 원이 아쉬운 C의 할머니는 3월부터 손자를 집에 두기로 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딸과 함께.

C가 다니는 어린이집 교사의 말에 따르면 4세 반 17명 중 7명이 3월에 등록을 안 하기로 했다. 부모들이 대는 이유는 한결같이 “현금이 필요해서”라고 한다.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월 10만 원이 미치는 격차가 너무 커지는 순간이다.

정부는 3∼5세에게 표준화된 교육을 하기 위해 누리과정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영유아 단계부터 격차 없는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북유럽 국가들이 의무교육 연령을 낮추는 것도 영유아기의 작은 차이가 자랄수록 크게 벌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아직 우리나라는 무상보육 초창기라 지원 대상과 방식을 정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전문가들도 가정에 현금을 주는 방식은 안 된다거나 보육료와 양육수당을 똑같이 줘야 한다는 등 전혀 다른 해법을 내놓는 상황이다.

전문가가 아닌 필자로서는 솔직히 어떤 방식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10만 원 때문에 영유아 단계부터 교육 양극화가 심해질까 두렵고 안타깝다. 10만 원 때문에 집에서도, 기관에서도 이중으로 방치될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가 절실하다.

김희균 교육복지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30221/53183023/1

Posted by 겟업
2013. 4. 5. 13:50

2008년 1월 23일의 일이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선인 간 만남이 있었다. 박 당선인이 이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을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정작 현안은 공천 문제였다. 3개월 뒤가 총선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날 공정 공천 원칙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훗날 달리 전개됐지만 말이다.

여기까진 공개된 내용이다. 뒷얘기가 더 있다. 이른바 ‘노란 봉투’ 건이다. 박 당선인은 이날 이 대통령에게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유력 대선 주자지만 여당 소수파 리더인 사람이 대통령에게 노란 봉투를 건넨 건 처음이 아니었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때 YS도 그랬다. 당시 봉투 안엔 YS의 ‘자질 부족’을 다룬 정보보고서가 담겨 있었다. YS는 그걸 근거로 “나를 고사시키려는 거냐”고 노 대통령을 강하게 압박했었다.

박 당선인의 봉투엔 무엇이 있었을 것 같은가. 한 인사가 현 정부 말미까지 비보도를 전제로 전한 정황은 이랬다. “대통령이 곧바로 봉투를 참모들에게 넘겼다. 한 참모가 봉투를 뜯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거다. 다시 원상태로 해보더라. 도중에 누가 뜯어봤나 싶어서였다. 아니었다. 빈 봉투를 밀봉해서 준 거였다. 공천 명단이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대통령에게 빈 봉투를 들이민다? 쉽게 내기 어려운 계책이고 담력이었다. 이 대통령 쪽에선 박 당선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몰라 더 당황했었다.

박 당선인은 이렇듯 정치적 심리전에 강했다. 세밀한 부분까지 계산, 상대의 기를 통제하곤 했다. 한때 의원들과 ‘007 방식’으로 만난 것도 그중 한 예다. “어디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차가 대기 중이었고 그 차를 타고 가니 박 당선인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했다. 의원들에게 보안을 중시한다는 걸 알리면서 동시에 “나를 신경 써서 만난다”는 인상을 줬다.

뭐니뭐니해도 박 당선인이 즐긴 방식은 일단 공언하면 꿈쩍을 안 했다는 거다. 이른바 ‘원칙’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박 당선인과 150분간 대화한 뒤 벽을 마주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낀 사람, 그 후에도 많았다. 박 당선인은 여느 정치인과 달리 절충과 타협을 추구하지 않았다. 상대가 질릴 때까지 밀어붙였고 그래서 이기곤 했다. 참모들이 “싸우면 다 이긴다. 싸움의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찬탄할 정도였다.

분명한 건 그게 야당 대표 또는 사실상 야당 대표였던 여당 2인자 시절에나 통하는 ‘문법’이란 거다. 정치적 약자(弱者) 말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약자는 지분 이상의 힘을 발휘하곤 했다. 게다가 박 당선인은 인생사까지 얽혀 더한 측은지심의 대상이었다. 겉보기론 을(乙)이었지만 실상은 갑(甲)이었다. 말만 해도 충분했다. 대통령들도 박 당선인의 눈치를 봤다.

이젠 다르다. 대통령은 절대 강자(强者)이자 갑으로 여겨진다.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결실로 이어갈 책무를 진다. 과정도, 결과물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에 만족해야 할 때도, 자신이 절대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거래’해야 하고, 야당과 합의하에 “강행처리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한다. 실상 을의 자세가 되는 것, 그게 대통령 정치의 요체다.

박 당선인은 그러나 정부조직법의 원안 통과를 고수하고, 문제가 심한 장관 후보자도 그대로 안고 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옛 정치 방식이다. 정치를 안 한다고 내내 타박받았던 이 대통령도 정부 출범을 위해 두 개 부처를 되살려내고 후보자 3명을 하차시켜야 했다. 야당이 옳아서가 아니라 국정운영의 1차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야당 시절 박 당선인이 한 말이다. “소수당은 양보할 게 사실상 별로 없다.” “여당만의 안(案)이라고 본다.” 역지사지할 때다.


고정애 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742520&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4. 5. 13:49

한동안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이웃 간의 언쟁을 목격했다. 원인은 항상 세탁기에 있었다. 스무명 정도의 세입자가 세탁기 한대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별도의 세탁실이 없이 복도 구석에 세탁기가 있다 보니 바로 그 앞에 사는 세입자가 늘 괴로움을 호소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기가 집에 없을 때만 사용해 달라고 했다.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세입자들은 집에 세탁기를 두고 빨래방에 가서 돈을 쓸 수는 없다고 또 따진다. 나는 싸우기 싫어 손빨래를 하다가 지쳤다. 아무도 틀리지 않으나 모두가 힘들다.

이렇게 피곤한 나의 주거환경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늘어놓다 보면 간혹 “없는 것들이 요구사항도 많고 성질도 더러워서 그래”라는 말이 돌아올 때가 있다. 계단 옆의 비좁은 공간에 세를 주기 위해 억지로 만든 그 방에서 날마다 세탁기 소리와 함께 사는 세입자는 소음피해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요구사항이 많고 성질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 이런 분쟁이 벌어지는 이유가 과연 세입자 개개인의 성격 때문일까. 결국 마당에 세탁실을 새로 지으면서 이웃들이 싸우는 풍경이 사라졌다. 문제는 집의 구조였던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사회의 빈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빈곤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살피기보다 개인의 생활습관, 성격, 소비유형 등에 주목한다. 그래서 술, 게으름, 잦은 이직, 도박과 같은 개인의 탓으로 가난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나타난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가난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한 사회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산업화 이후 빈농의 자식들은 도시에 와서 도시빈민이 되었다. 대부분 육체노동으로 살아가지만 육체노동자일수록 일용직이며 잦은 부상으로 규칙적인 일자리를 갖기 어렵다. 규칙적인 수입을 갖기 어려울수록 소비행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회의 보호장치가 없을수록 빈곤은 자식에게서 또 그 자식에게로 이어진다.

이러한 빈곤의 고리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빈곤을 멸시하려는 감정이 사회에 일상적으로 퍼져 있다. 그리하여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 하는 개인의 탓이 되고, 복지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피 같은 세금으로 게으른 인간들에게 퍼붓는 시혜가 된다.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무시의 감정은 그렇게 자라난다. 이는 한국에서만 목격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에서 복지 수혜자들을 향해 빈대라는 뜻을 가진 ‘무처’(moocher)라는 표현으로 비하하거나, 생산 없이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들이라며 ‘테이커’(taker)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감정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가난을 ‘구경’할 때는 그 비참함에 가슴 저려하는 이들도 막상 현실 속의 가난 앞에서는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고, 무식하고, 게으른 인간들이란 타박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몹시 듣기 힘들어한다. 가난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난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 그러나 가난은 ‘무소유’를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가난을 착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회학자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밑으로부터 사회학 하기”란 어떤 것인지 깊은 성찰을 보여준 연구였다. “이제 나는 한때의 도시빈민이 25년이 지난 뒤 빈곤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질문에 확답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책은 한 가정을 25년간 연구하며 빈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속되는지 담아내었다. 개인의 빈곤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4780.html



Posted by 겟업
2013. 4. 5. 13:48

지난주 목요일, 학원에서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생들을 상대로 글쓰기 강의를 했다. 그날따라 결석한 이가 절반이 넘었다. 강의 마치고 술 마시기로, 전부터 약속한 터라 맥줏집으로 향했다. 수강생의 4분의 3이 여자인데, 강의 마치고 술자리까지 온 건, 남자 셋에 여자 둘이었고, 여자 둘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나왔다. “너넨 연애 안 해?” 한 명이 답했다. “안 하니까 지금 여기 있죠.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세요?” 그랬다. 밸런타인데이였다. 남자 셋 다 20대 중·후반이었다. “젊을 때 연애 많이 하는 게 글 쓰는 데도 좋은데.” 다른 한 명이 말했다. “저희가 지금 자존감이 약할 때잖아요. 그러니 연애하기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20대 남자들 딱히 호감 갖고 본 기억이 오래전인데, 이날은 달랐다. 안쓰러워 보였고, 동지애까지 생기는 듯했다.

청년실업률 높은 시대에 취직 준비하는 20대 후반 남자들! 강의하면서 보면 똑같은 취업준비생임에도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주눅들어 있었다. 가부장 문화가 주는 부담이 클 거고, 군대 갔다 와서 여자들보다 나이도 많고, 그래서 자존감이 약하고, 돈도 없고…. 그런데 자존감이 약해지면 연애를 못하나? 자존감과 연애를 곧바로 연결짓는 게 옛날 남자식 발상 아닌가.

외국은 어떨까. 지난해에 나온, 미국 여자가 쓴 <남자의 종말>이라는 책을 봤더니 거기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요즘 미국의 젊은 남자들은 과도기에 놓여 있다고 했다. 가부장적인 백인 남자가 이제는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권력과 영향력이 빠져나가는 게 두려워서 그런 걸 등지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여자들이 유능해져서 ‘가부장’ 사회에서 ‘가모장’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엔 몸집과 체력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밀렸지만 후기 산업사회는 사회지능, 열린 의사소통, 유연함 같은 걸 중시하는데 이건 여자들이 더 잘한다. 이런 변화는 남녀의 연애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자들이 공부하고 일하기에 바빠지다 보니 연애는 시간 빼앗기는 일이 됐다는 것이다.

한 조사 결과 미국의 여대생들이 ‘남자와 사귀려고 애쓰기보다 사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연구원의 말을 인용한다. “야심 찬 여자들은 관계를 맺는 게 4학점짜리 수업을 듣는 것과 같다고 계산하고, 차라리 훅업(일회성 성행위)을 택하는 겁니다.” ‘훅업’까지는 몰라도, 저자는 한국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본다. 요즘 한국 남자를 위협하는 건, ‘본인이 공부하느라 워낙 바빠서 남자를 꾀어내지 않는 여자, 몇 년 뒤 스스로 고급 핸드백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남자의 돈이 필요 없는 여자’라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변화하는 여성과 변함없는 남성은 서로를 살펴보고는 상대가 인생의 동반자로 완전히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바람에 아시아는 ‘짝 없는 외기러기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여성지배적인 사회라고 해서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유토피아로 변하라는 법은 없다”, “자연적 질서 따위는 없고, 오로지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이 책의 예측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옛날 남자식 자존감 같은 것 따지지 말고, 콤플렉스 느끼지 말고, 상대방이 자기보다 잘날 수도 있는 거고, 상대가 돈을 낼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유연한 마음으로 연애해라, 그게 ‘남자의 종말’ 시대에 살아남을 미래형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 말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쉬울까.

아무튼 시대가 바뀌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니, 멋지고 새로운 미래의 남자상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지금 찌질해 보이는 20대 남자들의 몫일 거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4381.html



Posted by 겟업
2013. 4. 5. 06:30

필화 사건도, 동료 교수들과의 불화도 아니다.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62·사진)가 이번엔 엉뚱한 '책 장사'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학생들에게 수업 교재인 자신의 저서를 산 영수증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라고 요구해 문제가 됐다. 어길 경우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도 했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사실상 강매란 것이다. 교재를 구입해 영수증을 얻은 뒤 환불하면 된다는 '대처 요령'까지 나왔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자 마 교수는 더 강하게 나왔다. 학교 홈페이지(www.yonsei.ac.kr)에 직접 '학생들의 뻔뻔스런 수강 태도에 분노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질타했다. "5000원짜리 커피를 즐겨 마시면서 한 학기 2만 원 남짓 교재 값은 아까워한다"며 요즘 대학생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떠도는 말들 가운데 논란의 진실은 무엇일까. 당사자에게 직접 사건의 전말을 듣기 위해 26일 서울 동부이촌동 그의 집을 찾았다.

마 교수는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죽 했으면 그랬겠나"라고 서두를 뗐다. 사회적 논란에 갇힐 때마다 그의 편이 돼줬던 학생들이 "200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 변했다"고 했다. 그는 "수업 교재 구입은 배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냐"며 "학생들이 해가 갈수록 얌체주의, 이기주의로 변하는 것 같아 슬프다"고 말했다.

- 책 장사 논란, 왜 나온 건가요.

"적반하장이에요. 수업 교재도 안 사고 버티는 학생이 많아요. 싸우러 가는데 총 안 갖고 가는 거랑 똑같아. 제가 수십 년 동안 가르쳤는데 예전 학생들은 당연히 교재는 사는 걸로 알았어요. 사실 의무적으로 영수증 제출하라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하도 화가 나서요. 지난 학기 수업을 600명 정도 들었는데 교재를 산 건 50여명밖에 안 된다고 하니까."

- 학생들에게 실망이 큰 것 같습니다.

"가짜 영수증 만드는 방법까지 올리는 것 보고. (한숨) 요즘 학생들 커피 값, 술값에 스마트폰 통신비는 안 아껴요. 홍대 앞에 춤추러 가고, 데이트 하면 적어도 10만 원은 깨진다고. 내 교재 얼마 해요? 9000원짜리, 1만3800원짜리 두 권 합쳐 2만 원 조금 넘어요. e-북도 인정해준다고 했어요. 1만3800원 종이책 비싸면 7000원짜리 e-북으로 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걸 아깝다 하면…"

- 한 학기 2만 원 내외인데, 이건 너무하다는 거네요.

"벼룩의 간을 빼먹는 거랑 똑같은 심보라고. 경제학 같은 수업은 10만 원짜리 두꺼운 원서 사게 해도 항의 안 해요. 거기서 시험 문제 내고 하거든요. 내 책은 교재 치고도 싼 편이에요. 이번에 학생들에게 너무 실망을 했어. 내가 주장하는 게 '자유를 주면 자율이 생긴다'인데. 수업도 억지로 출석 체크하고 앉혀놓는 게 치사한 거야. 그래서 방침을 자유를 주겠다, 전자출결로 학생증만 찍어라, 했다고. 그런데 학생증만 찍고 도망가는 거야. 제가 불러도 가버려요."

- 교수님 저서로 지정한 게 문제란 얘기도 있습니다.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는데, 그걸 몇 푼이나 번다고. 요새 9000원짜리 책이 어디 있어요. 출판사에도 얘기했어요, 값 올리지 말라고. 내 저서만 아니면 괜찮았다 그러기도 하는데… 아니, 선생이 자기가 연구한 걸로 가르치면 칭찬해야지. 저서 없이 강의하는 게 오히려 불성실한 교수지. 그걸 말이라고 해."

- 책 장사, 돈 문제로만 바라보는 게 서운하다?

"내가 인세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어. 학술 서적이라 1000~2000권 찍어요. 돈 벌겠다는 책이 아니지. 내 강의는 교재를 참고로 사라는 게 아니야. 내가 쓴 학술 서적 갖고 읽으면서 하는 강독식 수업이야. 그런데 수업 들어가면 앞에 책을 펴놓은 학생이 없어요. 어떨 때는 내가 읽어버려. 화가 나더라고."

- 등록금도 비싼데 책 사는 게 부담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정말 책값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딱한 사정 얘기했으면 봐줬을 거야. 항상 얘기하는 게 저는 학교 다닐 때 절대 도서관에서 책 빌려본 적 없어요. 수업 교재를 닷새 빌려서 내용을 소화시킬 수 없는 거야. 교재 사는 건 수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도서관에 있다고 하는데, 교재 3권 있어요. 600명이 어떻게 봐. 그걸로 본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 원래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교수에요. 맞담배 피라고 하고, 인사 나만큼 잘 받아주는 교수도 없어요. 학생들도 내가 힘들 때마다 힘이 돼줬고. 필화 사건 겪었을 때 나 지지한다고 데모도 하고. 강의 배정 안 돼서 '무학점 강의' 무대포로 할 때도 100명씩 와서 들었어. 그런데 2000년대 중반 넘어가면서 학생들이 바뀌었어."

- 어떻게 바뀌었다는 겁니까.

"해가 갈수록 얌체주의, 이기주의에 '너 죽고 나 살자' 주의야. 수업은 엉터리로 책도 안 사는데 스펙은 쌓아야 하니 학점은 잘 달라고 항의가 빗발치는 거야. 옛날 손으로 리포트 쓰던 세대와 인터넷 발달한 지금 리포트 수준 차가 엄청나요. 리포트 양심껏 써오라고 해도 소용없어. 인터넷에서 리포트 파는 사이트가 있어요. 마광수 검색해서 짜깁기해 낸다고.

게다가 이번엔 날 책 강매하는 인간으로 몰았잖아. 자유를 주니 악용하는 거지. 하버드대는 참고서적 한 주에 한 권씩 사고 리포트 제출하게 하고 그래요. 우리나라는 정말 편하게 학교 다니는 거야. 저조차도 반성해요. 이번 일 겪으면서 느낀 게 한 마디로 학생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얼마나 슬픈 일이에요."

- '젊은 학생들 못 믿겠다'라. 조금 의외입니다.

"이젠 학생들 못 믿겠어. 사실 저는 옛날부터 앞날에 기대했어요. 신세대 문화에 기대한다, 이런 글을 많이 썼어. 그런데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이제 학생들이 교수 강의평가로 권력행사를 하려고 해. 저는 정년 보장받은 정교수니까 상관없는데, 교수가 학생 눈치보고 학생에게 종속되게 하는 거야. 학생들이 정확하게 평가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학점 잘 주면 강의평가 점수 잘 주는 식이에요."

- 학생들이 어떻게 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지금 중학교, 고등학교부터 무너져 있어요. 학생들이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학교에 와선 자고 떠들고 문자 주고받고 한대요. 선생이 야단치면 나가버리고, 학부모가 나서 난리 피우고. 그렇게 자란 애들이 대학까지 이어지는 거지. 토익 교재는 몇만 원씩 하는데 안 아까운 거야. 교권을 세워줘야 돼. 대학도 마찬가지에요. 교수를 학생 아래 두게 놔뒀어요. 교권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어느 정도는 지켜줘야 한다는 거죠."

- 결국 학생들의 교재 구입 방침은 유효하군요.

"오히려 학생들이 정보를 준 거지. 가짜 영수증 제출하는 방법까지 이번에 알았어요. 조교가 5명인데 그까짓 것 검사 못해요? 다 검사하고 아예 책을 샀는지 안 샀는지 실물을 확인할 생각도 있어요. 지독한 애들이야. 그런 요령까지 당연한 듯 얘기하고 있어. 아이고, 난 정말 끔찍해. (웃음) 아까 '너 죽고 나 살자'라 그랬죠? 순수한 경쟁의 논리가 아닌 승자독식, 약육강식에 원칙 없는 정글처럼 돼버렸어요."

- 산전수전 겪었는데, 이번 일이 더 충격인 것 같습니다.

"제가 풍파를 많이 겪었어요. 동료 교수들한테 왕따 당했고, 퇴임 후에 연금도 못 받아요. 사학연금공단 규정에 실형 이상 전과자는 박탈하게 돼 있어요. 다들 연금 문제 고소하라고 하는데, 난 재판에 이가 갈리는 사람이야. '즐거운 사라' 항소한 거 지금도 후회하거든요. 법정이 싫어요. 그것보다 더 슬픈 건 결론이 '학생을 눌러야 한다'로 가게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30326582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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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6:27

가미카쓰(上勝) 마을은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큰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섬인 시코쿠(四國) 내륙의 산간 지역에 있다. 한국의 면에 해당하는 이곳은 현청 소재지인 도쿠시마(德島) 시에서 차로 1시간 거리. 주민 1800여 명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이 절반이다. 마을 면적의 85.1%는 산림이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지는 1.9%에 불과하다. 그나마 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과 밭이 많아 기계화도 곤란하다. 감귤 재배가 주민의 주요 수입원이었지만 1981년 이상 한파로 나무가 모두 고사했다. 이 정도면 절망이 지배할 땅 같지만 이곳은 활기와 웃음으로 넘친다. 비결은 지천에 널린 나뭇잎이다. 마을 할머니들은 나뭇잎을 팔아 연 2억 엔(약 23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나뭇잎을 판다고?

1986년 오사카(大阪) 시의 한 초밥집. 가미카쓰 마을 농협 직원이던 요코이시 도모지(橫石知二) 씨는 무심코 들려온 옆 테이블 여자아이의 탄성에 귀가 번쩍 뜨였다. “우아, 정말 예쁘다.” 여자아이는 생선회 요리 위에 얹어진 빨간 단풍잎을 컵에 띄우고 싱글벙글했다. 단풍잎 등 나뭇잎은 제철 생선을 많이 쓰는 일본 요리의 맛을 더하기 위해 장식하는 소품이다. 일명 쓰마모노(妻物). ‘나뭇잎이라면 가미카쓰에 얼마든지 있고, 노인들이 다루기에 무겁지도 않은데….’ 감귤 나무 고사 이후 새로운 수입원 발굴에 고심하고 있던 요코이시 씨는 즉시 시장 조사에 나섰다. 시골엔 흔한 나뭇잎이지만 도시에서는 돈이 될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요리점들은 대부분 문하생을 시켜 나뭇잎을 직접 따오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종류의 색감 좋은 나뭇잎을 제때 조달하기 쉽지 않았고 문하생도 갈수록 줄고 있었다. 이만하면 틈새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문제는 다양한 상품개발과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 생산체제 확립. 특히 고급 요리점들은 가을이 오기도 전에 가을을 연출할 수 있는 단풍잎을 원했고 겨울 요리에서 봄 향기를 풍기고 싶어 했다. 

요코이시 씨는 반신반의하는 마을 할머니들을 설득해 비닐하우스에서 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요리점들의 종류별 나뭇잎 공급 요청에 선착순으로 수주할 수 있는 경쟁 시스템도 도입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용하기 간편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자 처음엔 팩스만 고집하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며 선착순 입찰에 나서고 있다. 특히 마을 내에 매출액 순위 경쟁이 붙으면서 할머니들은 시스템이 제공하는 각종 판매 동향 정보를 참고해 출하 목표를 세우는 전략적인 모습도 보이고 있다. 경쟁은 상품의 품질 저하를 막았고 마을 전체에 건강한 긴장감과 활력, 공통의 화제를 늘렸다. 마을이 살아나자 국내외에서 견학 요청이 쏟아졌고 마을에 정착하겠다는 도시 젊은이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선진국 공통의 과제인 고령화와 인구의 급속한 감소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지혜를 짜내고 있는 일본 자치단체들의 노력은 벤치마킹 대상이다. 해마다 정부 예산을 따내 다리와 도로를 만드는 데만 골몰하거나, 수도권에 있는 공장이나 기업 빼내기가 지역 발전의 전부라고 믿는 자치단체라면 더욱 그렇다. 일본에서는 자치단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지칭해 ‘마치 오코시(町おこし·지역 부흥)’라는 조어도 생겼다. 버전이 업그레이드된 ‘일본판 새마을운동’인 셈이다. 일본의 부정적인 뉴스에만 눈이 쏠려 있으면 일본의 진면목을 놓칠 수 있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30317/53773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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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6:24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미국 예일대 경영대학원(MBA) 학생들은 서울 종로구 돈의동의 갈매기살 식당을 찾았다. 소주, 콜라, 맥주를 섞은 ‘고진감래주(苦盡甘來酒)’를 시음하며 쌈장을 찍은 고기를 상추에 싸먹었다. 이들이 체험한 것은 한국의 회식자리를 관광상품으로 만든 ‘나이트 다이닝투어’. 기획자는 외국인에게 한국음식을 소개하는 푸드 벤처기업 ‘온고푸드’다. 

관광상품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건 없다. ‘1차’에서는 식당에서 고기에 술을 곁들이고 ‘2차’에서는 광장시장을 돌며 녹두빈대떡을 먹는 식이다. 우리에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 외국인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 투어를 체험한 관광객들은 “관광책자에서 볼 수 없는 한국의 진짜 민낯”이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입소문을 내고 있다. 광고나 홍보 한번 없이 온고푸드의 고객은 지난해 3000명을 넘었다.

‘미국 뉴요커가 한식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로 박사논문을 썼던 온고푸드의 최지아 대표(45)는 프랑스 와이너리투어와 스페인 타파스(전채요리)투어를 보고 나이트 다이닝투어를 기획했다. 단순히 맛집들을 묶어 소개하는 것과 달리 여러 개 콘텐츠를 선별해 하나의 스토리로 엮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온고푸드는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외국인에게 한국의 식문화를 설명하는 ‘푸드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만들어 자격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이 10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의 관광산업은 양적인 성장을 일궜다. 하지만 여전히 고궁 박물관 쇼핑으로 이어지는 뻔한 코스가 관광객의 재방문율을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5년간 여행업(―4.1%), 관광객이용시설업(―5.7%) 등에서 신규 일자리는 감소했다.

이런 가운데 온고푸드처럼 기존 관광상품의 틀을 깨는 다양한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창조관광 프로젝트는 관광산업의 판을 넓힐 수 있는 좋은 본보기다. 외국인 여성 관광객에게 필요한 여행 준비 상품을 숙소로 배송해주는 서비스나 여행일과를 마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파티투어 등은 잘만 발전시키면 킬러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최 대표는 ‘배달민족’의 저력을 보여줄 다음 상품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한강둔치에서 밤늦게 ‘치맥(치킨과 맥주)’을 시켜먹는 체험상품이다. 전화 한 통이면 어디로든 야식을 배달해주는 모습에 외국인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호텔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저기 구슬처럼 널린 관광아이템을 하나의 상품으로 꿰는 일도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도의 명물이 된 올레길은 언론인 출신 서명숙 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얻은 영감으로 만들어졌다. 대규모 자본이 든 것도, 정부 지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 걷던, 동네사람만 아는 옛길을 엮어 올레코스를 만들었다. 창조의 사전적 의미는 ‘무(無)에서 유(有)를 새로 만들다’지만 ‘기존의 것을 달리 보다’로 확장되면 관광상품은 이렇게 무궁무진할 수 있다. 



염희진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30319/537987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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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5:50

핀란드에선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노키아에 대해 한마디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삼성에 대해 누구나 한마디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구 540만 명의 작은 나라를 ‘휴대전화의 왕국’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채웠던 노키아는 날개도 없이 추락하고 있다. 1998년 세계 1위의 휴대전화 회사로 등극한 이래 핀란드 경제의 3분의 1을 떠맡았던 ‘국민기업’이었다. 그러나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 노키아 주가는 전성기 때의 20분의 1로 줄었다. 1위의 저주, 변화를 외면한 오만, 합의에 의존하다 놓친 스피드 경영 등 노키아 몰락의 이유는 많다. 그러나 “그것이 이 나라에서 가장 잘된 일”이라는 말이 요즘 유행이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전했다.

▷노키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창업한 신생 기업이 300개가 넘었다. 노키아 같은 대기업에 취업을 원했던 대학생들은 이제 창업을 ‘쿨’하게 여긴다. 2003년 헬싱키기술대학 학생 셋이 창업해 2009년 앵그리버드 게임으로 히트 친 로비오는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이 됐다. 노키아의 추락을 보며 핀란드 정부는 2008년 대학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개혁을 도입했다. 헬싱키기술대학, 헬싱키경제대학, 헬싱키 아트와 디자인대학을 합친 알토대학이 2010년 탄생했다. 대학 로고(A!)부터 참신한 이 대학 학생들은 ‘창업의 여름’ 행사와 ‘창업의 사우나’ 조직 등을 만들어 창업 열기를 확산시켰다. 정부는 기술혁신투자청(TEKES), 벤처캐피털펀드 핀베라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일부터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네트워크 형성까지 구석구석 지원했다.

▷혁신의 주역인 핀란드 정부가 키우는 창업 문화가 ‘뉴 노르딕 모델’이다. 북유럽 모델을 선망하는 일부 수구좌파는 여전히 ‘큰 정부’를 강조하지만 북유럽에서는 정부가 요람부터 무덤까지 책임지기보다, 개개인이 자율성을 키워 성공할 수 있도록 시장 원리를 통해 지원한다. 1990년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복지 문제에서 ‘더 내고 더 받기’ 모델이 작동될 수 없음은 경험한 바다. 이번 글로벌 위기 때 유로존 국가에 비해 북유럽 지역의 타격이 적었던 것도 이런 ‘미리 개혁’ 덕분이었다.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으면 1등도 추락할 수 있음을 노키아는 보여준다. 정부도, 복지 모델도 마찬가지다. 그 덕분에 핀란드는 반부패지수 1등, 글로벌 경쟁력 3위, 국민소득 4만5500달러의 선진국이다. 국가 부채가 유로존 평균의 절반일 만큼 재정이 탄탄하고 제도에 대한 신뢰는 북유럽 국가 중에서도 제일 높다. 이런 나라라면 노키아도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을 것 같다. 믿을 만한 정부가 먼저냐, 국민이 믿어주는 게 먼저냐. 이게 문제일 듯하다. 

김순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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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5:39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감수성이 풍부한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롤링의 아버지는 공장 책임자로 일하는 블루칼라였지만 어머니 앤은 책과 전원생활을 사랑하는 여성이었다. 앤은 조앤이 13세가 되던 해 다발성경화증에 걸려 손을 심하게 떨고 종국엔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결국 그는 딸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45세에 사망했다. 앤은 의사는커녕 방문 간호사의 돌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10년을 투병했다. 이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본 조앤은 2010년 다발성경화증 연구를 위한 기금으로 1000만 파운드를 에든버러대에 기부했다.

▷영국 국민건강보험(NHS)은 영국이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일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제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한다는 베버리지 보고서에 따라 1948년 도입했다.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가 아니라 100% 세금으로 운영된다. 전 국민이 빈부(貧富)에 관계없이 아프면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이상적이다. 문제는 의료의 질(質)이다. 영국 병원들은 모두 국영이며 의사는 공무원이다. 환자들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3년을 기다려야 한다. 조앤의 어머니도 이런 식으로 하다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영국 정부는 6일 스태퍼드셔에 있는 스태퍼드 병원에서 2005년부터 4년간 최소 400명, 최대 1200명의 환자가 제대로 진료 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스태퍼드 병원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거동이 힘든 환자가 침대에서 소변을 보고 일부 환자들은 음식과 물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꽃병의 물을 마셨다. 21세기 문명국가에서 일어난 일인지 귀가 의심스럽다. 2004년에도 영국에서 40대 간호사가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고령 환자에게 마취제를 투여하고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는 방식으로 죽음을 유도해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이 간호사는 “병상을 빨리 비우기 위해 그랬다”고 말했다. 

▷스태퍼드 병원 사건은 무상의료 자체보다는 무상의료 개혁 과정에서 불거진 일이다. 병원은 재정지출 등에서 NHS가 요구하는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정부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율운영을 할 수 있다.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2006∼2007년 병원 예산 1000만 파운드를 깎고 의료진 150명을 해고했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갔다. 스태퍼드 병원은 한계에 봉착한 영국 NHS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영국 의료제도의 끔찍한 실패에 사과한다”고 했으니 원죄가 무상의료에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선거 때만 되면 무상의료를 외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영국의 의료제도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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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5:10

박근혜 차기정부는 ‘창조경제’를 경제정책의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우고 출발점으로 상상력, 창의성 그리고 과학기술을 설정했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기존의 경제정책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이다. 그래서 경제정책을 할 때 인간만의 잠재력인 상상력과 창의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이들 잠재력에 대한 원천을 고려하지 않은 경제정책은 지난 50년간의 경제정책 경험의 아류에 불과할 뿐이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인간 고유의 잠재력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불과 150년 전부터다. 미국의 국립과학원은 2003년에 발간한 ‘생산성을 넘어 창의성으로’에서 창의성의 원천을 과학, 기술, 경제 그리고 문화로 정리했다. 

그동안의 경제발전은 과학의 창의성과 경제의 창의성이 서로 결합한 결과다. 그 시작은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18세기 말의 산업혁명에서부터이고 한국의 경우는 1962년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문화예술의 창의성은 선진국들에서나 우리나라에서 별로 활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국의 국립과학원은 정보통신기술을 통해 예술로부터의 창의성을 각 산업에 활용하기를 권고했다.

1990년대 말부터 일부 서구 선진국들은 문화예술의 창의성을 경제정책의 중심에 두기 시작했다. 영국은 1997년에 창의산업 특별팀을 설립하여 문화산업이 포함된 창의산업을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5년에 창의경제계획을 확립했고, 2006년에는 산업계로부터, 2007년에는 정부의 타 부처로부터 동의를 얻어 2008년에 국가계획으로 공포했다. 영국 다음으로 네덜란드가 2005년에 창의산업 4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호주 캐나다 등이 뒤를 이었다.

이에 우리의 ‘창조경제’도 장기 경제정책으로 성공하기 위해 다음 사항을 필히 고려해야 한다. 첫째, 임기 5년간의 정책내용은 향후 20년 이후를 내다보고 초석을 다진다는 생각으로 수립돼야 한다. 개인의 창의성이 단기간에 증진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창의경제는 수십 년 후까지 정책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본 정책은 통합적 다학제 간 접근법(holistic multidisciplinary approach)으로 수립돼야 한다. 본 정책에는 개인의 창의성 증진 방안, 창의산업 육성 방안, 창의산업의 수출산업화 방안, 농업 제조업 등에 혁신을 제공하는 창의산업의 역할 방안, 필요한 재원의 조달 방안 등이 포함돼야 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 과학, 문화 등의 이론이 통합적으로 활용돼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끼와 소질을 조기에 발굴하도록 지원하는 교육 방향은 창의경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정책은 문화예술의 창의성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칸트는 예술가를 천재라 했고, 듀이는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상상력의 결과이고 일반인에게는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했다. 이러한 상상력과 창의성이 농어촌이나 대도시에 사는 모두에게 현재보다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이 ‘창조경제’의 출발점이 아닌가.

이상의 발전계획은 거대자본 중심이 아니라 개인과 중소형 기업에 친화적인 인간중심의 발전이 될 것이다. 50년 전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현재 한국의 초석이 되었듯 ‘창조경제’가 올바르게 수립돼 20년 후의 일류선진 한국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전택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경제학 교수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30129/52654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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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5:09

일요일에 혼자 몰래 골프 치는 목사에게 하나님이 내린 벌이 홀인원이란 말이 있다. 봐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평생의 자랑거리가 평생의 아쉬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 혈연단신 입국한 탈북자들도 봐줄 사람이 없어 불행하다.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 탈북자들은 취직도 어렵고 사회적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는 집단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자. 입국한 지 몇 년 안 된 탈북자라도 임대아파트 보증금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을 합치면 최소한 수천만 원의 재산은 있다. 이 돈이면 북한에서 평생 먹고살 수 있다. 먹고살기 어려워 북한을 떠났는데 불과 몇 년 만에 북한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산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니 혈육과 떨어져 이 땅에서 빈곤계층으로 살기보단 북한에 돌아가 가족친지들 앞에서 부자로 살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망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떤 탈북자는 몇 달 전 중고차 거래 사이트에서 수백만 원짜리 중고 벤츠를 찜해놓고 꼭 사겠다고 별렀다. 그렇게 낡은 차는 타지 못한다고 설명했는데도 “내일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지면 단 한 번만 타도 좋으니 벤츠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 이유를 댄다. 북한에서 벤츠는 최고위급만 타는 가장 좋은 차로 인식된다.

대다수 탈북자에게 탈북의 가장 큰 동기는 생활고이다. 고향에서 이집 저집 먹을 것을 꾸러 다니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과거 정도는 누구나 있다. 이들에겐 고향에 ‘금의환향’해 부자로 대접받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삶의 동기이다. 지금은 갈 수 없어 못 갈 뿐이다.

그런데 북한이 최근 다시 돌아온 탈북자는 용서해 준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선전을 믿고 지난해 6월 박정숙 씨를 시작으로 이달 24일까지 갓난아기 2명을 포함한 8명의 탈북자가 재입북했다. 북으로 돌아가기 전 이들이 돈부터 챙겼을 것은 당연한 일. 미리 북한에 밀반입시켰을 수도 있고 중국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다.

임대주택 보증금을 포함해 1인당 2000만 원 가까운 정착금을 의무적으로 주었더니 그걸 홀랑 들고 북한으로 넘어간 탈북자가 한국인으로선 큰 배신감이 들 것이다. “다시 돌려줘”라는 말이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돈을 가장 빼앗고 싶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김정은일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 다시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쌀 꾸러 다니던 아무개가 남쪽에서 몇 년 만에 평생 먹고살 돈을 갖고 돌아왔다는 소문만큼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수조 원의 대북 지원도 이런 효과는 못 낸다.

북한은 지금 재입북 탈북자들을 탈북 방지 선전용으로 활용하고 대접도 잘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호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김정은이 한국의 탈북자들을 정말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다면 국제사회에 “재입북 탈북자의 신변은 나와 노동당, 공화국의 이름으로 보장한다”는 선언이라도 하면 어떨까. 얼마나 돌아갈진 모르겠지만….

주성하 국제부 기자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30129/526543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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