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6. 05:04

12일(현지시각) 저녁 뉴욕의 주유엔 한국대표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표정은 매우 침통해 보였다. 이날 아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긴급회의 결과를 설명하고자 연 자리였다. 그는 “마음이 매우 무겁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를 마무리하는 이때, “북한과의 관계를 결국 이런 상황으로 마감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도 했다.


북한 핵실험만 없었다면 이날은 우리나라 외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날로 언론에 대서특필될 수도 있었다. 비록 15개 이사국이 월별로 돌아가며 맡는 것이긴 하나, 국제평화와 안전을 책임지는 안보리의 의장국으로서 국제사회에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를 공개토론에 부쳐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의제는 ‘무력분쟁에서 민간인 보호’였다. 참가한 나라도 70개국이 넘었다. 106년 전인 1907년 6월 44개국이 참가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려던 고종의 밀사들이 문전박대를 당했던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계략으로 회의 참가 자격조차 얻지 못한 이준 열사는 헤이그의 호텔방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그러나 안보리 공개토론은 북한의 핵실험 탓에 빛이 바랬다. 애초 오전 10시에 열기로 했던 이날 행사는 북한 핵실험 대응책을 논의하는 안보리 긴급회의가 갑자기 오전 9시로 잡히는 바람에 1시간30분이나 늦게 열렸다. 이 토론을 주재하고자 뉴욕까지 날아온 김성환 장관은 그나마 토론의 절반밖에 주재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갑자기 대북 제재 논의가 그의 방문 목적이 돼 버린 셈이다. 우리 외교사에서 축제일이 되어야 할 날, 간담회장에서 나온 발언들은 대결과 응징의 언어가 지배했다.


13일 오후 한국대표부와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주유엔 북한대표부 건물. 13층에 입주한 북한대표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깐 밖에 나온 한 직원은 인터뷰 요청에 “대표가 출타 중”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핵실험 이후 외무성을 통한 ‘성명’만 접할 수 있었을 뿐, ‘말’을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같은 뉴욕 하늘 아래 있지만, 북한대표부 앞엔 마치 38선이 둘러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 이날 유엔본부 앞에선 티베트인 50~60명이 ‘티베트에 자유를 달라’라고 쓰인 손팻말과 티베트 국기를 들고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1950년 강제병합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 무리엔 노인과 여성, 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행색은 비록 초라했으나 이들의 얼굴은 근엄해 보였고 눈빛은 강렬했다.


갑자기 1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이 이들 티베트인과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우리 조상들도 강대국들과 국제회의 등을 돌아다니며 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것을 막아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을 것이다. 조상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고 뭐라고 할까. 나라가 두 개로 쪼개진 뒤, 한 나라는 안보리 의장국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한 나라는 그 회의에서 제재의 대상이 돼 있는 현실을.


행진을 하는 티베트인들에게, 자유는 쟁취했으나 평화는 저당잡힌 우리의 과오를 들려주고 싶었다.


박현 워싱턴 특파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3920.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4:49

베를린에 있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박물관은 사실 두 개의 박물관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다. 이 둘 모두 동독인들의 일상과 밀접히 관련돼 있던 것이면서 서로 미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박물관을 만든 이가 처음부터 이것을 의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긴장이 많은 독일인들이 동독이라는 옛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느끼는 모호함과 양면성을 포착하고 있다.


박물관의 중앙 전시실은 쌍방향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는 헤드폰을 끼고 동독 시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수 있고, 취조실과 감옥 체험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위 간부의 책상에 앉아보거나 러시아어 테스트를 받아볼 수도 있고, (공산주의식) 부정 선거에도 참여해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전시물에 달린 안내글을 읽지 않았다면 동독에 대한 객관적인 자화상만을 본 채 건물을 나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물관의 전체적인 느낌은 전시물에 달린 안내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음은 동독 관광객들에 대한 설명글이다. “동독 관광객들은 동구권 국가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프라하 웨이터들은 그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지요. 서구 관광객들이 마르크나 달러 같은 종이 화폐를 쓸 때 그들은 계산을 하기 위해 알루미늄 근수를 쟀지요.”


이런 전시품들 속에서 동독이란 비효율적이고, 지루하고, 익살스러우며, 다양한 방법으로 조롱을 당해야 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옛 동독인들이 이러한 전시물들을 보며 좀 기분이 상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서독의 과거는 경탄할 만한 것으로 취급되는 데 견줘 동독의 과거는 막다른 길처럼 묘사돼 있다.


그리고 박물관의 또다른 절반이 있다. 그것은 식당이다.


박물관엔 동베를린에 있었던 고급 레스토랑의 복제품이 마련돼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동독식 최고 정찬과 예전 동독에서 생산되던 코카콜라의 대용품인 비타콜라 등을 맛볼 수 있다. 메뉴엔 예전에 호네커가 좋아했다는 훈제 돼지고기, 감자, 사워크라우트(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요리나 내가 먹어본 고기 등으로 속을 채운 양배추 요리 등도 있다. 그리고 이 음식들은 정말 맛이 있다. 재미있게 말하거나 비꼬려는 게 아니다. 메뉴에서 살짝 우스꽝스런 표현을 볼 수 있지만, 음식 자체가 우스꽝스럽진 않다.


물론 이 음식의 레시피는 동독의 최고 레스토랑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러나 비타콜라는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보편적인 소비재였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이 레스토랑은 다른 전시물들과 매우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동독인들의 삶에도 좋은 것이 있었으며 그것은 경탄하고, 보존하고, 요즘 사람들에게도 공급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최근 많은 동독인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 대부분은 결코 예전 동독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비밀경찰에게 고통을 받았고, 일부는 감옥에 끌려가거나 직업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휴가를 가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한국인들에 대한 교훈도 분명하다. 북한한테 나쁜 농담을 하거나, 장애를 가진 어린 동생처럼 다루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도 23년 전 동독이 사라진 뒤 동독인들이 느꼈던 것처럼 2류 시민으로 취급받길 원치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 통일이 이뤄질 때 한국인들은 북에 있는 그들의 형제자매들이 감내하고 극복해야 했던 많은 공포와 그들이 즐겁게 그리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살아냈던 삶에 대한 얘기를 존중하고 경청해야 한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3567.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4:47

그의 별명은 ‘보안관 아저씨’다. 밤이나 낮이나 동네 이곳저곳을 순찰하면서 10대들을 선도한다. 보일러 시공이 본업이지만, 홀로 사는 어르신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간다.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4동에 사는 이시중(62)씨가 그 주인공이다. 빵집 가게 앞 전봇대에 온갖 쓰레기가 쌓이는 것을 보다 못해 흙을 퍼나르고 기와로 장식해 작은 정원을 만든 박청호(54)씨도 이 마을 신참 주민이다. 보안관 아저씨는 이 정원에 예쁜 석류나무와 동백을 내줬고, 교사로 정년퇴임한 할머니는 30년산 철쭉을 선뜻 희사했다.


마을의 소소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퍼뜨린 것은 동네 잡지였다. <월산4동에 살다>(175쪽)라는 동네 잡지를 만든 이들은 다름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다. 산등성이가 마치 달이 뜨는 것 같다고 해서 생긴 월산동 달뫼마을에서 떨어져 나온 월산4동은 사실 동네 유래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주민 몇몇이 지난해 10월 구청 마을 살리기 사업으로 700만원을 지원받아 동네 잡지를 만들어보자고 했을 땐 첫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 돈으로 어려운 이웃이나 도울 일이지…. 우리가 어떻게 잡지를 만들어?”

하지만 김종민(59) 주민자치위원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뭉쳤다. 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는 그는 “호적이 있는 동네를 만들어보자”며 마을지 편집위원회를 꾸렸지만,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카센터, 1970년대 △△교회 앞에 있었던 ‘뽕뽕다리’, ○○교회 부근에 있었던 젖소농장 등 마을의 기억…. 주민들이 주민들의 이야기를 발굴했다. 주민들이 모여 마을 지도를 직접 그려 잡지에 실었다. 원고의 95%는 그대로 살렸다. 앞으로 동네 잡지를 1년에 한차례는 꼭 내볼 참이다. 동네 잡지 한권이 삭막한 대도시의 7000가구, 1만2430명이 사는 동네를 훈훈하게 바꾸는 출발점이 된 셈이다.

동네 미디어는 또 있다. 서구 화정동 주민들이 참여하는 광주문화유랑단은 <화정동에 꽃이 피다>라는 신문을 낸다. 마을 주민들은 동네 신문에 음식물을 먹어치울 지렁이를 분양하는 일정, 동네 장터 개장일 같은 소식을 담아 5호까지 냈다. 동사무소 2층 165㎡(50평) 공간을 마을극장으로 바꾸려고 아이디어도 모으고 있다. 마을극장 개장 소식은 아마도 동네 신문이 특종 보도할 것 같다.

광주시 남구 주민들이 모여 꾸린 송화인문공동체도 2011년 5월부터 <함꾸네 신문>을 내고 있다. 타블로이드판 8면짜리 신문엔 마을 도서관·지역아동센터·강연회 소식이나 마을 미담 등이 실린다. 민판기(61) 편집위원장은 “주요 신문에 동네 이야기는 없더라. 이웃간의 관계를 트고 소통하는 데 동네 신문이 제격”이라고 했다. 알림판과 광고 수입 등으로 자체 제작해 6000부를 배포한다. 남구 양림동에서도 <양림소식>이라는 4쪽짜리 신문을 낸다.

동네 미디어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매개체다. 마을과 연관된 이야기가 실린 잡지는 어쩌면 도시에서 더 필요하다. 무심코 지나쳤던 내 주변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가 활자화되면 오히려 더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는 공감을 낳고, 이 공감이 관심과 참여를 이끈다. 어쩌면 수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짓는 공공기관보다, 동네 미디어가 도시 공동체 문화를 복원하는 데 더 큰 효과를 몰고 올지 모른다. 앞으로 주민들이 제작 경비까지 마련해 동네 미디어가 활성화되면 지역 살리기 해법의 단초를 발견하지 않을까? 동네 미디어가 마을 공동체를 대변하고 소통하는 큰 울림통이 되길 기대한다. 동네와 동네 미디어가 희망이다.

정대하 사회2부 호남제주팀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3569.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4:44

초등학교 짝 오지혜를 삼십여년 만에 만났다.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하지만, 지혜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배우이다. 스크린이나 무대에서 지혜는 ‘나 연기 잘해’라고 외치듯 ‘오버’하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어릴 때부터 어법이나 표현이 정확했고, 조지 클루니나 앤절리나 졸리와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사회문제에도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우리나라에서는 배우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마치 ‘별종’처럼 보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부여해준 관심에 따른 당연한 책임이라 본다.)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서 연극과 비즈니스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혜로부터 연극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의견을 들었다. 연극이야말로 초등학교 기초과목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연극이란 학예회 정도로 생각했던 내게 다소 의외였다. 왜 그럴까?


첫째, 연극 한 편을 올리려면 반드시 협동이 필요하다. 인터넷으로 인해 지금의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하다’. 개인의 경쟁력은 우수하지만 사람 사이(人間)의 협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절망적이다. 왕따 현상은 한 사례일 뿐이다. 2010년, 50년 넘는 전통을 가진 미국 시카고의 세컨드시티 코미디 극단에서 즉흥극 교육을 받으며 이들이 혼자 진행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다루지 않는 것에 주목했다. 최소 두 명 이상이 모여 극을 만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며,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왜 대화를 독점하면 안 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둘째, 우리는 스티브 잡스의 영향으로 단순히 기술에만 밝아서는 의미 있는 혁신을 할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연극 공연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대본을 여러 차례 읽게 되며, 이 과정에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연극을 교육에 접목하고 있는 사다리연극놀이아카데미에서 만난 한 중학교 국어 선생님은 연극놀이를 수업에 도입하면서 아이들의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셋째, 연극은 아이들의 다양한 취향을 자극하고, 자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잘하는지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배우 외에도 미술이나 디자인에 관심이 있으면 무대 디자인을, 패션 쪽에 관심이 있으면 의상을, 기획에 관심이 있으면 연출이나 마케팅을, 음악에 관심이 있으면 음향을,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대본을 맡으면 된다. 오랜 기간 알아온 한 글로벌 컨설팅 기업의 임원은 아이가 심한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 연극 수업으로 그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연극이 아이의 자기성찰 및 자세, 자기표현 등 사람에 대한 다양한 것을 가르쳐주었고, 이를 통해 사춘기의 고비를 넘기고 올해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많은 시간과 관심, 엄청난 돈을 영어교육에 쏟아붓는다. 영어는 중요한 도구다. 하지만 한국말 잘한다고 소통 능력이 반드시 높지 않듯 영어를 잘한다고 글로벌 시대에 소통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인재는 영어로 발표를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글로벌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공감하며, 협조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능력 개발은 영어 교육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연극은 훌륭한 교육 수단이 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영어교육에 쏟아붓는 관심과 자원의 10분의 1 미만을 투자해도 비용 대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연극은 ‘영어만큼’ 중요하고 ‘영어보다’ 효과적이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3412.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4:24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 중국 농촌에서는 ‘자본주의 꼬리를 베는 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자류지도, 가축도 ‘사회주의 범위 안’에서만 가꿀 수 있었다. 범위 밖에서 자라는 곡식은 아예 낫으로 허리를 잘라버렸다. “사회주의 풀을 기르더라도, 자본주의 곡식은 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닭이나 오리는 얼마만큼 기르면 사회주의이고 얼마만큼 기르면 자본주의라는 논리도 펼쳐졌다. “빈곤한 사회주의로 살더라도 부유한 자본주의로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공자가 말한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빈곤을 걱정하지 않는다”(君子憂道, 不憂貧)고나 할까. 있는 것이 수치이고, 부를 창조하겠다는 것이 수치였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문화대혁명 때만이 아니었다. 개혁개방에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명제는 바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것이었다. 10여년 동안 걸음마다 논쟁을 벌였다. 이 논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이념이 정립되고 사상 해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이 겪은 ‘사’(社·사회주의)와 ‘자’(資·자본주의)의 투쟁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다 겪었던 과정이다.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사회주의 나라들의 숙명적 과제였던 것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은 오늘까지도 ‘시장경제’를 자본주의로 인식하며 배격하고 있다.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슨 일이나 다 ‘사’냐 ‘자’냐를 따져가며 시시비비를 가린다. 효율이 제고되더라도 ‘자본주의’로 판단되면 멈춰야 한다. 농민들의 적극성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역시 ‘자본주의’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 의한 효과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면 금방 많은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겠지만 역시 ‘자본주의’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결국 북한에 자본주의는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는 고리인 ‘긴고아’와 같은 것이다. 긴고아는 사실상 스스로 발목을 묶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독점물이고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독점물일까? 한국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가 큰 몫을 했다. 역으로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경제가 급성장하였다. 두 나라는 사유제와 공유제로 체제가 다르지만, 모두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상호 조절, 상호 보완하면서 발전을 이룩했다. 계획과 시장은 경제수단이지 체제·이념의 분계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만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사상을 해방해야 할 것이다. 목표는 공동부유이지 공동빈곤이 아닌 것이다.


지난해 세계는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행보에서 “중국의 방법이든, 러시아든 일본이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도입하라고 지시했다”는 데 주목하였다. 일언흥방(一言興邦)이라는 말이 있다, 사고만 바꾸면 나라가 흥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라는 등식을 깨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사고로 중국을 바꾸었다. 북한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선을 보였던 ‘신사고’로 시장경제의 일부분을 사회주의에 ‘편입’시킨다면, 천지개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진징이 중국 베이징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1806.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4:23

1987년에는 영국에서 연구년을 보냈다. 초등학생이던 두 아이도 함께 갔는데 영국 정부에서 수표가 든 편지를 보내왔다. 수표는 두 아이의 매월 간식비라고 했다. 나는 영국 정부가 우리를 이민자로 착각해 보낸 줄 알고 전화를 걸어 돌려주겠다고 했더니, 담당자는 현재 영국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주는 돈이라고 했다. 그 아이들이 다 행복해야 영국 아이들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의 혜택을 받은 내 첫 번째 경험이다. 복지와 관련해 또 하나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 학회에서 만난 동포 한 분이 부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있고, 65살만 넘으면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하고, 구민회관에서 공짜로 춤도 추고 그림도 그린다는 한국은 정말 좋은 복지국가라며 ‘공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국에 이민온 건 잘못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의는 2010년 6·2 서울시장 선거에서 학교급식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며 본격화됐다. 선별적 복지는 기본적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의 국민을 가려내 국가가 기본 생계를 지원하는 제도다. 결핍 상황이 발생한 뒤 사후에 지원을 한다는 면에서 결과적 지원 제도라 할 수 있다. 반면 보편적 복지는 모두가 겪을 수 있는 난감한 상황을 공적 자금으로 함께 해결해가려는 예방적 제도다. 중산층에서 탈락한 이들을 보조하는 단순한 소득 재분배가 아니라 점점 질이 하락하고 해결 가능성이 적어지는 육아와 교육, 질병, 노령, 실업, 산업재해 등의 문제를 시민과 정부가 함께 해결해가려는 정책인데, 마치 공기와 물과 도로를 공유하는 것처럼 사회적 재생산 문제를 공공재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선별적 복지는 개인의 능력을 극히 강조하는 미국에서 발전한 반면, 보편적 복지는 세계대전을 치른 유럽이 새로운 공공재를 만들지 않고는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현재 한국과 같이 중산층이 급격히 붕괴하고 높은 자살률과 과로사, 저출산 등으로 사회적 재생산이 위기에 처한 경우, 선별적 복지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보편적 복지정책을 통해 사회적 소생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달 27일 정부가 발표한 무상보육 지원 건은 매우 중요한 정책이다. 곧 시행될 이 계획에 따르면 만 0~5살 자녀를 둔 부모는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국가에서 매달 지원금을 받게 된다. 어린이집을 이용하면 어린이집 이용료 전액(39만4000원에서 22만원까지)을, 어린이집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만 0살은 월 20만원, 만 1살은 15만원, 만 2~5살은 10만원의 지원을 받는다. 사실 이런 차등 지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고, 이 제도가 잘못 운용되면 ‘유아교육의 획일화’를 촉진할 우려가 높다. 그러나 이 계획이 공적 자원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공생의 감각을 높이고 신뢰사회를 회복해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보편적 복지 원리에 충실하게 실행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를 크게 성숙시켜낼 것이다.


이를 위해 공무원과 시민들도 변해야 한다. 그간의 선별적 복지 체제에 길들여졌던 평가와 감시의 태도는 위험하다. 공무원들은 시민과 함께 공공재를 만들어가는 동반자로서의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육아수당을 받는 수혜자들도 지원금을 단순한 보조비가 아니라 ‘돌봄의 공유지’를 만들어낼 종잣돈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사실상 현재 다수의 보육시설들은 후기 근대를 살아갈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부모들이 선택할 만한 어린이집도 턱없이 부족하다. 공공재를 풍성하게 하는 의미에서 이 제도를 선택했다면 뜻있는 부모와 주변 어른들이 모여 공동육아를 시도하거나 숲 어린이집을 하는 등 다양하고 참신한 시도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하며 기존의 시설도 질적 성장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아동수당 지급을 계기로 극도로 개인화된 우리 사회에 상부상조와 호혜의 관계가 되살아나고, 창의적 공공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장이 열릴 것을 기대해본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1807.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4:11

“프란추차(프랑스 여성) 5페소, 폴라크(폴란드 출신 유대 여성) 2페소, 크레올(유럽계 백인과 현지인 사이의 혼혈) 1페소!”


192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성매매 ‘가격’이다. 양차 대전 사이에 프랑스에서 일부 젊은 여성들은 아르헨티나로 팔려가 성매매를 했다. 특히 유럽에서 더욱 약자가 되어가던 폴란드 출신 유대 여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를 넘나들며 조직적으로 여성들을 알선하고 모집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에게 매겨지는 ‘가격’은 인종에 따라 다시 차등적으로 형성된다.


이 사실은 당시 기자인 알베르 롱드르(Albert Londres, 1884~1932)의 르포르타주를 통해 알려지며 사회적 충격을 안겼다. 롱드르는 성매매가 결국 경제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착취이며 성매매를 통해 여성을 과거의 노예처럼 매매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회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성애자 남성의 지배체제 속에서 여성의 성은 이처럼 꾸준히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성매매를 단지 ‘개인 간의 성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옛날 얘기라고? 요즘은 어떨까.


마침 학술지 <세계개발>의 2013년 1월호에 ‘합법화된 성매매가 인신매매를 증가시키는가’라는 논문이 실렸다. 영국과 독일, 스위스의 연구진에 의해 이루어진 이 논문은 150개국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고 그중에서 특히 세 나라에 대해 사례연구를 했다.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독일이다. 이 세 나라를 대표 사례로 선정한 이유는 각각의 나라가 다른 유형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모든 상업적 성거래가 불법이며 성 판매자는 비범죄화한다. 덴마크는 개인 간의 성매매만 허용한다. 그리고 독일은 제3자가 개입되는 성매매도 합법인 국가로 업주에 의한 고용·알선이 모두 허용되어 유럽에서 가장 큰 성매매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스웨덴이 덴마크보다 인구가 40% 많음에도 인신매매 피해자는 덴마크가 스웨덴의 4배를 넘었다. 또한 스웨덴보다 인구가 10배가 조금 안 되는 독일의 인신매매 피해자는 스웨덴의 62배나 된다. 즉 성매매의 합법화 정도에 따라 인신매매의 비중도 함께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현재 한국에서 성매매 특별법 위헌법률 심판 제청이 이루어졌고, 담당 판사는 결정문에서 “성인 간의 성행위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성매매가 발생하므로 성 판매자에 대한 처벌에는 반대하며, 그 부분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성 판매자를 처벌하지 않는 이유가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성 구매자도 ‘자기결정권’이라는 근거하에 처벌할 수가 없어진다. 결국 ‘개인 간의’ 성매매를 합법화할 위험이 있다.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분석된 사례처럼 현실적으로 합법화는 인신매매를 수반하는 불법시장도 함께 늘리게 된다. 그러므로 성매매 여성이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를 따지기보다 성매매를 합법화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 구매자만 처벌하는 스웨덴 모델이 모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제도적 장치가 성매매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성매매 여성의 인권 보호와 성매매가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혼동하면 안 된다. 절대다수의 구매자가 이성애자 남성이며 절대다수의 판매자는 여성이다. 성매매에서 사고팔리는 것은 ‘성관계’라기보다 돈을 매개로 한 ‘권력’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이 기울어진 권력의 장에 침묵한다면 이는 인권에서 더욱 멀어지는 길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0972.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3:57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들여다보면서 상당히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특별히 국가브랜드위원회를 해체함으로써 장기간 진행해온 한국의 국가브랜드 제고 노력을 저버리는 것이 그렇다.


모든 국가엔 브랜드가 있다. 이탈리아는 패션과 디자인, 스위스는 정확성, 타이는 관광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4대에 걸쳐 인연을 맺어온 필자도 한국의 정체성을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국가브랜드 정립 작업은 우선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면 우리 자신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의 브랜드 정립 작업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과연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각이 정확한가? 그 시각에 한국이 공감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을뿐더러 우리의 경제사회 발전 속도와는 불일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상엔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21세기에도 한국은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전쟁, 빈곤, 북한의 도발, 노사갈등, 국회에서의 주먹다짐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는 한국의 국제적 영향력 발휘에 큰 제약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한 축의 시각이다. 따라서 한국의 상품, 기업 및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의 노력들은 세계시장 잠식을 위한 것들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국가브랜드 분야의 구루(guru·스승)인 월리 올린스는 “대부분은 국가브랜드의 가치가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리드하는 반면, 한국은 유일하게 기업들의 브랜드 가치가 국가브랜드 가치를 훨씬 압도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랜드란 변하는 것이고, 한국에 대해 알게 되는 사람이 늘어나고, 국제사회의 이목을 끄는 국제적 이벤트 개최 등으로 한국의 이미지 또한 개선되고 있다. 한국의 운동선수들, 연주자들, 기업과 상품, 월드컵, 한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 엑스포 및 자유무역협정(FTA) 등은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확실히 높였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국가 이미지를 바꾸고자 한다면 브랜드 정립의 마지막 단계인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길 원하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진솔하고 투명한 토론이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 이후 우리의 국가 이미지 개선 노력은 계속돼왔다. 2002년 월드컵 무렵에는 총리실 주도로 ‘다이내믹 코리아’란 슬로건을 채택·활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국가이미지위원회를 설립해 노력을 이어갔다. 이명박 대통령은 마케팅·언론·문화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립했다.


브랜드위원회는 한국의 국가브랜드 정체성을 파악한 뒤 우리의 메시지를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한국을 홍보하는 민관 기관의 활동을 총괄·조정하여 한국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일관된 한국의 국가브랜드로 정립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한국의 국가브랜드 제고를 민간 자율에 맡길 정도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면서 국가브랜드 가치 제고에 기여해왔다. 그런데 국제적 위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그런 노력을 중단하고 한국의 국가브랜드를 세계가 보고자 하는 대로 방치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열고자 하는 국민행복시대의 폭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



피터 언더우드 국가브랜드위원회 민간위촉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71658.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3:53

언론은 ‘피할 것’이 아니라 ‘활용해야 할’ 대상이다. 각 분야 리더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위기 상황에서도 무조건 피할 일이 아니다. 기자를 피한다고 기사를 안 쓰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나갈 기사라면, 자신들의 입장을 포함시키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진보 세력의 입장에서도 보수 신문은 물론 외신도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확산시킬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론을 ‘활용’할 수 있는 대표적 기회는 인터뷰다.


하지만 기자에 대한 리더들의 인식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 배경에는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경우가 꽤 된다. 그러나 리더 자신이 트라우마를 자초한 경우도 많다. 기자들은 선배들로부터 인터뷰 대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훈련을 받고, 인터뷰에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사전 준비를 하는 반면에, 인터뷰에 임하는 리더들은, 예상 질의응답 보고서 몇 장 읽어보고 인터뷰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우리나라의 리더들이 언론을 좀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많은 시민들은 언론을 통해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자 하고,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예상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론에 대한 이해이다.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서 리더들의 인터뷰를 흥미를 갖고 읽는 편이다. 앞으로 언론 인터뷰를 해야 할 리더들에게 중요한 세 가지를 적어본다.


1. 묻는 말에만 답하지 말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취임 후 고강도 미디어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이데일리 하정민 특파원의 기사에 따르면, 예를 들어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에 대한 생각을 물을 경우, 단순히 “자랑스럽다”는 식의 답변이 아니라, 히딩크 영입을 통해 한국 축구팀이 선전을 한 것처럼, 자신도 유엔 조직의 개혁을 위해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겠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월드컵에 대한 질문을 자신의 업무 관련 계획을 전달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2. 묻는 말에 반드시 답할 필요는 없다?: 2008년 2월 유엔의 자원봉사자로 이라크를 방문한 앤절리나 졸리에게 <시엔엔>(CNN)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인터뷰 주제와 관련없는 그녀의 임신 여부에 대해 묻는다. 졸리는 정색을 하며 “그만해요. 시엔엔에서 나오셨잖아요. 시엔엔의 전통에 맞추어,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응수한다. 그래도 기자가 한 번 더 묻자 졸리는 “제가 꼭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라고 답했고, 기자는 “물론이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그녀의 ‘말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했다. ‘인터뷰의 왕’ 래리 킹 역시 “어느 누구도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질문에 답변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물론 내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물론, 언론의 카메라 렌즈를 손으로 막거나 기자에게 화를 내지 말고, 답하기 곤란한 사항은 당당하고도 ‘친절하게 거부’할 수 있다.


3. 묻는 기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란 ‘기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기자에게 때로 반말이나 폭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 기자는 독자를 대신하여 질문을 하는 것이고, 기자에게 전달하는 말은 물론 표정, 제스처는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인터뷰란 ‘기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의사 결정’만큼이나 ‘의사 전달’은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다. 리더는 ‘대표 대변인’이다. 이들이 더욱 세련되고 활발하게 언론을 ‘활용하길’ 기대한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0607.html

Posted by 겟업
2013. 4. 6. 03:40

서남아시아의 미얀마는 우리에겐 '버마 아웅산 묘지 폭파사건'으로 기억되는 나라다. 당시 북한의 만행에 이범석 외무장관과 김재익 경제수석을 비롯한 17명의 각료와 수행원이 머나 먼 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지 벌써 30년이 됐다. 

우리에게 가슴 아픈 나라 미얀마는 중국에겐 속이 쓰린 나라다. 중국은 미얀마에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념적인 동질성도 한몫 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가 없는 중국에게 미얀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다. 중국은 그 동안 인도양 출구가 없는 탓에 경제성장에 필요한 중동ㆍ아프리카 산 원유와 가스의 대부분을 말라카 해협까지 우회한 뒤 들여왔다. 중국이 무려 25억달러(약 2조8,000억원)를 들여 미얀마의 차우크퓨항과 윈난(雲南)성을 연결하는 파이프를 설치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경우 수송거리를 최소 1,200㎞나 줄일 수 있고 에너지 안보도 크게 높일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그 동안 중국이 적극 지원해 온 군부가 퇴진하고 2011년 테인 세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선 정부가 출범하며 중국과 미얀마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이다. 여전히 군부가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민선 정부는 중국이 투자한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 대해 잇따라 제동을 걸면서 중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민주화 성과도 더디긴 하지만 이어지고 있다. 이런 변화에 호응해 그 동안 경제제재를 통해 미얀마를 전면 압박해 온 미국은 지난해 제재를 풀었다. 급기야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임 이후 첫 해외 순방국으로 미얀마를 직접 찾아 손을 내밀었다. 미국이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뒤 그렇잖아도 심기가 불편한 중국은 이제 가장 가깝던 우방이 가상의 적과 연대하는 것을 눈 앞에서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다. 

미얀마에 대한 뼈 아픈 경험은 중국의 대북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과 미얀마는 비슷한 점이 많다. 먼저 두 나라 모두 사회주의 군사독재 국가다. 미얀마가 중국의 남서쪽 국경과 2,200㎞를 접하고 있다면 북한은 중국의 북동쪽 국경과 1,300㎞를 맞대고 있다. 미얀마가 중국의 인도양 출구라는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다면 북한은 중국의 동해 출구로서 없어선 안 될 존재다. 미얀마와 북한 모두 민족ㆍ자주ㆍ독립 의식이 강해 중국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점도 같다. 

이런 유사점은 중국에게 북한이 제2의 미얀마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더구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오바마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길 원한다는 사실까지 보란 듯이 공개하고 나선 상황이다. 전통적 우방인 미얀마가 미국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데 이어 이젠 한국전쟁에서 수십만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켜온 북한과의 특수관계마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대북제재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지만 미얀마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제재를 풀고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평양으로 띄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얀마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미중의 최대 각축장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북한인 셈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중국이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하며 북중 관계의 변화를 점치는 시각이 적잖다. 중국이 대북정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은 결코 북한의 적이 되려 하진 않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변화에 흥분해 속까지 오판해선 안 된다. 중국에게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중국만 더 북한을 압박해 주면 한반도 문제는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중국은 누가 뭐라 하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결국 우리의 일은 우리의 손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원칙이 새로운 출발점이 돼야 한다.



박일근 베이징특파원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3/h201303180231108490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9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가슴이 따뜻하게 아릿했다. 사연은 이랬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미국 40사단 참전용사 다섯 명이 나흘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아와 경기 가평의 어느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지팡이를 짚고 61년 만에 한국 땅에 찾아온 그들은 바로 그 고등학교를 지어준 은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현역장병과 참전용사가 모은 장학금 1,000달러를 장학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먼 길을 나서 자신들이 지은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의 졸업식에 찾아온 이들의 정성도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나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 건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1952년 전쟁이 한창인데 당시 가평에 주둔했던 미 40사단장의 눈에 번쩍 뜨인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에서 천막을 치고 무려 150여명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부하는 모습에 감동한 그는 부대로 돌아가 장병들에게 이야기를 해줬고 1만5,000여명의 장병들이 2달러씩 돈을 모아서 그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지어주기로 했다. 공병부대가 나서 건물을 지었다. 여기까지는 당시 전쟁에서 가끔 보던 장면이다. 감동은 바로 그 다음 대목이다. 

학교를 다 짓고 나서 학교 이름을 사단장 이름으로 하자는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 조지프 클레란드 장군은 정중히 사양했다. "처음 전사한 내 부하의 이름이 마땅하다." 얼마나 큰 그릇인가! 보잘것없는 일 하면서 제 이름 남기려 혈안인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의 말 한마디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의 부대에서 처음으로 전사한 부하가 당시 19세의 소년병 케네스 카이저 하사였다. 그래서 카이저 학교로 정해진 것이다. 주민들이 '가이사'라고 부르는 대로 따라 '가이사 중학원'이 되었단다. 그게 지금의 가평고다. 클레란드 장군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연금 일부를 가평고에 장학금으로 전해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의 부인이 그 뜻을 따랐다 하니 그의 깊은 인품이 느껴진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누구나 제 이름 남기고 싶어한다. 때론 헛된 이름 남기려고 온갖 추태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의 인사 파동을 통해 그런 모습을 너무나 선연히 보지 않는가. 사실 표범은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기 쉽다. 그 헛된 이름 남길 욕심이 그의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모범이 되어야 할 처지에 있는 이들이 오히려 나쁜 선례만 만들어내고 있으니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영국의 국립묘지에는 어린 소대장의 무덤이 가장 많다던가? 대부분 귀족 출신인 이들 젊은 장교들은 전시에 자진 입대해서 공격의 선봉에 서다 가장 먼저 죽는 경우가 많았단다. 그게 바로 노블리세 오블리쥬다. 귀족에 대한 존경은 그렇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노블리세 '노' 오블리쥬만 누린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노블리세를 탐하면서 정작 의무는 외면한다. 어쩌면 그 의무를 외면하기 위해 그렇게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영국이 입은 가장 큰 손상은 폭격에 의한 파괴도 엄청난 전쟁 비용도 아니었다.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젊은 엘리트들이 전쟁 중에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손실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지도층의 희생이 있었기에 영국을 의연하게 만들었다. 

노병들이 61년 만에 찾은 학교와 학생들을 보고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단장 클레란드 장군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의 발의로 모금하고 건설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사양하고 어린 나이에 먼 나라에 와서 처음 전사한 자신의 부하의 이름을 선택한 그의 인품을 기억했을 것이다. 인격의 향기가 이 겨울 매화 향처럼 깊고 진하다. 이름값 하고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 따뜻한 감동을 느끼면서 새삼 느꼈다. 천막 학교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학교 이름에 깃든 그의 겸손함,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녔던 학생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인사 파동에 회자된 이들과 부끄럽게 대조된다.


김경집 인문학자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8

패랭이꽃그림책버스가 벌써 10년이 됐다고 했다. 2004년 5월에 폐차 직전이었던 버스 1대를 구해 시작했으니, 10년이 지난 지금 진짜 폐차할 때가 됐을 법하다. 이 그림책버스를 만든 이상희씨를 마침 설 직전에 만나 '그래 어떡할 거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제 '그림책 도시'를 꿈꾸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림책 전문 꼬마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패랭이꽃그림책버스는 빼어난 여성 시인이자 출판편집자이자 100권이 넘는 외국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한 이씨가 스스로 그림책에 빠져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싶다는 백일몽 같은 꿈을 꾸면서 만들어졌다. 그 꿈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이야기하자 놀랍게도 버스를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 버스에 예쁘게 색칠을 해 주고 그림책을 기증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씨의 그림책 교실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은 버스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패랭이꽃그림책버스가 지방 도시 원주에서 문을 연 이후 10년 동안 그림책 읽기는 우리 독서문화의 한 줄기가 됐다.


원주와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이씨는 사실상 무작정 그곳으로 가서 패랭이꽃그림책버스로 그 도시에 하나의 문화를 일군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원주를 그림책 도시로 가꾸고 싶다는 꿈을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가 꿈꾸는 그림책 도시는 세상 모든 그림책을 볼 수 있는 그림책도서관이 있고, 그 1층 로비에 패랭이꽃그림책버스를 옮겨 놓고, 도서관 주변에는 그림책 전문인력 교육관, 그림책 작가 지망생을 위한 그림책학교와 그림책작가마을, 관광객들을 위한 그림책호텔, 그림책 속의 빵과 요리를 만드는 그림책빵집과 그림책음식점, 그림책에 나오는 시공간을 재현한 그림책놀이공원, 그림책으로 노년의 몸과 마음을 쉬어가는 그림책휴양마을이 있으며, 2년마다 열리는 그림책비엔날레 등 그림책 축제가 펼쳐지는 곳이다.

정말 동화같은, 백일몽같은 이야기인데 이씨는 그림책도서관을 만드는 것부터 실현하고 있는 듯했다. 사회적기업 아이디어가 그 원동력의 하나가 됐다. 지역사회 발전 및 공익 증진이라는 사회적기업의 설립 목적은 이씨의 꿈과 그대로 들어맞았고, 원주시도 이씨의 꿈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허다하게 생겨났다 거품처럼 사라지는 지방의 각종 '축제'들, 관광객 유치나 경제적 수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이벤트성 축제보다 지역사회에도 인문정신을 북돋우고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정신의 축제가 필요하다는 이씨의 구상에 원주시의 공무원들도 '넘어간' 모양이다. 근래 각종 지원을 노리고 얄팍한 계산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기업들도 많지만, 좀체 현실적 기반을 마련하기 어려운 좋은 아이디어에 대한 지원은 사회적기업 제도의 큰 장점이다. 이씨는 지역형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그림책 도시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꿈을 꺼내놓으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쌍수를 들고 말릴 줄 알았다. 주위의 꿈쟁이들이며 시인 작가들이야 박수를 치고 신나할 줄 알았지만, 틈틈이 그림책을 선물하고 읽어 줬던 기업가 의사 검사 교수 정치가 언론인들도 동참하겠다며 흥분했다. 문화인력 고용 창출,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 지적 자산과 문화력 생산, 사회적 불균형과 세대간 불화 치유에 도움이 되겠다면서." 그러니까 평소 몽상하기 좋아하는 '꿈쟁이들' 말고도, 일과 돈에 쫓기고 경쟁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도 사실 그런 꿈을 꿀 생각을 못했을 뿐 그 꿈의 내용은 함께 소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림책 도시 이야기를 이씨로부터 들으면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2,900만명이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한다는 설날, 우리 모두 귀성길에 나름대로 고향을 위한 꿈을 한번 꿔보면 어떨까 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다. 뭐 꼭 태어난 고향이 아니라도 좋다. 부산이 고향이지만 서울서 살다 원주로 가서 꿈을 현실에 구현하고 있는 이씨처럼, 꿈꾸는 자의 세계는 그대로 그의 새로운 고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2/h201302090235172438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7

미국에서 잦은 총기사건이 들릴 때마다 예전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 당시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한인상점을 비롯한 LA 도심 곳곳이 불에 타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도처에서 간단없이 총성이 들렸다. 한국해병전우회 등 군 경험이 있는 교민들이 폭도들과의 총격전에 대비, 한인가(街) 식당지붕 등지에 올라가 거리를 향해 샷건(shot gun)을 겨누었다. 서울에서 급파돼 취재하면서 마치 종군기자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이후에도 치안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차 탈 때마다 안에서 문을 잠그라는 조언을 들었고, 건물 앞에서 잠깐 담배를 피울 때도 "지나가면서 괜히 총 쏘는 놈들이 있다"고 안으로 끌어당겨졌다. 초등학교에 금속탐지기가 설치된 것도 이때였다. 학부모가 TV에서 "도대체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총 맞을 걸 걱정해야 하느냐"며 울분을 터뜨렸고, 주(州)방위군을 치안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신문에 실렸다. 모두가 총 때문이었다. 

■2007년 33명이 숨진 버지니아공대, 지난 연말 어린이 20명이 희생된 샌디훅 초등학교 참사를 비롯해 미국의 크고 작은 총기사건은 거의 하루도 빠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총기규제에 미온적인 현상은 실로 불가사의다. 오바마의 호소로 일부 전향적 법안들이 나오고 있지만, 구매자 신원확인 강화나 반자동 소총 등 대량살상용 무기 제한 등이 고작일 뿐 총기소지 자체를 문제삼진 않는다. 흔히 말하듯 전미총기협회(NRA)의 로비 탓만도 아니다.

■총기규제 반대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민병대 조직과 무기소지 권리를 명시한 미 수정헌법 2조다. 많은 이들이 이 권리를 천부적 자연권으로 받아들인다. 급박한 위해에 맞서는 마땅한 자위권의 행사이자,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저항권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거의 결론 나지 않는 철학적 사안이다. 가장 발전한 국가라는 미국이 국민안전을 개인 총기에 의존하는 2세기 전 건국기(期)의 무법적 상황인식에 여전히 갇혀있는 건 이만저만한 아이러니가 아니다.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2/h201302082011132444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6

네 메일을 받고 한참동안 답장을 못했다. ‘졸업이 실업’이라며 낙담한 네게 어설픈 위로라도 전하려다 이내 접고 말았어. 잘 포장된 위로상품이 시장에 지천이기 때문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을 너도 이젠 믿지 않겠지. 아파도 너무 아프니까 말이야. ‘이젠 뭘 더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너의 막막함을 읽으면서, 지난여름 졸업사진을 찍을 때의 기대에 찬 네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너를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사람이 자동차도 아닌데 스펙 쌓으라 하니, 토익이다 뭐다 웬만한 스펙은 다 만들어 놨었지. ‘스펙보다 스토리’라는 취업성공수기가 떠돌자, 너는 불안한 마음에 아르바이트로 모은 금쪽같은 돈을 스토리 만드는데 투자하기도 했지. 멘토를 찾아 조언도 구했고, 인문학 서적도 열심히 읽으며 멋진 사회진출을 준비한 너였는데, 졸업을 앞둔 네게 우리사회는 비집고 들어갈 조그만 틈도 주지 않는구나. 네가 느낄 막막함이 얼마나 클까.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세대는 공허한 위로는 건넸을망정 한 번도 너희세대에게 사과하지 않았구나. 나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니 소위 486세대다. 민주화라는 역사에 편승해서 그 과실을 모두 향유했던 운 좋은 세대지. 누구나 쉽게 취업해 괜찮은 연봉을 받았고, 노동조합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를 비판하는 위선도 떨었다. 독재만 타도되면 되는 줄 알고, ‘좋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고민하지 못했어. 독재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시장은 꽤 괜찮은 것이라 믿었고, 그 무지로 인해 결국 천박한 시장주의가 판치도록 방치하고 말았어. 능력도 패기도 우리보다 출중한 너희세대에게 괜찮은 일자리 하나 제대로 못주는 허약한 경제를 만든 책임은 우리세대에게 있다. 더 큰 잘못은 우리사회의 정신이 부박해져감에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어린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 배웠던 우리는, 국가가 우리를 인재로 호명하며 경제성장을 위한 인적자원으로 개조할 때, 그저 아무생각 없이 따라가기만 했다. 성장은 인적자원인 내가 잘나서 이룩된 것인 줄 알았고, 그 과실을 맘껏 소비하는 게 자유이자 선(善)인줄 착각했다. 국가의 자리를 자본이 대신한 지금에도 ‘자기계발형 인간’이 되길 강요하는 엇비슷한 이데올로기는 여전하다. 자기계발의 본래 가치마저 부정할 수야 없지. 그러나 자본에 의해 제조된 자기계발형 인간은 목적을 상실한 이기적 주체일 뿐이며, 자본에 의해 늘 이용당하는 객체란 사실을 이제야 겨우 눈치 챘다. 

허약한 민주주의, 무능한 경제, 부박한 정신을 물려준 우리세대는 진지하게 먼저 사과했어야 옳았어. 성찰이 담긴 사과가 새로운 전망과 대안을 함께 찾을 수 있는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는데, 답도 없는 허술한 위로를 건네느라 시간만 허비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아. 곧 새 정부가 들어서지만 기대할 만한 게 없어 더욱 그렇다. 붕어빵 같은 스펙기반 채용에서 벗어나 열정과 능력만으로 선발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계획만 봐도, 열심히 자기계발하고 결과는 알아서 책임지라는 낡은 강요는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대학을 창업기지로 만들어 너희 후배들을 기업가로 양성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지금의 곤란을 타개하려면 함께 해야 한다. 그때만이 우리세대의 실패가 자산이 되고 너희세대의 열정과 창의가 원동력이 될 수 있어. ‘이젠 무엇을 해야 할지’라는 네 질문에 대한 답도 그때 비로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당부는, 지난 대선과정에서 너희세대가 보여준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넓혔으면 좋겠다. 새 정치를 만들지 않고서는 전망과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졸업을 앞두고 상심한 네게 선생이랍시고 건네는 말이 고작 ‘미안하다’는 말이구나. 그러나 약속하마. 다음엔 꼭 전망과 대안을 담은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때까지 졸업 축하 인사는 미뤄야 할 것 같다. 어디에서든 건강하길.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2/h201302072100442437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4

한미 FTA가 작년 3월에 발효되었고 이어서 한중FTA 협상이 시작되었다. 올해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을 전망이다. FTA는 국가간에 무역을 더욱 자유화하여 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FTA는 긍정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부작용도 있기에 적절한 대처방안이 없이 진행하면 오히려경제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FTA가 경제 전체에는 이익을 준다고 해도 그로 인해 손실을 입는 사람들이 있다. 본래 시장이 자유화되면 경쟁력 있는 분야에는 더 이익이 되고 경쟁력 없는 분야는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한미 FTA에서도 수출산업인 자동차산업은 이익을 얻지만 수입산업인 농산물 분야에서는 큰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농민들은 결사적으로 이에 반대하였다. 그런데 장기적, 거시적으로 생각하면 분야별 손익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한미FTA 협상 과정에 나타난 극심한 반대 이면에는 양극화 심화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로 인한 소득불평등이 한미FTA에 따라 더 심각해지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중FTA는 양극화라는 면에서 한미FTA보다 더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헥셔-올린' 무역이론에 따르면, 자본이 풍부하고 노동이 희소하여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이 그 반대 상황인 국가와 무역을 하면 미국 노동자들이 손실을 입게 된다. 저임금을 이용하여 생산된 물건이 미국에 많이 수입되면 미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임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미국 정치인들이 자유무역에 대해 비판하고 한국이나 중국 등으로부터의 수입에 대해 규제할 것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이러한 논리를 한중FTA에 적용해보면, 한국은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나라이기 때문에 무역이 자유화될수록 한국 노동자들 특히 비숙련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중FTA 협상에서 중국은 인력이동 자유화, 농수산물시장개방 등을 요구하고 한국은 자동차 석유화학 고급가전제품 등의 시장 개방에 중점을 두는 것을 보아도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대중국 무역 비중이 2012년 기준 약 20.4%로서 대미 무역비중 9.3%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에 한중FTA는 한미FTA보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클 것이다. 따라서 무역자유화로 인한 이익이 큰 만큼 양극화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또한 클 것으로 예상된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는 특정 산업 분야에서 소수 대기업 중심으로 수출이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최근 경제구조 변화로 인해 수출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수출이 자본집약산업 위주로 변했기 때문에 고용효과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아웃소싱으로 인해 수입중간재를 많이 이용하므로 국내의 타 기업들에 대한 낙수효과가 적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탓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고환율, 감세 정책으로 대기업을 지원하여 수출증가를 통해 고용 및 소득증가를 이루고자 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책은 결국 경제의 집중과 양극화 심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한중FTA도 자칫 잘못되면 수출분야와 수입분야의 양극화, 동일 산업 내에서도 대기업과중소기업의 양극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새 정부는 중소기업을 중시하고 수출과 내수를 동시에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경제를 운용하겠다고 한다.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의 대기업수출은 자율적으로 하도록 놔두고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한중FTA의 협상과정에서도 그대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대기업이 거둘 수 있는 과실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고용유발효과가 큰 산업이나 중소기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협상에 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근엽 충남대 경상대학 교수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2/h201302040231392437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3

하나의 가상적 상황. 당신이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난다. 다른 일정도 많은 바쁜 날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일찍 서둘렀고, 약속된 카페에 제 시간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그 친구는 아직 오지 않았다. 5분을 기다리고 10분을 기다린다. 그래도 오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아직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생각하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20분이 넘어간다. 이런 경우에는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하든가 혹은 문자 정도는 보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니 은근히 서운하고 화가 난다. 전화를 하려는데 마침 그 친구가 나타났다. 

그런데 당당하게 자신의 커피를 주문하는 이 친구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전혀 배어 나오지 않는다. 서운하다. 은근히 화가 나기까지 한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차가 많이 막혔나? 오는 길에 조금 늦는다고 문자 하나는 보내는 게 좋았잖아” 정도는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이를테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 사이에 20분이 넘게 지각을 하면서 미리 연락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이야기한다면, 그 순간부터 윤리적 비판의 칼날은 당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상대방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당신은 순간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그가 저지른 잘못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도한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 상대방이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판단이 일단 내려지면 이는 자신이 상대방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놓이게 되었다는 자의식으로 이어진다. 이를 일종의 윤리적 교만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부터 쉽게 이 지위를 남용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고 적합한 비판의 한계를 넘어선다.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경적소리를 요란하게 울릴 때는 단순히 앞차가 느리게 간다거나 진로를 방해하는 경우가 아니다. 앞차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 판단했을 때 경적을 자신 있게 눌러대며 타인을 비난한다. 자기만 빨리 가겠다고 이른바 꼬리 물기로 교차로 안으로 들어와서 다른 차량의 통행을 방해한다든지 아니면 차선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차들 앞에서 갑자기 끼어들기를 시도한다든지 하는 등 ‘이기적’으로 규정된 행동들이 다른 운전자들의 격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타인을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잘못을 단순한 일회적인 실수로 여기지 않는다. 해석에 해석을 거듭하고 숙고에 숙고를 더하여, 내가 마주친 상대방의 부도덕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적인 결함이 표현된 결과라는 자의적인 해석에 이르게 된다. 만일에 동일한 잘못을 내가 저질렀다면 그것은 거의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잘못은 일회적인 실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부도덕은 특수화시키고 타인의 부도덕은 일반화시킨다. 이것이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타인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의 뜻이다. 

일정한 나이가 지나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타인의 판단은 대개의 경우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외모나 교양이나 학식이나 재능에 대해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수준에 대한 평가의 영역에서 나 자신에 대한 평가와 타인에 대한 평가는 가장 많이 달라진다. 

그러나 윤리는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윤리는 지극히 상호적인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보편적인 기준을 정확히 적용하는 것이고, 나의 기준을 그대로 타인에게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윤리적 격률인 ‘황금률’로 표현되어 왔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 그것이 도덕에 대한 가장 본래적인 통찰 중의 하나이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니 시키지 않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원하니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만 특별히 도덕적 가중치를 부여하는 사람, 그것이 비윤리적인 사람의 본질이다. 모든 사람은 특수하지만 그 누구도 특별하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1/h2013012821005612176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30
앞서 '박근혜 당선인이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한국일보 1월 12일자 '토요에세이')을 쓴 뒤 독자들의 댓글이 수십 통 제 메일함에 입전됐습니다. 우선 한 언론사의 파리특파원을 역임하신 K씨의 글을 제 답신과 함께 띄웁니다.

"수년 전 싱가포르에 갔는데, 아파트 승강기마다 '오줌 감식기'가 부착돼있어 놀랐습니다. 또 몇 해 전 마이클 페이라는 미국의 한 청소년이 싱가포르에 들러 스프레이 페인팅을 담벼락에 뿌린 적이 있습니다. 싱가포르 법원은 그에게 '태형'(笞刑) 6대를 판결했습니다. 미국은 특사를 보내 긴밀한 협의 끝에 '태형 4대'로 형을 낮췄습니다만. 태형을 때리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습니까?"

한마디로 이게 과연 사람 사는 나라인가라는 질문이신데, 건국초기 싱가포르가 처했던 상황에 관해 리콴유가 자서전 <싱가포르 이야기>(TheSingapore Story)에 남긴 기록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아파트를 분양한 뒤 돼지와 함께 사는 국민이 많았고, 씹던 껌을 승강기버튼이나 센서에 붙여 엘리베이터나 전철의 작동이 멈춘 사례도 많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변을 보는 건 약과였다는 이야기지요. 다음은 미국 청소년 마이클 페이에 관한 리콴유의 언급. 

"페이는 넉 대의 태형을 받고 미국으로 귀국하더니 술 취해 귀가 후 아버지를 구타한 죄목으로 체포됐다. 그러더니 부탄가스를 마시다 성냥불에 가스가 폭발, 중화상을 입었다고 미국 언론은 보도했다." 

리콴유의 설명대로라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인구의 5%는 통제 불능인바, 이를 단속할 해법은 엄한 징치와 격리수용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미국에서도 중형으로 다스리는 밴달리즘이 싱가포르에서 면제돼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미 측의 석방요청을 끝내 거절한 것은 싱가포르의 위엄과 국격을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글 역시 모 경제일간지 사장을 역임하신 언론인 L교수의 글입니다.

"리콴유는 화상(華商)의 주류를 형성하는 객가(客家)출신으로, 권력의 기반을 (마오쩌둥처럼)총구(銃口)가 아닌, 전구(錢口)에 뒀던 사람입니다. 객가들은 돈을 제일 무서워한다지 않습니까?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것도 벌금대상이더군요. 배부른 비둘기가 벌레를 잡아먹지 않게 함으로써 질병을 퍼뜨린 죄라나요. 그의 공로는 전설에 해당하지만 이 시대에 맞는 민주적인 지도자는 아니잖습니까? 따라서 박 당선인이 우연히 싱가포르에 들려 리콴유를 만나는 건 괜찮지만, 굳이 우선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잖습니까?"

싱가포르의 권력기반은 전구에 있지 않습니다. 굳이 비유한다면 법구(法口)에 가깝습니다. 싱가포르가 건국된 1965년 전후의 시대적 배경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5ㆍ16이 나고 4년 후 되는 시점으로, 동아시아전역이 월남전의 후폭풍에 말려들어 언젠가 공산화 될지 모른다는 '도미노'이론과 그 극복을 핑계로 (우리가 5ㆍ16을 겪은 것처럼)'대령(大領)들의 쿠데타'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싱가포르의 경우 공산세력의 준동과 제로상태의 국방력, 여기에 돈만 알뿐 국적의식 없이 우왕좌왕하는 국민성(화교)까지 겹쳐 적화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리콴유가 최후로 기댄 치국의 틀이 바로 법치(法治)였습니다. 비리와 부정의 근절, 외국자본이 맘 놓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지금은 일본보다도 개인소득이 높은 아시아 최고의 부국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으로 제 답신을 마칩니다. 돈은 싱가포르의 경우 목적이 아니라 결과물이었습니다.

답신을 올린 김에 박근혜 당선인에 대한 리콴유의 언급도 함께 붙입니다. "1979년 10월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 영어를 할 줄 아는 그의 20대 딸의 통역으로 대화를 나눴다. 박 대통령은 날카로운 얼굴에 작고 강단 있게 생긴 분으로 엄격해 보였다. 그가 일본군의 장교로서 선택되어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로 미뤄, 같은 세대의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인재였을 것이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1/h2013012521024611578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28

지지난 주엔 아내 혼자 극장에 나가 ‘레미제라블’을 보고 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을 키우는 입장에서 부부 동반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뽀로로가 아이들 앞에서 갑자기 커밍아웃하거나 혹은 진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인지라, 아내에게 선심 쓰듯 먼저 양보한 것이었다. 웬일이래? 아내는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예매한 표를 받아들었지만, 정작 상영시간 세 시간 전부터 아이들 저녁밥을 차려준다, 일찍 목욕을 시킨다, 부산을 떨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 네 시 삼십 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내는 현관문을 나서기 전 그렇게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일은 무슨? 나는 마치 일상적인 일인 양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아내가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 순간부터,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네 시간 가까이, 나는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바로 그 토마스가 되었다가, 다시 ‘파워레인저’에 나오는 블루도 되었다가, 인간 자동차도 되었다가, 시소 인간도 되었다가, 그러다가 그만 거실 한가운데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널브러진 내 등 위에서 아이들 셋은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는 시늉을 하며 또 어딘가를 향해 나아갔고.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라는 표정을 하곤 삽시간에 주변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들어가 양치질을 시키기도 했고, 아이들 손에 통 하나씩 들려주고 각자 장난감을 정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상에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프라이팬  검은콩처럼 요란하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접시 위에 놓인 새침하고 얌전한 두부 한 모로 변해버렸다. 이건 뭘까? 나는 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을 사이에 놓고 안방에 누운 채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영화 좋았어? 아내는 막내의 등을 토닥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들 생각나서…어디 집중할 수가 있어야지. 그러면 중간에 그냥 나오지 그랬니, 라고 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한데 참 이상하지? 아내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는데, 왜 변하는 게 없지? 아내는 그러면서 영화가 끝났을 때 자기 앞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 두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까지 치더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들 공감하고 다들 이해하면서도 왜 이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는 걸까?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멀뚱멀뚱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작년에 보았던 ‘두 개의 문’이라는 다큐 영화를 떠올렸다. 용산 참사를 다룬 그 영화는 다큐멘터리치곤 이례적으로 많은 관객을 모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는 뜻이리라. 한데도 용산 참사는 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공감은 많되 상황은 바뀌지 않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다가 말이야… 아내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바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까, 그게 딱 나인 거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거야.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애들 생각을 하는 나, 남편 생각을 하는 나. 아내의 말인즉슨 우리들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감이란,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감은 아닐까, 그 뜻이었다. 자신은 안전하다는 공감, 가족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공감. 그게 우리들의 공감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공감일까? 나는 잠자코 아내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두려움에 대한 공감, 이라는 말을 속으로 작게 덧붙였다. 그나저나 그 영화 왜 다 뮤지컬로 만들어졌는지 알아?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누가 그러더라고. “가난한 것들, 이런 식으로라도 뮤지컬 봐라.” 아, 그 말엔 또 얼마나 공감이 가던지. 나는 아내 먼저 영화를 보게 한 후,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그 영화를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그럴 순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1/h201301232100408192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25
워싱턴 포스트 기자 댄 모건이 1979년에 펴낸 <곡물상인들>(merchants of grain)이란 책에는 미국 루이지애나 주 농민들이 헨리 키신저야말로 '최고의 세일즈맨'이라고 환호하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들이 생산해서 남아도는 쌀을 키신저가 해외에 가장 잘 팔아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키신저가 쌀장수를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 국무장관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잉여농산물을 해외에 내다파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가 정부조직 개편작업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외교통상부의 기능축소다. 통상교섭 기능을 신설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국회의 심의 의결 과정을 남겨놓고 있기에 섣부른 예단은 않겠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는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돌려놓는 일이다.

통상교섭 기능이 산업자원부(구 상공부)에서 외교부로 옮겨 온 것이 김대중(DJ) 정부 때의 일이다. 나는 DJ정부의 치적 가운데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면 통상교섭 기능을 외교부로 옮겨 외교통상부로 확대 개편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오늘날 외교 업무 가운데 70~80%이상은 통상 등 경제관련 업무다. 경제에 관한 한 식견을 가진 DJ의 선견지명이다. 

특히 무한경쟁 상황에서 국가간 통상교섭 업무는 고도로 숙련된 통상전문 외교 인력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제적인 추세도 그렇다. 외교부에 통상교섭 업무가 주어진 이래 우리는 많은 실익을 챙겼다. WTO(세계무역기구) 체제에서 선제적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로 수출시장을 착착 확보해왔다. 정부조직을 대폭 손질했던 이명박 정부도 통상교섭 업무가 외교부에 있는 현 상황에 손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실물경제라도 경제를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의 소관 업무 조정은 미래를 내다보고 또 과거도 돌아 볼 줄 아는 안목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단견이나 부처이기주의에 매몰되면 국가의 대계를 망치게 된다.

해외출장 중에 김성환 외교통상장관이 급거 귀국했다고 한다. 인수위를 설득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 장관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도다. 경제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외교부에 몰려들도록 해야 한다. 경제 마인드나 경제부처 경험을 가진 이들이 외교업무에서 역량을 발휘한 사례는 많다. 외무고시 7회 출신만 해도 세 사람이 있다. 

미국 FMS(해외군사판매)차관에 의한 신무기 도입 등 국방부 업무가 국제화할 때 최광수 전 외무장관은 국방부 차관보로 징발됐다가 차관을 지내고 돌아 온 일이 있다. 그에 앞서 황병태 전 국회의원은 외무부에서 근무하다 경제기획원으로 징발돼 5개년 경제개발을 위한 외자도입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 노태우 정부 땐 최호중 전 장관이 상공부차관으로 발탁됐다가 뒤에 장관으로 돌아온 일이 있다. 

통상이든 무엇이든 대외교섭 업무는 외교부에 맡기는 것이 최상이다. 그간 우리나라도 외교 현대화 계획을 활발히 논의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미 국무성처럼 우리의 외교부를 초 실세부서, 즉 '슈퍼 미니스트리'로 만들자는 게 요체였다. 부존자원 하나 변변치 않은 나라, 경제의 해외의존도가 90%가 넘는 나라에서 앞으로 살아갈 길은 이 길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부처이기주의에 함몰돼 좌초되고 말았다. 외교부의 역할이 더욱 필요한 때에 외교부의 힘을 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외교부 강화는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외교통상부에서 통상교섭 기능을 떼 낸 것은 재검토 되어야 한다.




노진환 전 한국일보주필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1/h2013012321022924060.htm&ver=v002




Posted by 겟업
2013. 4. 6. 03:24

강원 평창의 작은 산골마을 고길리의 보건소는 조금 특별하다. 여느 보건소와는 달리 여성 보건소장이 마을의 어머니, 할머니들에게 열심히 ‘춤바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특유의 추운 날씨로 인해 운동부족으로 건강이 취약해지기 쉬운 겨울철 농한기에 마을에 사는 부녀들을 대상으로 건강증진교육 차원에서 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음악과 함께 춤을 추면서 움직임을 유도하고 노래까지 따라 부르다 보니 웬만한 운동 못지않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쯤 되면 무용인지 체육인지를 굳이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를 위해 보건소장은 청춘가, 해뜰 날, 뱃노래, 칠리차차 등 음악도 직접 고른다. 그리고 안무를 짜서 본인이 한번 해본 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율동으로 만들고 함께 연습을 한다. 그리고 기왕에 춤추러 다 같이 모인 김에 자연스레 혈압과 혈당도 체크하고 금연, 절주 등 질병예방이나 관리에 대한 보건교육을 실시한다. 건강교육 받으러 오라면 어려워하실 분들이 이렇게 함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건강증진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어디 아프고 다치면 약타고 응급처치 하러 가는 곳으로만 알았던 보건소는 이제 마을의 문화공간이자 여가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에는 본인들의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는 활동도 많아졌다. 읍내의 의료원 주최 행사에 작은 발표회를 시작한 게 계기가 되어 최근엔 아예 유니폼까지 맞추고 본격적으로 공연도 하게 되었다. 봄마다 열리는 마을축제 ‘감자꽃봄소풍’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을축제를 찾은 수많은 방문객과 관광객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축제장의 흥을 돋아 운동장 객석을 휘어잡는다. 크리스마스에는 보건소와 인접한 다섯 개 마을의 주민들이 각자 준비한 공연으로 만드는 ‘성탄극장’에서 늘 새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지역의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시니 재능기부나 봉사가 따로 없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우리가 언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려 보겠냐며 즐거우시다. 아이들의재롱잔치를 즐기실 나이에 오히려 손자뻘 되는 아이들 앞에서 능숙하게 춤솜씨를 보여주시니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자식은 늙으신 어머니의 춤바람에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멀리 타국에서 시집와 고된 농촌생활에 힘든 외국인 며느리도 이 일만큼은 신난다. 억지로 배우는 어려운 한국무용이 아니라 신나고 금방 즐길 수 있는 춤이라 재미있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말이 서툴러 춤추러 나간다니 무슨 진짜 춤바람 난 줄 알고 기겁을 하고 ?아왔던 신랑의 표정이 선한 데 이제는 당당하여 거리낄게 없다. 

이런 활동으로 마을 부녀들에게 조용한 변화가 생기는 것도 감지된다. 수다와 고스톱이 다 일수 있는 이들의 여가는 훨씬 활기차고 즐거워졌다. 할머니들 좋으라고 한 일인데 뜻밖에 며느리들이 더 좋아한다는데 알고 보니 춤추는 시어머니는 잔소리가 훨씬 줄었다고 반색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소 우울해 하던 분들도 기운을 차리시고 일상이 훨씬 밝아졌다 한다. 전에는 마을의 중요한 회의가 있어도 이장과 남자 어른들이 말하는 거 조용히 지켜보면서 밥하고, 상 차리고, 설거지 하는 게 다였던 어머니 할머니들이 이제는 마을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동참한다. 

문화적 혜택이나 예술의 향유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던 농촌에서도 문화예술을 통해 새로운 활기를 찾고 공동체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꼭 유명한 예술가가 살지 않아도, 번듯한 시설이나 기자재가 부족해도, 그리고 큰 지원이 없어도, 마을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문화를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드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어디서나 문화적인 활동은 여성이 더 적극적이고 주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농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춤바람이라면 널리널리 퍼져도 문제될 게 없을 듯하다.




이선철 용인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1301/h20130125210414121770.htm&ver=v002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