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6. 03:39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가슴이 따뜻하게 아릿했다. 사연은 이랬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미국 40사단 참전용사 다섯 명이 나흘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아와 경기 가평의 어느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지팡이를 짚고 61년 만에 한국 땅에 찾아온 그들은 바로 그 고등학교를 지어준 은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현역장병과 참전용사가 모은 장학금 1,000달러를 장학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먼 길을 나서 자신들이 지은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의 졸업식에 찾아온 이들의 정성도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나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 건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1952년 전쟁이 한창인데 당시 가평에 주둔했던 미 40사단장의 눈에 번쩍 뜨인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에서 천막을 치고 무려 150여명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부하는 모습에 감동한 그는 부대로 돌아가 장병들에게 이야기를 해줬고 1만5,000여명의 장병들이 2달러씩 돈을 모아서 그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지어주기로 했다. 공병부대가 나서 건물을 지었다. 여기까지는 당시 전쟁에서 가끔 보던 장면이다. 감동은 바로 그 다음 대목이다. 

학교를 다 짓고 나서 학교 이름을 사단장 이름으로 하자는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 조지프 클레란드 장군은 정중히 사양했다. "처음 전사한 내 부하의 이름이 마땅하다." 얼마나 큰 그릇인가! 보잘것없는 일 하면서 제 이름 남기려 혈안인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의 말 한마디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의 부대에서 처음으로 전사한 부하가 당시 19세의 소년병 케네스 카이저 하사였다. 그래서 카이저 학교로 정해진 것이다. 주민들이 '가이사'라고 부르는 대로 따라 '가이사 중학원'이 되었단다. 그게 지금의 가평고다. 클레란드 장군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연금 일부를 가평고에 장학금으로 전해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의 부인이 그 뜻을 따랐다 하니 그의 깊은 인품이 느껴진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누구나 제 이름 남기고 싶어한다. 때론 헛된 이름 남기려고 온갖 추태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의 인사 파동을 통해 그런 모습을 너무나 선연히 보지 않는가. 사실 표범은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기 쉽다. 그 헛된 이름 남길 욕심이 그의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모범이 되어야 할 처지에 있는 이들이 오히려 나쁜 선례만 만들어내고 있으니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영국의 국립묘지에는 어린 소대장의 무덤이 가장 많다던가? 대부분 귀족 출신인 이들 젊은 장교들은 전시에 자진 입대해서 공격의 선봉에 서다 가장 먼저 죽는 경우가 많았단다. 그게 바로 노블리세 오블리쥬다. 귀족에 대한 존경은 그렇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노블리세 '노' 오블리쥬만 누린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노블리세를 탐하면서 정작 의무는 외면한다. 어쩌면 그 의무를 외면하기 위해 그렇게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영국이 입은 가장 큰 손상은 폭격에 의한 파괴도 엄청난 전쟁 비용도 아니었다.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젊은 엘리트들이 전쟁 중에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손실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지도층의 희생이 있었기에 영국을 의연하게 만들었다. 

노병들이 61년 만에 찾은 학교와 학생들을 보고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단장 클레란드 장군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의 발의로 모금하고 건설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사양하고 어린 나이에 먼 나라에 와서 처음 전사한 자신의 부하의 이름을 선택한 그의 인품을 기억했을 것이다. 인격의 향기가 이 겨울 매화 향처럼 깊고 진하다. 이름값 하고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 따뜻한 감동을 느끼면서 새삼 느꼈다. 천막 학교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학교 이름에 깃든 그의 겸손함,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녔던 학생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인사 파동에 회자된 이들과 부끄럽게 대조된다.


김경집 인문학자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