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엔 아내 혼자 극장에 나가 ‘레미제라블’을 보고 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을 키우는 입장에서 부부 동반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뽀로로가 아이들 앞에서 갑자기 커밍아웃하거나 혹은 진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인지라, 아내에게 선심 쓰듯 먼저 양보한 것이었다. 웬일이래? 아내는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예매한 표를 받아들었지만, 정작 상영시간 세 시간 전부터 아이들 저녁밥을 차려준다, 일찍 목욕을 시킨다, 부산을 떨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 네 시 삼십 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내는 현관문을 나서기 전 그렇게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일은 무슨? 나는 마치 일상적인 일인 양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아내가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 순간부터,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네 시간 가까이, 나는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바로 그 토마스가 되었다가, 다시 ‘파워레인저’에 나오는 블루도 되었다가, 인간 자동차도 되었다가, 시소 인간도 되었다가, 그러다가 그만 거실 한가운데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널브러진 내 등 위에서 아이들 셋은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는 시늉을 하며 또 어딘가를 향해 나아갔고.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라는 표정을 하곤 삽시간에 주변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들어가 양치질을 시키기도 했고, 아이들 손에 통 하나씩 들려주고 각자 장난감을 정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상에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프라이팬 속 검은콩처럼 요란하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접시 위에 놓인 새침하고 얌전한 두부 한 모로 변해버렸다. 이건 뭘까? 나는 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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