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가상적 상황. 당신이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난다. 다른 일정도 많은 바쁜 날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일찍 서둘렀고, 약속된 카페에 제 시간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그 친구는 아직 오지 않았다. 5분을 기다리고 10분을 기다린다. 그래도 오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아직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생각하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20분이 넘어간다. 이런 경우에는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하든가 혹은 문자 정도는 보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니 은근히 서운하고 화가 난다. 전화를 하려는데 마침 그 친구가 나타났다.
그런데 당당하게 자신의 커피를 주문하는 이 친구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전혀 배어 나오지 않는다. 서운하다. 은근히 화가 나기까지 한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차가 많이 막혔나? 오는 길에 조금 늦는다고 문자 하나는 보내는 게 좋았잖아” 정도는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이를테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 사이에 20분이 넘게 지각을 하면서 미리 연락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이야기한다면, 그 순간부터 윤리적 비판의 칼날은 당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상대방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당신은 순간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그가 저지른 잘못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도한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잘못을 단순한 일회적인 실수로 여기지 않는다. 해석에 해석을 거듭하고 숙고에 숙고를 더하여, 내가 마주친 상대방의 부도덕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적인 결함이 표현된 결과라는 자의적인 해석에 이르게 된다. 만일에 동일한 잘못을 내가 저질렀다면 그것은 거의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잘못은 일회적인 실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부도덕은 특수화시키고 타인의 부도덕은 일반화시킨다. 이것이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타인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의 뜻이다.
일정한 나이가 지나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타인의 판단은 대개의 경우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외모나 교양이나 학식이나 재능에 대해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수준에 대한 평가의 영역에서 나 자신에 대한 평가와 타인에 대한 평가는 가장 많이 달라진다.
그러나 윤리는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윤리는 지극히 상호적인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보편적인 기준을 정확히 적용하는 것이고, 나의 기준을 그대로 타인에게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윤리적 격률인 ‘황금률’로 표현되어 왔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 그것이 도덕에 대한 가장 본래적인 통찰 중의 하나이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니 시키지 않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원하니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만 특별히 도덕적 가중치를 부여하는 사람, 그것이 비윤리적인 사람의 본질이다. 모든 사람은 특수하지만 그 누구도 특별하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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