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16:34

19세기는 서양의 기술이 동양을 점령했던 시기였다.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이, 서양의 기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고, 한반도는 아시아의 유럽을 표방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말은 인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말과 좀 다른 층위를 갖는다. 일본은 철저하게 조선의 전통을 계획적으로 말살해 나갔다. 조선의 전통을 말살했다는 것은 그것들을 하루아침에 깡그리 없애버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수 천 년을 이어 온 한 민족의 전통은 물리적 강제에 의해서 사탕 빼앗듯 쉽게 없앨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끄럽게 만들 수는 있다. 일본은 그들이 배운 서양의 기술과 그 가치를 가지고 우리의 말과, 의복을 비롯한 우리의 생활과 역사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 가치 또한, 1876년 김기수의 조선수신사 일행의 행색을 보고 비웃는 일본인을 유럽인들이 비웃었듯이 어차피 남의 옷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19세기 조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사실 굉장히 역동적인 시대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계급들이 부를 축적하던 시기였고, 문화적으로도 추사와 북학파의 후인들이 발흥했던 시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노론 내부에서 자기반성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백과전서파들이 등장했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수집벽이 유행했으며, 건축적으로도 재사건축이 새롭게 실험되고 있었고, 살림집에서도 새로운 모색이 막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도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중단되면서 조선의 문화는 이어지지 못하고 한 시대의 문을 닫는다. 혹자는 한국과 일본을 두고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 한국이 일본보다 더 빠르게 근대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사실은 한국이 전통과 단절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조선의 전통이 한국으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한 얘기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 한국은 빠른 속도로 근대화 되었다. 그리고 21세기,디자인의 시대라는 이 새로운 세기에 서양은 다시 동양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전시대와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기술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지금 아시아로 들어오는 서양의 디자인은 자신들의 시장을 개척하러 들어 온다기 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19세기에는 무자비한 자원수탈이 행해졌지만, 문화와 생활은 광물처럼 함부로 캐 갈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양은 지금 아시아의 디자인을 주목하고 있다. 철근콘크리트라는 서양의 발명품으로 안도 다다오는 막다른 길에 접어든 모더니즘 건축의 돌파구를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건축가 왕슈는 모더니즘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중국을 현대화했다. 패션에서도 중국은 이미 중국의 스타일을 완성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일찌감치 전세계적으로 젠(Zen)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일본의 젠스타일이 서양 모더니즘의 돌파구를 제시하는 동시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면, 태국의 중요한 디자인 개념인 '휴'(休)는 보다 생활에 깊이 들어 와 세계인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어넣고 있다. 거기에는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편안히 한다는 불교적 방법이 스며있다. 태국은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몸과 마음의 철학을 디자인에 심어서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격(格)이다. 격은 사람이 겪는 '곳'에 맞는 것이고, 사람이 겪은 '때'에 맞는다는 것이다. 곳은 장소고, 자연이고, 환경이다. 때는 시간이고, 느낌이며, 상태다. 따라서 격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바깥과 안이 조화롭다는 것이다. 조화는 계속해서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조화는 없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그것이 환경과 사회에 맞는 것이 될 때 격은 이루어진다. 나는 이 '격'이 지금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무늬라고 말하고 싶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조선이 못 다한 실험을 이어 지금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함성호 시인ㆍ건축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6/h20130610210142121760.htm



Posted by 겟업
2013. 9. 19. 16:32

싱가포르는 작지만 국가경쟁력이 세계 1, 2위인 나라이다. 교육경쟁력도 상당하다. 이런 경쟁력의 뒤에 싱가포르국립대(NUS)가 있다. 싱가포르국립대는 1905년 개교한 학교로, 100여 개 국가에서 온 교수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타임지 선정 2012년 세계 대학 순위에서 세계 23위, 아시아 2위를 기록했고, 2012년 QS 세계 대학평가에선 세계 25위, 아시아 2위에 올라 있다. 이 대학의 비전은 세계를 리드하는 아시아 중심 대학이다. 당연히 세계를 향해 캠퍼스가 열려 있다. 캠퍼스만 열려 있다고 세계 유수 대학과 연구소, 학생이 모이지는 않는다.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꾸준한 노력들이 합쳐져야 가능한 결과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싱가포르국립대의 글로벌화 노력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대학의 글로벌화 노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우선 하버드대, 듀크대, MIT, 조지아텍 등 국제적으로 최상위권 대학들과 70여 개의 복수 학위를, 35개의 조인트 학위과정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40여 개국의 300개 대학과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또 미국, 유럽, 중국, 인도, 이스라엘 등에 7개의 해외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해외 캠퍼스는 일부 유수 대학과 파트너 캠퍼스 운영협약을 맺고 NUS 캠퍼스를 운영하는 것이다. 미국 실리콘 밸리의 스탠퍼드대, 필라델피아 바이오 밸리의 펜실베이니아대, 중국 상하이의 푸단대, 베이징의 칭화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싱가포르국립대는 또 국제연구대학연맹(IARU), 환태평양대학협회(APRU) 등 국제적인 대학연합체에 가입해 대학을 홍보하고, 자신의 수준을 알리고 있다.

특이한 것은 대학 비전인 세계를 리드하는 아시아 중심 대학을 만들기 위해 관련 연구소를 여럿 설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연구소, 글로벌아시아연구소, 중동연구소 등이 그것이다. 이런 아시아 연구와 함께 자본주의 문제, 재정과 위기관리 등 세계의 당면과제에 대한 심층연구를 통해 글로벌 연구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 이 대학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미래의 블루오션을 인문학으로 보고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켜 아시아의 인문학 허브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올해 미국 예일대와 합작으로 인문교양대학을 건립하고 학부생 150명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인문교양대학에서는 아시아와 서양의 문화를 동시에 학습하도록 하고, 10명 단위수업으로 토론중심의 수업을 실시한다. 이런 싱가포르국립대의 글로벌화 노력은 한국 대학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대학의 글로벌에 대한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싱가포르국립대의 최종목표는 아시아에 있는 글로벌대학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 수준의 교육역량 확보와 함께, 아시아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의 인문학 허브가 되겠다는 포부는 신선한 도전이라 할 만하다.

둘째, 국외 최고의 대학들과 연계를 맺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 유수 연구소와의 공동연구, 협력연수, 최고 대학과의 공동 학위과정 운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대학은 더 나아가 외국과 파트너 대학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분교형식보다 효율성 면에서 유리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셋째, 글로벌 파트너십을 중시한다. 세계 대학연합체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대학의 글로벌화 방향 설정 및 대학 홍보에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가 당면한 문제연구를 통해 대학이 글로벌 연구기관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싱가포르판 브루킹스연구소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현재 국내 대학도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이제 한국의 대학들도 싱가포르처럼 한국형 글로벌대학을 탄생시킬 때가 되었다.



구자억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6/h201306052101381120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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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6:29

탈북 청소년 9명이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으로 논란이 많다. 갖은 고난을 딛고 한국행을 꿈꾼 10대들이 우리 공관 잘못으로 다시 사지(死地)로 끌려갔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허술한 탈북자 보호를 탓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도 부산히 움직이는 모습이다. 

올바른 해법을 찾으려면 탈북자 문제의 근본적 딜레마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다. 그렇지 않으면 요란하게 떠들다가 이내 관심을 잃는 습관을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비분강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이번 탈북자들이 10대 '꽃제비'로 알려진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 때문에 더욱 논란이지만, 라오스 정부로서는 '난민'으로 다루기 한층 어려웠을 수 있다. 유엔난민협약에 따른 난민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탈출한 경우에 해당한다. '꽃제비'처럼 주로 경제적 이유로 탈북한 경우에 적용하기 어렵다. 

물론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은 자연재해와 기아 등으로 생명과자유를 위협받는 이는 모두 난민으로 간주, 인도적 보호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본국에 송환되면 처벌받을 것이 명백하면 난민으로 인정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난민 인정은 국제법적 강제력은 없어 주권국가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 

라오스는 중국을 거쳐 입국한 탈북자 1,000여명의 한국행을 조용히 도왔다. 이번에는 이런 외교적 '신사협정'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 배경은 알 수 없다. 때마침 라오스 고위층이 평양을 방문 중이었던 사실에 주목할 뿐이다. 어쨌든 '꽃제비' 9명이 집단으로 한국행에 성공, 여느 때보다 떠들썩하게 북한 인권과 탈북 참상이 국제 조명을 받을 것을 라오스도 꺼렸을 수 있다. 라오스와 중국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과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탈북자 문제, 탈북자 정책의 핵심은 중국의 북한이탈주민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있다. 이에 관해 양길현 제주대 교수 등이 최근 발표한 연구결과(<국가전략> 2013년 19권1호:세종연구소)는 조용한 '중국 설득'과 탈정치적 국제 공조 및 배후지원 정책을 권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탈북자 문제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현재 5만 명으로 추정되는 동북 3성의 탈북자를 방치하면 접경지역의 안정을 해친다. 또 탈북자가 늘어나 북한 체제가 흔들리면 중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협한다. 이 때문에 탈북자와 지원단체를 단속하고 북한의 탈북자 추적을 돕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을 인도적 차원을 넘어 국제법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부족하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의식, 탈북자 지원단체의 조직적 기획으로 우리 공관이나 국제기구 사무소로 들어간 탈북자를 제3국 추방 형식으로 한국과 미국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기획 망명' 또는 '기획 입국'은 탈북자 문제의 국제 여론화 효과 못지않게 탈북자 단속을 재촉, 다수 탈북자를 희생시키는 부작용이 크다. 

이처럼 탈북자 문제는 중국과 우리가 함께 안고 있는 딜레마다. 옛 서독처럼 탈북자를 우리 국민으로 간주해 적극 보호하라는 주장이 있지만, 서독과 우리의 국적 규정과 국제정치 역학 및 영향력은 다르다. 중국 국익을 무시한 채 탈북자 인권을 부각시키는 '인권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탈북자들이 대개 강제송환 위협이 없으면 북한과 끈을 잇기 쉬운 중국 체류를 원하는 사실도 유념할 만하다. 

여러 조건을 고려할 때, 북중 접경지역 등에 정착촌 개념의 수용시설을 설치해 강제송환 없이 탈북자를 보호하도록 중국을 조용히 설득하는 국제공조 노력이 필요하다. UNHCR이 수용소를 관리하고, 우리는비용을 일부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탈북자 정책의 근원적 딜레마를 정직하게 헤아린 현실적 해법이라는 학자들의 권고를 새겨들을 만하다.


강병태 주필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6/h20130603210301244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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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6:22

이제 너무나 유명해진 세계적 공연기업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시의 생미셸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이 서커스단이 오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 생미셸 지역은 환경적·사회적 문제로 가득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수십년 동안 쓰레기를 매립해 북미 최대의 쓰레기매립장이 되어 있었다. 공기는 매립장에서 나오는 가스로 오염되어 있었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40%가 저소득층으로 분류됐다.


그런데 당시 몬트리올시와 지역주민들은 대담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지역을 친환경 공원과 문화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쓰레기매립지를 친환경 공원과 문화도시로 변화시키겠다니, 어쩌면 황당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상상력이 이 지역을 밀고 가는 힘이 됐다. 이 상상력 앞에 민간기업인 ‘태양의 서커스’와 캐나다 중앙정부 및 퀘벡·몬트리올 지방정부가 모두 힘을 합쳤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각자 가진 것을 꺼내 기여하며 협업했다.


지금 태양의 서커스가 입주한 단지 ‘라 토후’도 이들이 함께 기여해 만들었다. 바로 쓰레기매립장 위에 세워진 곳이다. 이 단지에는 국립서커스학교, 서커스 공연장, 예술가 숙소, 태양의 서커스 본사뿐 아니라 매립 쓰레기를 에너지 등으로 전환하는 재활용센터 등이 함께 입주해 있다.


성과도 눈부시다. 1997년 이곳에 입주한 태양의 서커스는 날개를 달아 세계로 발돋움하며 성장했다. 몬트리올은 세계 서커스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치게 됐고, 이 지역에 관광객과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쓰레기매립장이던 이곳에 쓰레기로부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환경기술이 접목됐다. 매립장은 차차 거대한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현실적 제약조건을 넘어선 사회적 상상은 ‘비현실적’이거나 ‘모호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화는 늘 상상에서 시작된다.


공상과학소설(사이언스픽션)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알베르 로비다가 1800년대 말에 낸 20세기 예측서들을 보자. 다수 채널을 가진 대형 텔레비전, 24시간 실시간 뉴스 채널, 홈쇼핑, 영상 전화기, 대륙간 항공, 인공 강우, 시험관 아기, 패스트푸드, 국립공원 시스템 등이 그의 책에 등장한다. 물론 이들은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먼저 상상력을 발휘한 뒤, 과학기술이 뒤따라가서 현실로 만들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창립자는 지난 4월 스콜월드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상과학소설이 결국 과학을 움직였다. 먼저 상상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소셜픽션(social fiction)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많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서 있다. 동시에 각각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법을 논의하자는 목소리도 많다. 지역 풀뿌리 단체도 많아졌고, 지자체도 고민이 깊어졌고,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도 커졌다. 많은 이들이 사회문제 해결 노력에 적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문제 해결 방법론에만 천착하다 공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미시적 논쟁에 얽매이면 각자 속한 작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복잡해지며 논의가 멈추기 쉽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상상을 공유하지 않으면, 부딪쳤을 때 쉬이 주저앉게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말처럼 소셜픽션을 쓰는 것이다. 함께 쓰면 더 좋겠다. 그 픽션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벽을 허물고 토론하는 데까지 가면 더 좋겠다. 몬트리올에서처럼 말이다.


이원재 경제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922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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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6:18

불안하다.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는커녕 숨이 턱턱 막힌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앞선 세대는 괜히 밉지만, 저항해야 할 마땅한 명분도 없고 싸울 힘도 없다. 요즘 청년들 마음이 그렇다. 스무살 먹은 대학생이나, 40대를 넘나드는 늙은 청년이나 비슷한 처지다.


먹고살기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렵던 과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1980년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금의 5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그런데 그때 이 나라 대학생들은 시대를 호령했다. 언론이 통제되던 시절, 그 젊은이들이 쓴 대자보와 유인물은 조간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보다 훨씬 크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숨죽여 시대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던 직장인들마저 결정적인 순간 넥타이부대로 변신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민주화를 외쳤다.


그들이 386세대다.


조금 더 시계를 되돌려 보자. 1970년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금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이 나라는 전쟁으로 피폐해진데다 군인이 지배하는 후진국으로 여겨졌다. 그때 이 나라의 젊은 공무원과 기업가들은 미래 경제를 기획했다. 중화학공업을 키우고 수출강국을 만들겠다고 외쳤다. 무리해 보이는 투자를 감행해 고속도로와 철도를 깔고 제철소와 자동차공장을 세웠다. 기업가와 노동자들은 피땀 흘려 세계를 뛰어다니고 뜨거운 공장에서 청춘을 바쳤다. 산업화의 역군을 자처했다.


그들이 베이비붐 세대다.


1980년대에 민주화란 비현실적 판타지였다. 산업화 역시 1970년대 당시에는 몽상이었다. 그야말로 사회적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그 상상력은 결국 현실의 벽을 깨뜨리고 세상을 바꿨다. 이런 경험은 그 두 세대의 자부심으로 진화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나라에는 사회적 상상력이 사라졌다. 현실 자체도 답답하지만, 이걸 넘어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큰 그림이 없다는 사실에 더 숨이 막힌다.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은 상상이 사라진 자리에 무성해진다. 새로운 세대의 불안과 답답함의 이유가 여기 있다.


애써 상상력을 가져보려 해도 사회 시스템이 이를 가로막기 일쑤다. 한국 사회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헌신을 자산으로 쌓은 성이 됐다. 새로운 세대는 희생 없이 풍요와 민주주의를 즐기는 ‘무임승차자’라는 무형의 부채에 시달린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마추어적이라고 놀림받는다. 세상은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같이 느껴진다. 당연히 자신감도 자부심도 갖기 어렵다.


그래서 일부는 ‘함께 꾸는 꿈’보다는 ‘혼자 꾸는 꿈’에 골몰한다. ‘스펙 쌓기’ 현상이 그래서 일어난다. 일부는 세상을 조롱하며 비뚤어진다. ‘일베’ 현상이 이를 상징한다.


네덜란드 사회학자 프레트 폴락이 기념비적 저서 <미래의 이미지>에서 설파했던 것처럼, 사회 변화는 미래와 과거가 밀고 당기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상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앞에서 끌어당기고, 현실화된 과거가 뒤에서 밀어야 사회는 진보한다. 사회적 상상력이 사라지면 진보의 시계는 멈춘다.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해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벽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세대가 앞장서서,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새로운 미래 이미지를 상상하기 시작할 때다. 그 상상력이 불안을 해소하는 첫걸음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는 길을 열어주고 도와야 한다. 민주화의 판타지, 산업화의 몽상에 젖어 있던 시절, 그들은 모두 청년이었다. 함께 묻고 상상하고 대답해야 한다. 당신이 꿈꾸는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이원재 경제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382.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15:41

거리를 행진하는 군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통행금지나 검열 또는 계엄령도 없다. 카페엔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겉으로 보기엔 헝가리의 모든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헝가리는 정상이 아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돼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헝가리의 자유사회를 침식하고 있는 암이 유럽 대륙의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1990년 내가 헝가리에 있을 때 청년민주동맹(FIDESZ)은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대안의 정치를 내세운 혈기왕성한 정당이었다. 가입 자격은 35살 이하로 제한됐다. 당시 이 정당의 여름캠프에서 생기발랄했던 젊은 정당 구성원들과 축구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정당이 대변했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스타일은 높이 평가했다. 그해 선거에서 이 정당은 9%를 얻었다.


오늘날 청년민주동맹은 더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대안도 아니다. 젊은이들의 정당도 아니다. 빅토르 오르반 현 총리의 주도 아래 우파로 변신한 뒤 전통적인 정당이 되었다. 권력에 취한 이 정당은 권위주의에 빠져들었다.


2010년 선거에서 이 정당은 50% 이상의 득표를 했다. 급진 민족주의 정당인 요비크(Jobbik) 같은 동맹세력들과 함께, 오르반 정부는 의회의 3분의 2를 차지해 헌법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오르반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 헌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청년민주동맹은 여전히 인기가 있다. 비판가들은 언론 통제가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걸 돕는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통신사의 경영진을 예스맨들로 교체했다. 또 민족주의를 이용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토의 3분의 2를 축소시킨 트리아농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민족 단결의 날’을 만들었고, 호르티 장군의 독재정권을 복권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민족주의의 이면에는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가 있다. 청년민주동맹의 공동 설립자인 졸트 바예르(Zsolt Bayer)는 “상당수의 집시는 함께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들은 동물이며 동물처럼 행동한다”라고 썼다. 교육부 장관은 학교 교육과정에 반유대주의 저자들을 추천했다. 청년민주동맹은 국가를 정당 구성원들과 친구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기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자유 억압적인 요소들은 유럽의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시절 언론에 대한 국가 개입은 다반사가 되었다.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는 그리스에서부터 스웨덴까지 모든 곳에서 더 강력해진 극우정당들의 본질적 요소들이며, 주류 보수주의 정당들조차도 반이민 정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부패 스캔들은 루마니아·스페인·슬로바키아·프랑스 정부에도 번졌다.


권위주의는 헝가리에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카친스키 형제는 폴란드를 권위주의로 몰아넣었는데,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전 총리는 여전히 권좌에 복귀해 청년민주동맹과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길 원한다. 불가리아의 보이코 보리소프 전 총리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했다.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와 체코공화국의 바츨라프 클라우스 전 대통령, 그리고 옛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도자들은 절대주의 경향을 보였다.


헝가리가 다른 점은 이런 모든 요소들이 합해져 반자유주의의 ‘퍼펙트 스톰’이 된 현상이다. 헝가리의 우파로의 선회는 단순히 몇몇 카리스마가 있는 개인들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헝가리에서, 좀더 일반적으로는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은 소수를 위한 부, 대다수에겐 불확실성, 증가하는 소수인종에겐 극단적 빈곤을 가져왔다. 자유주의적 정치모델은 개인주의를 부추겼고, 이는 가족·이웃·공동체 단위의 연대를 침식했다.


‘자유주의적’이란 말이 더러운 말이 되었고, 청년민주동맹 같은 운동이 한때 이 지역에 많은 것을 약속했던 이데올로기의 정치·경제적 실패로 초래된 진공 속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유럽 지도자들은 부다페스트에서 나온 이 암의 번식에 대해 정말로 걱정해야 한다. 그들은 오래된 자유주의적 제도들이 충분히 강력한 면역시스템으로 기능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쇠퇴하는 믿음은 그런 악성 종양의 성장에 적합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90083.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15:33

대학 새내기 시절, 한 선배가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당시 교정엔 민족해방 계열 운동권의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넘쳐났는데 그와 내가 속해 있던 동아리는 그쪽이 아니었다. 그 선배는 민족주의란 여기에도 붙고 저기에도 붙는 맹목적 믿음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펴는 와중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민족주의는 창녀와 같다.”


그 말이 일으킨 불쾌감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그는 남자였고 나는 그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과 같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그 뒤 이따금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주의·주장에 대한 견해를 떠나, 생계를 위해 성매매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을 그 어떤 나쁜 것의 상징으로 비유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그와 유사한 비유법을 20여년 만에 듣게 되었는데, 박근혜 정부의 입으로 기용됐던 윤창중씨에게서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정운찬·윤여준씨 등을 “정치적 창녀”로 비유했다. 그 말이 문제인 것은 그 인사들에 대한 원색적 표현이어서가 아니다. 성매매 여성들의 인격과 인권을 모욕하고 짓밟기 때문이다.


그 여성들이 그런 식으로 비유되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사회적 약자인 탓이다. 지금도 어떤 나쁜 행위를 약자한테 떠넘기는 비유가 재생산되고 있다. 희대의 연쇄살인범을 두고 “짐승”이라는 둥 말 못하는 동물에 빗대는가 하면, 종종 정신병자니 사이코패스로 규정한다. 이런 비유는 정신병 환자에겐 이중 고통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수전 손택의 말을 따르면, 누군가 ‘편집증적 사회’라고 말할 때 편집증은 그 사회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을 은유한다. 편집증을 앓는 소수자를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밀어낸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정신병리나 이념(인종주의) 탓이 아니라 윤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보았다. 윤리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 곧 양심이다. 성추행을 저지른 윤창중씨에겐 그것이 없었다.


허미경 책지성팀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209.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15:23

어느 날 우연히 서울의 큰 빌딩 앞에서 본 생경한 아침 풍경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회사의 수위 아저씨는 아주 밝은 얼굴 가득히 상쾌한 소리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좋은 날입니다.” 옆에서 보는 내가 저절로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 인사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그 자리가 무언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일방적 인사였다. 그 회사의 직원들 대부분이 수위의 인사에 그저 고개만 숙여 대응할 뿐,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간단한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표정 없는 마주침이다. 분명 수위와 직원들은 한 발쯤의 거리인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시스템과 매뉴얼만 있고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관계가 일상적으로 발견된다. 백화점, 호텔, 항공기, 열차, 고급 음식점 등에서 보게 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곳에는 종사하는 직원들의 미소와 깍듯한 인사가 있다. 그런데 그곳의 손님들은 대부분 인사와 미소에 응답하지 않는다. 일방적 관계가 당연한 관행인 듯하다. 성의 있는 눈길의 마주함과 마음 있는 표정의 부딪침에서 기쁨과 사랑이 발생하는 법인데 사이가 이러하니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계는 소통을 하고 있는데 인간은 불통을 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긴장과 억압의 일방적 관계 또한 곳곳에서 발생한다. 최근 큰 기업과 대리점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감정노동자는 서글프고 경제적 약자는 억울하다. 그래도 ‘갑’에게 ‘을’은 자신의 표정을 숨겨야 한다. 당장에 ‘밥줄’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존엄한 인간이 밥 때문에 속내를 드러내는 맨얼굴을 숨기고 무표정하거나 비굴한 표정으로 화장까지 해야 한다. 이 모두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본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돈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깊이 생각해 보자. 존엄해야 할 우리들의 ‘밥’과 ‘마음’이 돈에 휘둘리고 있는 현실을, 그리하여 돈으로 친절과 복종을 사고 그 사이에서 잠시 우쭐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웃 사람의 감정을 억압하고 존엄을 짓밟아 얻는 행복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것인가.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돌이켜야 할 지점에 있다. 우리, 서로, 모두가, 존엄해지기 위해서, 이웃에 대한 나의 표정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이웃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먼저 나에 대한 시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너에 대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서로가 갑과 을이라는 허망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너에 대한 시선이 열릴 것이다. 그 열린 눈에 비친 너와 나는 거래의 관계가 아닌 도움과 은혜로 얽힌 고마운 관계로 오지 않겠는가.


언젠가 식당에서 본 흐뭇한 일이 생각난다. 일이 바빠 급하게 움직이다가 종업원이 손님의 옷에 음식을 쏟았다. 종업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손님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에 가서 세탁기에 돌리면 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그때 그 남자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이웃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따뜻하게 보듬는 마음을 보았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얼굴은 번역과 통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이다. 그날 그곳에서 돈이 들지 않는 표정을 기부한 그 남자, 그 자리에 갑과 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89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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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5:22

내 글을 즐겨 읽는다는 한 독자로부터 ‘송전탑 이야기 말고 교육 이야기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애정 어린 권유를 받고 나서 얼마 뒤 밀양 송전탑 공사가 재개되고 말았다.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필자가 쓰는 글마다 ‘밀양 송전탑’ 이야기가 빠지지 않으니 의아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밀양 사람이다. 여기서 나고 자랐고, 대학과 군대, 교사 초년 시절을 뺀 나머지 세월을 모두 밀양에서 살아왔다. 학교를 그만두고 오랫동안 꿈꾸어온 일들을 막 시작할 무렵 터진 ‘밀양 송전탑’ 분신자결사건 이후 지금까지 17개월째 이 일에 매달려왔다. 이 싸움이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대의를 따르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이 사안이 얼마나 불의하고 모순에 가득 찬 일인지를 모르지 않으면서,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어르신들의 고통과 분노를 외면한 채 내가 벌일 일들, 농업과 교육, 세상을 향한 글쓰기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자격지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고, 앞장서는 놈은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으니, 그저 욕먹지 않을 만큼만 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빠져주는 보편적인 행동 윤리를 나도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여리고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수시로 자문해야 했다. 그사이 심리적인 위기 상황도 없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던 것은 바로 이 ‘고운 얼굴들’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한동안 실의에 젖어 있던 적이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선거 이후 첫 촛불집회에 갔을 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반가워서, 앞으로 자신들 앞에 어떤 일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 두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체현한 수도자인 양, 쭈글쭈글한 얼굴 주름 골이 한껏 파인 미소로 나를 반겨주던 할머니들의 고운 얼굴, 이런 기억들이 나를 이끌어왔다. 한전 쪽이 거액의 손배소와 고소·고발을 남발할 무렵, 고초를 겪고 있던 분들을 위해 탄원서를 부탁한 적이 있다. 70대, 80대 할머니들이 삐뚤빼뚤 눌러쓴 글에는 놀랍게도 같은 말씀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는 것.”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할머니들에게서 어떻게 이런 글들이 동시에 나오게 되었을까. 고향과 선산을 지키지 못하고 저승에서 만날 어른들께 죄가 될 것 같아 너무 괴롭다는 그 말씀을, 수족에 병이 들어 거동조차 못하는 자신을 고쳐준 ‘숲으로, 녹색으로 꽉 찬’ 이 산을 지키기 위해서, ‘나중에 자식들이 돌아와서 살 데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싸운다’는 이 말씀들을 그저 ‘해보는 소리’로 치부하고 있는 세상. 결국 ‘돈 때문일 거라는 것, 그래서 돈을 더 얹어주면 해결될 거라는 것’, 이렇게 악한 믿음이 지배하는 세태 속에서 어르신들은 싸우고 있다.


할머니들은 목에 밧줄을 묶고, 웃통을 벗어젖히며, 포클레인 밑으로 기어들어가 드러눕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이웃들을 보며 울부짖다가 기진해서 또 줄줄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보기가 너무 괴롭다. 이들을 향해서도 세상은 여전히 ‘님비’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핵발전으로부터 비롯된 이 장거리 송전시스템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들은 전기 안 쓰냐’고? 그렇다면 왜 전기를 가장 적게 쓰는 이분들이 작금의 전력시스템이 야기하는 모든 고통을 뒤집어써야 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이 ‘고운 얼굴들’은 지금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럽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나. “도와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편집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87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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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5:16

개인용 컴퓨터(PC)가 처음 나왔을 때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물리학과에서 논쟁이 있었다. 물리학 개론 과목에서 전자입자를 깨는 실험 과정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가르칠 것인가 여부. 2년여 동안 토론 끝에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하는 실험만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손으로 직접 실험도구들을 만들고 설치하고 실제로 전자가 깨지는 흔적까지 눈으로 확인을 하는 게 타당하다는 게 결정의 근거였다. 교수들은 전자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손으로 만들고 눈으로 보는 과정을 직접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훨씬 깔끔하게 결과를 보여주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직접 실험도구를 접착제로 붙이고 끼워서 만들어야만 했다.


자연과학을 하는 선배의 경험담 하나. 좋은 학자로 성장하는 학생들의 특징을 오랫동안 관찰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한다. 실험실 설거지를 늘 잘하더라는 것이다. 실험도구, 재료와 시약이 손에 익어서 눈을 감고도 실험 과정 전체(예를 들면 세밀한 화학반응 과정까지)를 머릿속 그림으로 그려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선배 교수는 실험실에 들어오는 대학원생들에게 설거지하는 법부터 가르친다.


뛰어난 축구선수는 훈련일지를 작성한다고 한다. 좋은 훈련일지는 오늘 패스 연습을 몇 번 했다는 식이 아니라 “아 그때 안으로 파고들지 말고 옆으로 빠졌어야 했던 것 아닌가”와 같이 구체적 기록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훌륭한 선수들은 경기에 나가기 직전에 오늘 이뤄질 시합 전체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그 그림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기획한다고 한다. 움직임에 대한 기획. 이때 훈련일지는 선수 자신의 몸의 움직임과 그 결과에 대한 판단·평가·성찰을 담는 그릇이 된다.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실습과 예술이론을 통합함으로써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에 커다란 전환을 이룬 미술공예운동이었다. 미학과 기예의 통합. 이 학교 신입생은 실습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 6개월간 목공·도예·스테인드글라스·벽화직조·그래픽·인쇄·무대연출 등을 직접 배우고 전문 직공 자격증을 따야 했다. 파울 클레가 스테인드글라스와 회화를 담당했고, 바실리 칸딘스키가 벽화를, 라이오넬 파이닝어가 그래픽을 가르쳤다. 손과 머리를 통합했던 대표적 사례이다.


‘공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다르게 가르쳐야 할까, 혹은 배우는 방식이 달라야만 할까. 초·중등 12년과 대학, 때로는 대학원까지의 교육과정에서 점수로 사람을 끊임없이 가른다. 공부를 잘하면 의대·법대 가고, 경영대와 공대에 간다. 국영수 성적이 나쁘면, 기술 배우라면서, 요리, 자동차 정비, 미용 등등 직업교육을 시킨다. 정말 잘못된 교육과 학습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이 손으로 실험기기를 조립하고 도출된 결과를 정리하고 확인하는 과정, 축구선수가 전체 경기의 흐름을 머릿속에 그리고 상대 팀의 배치와 움직임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서 자신의 플레이를 운용하는 과정은 사실상 다르지 않다. 그런데 과학 잘하는 아이는 올림피아드만 준비시키고, 축구 잘하는 아이는 운동장에서 놀게 하는 오류를 우리 교육 전체가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다 성적이 좋은 선수가 있으면, 공부도 잘한다고 칭찬한다.


성적이 좋지 않으니까 요리 배우고, 운동선수로 뛰고, 패션디자인 배우는 게 아니어야 함에도 우리는 그렇게 나누고 차별한다. 국영수 잘하면 손과 발은 묶어 놓고, 책상에 앉아 문제풀이만 시키는 학습을 시킨다.


대학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이론과 개념 중심은 여전하고 실험과 실습은 이론을 배우기 위한 보조에 불과하다. 사회봉사나 현장실습은 대충대충 쉬어가는 과목이다. 몸을 던져서 하는 봉사, 손과 발의 느낌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공작(工作)은 찾아보기 어렵다. 체육과 음악·미술은 고상한 취미나 교양을 갖추기 위한 우아한 활동으로 치부된다. 칸딘스키의 날카로운 사각형의 선이 드러내는 무한과 유한의 인식은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것 아닌가. 손과 발은 몸과 머리, 감성과 인식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육의 현장에서 손과 발이 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여전하다.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80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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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5:12

몇 년 전에 캐나다 교민 초청 강연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캐나다를 출발하여 유럽으로 가던 비행기 안에서 한 남자가 옆에 앉은 지적장애 소녀를 성추행했다. 이 사실을 안 스튜어디스는 기장에게 알렸고 비행기는 즉시 회항하였다. 마치 연료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다. 범죄자를 공항경찰에게 넘기고 비행기는 다시 출발했다. 이 말을 전한 교포는 “그래서 캐나다는 외국 땅이지만 살 만한 곳”이라고 덧붙였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샜다’로 요약된다. 고위공직자들과 국회의원, 돈 많은 부자들이 일으키는 성범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대표적인 사건만 나열해도 이 지면이 넘친다. 그 사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양은냄비처럼 우르르 끓었다가 슬그머니 사그라졌다. 가해자 내지 범죄자는 일단 숨죽이고 있다가 한 김 빠지고 나면 공식적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그 오리발은 잠시 도마 위에 오르지만 결국 면죄부로 변신한다. 가해자는 기를 펴고 활보하고 세상은 조용해진다. 피해자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죽음으로써 이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는 말이 생겼다.(어제 서울에서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으라차차 후원행사가 있었다.)


성범죄는 남녀간의 일이 아니다.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의 기본은 신체적 자유이다. 사람의 몸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것을 인권침해로 여기기보다 ‘남자들의 본성’ 내지는 ‘술김의 실수’ 등으로 쉽게 용서해왔다. 그러니 돈과 권력이 있으면 누구나 해보고 싶고, 할 수 있는 놀이처럼 되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장자연 사건을 보라.)


우리 사회에 인권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윤창중 사건을 다루는 언론에서도 나타난다. 피해 여학생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던 이 여학생에게 모국 대통령의 순방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었겠는가.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에 사명감과 보람으로 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막힌 일을 당했으니 본인과 그 부모의 상처는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게 깊은 사과와 따뜻한 위로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여성운동가 후배 한 사람이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신입생 축하 파티를 마치고 남자 유학생 선배가 학교생활 정보를 준다기에 학교 앞 술집에 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이 왔고,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경찰 앞에 난데없는 애국심이 발동을 걸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나라 학생 커플이 다가와 자신들이 신고한 이유를 밝혔다. ‘우리가 옆에서 네가 당하는 것을 보았다. 네가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피해자다. 이 남자의 못된 행동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 힘들었고 이 바 전체의 분위기가 훼손당했다.’


윤창중 사건은 국민 모두가 피해자이며 성희롱·성폭력 문제 해결은 여성단체만의 일이 아니다. 인권위가 앞장서야 한다. 비정규직·아르바이트·밥줄에 목이 매여 당하고 있는 성희롱과 성폭력은 노동부가 나서야 한다. 교권에 의한 학교 성폭력은 교육부가, 거리에서 일상에서 행해지는 성폭력은 안전행정부가, 가족 안의 성폭력은 여성가족부가, 온 행정부처가 다 할 일이 있다. 입법부와 사법부도 분명한 몫이 있다.


지구촌 시대, 남자들의 침묵의 카르텔이 만들어온 한국식 봐주기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여성대통령 시대에 거는 기대이다. 여자들의 한이 맺힌 나라는 잘되지 못한다. 성희롱과 성폭력의 근절은 국민행복시대의 가장 시급한 숙제이다.


오한숙희 여성학자·방송인·수키야 놀자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71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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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4:45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누가 이기나요?

대부분 거북이가 이긴다고 대답합니다. 그럼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내기를 하면 누구에게 거실건가요? 아마도 거의 다 토끼겠죠. 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를까요? ‘돈’ 앞에서 현실을 깨닫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성실하면 성공한다는 교훈 뒤에 감춰진 불공정한 경기규칙입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경기규칙은 처음부터 토끼의 필승카드입니다. 토끼의 긴 뒷다리는 산위로 오를 때 진가를 발휘하지요. 토끼가 낮잠을 자도 아마 거북이는 질 겁니다.


토끼끼리, 혹은 거북이끼리 산위로 오른다면 공정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거북이를 토끼의 상대로 설정했을까요? 자유로운 시장을 위해 ‘작은 정부’로 가야 하고 ‘규제 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생각납니다. 재벌가의 빵집도 떠오릅니다. 우루과이라운드와 그 이후의 세계무역기구는 국민과 정부라는 심판 없이 재벌과 중소기업이 경쟁하고 곡물메이저와 가족농이 경주해야 한다는 게임의 룰을 강요했습니다.


중소기업·자영업자·농민들은 규칙을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토끼는 규칙 바꾸기를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심판을 매수해 자기 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다른 동네 토끼들과 연합해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대못질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휴대폰 이용자의 절반이 해마다 단말기를 바꾼답니다. ‘꽁짜폰’인데 왜 안바꿔주냐는(사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 말에 부모들도 두 손을 듭니다. 그러나 단말기 보조금은 유난히 비싼 통화요금에 다 묻어 놓았지요. 그 스마트폰 하나 값이 우리 아이들이 6년동안 먹는 쌀값에 해당합니다. 스마트폰이 비싼건가요? 쌀값이 싼건가요? 100만원짜리 스마트폰 가격은 시장(기업)에 맡기고, 쌀과 배추의 가격은 정부가 나서서 강제로 내리는 게 옳을까요?


거북이가 이젠 경주를 안하겠다고 합니다. 토끼를 도우며 물수건과 양동이를 들고 다닙니다. 그 결과 대기업 프랜차이즈 간판으로 운영하는 빵집, 커피전문점, 통닭집, 식당들이 넘쳐납니다. 우리 5천만 국민의 곡물자급율은 24.3%에 불과합니다. 10대 재벌 매출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의 76.5%를 차지하고, 삼성그룹 한곳의 매출이 21.9%에 이릅니다. 하지만, 10대 재벌의 직원 수는 고작 60만명 남짓입니다. 농가수는 그 두 배입니다.


이제는 토끼는 토끼들끼리, 거북이는 거북이들끼리 같은 조를 이루어 경주하는 규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산에서는 토끼가 뛰고, 바다에서는 거북이가 헤엄치면 됩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다른 동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쟁이 공정합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가 그렇습니다.



박영범 지역농업네트워크 대표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85639.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14:40

망연자실한 눈빛의 비둘기 한 마리가 3일째 베란다에 앉아 있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지금은 어찌할지 모르겠다. 이별의 상심에 식음을 전폐한 걸까, 어지러운 세상사에 절망한 걸까, 먹을 것도 안 먹고, 만져도 떠나지 않는다. 설마 죽는 걸까 하는 생각에 뭐든 물어보라는 120에 구조 요청을 했다. 놀랍게도 비둘기는 유해 조류로 분류돼 도움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어쩌다 유해한 새가 된 걸까?


초등학교 1학년 5월, 담임 선생님이 문득 경주 시내의 미술대회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대신 참가비가 200원이라고 덧붙였다. 한껏 들뜬 난 냉큼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집을 비웠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뒤꿈치를 들어 부엌 찬장 속의 빨간 수저통을 뒤졌다. 그곳엔 늘 동전 몇 개씩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날은 동전이 없었다. 선생님은 참가비를 대신 내주며 풀죽어 돌아온 나를 인자하게 다독였다. 그림 경연이 시작되자 경주의 아름다운 솔밭으로 다들 흩어졌다. 문제는 설명해줄 엄마가 없었기에 어떤 주제로 그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초조해하다가 결국 한 그림을 훔쳐봤는데, 솥이었다. 솥이라면 자신 있었다. 솥뚜껑의 동그란 주름 틈에 손가락을 뱅뱅 돌리며 몇 시간이고 놀곤 했으니까. 온통 검게 채색된 내 그림이 제출됐을 때, 모두가 깔깔대고 웃어댔다. 그제야 내가 훔쳐본 그림이 갓을 쓴 할아버지였단 걸 알아챘다. 이후 다신 미술대회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상처는 증발되어, 중1 땐 미술실에서 데생을 배우며 훗날 루브르에서 보게 될 온갖 그림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문득 미술 선생님이 ‘미대 어때? 넌 디자이너가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라며 강력히 추천했다. 엉뚱하게도 난, 그러면 어떻게 먹고살아요 하고 되받아쳤다. 황망한 선생님은 말을 잇지 못했고, 그 말을 내뱉은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내가 왜 그런 폭력적 자기방어를 시도했는지, 긴 시간에 걸쳐 그 광경을 돌이켜보곤 한다. 분명 한켠은 첫 미술대회에서 폭포처럼 뒤집어쓴 그 조롱, 곧, 지위에 맞지 않는 무임승차로 민폐 끼치는 실력 없는 나쁜 사람의 삶을 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능력만큼 보상받는다는 실용적 명분을 갖춘 사회는 가난한 자를 유해한 자로 규정한다. 왜냐면, 그들은 학업을 게을리했고, 자기계발에 무관심했고, 지혜와 정치력이 모자랐기에, 말하자면,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 이 시대의 도덕률에 맞춰 성실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신봉자는 기내 승무원이나 편의점 알바나 음식점 종업원 앞에 진상 손님으로 등장해서, ‘니들 놀 때 난 뺑이쳤거든, 왜 꼽냐’라며 그나마 엷디엷은 자존감 위로 침을 뱉어댄다. 굴욕에 주눅든 유해 인간들은 부도덕한 존재라는 수치심에 한없이 무력해진다.


하나 그것은 애초에 공정한 게임이 아니니 속지 말아야 한다. 재벌 드라마의 당치 않은 대물림쇼를 보자. 철판 깔고 청문회에 선 고관대작들의 편법을 보자. 유익한 자가 못 된 건 개인 탓도, 부도덕한 탓도 아니다. 다만,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될 권리가 평등하게 부여됐다고 착각한 탓에, 이 죽일 놈의 가난이 결국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의 소치라고 자학하는 습관이 문제이다. 다행히도 세도가들의 요즘 행태는 부를 악덕의 상징으로 대체시키며, 돈과 권력과 지위가 도덕적 지평과는 무관함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이게 위안이 될진 모르겠지만.


음, 난 일생 풍족하진 못했지만, 그로 인해 수치스러운 적이 없었으니, 가난한 적이 없었다 해야겠다. 어쩌면 그건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엄마의 알라딘 수저통의 마법 덕인지도.


민규동 영화감독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54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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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4:37

서울 성북구의 김영배 구청장이 엊그제 <동네 안에 국가 있다>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고 한 권 보내왔다. ‘공공성의 정치, 마을정치, 생활정치를 향하여’라는 부제를 붙여 구청장 활동 1000일을 기록했는데, 분량이 두툼하고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김 구청장의 성북구는 욕망의 정치에서 생활정치로 정책의 틀을 바꾼 경우다. 아파트값은 떨어지고 노후는 걱정되고 개인이 발버둥친다고 욕망을 실현하기도 어려운 한계 때문에 생활정치, 복지정치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김 구청장은 당선 뒤 첫 정책으로 공립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했다. 보편적 복지 논쟁이 한창 뜨거울 무렵이어서, 지역 차원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친환경무상급식위원회를 꾸려 치밀하게 준비해 성공시켰다고 한다.


성북구청은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국 지방정부 최초로 사회적 기업 허브센터를 만들었고, 사회적 경제 제품 구매를 촉진하고 판로를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로 지난해 5월 9000만원에 머물던 사회적 경제 매출이 한해 뒤에 10억원으로 늘고, 일자리도 생겨났다. 구청 산하 도시관리공단 노동자들도 자녀를 교육하고 최소한의 문화수준을 누리도록 생활임금 개념을 도입했다. 동사무소 청사 신축에서 산책로 조성, 총선과 대선 투표소 설치에 이르기까지 인권영향평가를 받도록 했다.


성북구청의 실험은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진보정책의 핵심 가치를 복지와 교육 중심으로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많이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들이 더 큰 특권을 누리기 위해 마치 그것이 민주주의인 양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에” 맞서겠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곳이 성북구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 성북·도봉·노원·은평·서대문·강서·금천구, 대구 서구·달성군, 인천 남구·남동구·부평구, 울산 동구, 경기도 수원·부천·성남·시흥·광명시, 전북 완주군, 강원도 홍천군 등 모두 29군데 기초자치단체가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를 결성했다. 민주통합당 소속 단체장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고 새누리당도 정당을 따질 일이 아니라며 함께하고 있다. 광역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같은 대열에 서있다.


풀뿌리 생활정치 차원에서 진보의 확산이 이뤄지는 반면에, 여의도 야당가에선 개혁이 후퇴하고 있다. 민주당은 4일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정강정책을 개정하려 한다. 개정안을 보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 기왕의 복지국가 노선을 약화시키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당 안에서는 대선 당시 정책이 너무 진보적이어서 표를 잃었다며 오른쪽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다. 보수언론이 진보 정책을 이념에만 골몰하는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이념보다는 민생이 중요하다”는 언술을, 당 지도부 선거에 출마한 인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되뇌고 있다.


민주당 지도층의 대선 평가는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야당의 복지국가 노선을 차용해 득표에 단단히 활용하지 않았는가. 복지국가 노선은 득표에도 효과적임을 입증했다고 보는 게 옳다. 같은 당 소속 지방정부 책임자들이 앞장서 민심을 읽고 있는 것을, 왜 중앙당 지도층만 모를까? 나는 이런 과정을 보면서 정책 담론의 주도권이 중앙에서 지역으로 빠르게 옮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사정 탓에 민주당이 새 지도부를 뽑아도 당풍이 쇄신될 것 같은 기대가 좀처럼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방정부 지도자들이 긴 안목에서 야당 재건의 구심점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5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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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4:27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장거리 여행을 즐기지 못한다.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긴 여행을 피하게 된다. 좁은 자리에 몸을 욱여넣고 긴 시간 잠을 청하다 보면 몸이 힘들지만 가격에 따라 좌석을 나누는 비행기 좌석은 계급적이라 마음도 불편하다. 그런데 좌석의 ‘차별’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은 사실 이코노미 클래스의 승객들이다. 항공사는 많은 돈을 쓸 용의가 있는 손님들에게 비싼 가격을 매겨 이익을 얻지만 이코노미 클래스의 승객들에게는 싼 가격의 좌석을 제공한다.


이런 항공사의 정책을 ‘가격차별’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가격을 매개로 해 이질적인 고객의 성향을 구별하기 위한 전략이다. 나처럼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이런 정책에 불평을 하긴 어렵다. 나름 합리적인 근거가 있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편견에 의한 차별도 흔하다. 어떤 종류의 차별은 상당히 뿌리 깊은 편견에서 기인해서 해소하기 어렵고 때로는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차별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 인종, 출신 지역, 성적 취향 등에 다양한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그 편견을 차별이란 행동으로 옮기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레스토랑의 주인이 최고의 요리사를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하지 않거나, 자동차 회사가 최고의 디자이너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하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내 편견을 행동으로 옮겨서 얻는 것은 정서적 쾌감이고 잃는 것은 구체적인 이익이기 때문에 차별은 비용을 더 높게 만드는 사회적 변화 앞에서 극적으로 줄어든다.


이런 사회적 변화의 좋은 예는 경쟁의 심화다. 한 번의 실수나 실패로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경쟁이 심한 산업에서 최고의 직원을 그 사람이 여자, 흑인,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하기는 몹시 어렵다. 아무리 종교적인 이유로 편견을 신념처럼 믿고 있어도 자기 회사의 운명이 차별 대상인 직원에게 달려 있다면 대개 차별을 포기하게 된다. 중국과 인도와 같은 거대한 나라들이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전세계가 극심한 경쟁에 내몰리게 되었기 때문에, 기업이 생산성이 뛰어난 인재를 편견 때문에 차별하는 건 경제적 자살행위에 가깝다.


문명 수준이 높고 경제 수준이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이러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별의 비용이 사회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을 생산성 이외의 이유로 차별하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에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인종이나 출신 지역 그리고 성적 취향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고 개선될 기미가 없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얼마 전 야당에서 추진한 ‘차별금지법’의 입법이 무산되었다. 차별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과 그런 그들을 선동해서 생활하는 ‘생계형 차별주의자’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들의 상당수가 종교인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무 낙담할 일은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차별의 실질적인 비용을 치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의 정치적인 힘이 큰 것 같아 보여도 우리 사회는 이미 여러 가지 차별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강력하고 글로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시대착오적 집단행동으로 막기는 어렵다. 돌아보면 한국에서 싱가포르 규모의 인구가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게 불과 16년 전이다. ‘차별금지법’의 미래를 낙관한다.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저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50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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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4:23

지난 14일, 한국 중산층 가구의 55%가 주택구입 대출금과 자녀 사교육비로 적자 인생을 살고 있다는 한 컨설팅회사의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대기업 임원이 암에 걸렸는데 자녀 유학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거나 고액 연봉을 받는 조카사위가 거액의 아파트 대출금과 갓 태어난 아들 유학비 걱정에 잠을 잘 못 자고 상사와 술 마시는 빈도가 늘어났다는 조카의 불만을 듣노라면, 실제로는 한국 중산층의 55%가 아닌 99%가 지속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조사를 수행한 매킨지 연구진은 담보대출 방식이나 고등교육에 대한 인식,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활성화 등과 관련된 제안을 해법으로 내놓긴 했지만, 사실상 이 난감한 문제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독점의 원리와 화폐 중심성을 넘어서야 풀릴 문제다. 적자 인생으로 돌아가도록 구조화된 거대한 롤러코스터 체제를 넘어설 탁월한 혜안이 필요하며, 삶의 전면적 구조조정을 다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말 돈이 없어 문제인가? 살펴보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돈이 너무 많아 탈이고 남아도는 집과 공간도 적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나눔의 지혜, 살아가는 힘을 주는 우애의 관계가 아닌가? 삶과 경제를 풍성하게 만드는 호혜성과 창의성 같은 비물질적 자원이 순환되는 영역이 사라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일터와 가정 영역 중간에 친지들이 어우러지는 제3의 공간이 있었고, 학교와 학원 사이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어울릴 놀이터가 있었고, 지불 노동과 생애에 걸쳐 하는 일 사이에 다양한 경험과 활동이 펼쳐지는 또 다른 활동공간이 있었다. 경제와 삶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 제3의 영역, 눈으로 볼 수 없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삶의 장을 회복해야 한다.


‘동네 나눔 부엌’이라는 장소를 상상해보자. 동네마다 주민자치회관이나 동사무소가 있고 그곳에 직원 식당이 있다. 점심시간에만 사용하는 그 공공공간을 주민들에게 개방한다고 생각해보자. 독점이 아닌 공유의 원리를 삶 속에서 뿌리내려 보자는 것이다. 여유가 생긴 주부들과 요리에 취미가 있는 프리랜서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동네 부엌에서 국을 끓인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동네에 사는 대학생들이 가장 환영할 일일 것이다. 4년 내내 공짜로 밥과 술을 얻어먹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돈이 없어서, 또는 바빠서 밥을 대충 때우거나 아예 못 먹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두가 ‘집밥’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학가에는 ‘함께 밥 먹자’는 동아리까지 생겨났다. 반찬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동네 부엌은 더욱 붐비지 않을까? 국을 제대로 끓일 줄 모르는 나도 배달 온 꾸러미 채소를 가지고 회식이 없는 날이면 그곳에서 밥을 얻어먹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할 것이고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하는 젖먹이 아기 엄마가 오면 엄마의 식사시간 동안 아기를 돌볼 것이다. 방과후에 마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나 딱히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동네 부엌에서 밥을 먹고 정이 가는 동네 형과 언니들에게 숙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냉장고에 가득 쌓인 식자재만 보면 골머리가 아프다는 골드미스는 유통기간이 끝나기 전에 식재료를 가져다줄 곳이 생겨 행복해질 것이고 옥상 텃밭에 남아도는 파와 상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아저씨도 기꺼이 단골이 될 것이다. 동사무소 직원과 동장님, 구청장도 시장님도 가끔 국을 끓이고 나누면서 민심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자주 만나는 아이의 멘토가 되어 삶이 풍성해진 동네 어른들도 생길 것이다. 동네 아티스트가 식당을 따뜻한 분위기로 만들어줄 것이고, 이런저런 마실로 마을은 안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을에 필요한 일거리도 생기고 협동조합도 생기고 골목 카페도 생겨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 아닌가? 이웃과 함께하는 밥상 공동체로 지속가능한 삶의 시대를 열어가 보자. 오늘 저녁 가까운 주민자치회관으로 슬슬 산보를 나가 보실까?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41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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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4:17

한국의 성형 열풍이 새로운 종족을 탄생시켰다.


성형 전(before)에 나름 개성 있던 다양한 얼굴들이, 성형 후(after), 판박이 같은 하나의 얼굴로 수렴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엔 인공미 없는 ‘비포’가 오히려 매력적이다. 내 눈, 아니 내 미의 기준을 성형해주는 곳은 없을까? 보고 있기 괴롭다.


김한민 작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7941.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14:13


무례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사소한 불친절로도 무고한 시민을 ‘멘붕’시킬 수 있다. 가령, 갈 길 바쁜 와중에 친절을 베풀면 인사 한마디 없이 정보만 취하는 식. 다시 안 볼 사람이라고 이토록 쉽게 대하고, 아무렇지 않게 도구화한다. 더 기분 나쁜 건 이득이 걸려 있을 땐 그들이 누구보다도 잘 굽실거린다는 점.


김한민 작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9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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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13:59
영국의 작은 마을 헤이(왼쪽)와 에덴은 ‘괴짜’라는 소리를 듣는 사회혁신가와 이들에게 협력한 주민들이 만들어낸 성공 모델이다. 허영 오픈이노베이션 대표

괴짜 혁신가가 바꾼 작은 마을 ‘헤이’ 그리고 ‘에덴’


런던에서 버스로 4~5시간
‘헤이’는 세계최대 책마을
‘에덴’은 세계최대 온실마을
매년 50만~125만 관광객

수십년전엔 그냥 보통마을
아이디어와 주민의 협력이
세상과 삶을 바꾸었다


모든 혁신은 꿈을 꾸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결심에서 시작된다. 혁신의 모델이 된 영국의 작은 마을 헤이와 에덴은 ‘괴짜’라는 소리를 듣는 사회혁신가와 이들에게 협력한 주민들이 만들어냈다. 2013 스콜포럼이 열린 즈음에 런던에서 버스나 기차로 4~5시간 걸리는 두 마을을 다녀왔다.


헤이온와이(Hay-on-Wye)는 잉글랜드-웨일스 접경지역 와이강가에 있는 인구 1300명의 마을이다. 방문 당시는 5월 말에 열리는 헤이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괴짜 리처드 부스가 1961년 낡은 성을 사서 헌책방을 만들면서 지금은 100만권 넘는 장서를 가진 세계 최대의 ‘책마을’이 되었다. 파주 헤이리 마을의 모델이다.


2012년 책마을 시작 50주년을 맞은 헤이는 40여개의 책방과 30여개의 골동품가게들이 매년 50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한해에 팔리는 책만 해도 100만권이 넘는다. 007의 작가 이언 플레밍이 이곳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본을 찾아낸 일화도 있다.


혁신가 리처드 부스는 “헌책은 대형마트에서 팔지 않기에 작은 마을의 희망이다”고 말한다. 그가 열네살 때 단골 서점 주인이 “너는 헌책방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되었다. 리처드 부스의 사회혁신은 모든 것을 주민들과 함께하고, 주민생활과 연계하며, 기존에 있는 것들과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통해 창조적인 문화도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본차이나 그릇에 쓰이는 고령토 광산이었던 잉글랜드 남서부 콘월지역의 에덴은 세계 최대의 온실로 탈바꿈했다. 5000여종 100만 식물이 재배되는데 2001년 3월 개장 이래 연간 125만명이 찾고 있다. 20번째 007 영화 <어나더데이>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서천 국립생태원의 모델이다.


유명 음반 제작자였던 팀 스미트는 19세기풍 정원을 복원하다 에덴을 구상했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주민들과 협력했다. 공사기간 중에 이미 50만명의 유료 관광객이 찾았다. 에덴의 비전은 ‘환경, 주민소통, 모든 수익은 지역에게’이다. 지역 생산물로 상점을 채우고 1700여 명의 지역민들이 일을 한다. 바다로 떠밀려온 나뭇조각 하나 버리지 않고 교육 및 건축 자재로 재활용했다. 식물에게 줄 4300만갤런의 물은 대부분 빗물을 이용했다. 지금도 전체 물 사용량의 43%가 빗물이다.


에덴의 교육총괄 존 엘리슨은 “궁극적인 목표가 뭐냐?”라는 질문에 “미래는 우리가 발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창조하자”라는 말로 대신했다. 교육을 중시하며 지구상의 모든 식물의 씨앗과 열매를 보존하겠다는 것이 에덴의 미래 비전이다.


보통의 도시가 창의적인 도시로 바뀌기 위해서는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문제를 꿰뚫어보는 혁신가의 자질과 꿈, 이를 평생 실천할 의지, 그리고 주민들의 동의와 재능을 모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창의적 아이디어로 삶의 양식을 바꾸고, 사업성을 갖춰 문제를 해결하면서, 근본적 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기업가 정신인 것이다.


허영/오픈이노베이션 대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6305.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13:56

고만고만한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아내는, 이제 육아에 관해서라면 거의 위로는 천문이요 아래로는 지리를 꿰뚫을 만큼 전문가가 다 된 듯싶다. 아이가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횟수나 목소리의 여린 변화만으로도 그날 유치원에서 무엇을 먹었고 어떤 수업을 받았는지 훤히 알아채기도 했고, 아이의 잔기침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단순한 감기인지 아니면 후두염으로까지 진행될지 대번에 예견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내 뒤에 병풍을 치고 아내 손에 부채라도 하나 쥐어주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하는데, 이건 뭐 아이가 세 명이었기에 망정이지 네 명이었다면 아예 선지자 반열에 오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내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 역시 다른 많은 초보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열이 조금만 있어도 대뜸 병원부터 찾아가고, 장염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괜한 반찬 투정을 한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런 시행착오들이 한 해 두 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아내가 된 것인데, 곁에서 가만가만 지켜보자니 아내의 육아 비법은 역시 징후를 잘 읽어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아이가 괜스레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집어던지면서 투정을 부리면 그저 단순히 새장난감에 대한 욕구의 발현이겠거니 생각하고 마는데, 아내는 거기에서 제 동생들에 대한 질투와 아빠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을 읽어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다른 처방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경우 대개 징후만 제대로 읽어내도 그에 따른 처방 역시 십중팔구 저절로 해결되기 마련인데, 그만큼 어른들에 비해 비밀도 작고 사안도 복잡하지 않고 명징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마 그것들을 오랫동안 관찰했기 때문에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리라.

요 근래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은 아이들의 경우처럼 그리 간단하게 파악하고 분리하고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청와대 대변인이 정상회담 장소에서 성추행을 한 것이나, 건설업자가 별장에서 성 접대를 하고 동영상으로 기록해둔 사건, 봉사활동을 간 고등학생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들에게 상식 밖의 행동을 한 사건(그걸 동영상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 더 놀라웠다), 대낮 육사 교내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 등등, 우리가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징후들이 곳곳에서 폭죽처럼 발화하고 있다. 문제는 이 징후들을 다루는 우리들의 태도에 있다. 이런 사안들을 우리가 단순히 왜곡된 성 문화와 공동체의 붕괴 등과 같이 하나마나한 말들로 파악하고 손쉽게 넘어가는 순간, 모두 함께 재빠르게 욕을 하고 넘어가는 순간, 징후는 고착되고 반복되며 어느새 그저 평범한 하나의 언어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징후들이 벌어질 때마다 조금 잔인할 정도로 사실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 사건들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징후를 읽어내는 힘은 튼튼한 사실의 영역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은 언론은 많되 사실은 더 줄어든 느낌이다. 이것 또한 하나의 징후라면 징후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기약을 먹으면 감기약이 우리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반복적으로, 알지도 못한 채 감기약에 의존한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과의 연애가 왜 실패했는지 모르고 넘어가기 때문에, 엇비슷한 사람과 다시 만나 또 한 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 많은 징후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징후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이다. 지나온 우리 시대가 지금의 우리 시대에게 보내는 전언이기도 하다. 그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의 영역이, 언론의 역할이 다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이기호 소설가ㆍ광주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5/h2013052921004081920.htm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