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행진하는 군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통행금지나 검열 또는 계엄령도 없다. 카페엔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겉으로 보기엔 헝가리의 모든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헝가리는 정상이 아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돼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헝가리의 자유사회를 침식하고 있는 암이 유럽 대륙의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1990년 내가 헝가리에 있을 때 청년민주동맹(FIDESZ)은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대안의 정치를 내세운 혈기왕성한 정당이었다. 가입 자격은 35살 이하로 제한됐다. 당시 이 정당의 여름캠프에서 생기발랄했던 젊은 정당 구성원들과 축구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정당이 대변했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스타일은 높이 평가했다. 그해 선거에서 이 정당은 9%를 얻었다.
오늘날 청년민주동맹은 더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대안도 아니다. 젊은이들의 정당도 아니다. 빅토르 오르반 현 총리의 주도 아래 우파로 변신한 뒤 전통적인 정당이 되었다. 권력에 취한 이 정당은 권위주의에 빠져들었다.
2010년 선거에서 이 정당은 50% 이상의 득표를 했다. 급진 민족주의 정당인 요비크(Jobbik) 같은 동맹세력들과 함께, 오르반 정부는 의회의 3분의 2를 차지해 헌법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오르반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 헌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청년민주동맹은 여전히 인기가 있다. 비판가들은 언론 통제가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걸 돕는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통신사의 경영진을 예스맨들로 교체했다. 또 민족주의를 이용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토의 3분의 2를 축소시킨 트리아농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민족 단결의 날’을 만들었고, 호르티 장군의 독재정권을 복권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민족주의의 이면에는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가 있다. 청년민주동맹의 공동 설립자인 졸트 바예르(Zsolt Bayer)는 “상당수의 집시는 함께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들은 동물이며 동물처럼 행동한다”라고 썼다. 교육부 장관은 학교 교육과정에 반유대주의 저자들을 추천했다. 청년민주동맹은 국가를 정당 구성원들과 친구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기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자유 억압적인 요소들은 유럽의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시절 언론에 대한 국가 개입은 다반사가 되었다.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는 그리스에서부터 스웨덴까지 모든 곳에서 더 강력해진 극우정당들의 본질적 요소들이며, 주류 보수주의 정당들조차도 반이민 정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부패 스캔들은 루마니아·스페인·슬로바키아·프랑스 정부에도 번졌다.
권위주의는 헝가리에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카친스키 형제는 폴란드를 권위주의로 몰아넣었는데,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전 총리는 여전히 권좌에 복귀해 청년민주동맹과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길 원한다. 불가리아의 보이코 보리소프 전 총리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했다.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와 체코공화국의 바츨라프 클라우스 전 대통령, 그리고 옛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도자들은 절대주의 경향을 보였다.
헝가리가 다른 점은 이런 모든 요소들이 합해져 반자유주의의 ‘퍼펙트 스톰’이 된 현상이다. 헝가리의 우파로의 선회는 단순히 몇몇 카리스마가 있는 개인들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헝가리에서, 좀더 일반적으로는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은 소수를 위한 부, 대다수에겐 불확실성, 증가하는 소수인종에겐 극단적 빈곤을 가져왔다. 자유주의적 정치모델은 개인주의를 부추겼고, 이는 가족·이웃·공동체 단위의 연대를 침식했다.
‘자유주의적’이란 말이 더러운 말이 되었고, 청년민주동맹 같은 운동이 한때 이 지역에 많은 것을 약속했던 이데올로기의 정치·경제적 실패로 초래된 진공 속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유럽 지도자들은 부다페스트에서 나온 이 암의 번식에 대해 정말로 걱정해야 한다. 그들은 오래된 자유주의적 제도들이 충분히 강력한 면역시스템으로 기능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쇠퇴하는 믿음은 그런 악성 종양의 성장에 적합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900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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