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을 즐겨 읽는다는 한 독자로부터 ‘송전탑 이야기 말고 교육 이야기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애정 어린 권유를 받고 나서 얼마 뒤 밀양 송전탑 공사가 재개되고 말았다.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필자가 쓰는 글마다 ‘밀양 송전탑’ 이야기가 빠지지 않으니 의아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밀양 사람이다. 여기서 나고 자랐고, 대학과 군대, 교사 초년 시절을 뺀 나머지 세월을 모두 밀양에서 살아왔다. 학교를 그만두고 오랫동안 꿈꾸어온 일들을 막 시작할 무렵 터진 ‘밀양 송전탑’ 분신자결사건 이후 지금까지 17개월째 이 일에 매달려왔다. 이 싸움이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대의를 따르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이 사안이 얼마나 불의하고 모순에 가득 찬 일인지를 모르지 않으면서,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어르신들의 고통과 분노를 외면한 채 내가 벌일 일들, 농업과 교육, 세상을 향한 글쓰기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자격지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고, 앞장서는 놈은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으니, 그저 욕먹지 않을 만큼만 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빠져주는 보편적인 행동 윤리를 나도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여리고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수시로 자문해야 했다. 그사이 심리적인 위기 상황도 없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던 것은 바로 이 ‘고운 얼굴들’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한동안 실의에 젖어 있던 적이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선거 이후 첫 촛불집회에 갔을 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반가워서, 앞으로 자신들 앞에 어떤 일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 두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체현한 수도자인 양, 쭈글쭈글한 얼굴 주름 골이 한껏 파인 미소로 나를 반겨주던 할머니들의 고운 얼굴, 이런 기억들이 나를 이끌어왔다. 한전 쪽이 거액의 손배소와 고소·고발을 남발할 무렵, 고초를 겪고 있던 분들을 위해 탄원서를 부탁한 적이 있다. 70대, 80대 할머니들이 삐뚤빼뚤 눌러쓴 글에는 놀랍게도 같은 말씀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는 것.”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할머니들에게서 어떻게 이런 글들이 동시에 나오게 되었을까. 고향과 선산을 지키지 못하고 저승에서 만날 어른들께 죄가 될 것 같아 너무 괴롭다는 그 말씀을, 수족에 병이 들어 거동조차 못하는 자신을 고쳐준 ‘숲으로, 녹색으로 꽉 찬’ 이 산을 지키기 위해서, ‘나중에 자식들이 돌아와서 살 데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싸운다’는 이 말씀들을 그저 ‘해보는 소리’로 치부하고 있는 세상. 결국 ‘돈 때문일 거라는 것, 그래서 돈을 더 얹어주면 해결될 거라는 것’, 이렇게 악한 믿음이 지배하는 세태 속에서 어르신들은 싸우고 있다.
할머니들은 목에 밧줄을 묶고, 웃통을 벗어젖히며, 포클레인 밑으로 기어들어가 드러눕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이웃들을 보며 울부짖다가 기진해서 또 줄줄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보기가 너무 괴롭다. 이들을 향해서도 세상은 여전히 ‘님비’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핵발전으로부터 비롯된 이 장거리 송전시스템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들은 전기 안 쓰냐’고? 그렇다면 왜 전기를 가장 적게 쓰는 이분들이 작금의 전력시스템이 야기하는 모든 고통을 뒤집어써야 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이 ‘고운 얼굴들’은 지금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럽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나. “도와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편집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87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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