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16:51

요즘 현대차는 외부 손님이 오면 주로 남양기술연구소로 데려간다. 그곳엔 공대를 졸업한 연구원들이 밤낮없이 신차종 개발에 땀을 흘린다. 현대차가 과거에 자랑하던 생산라인은 공개를 꺼린다. 제조비밀 때문이 아니다. “도요타 등 다른 공장들을 둘러본 자동차 전문가는 한눈에 현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다. 작업 분위기가 느긋하고 느슨하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 미래가 어둡지 않으냐는 반응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오히려 남양연구소를 둘러보면 손님들의 표정이 좋아진다”고 했다.

현대차의 국내 생산 비중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생산효율성 지표인 HPV(자동차 1대 만드는 데 투입된 근로시간)는 해외 공장들이 울산 공장의 절반 수준이다. 현대차 노조의 투쟁 대상이 사용자라는 건 착각이다.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는 해외 공장의 값싸고 질 좋은 근로자다. 그런 사실을 간파한 현대차 노조는 단체협상 때마다 꼼수를 부린다. 해외 공장을 세울 때 노조 동의를 받으라고 우긴다. 나아가 글로벌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달라고 고집한다. 스스로 경쟁력이 떨어지니 해외 공장과 해외 판매법인이 올린 이익에 숟가락을 얹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노조는 10년 넘게 좋은 시절을 누렸다. 강력한 투쟁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진짜 비밀은 따로 있다. 1999년 정몽구 회장 취임 이후 현대·기아차의 생산량은 연산 202만 대에서 올해 750만 대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더라도 우선 시장 수요를 맞추는 게 중요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현대·기아차의 판매량이 해마다 40만~50만 대씩 늘어나는 신화를 언제까지 이어갈지 의문이다. 판매량이 주춤거리는 순간 어느 공장부터 감산할지 눈감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일본이 밟아온 길이다. 도요타의 국내 생산비중은 40%, 혼다는 27%, 닛산은 20% 아래로 떨어졌다.

더 이상 삼성전자를 국내에 붙들어 두기도 무리다. 현재 구미 공장의 스마트폰 생산은 연간 3700만 대. 그 10배인 3억7000만 대를 베트남과 중국 공장에서 만든다. 까다로운 신제품인 갤럭시S4는 처음으로 구미·베트남·중국에서 동시에 생산한다. 품질은 똑같고 생산수율도 엇비슷한 수준이다. 이에 비해 고졸 초임의 월 급여(기본급·상여금·법정보험 포함)는 구미가 3284달러, 베트남이 250달러다. 잔업과 휴일근무까지 포함해도 베트남의 평균 인건비는 구미의 10% 수준이다. 게임이 안 된다.

첨단 공장은 국내에 남으리란 기대는 순진한 환상이다. 삼성은 최첨단인 20나노급 반도체와 8세대 LCD공장을 중국에 지었다. 회사 측은 “컴퓨터와 휴대폰의 세계 최대 생산거점이 중국이다. 반도체·LCD 수요가 가장 많은 곳에 부품 공장을 짓는 건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삼성이 당초보다 한 세대 앞선 첨단 공장을 내보낸 데는 중국의 집요한 작전이 숨어 있다. 중국은 LCD 같은 핵심부품의 관세를 3%에서 5%로 끌어올려 현지 진출을 압박했다. 기술 유출은 삼성도 겁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미국·대만 경쟁기업들의 중국 공장이 승승장구하는 건 더 끔찍한 장면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중 때 시안의 삼성 반도체 공장을 둘러볼 모양이다. 시진핑의 정치적 고향을 방문하는 포석도 깔려 있다. 그러나 청와대가 베이징현대차 공장 방문에는 난색을 표한다고 한다. “굳이 재벌 공장을 둘씩이나 둘러보면 국내 정서가 악화될 수 있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지나친 정치적 판단이다. 박 대통령이 내친김에 두 공장을 함께 둘러봤으면 한다. 만약 그곳에서 “뻗어나는 우리 국력을 느꼈다”고 하면 반쪽만 본 것이다. 시안의 반도체 공장은 무려 8조원을 쏟아부은, 단일 투자로는 역대 최대다. 앞으로도 첨단 공장마저 계속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란 신호를 읽을 수 있다. 아마 베이징현대차 공장에는 울산에서 가져간 헌 장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 것이다. 그럼에도 HPV는 19.5시간으로, 울산 공장의 30.7시간보다 생산성이 훨씬 높다.

이 두 공장은 우리 경제의 냉엄한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박 대통령이 이런 쓰라린 역설의 현장을 두루 둘러보았으면 한다. 어쩌면 박 대통령이 중국에서 마주칠, 북한 핵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옛날부터 신(神)은 선물을 항상 고통의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는 말이 있다. 귀족노조와 정면 승부 없이 한국 경제가 되살아날 우회로가 있을까. 서비스업 기득계층과 맞서 과감한 규제완화 없이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오래 문제의 본질을 애써 외면해 왔다. 더 이상 기업들의 막연한 애국심만 믿을 때가 아니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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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