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16:59

외출하고 들어온 전두환 대통령. 황급히 경제수석을 찾는다. “임자, 중앙은행이 독립한다고 하는데 뭔 소리야?” 대통령의 다급한 질문에 가슴을 쓸어내린 박영철(현 고려대 석좌교수) 수석. 이내 안정을 찾으며 차분히 설명한다. “중앙은행은 원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하고….” 묵묵히 듣던 전 대통령,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청와대 차관회의에서 재무부 차관이 지목됐다. “네, 재무차관 ○○○입니다.” 이어지는 전 대통령의 질문. “금리, 내리는 게 좋은가, 올리는 게 좋은가?” 느닷없는 물음에 머뭇거리자 누군가 도와준답시고 손을 아래로 향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예, 내리는 게 좋습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이 씩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시장에 맡기는 게 좋아.” 

전 대통령 시절은 경기가 좋았던 때였다.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로 유례없는 호황을 톡톡히 누렸다. 경제에 관한 한 역대 정부에서 그만큼 운이 좋았던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운만이었을까. 그는 경제 무식자를 자처하면서 유능한 관료들을 대거 발탁했고, 그들의 조언을 잘 듣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지난달. 미국 순방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뉴욕에 들렀다. 성대한 교민 행사도 치렀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이 했던 일이 빠졌다. 그것은 뉴욕증권거래소 타종 행사와 월가 거물들과의 회동이었다. 전직 경제부처 장관은 “참, 안타깝다. 이 행사는 꼭 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아마 이 사안의 중요성을 조언해줄 사람이 없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공교롭게도 현 정부에서 그나마 국제금융통이랄 수 있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대통령 수행단 멤버가 아니었다. 
지난 4월엔 호칭(何晶)이란 이름의 싱가포르 여성이 극비리에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세계적인 투자기관 싱가포르 테마섹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 이 정도라면 ‘아, 그런 사람이 온 거구나’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여성,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며느리이자 리셴룽(李顯龍) 현 총리의 부인이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리콴유가 누구인가. 독립 싱가포르 총리로 26년간 재직했고, 작은 도시국가를 세계 수준의 나라로 탈바꿈시킨 최고 실력자 아닌가.

그런 호칭 회장은 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발됐다. 당시엔 북핵 위기가 고조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를 접견하지 못한 것을 두고 아쉬워하는 금융인이 적지 않다. 특히 호칭 회장은 테마섹 고위 간부들을 몽땅 데리고 방한했다. 원래는 전 세계 글로벌 센터장 500여 명을 모두 한국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그만큼 한국 투자에 엄청난 관심을 가졌다. 실제 그는 국내 주요 투자기관 사람들과 접촉했다. “아무리 중대 위기 상황이긴 했어도 대통령은 호칭 회장을 꼭 만나야 했습니다.” 경제 고위 관료를 지낸 한 인사의 얘기다.

경제가 몸이라면 금융은 심장이다. 심장은 우리 몸의 피를 잘 돌게 한다. 경제에서 피는 곧 돈이다. 돈이 잘 돌아야 우리 경제가 잘 굴러간다. 심장은 커도 안 되고 작아도 안 되지만, 작동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혈액순환이 어려우면 몸이 마비되듯, 돈 흐름이 막히면 경제가 멈춘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다. 금융사고는 터지면 대형이었다. 이처럼 국가 운명까지 좌지우지하는 게 금융이라 대통령이 금융에 무관심하면 나라가 흔들릴 수 있다. 오죽하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금융을 톱 프라이어리티(최고 우선순위) 정책으로 삼을까. 

그렇다고 대통령이 금융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유능한 사람을 두루 만나 귀담아들으면 된다. 그전 정부 인사라고 배제할 까닭이 없다. 5공 정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도 활약했고, 이명박정부에서는 서울 G20 정상회의 유치의 일등공신이었다. 금융에서는 오히려 젊은 피보다 노련미 넘치는 사람이 좋다. 환자들이 대형병원을 찾는 이유는 수술 경험이 많은 의사들이 포진해서다. 패기가 경륜을 이길 수는 없다.

정선구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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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