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의 김영배 구청장이 엊그제 <동네 안에 국가 있다>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고 한 권 보내왔다. ‘공공성의 정치, 마을정치, 생활정치를 향하여’라는 부제를 붙여 구청장 활동 1000일을 기록했는데, 분량이 두툼하고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김 구청장의 성북구는 욕망의 정치에서 생활정치로 정책의 틀을 바꾼 경우다. 아파트값은 떨어지고 노후는 걱정되고 개인이 발버둥친다고 욕망을 실현하기도 어려운 한계 때문에 생활정치, 복지정치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김 구청장은 당선 뒤 첫 정책으로 공립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했다. 보편적 복지 논쟁이 한창 뜨거울 무렵이어서, 지역 차원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친환경무상급식위원회를 꾸려 치밀하게 준비해 성공시켰다고 한다.
성북구청은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국 지방정부 최초로 사회적 기업 허브센터를 만들었고, 사회적 경제 제품 구매를 촉진하고 판로를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로 지난해 5월 9000만원에 머물던 사회적 경제 매출이 한해 뒤에 10억원으로 늘고, 일자리도 생겨났다. 구청 산하 도시관리공단 노동자들도 자녀를 교육하고 최소한의 문화수준을 누리도록 생활임금 개념을 도입했다. 동사무소 청사 신축에서 산책로 조성, 총선과 대선 투표소 설치에 이르기까지 인권영향평가를 받도록 했다.
성북구청의 실험은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진보정책의 핵심 가치를 복지와 교육 중심으로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많이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들이 더 큰 특권을 누리기 위해 마치 그것이 민주주의인 양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에” 맞서겠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곳이 성북구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 성북·도봉·노원·은평·서대문·강서·금천구, 대구 서구·달성군, 인천 남구·남동구·부평구, 울산 동구, 경기도 수원·부천·성남·시흥·광명시, 전북 완주군, 강원도 홍천군 등 모두 29군데 기초자치단체가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를 결성했다. 민주통합당 소속 단체장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고 새누리당도 정당을 따질 일이 아니라며 함께하고 있다. 광역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같은 대열에 서있다.
풀뿌리 생활정치 차원에서 진보의 확산이 이뤄지는 반면에, 여의도 야당가에선 개혁이 후퇴하고 있다. 민주당은 4일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정강정책을 개정하려 한다. 개정안을 보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 기왕의 복지국가 노선을 약화시키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당 안에서는 대선 당시 정책이 너무 진보적이어서 표를 잃었다며 오른쪽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다. 보수언론이 진보 정책을 이념에만 골몰하는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이념보다는 민생이 중요하다”는 언술을, 당 지도부 선거에 출마한 인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되뇌고 있다.
민주당 지도층의 대선 평가는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야당의 복지국가 노선을 차용해 득표에 단단히 활용하지 않았는가. 복지국가 노선은 득표에도 효과적임을 입증했다고 보는 게 옳다. 같은 당 소속 지방정부 책임자들이 앞장서 민심을 읽고 있는 것을, 왜 중앙당 지도층만 모를까? 나는 이런 과정을 보면서 정책 담론의 주도권이 중앙에서 지역으로 빠르게 옮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사정 탓에 민주당이 새 지도부를 뽑아도 당풍이 쇄신될 것 같은 기대가 좀처럼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방정부 지도자들이 긴 안목에서 야당 재건의 구심점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5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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