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멀티미디어동에서 만난 토머스 사전트 교수(70)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복잡한 수식(數式) 메모와 자료들이 겹쳐서 놓여 있었다. ‘역시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여서…’라는 마음이 들 때쯤 의외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두산 베어스의 야구모자였다.
“야구를 좋아하냐”고 묻자 교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실구장에서 종종 야구를 보는데 LG 트윈스와 두산의 경기를 보다가 팬이 됐다는 것. 그는 “미국에서도 야구를 자주 보러 다녔지만 한국 야구장에서는 치어리더들이 아주 잘 짜인 안무로 응원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질서정연하면서도 신나게 즐기는 모습이 정말 좋더라”고 했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부 학생들이 꾸린 야구단 연습에도 참여한다. “나이가 있어서 학생들이 안 받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야구를 같이 하자고 학생들이 먼저 말해줘서 기뻤다. 매주 함께 연습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3월 신학기부터 새롭게 시작한 한국 생활에 푹 빠진 듯했다. 이날 김재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배석해 통역을 도와주었다.
○ “한국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
사전트 교수는 그동안 미네소타대, 시카고대,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 뉴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제자를 키웠다. 한국 학생들은 그에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그의 말이다.
“우선 결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미국 학생들은 결석률이 30∼40%나 된다. 한국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한 학생이 정말 많다.”
그는 한국 학생들의 성실성과 함께 스승에 대해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려 한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다만 “미국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에게는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 강의는 수식을 통해 증명하고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조용히 수업을 듣던 학생 몇 명이 수업이 끝나고 나를 따라왔다. 그러더니 한 학생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까 교수님이 설명한 수식과 증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아뿔싸, 내가 틀린 거였다.”
사전트 교수는 학생에게 “당연히 이해가 안 가겠지! 내가 실수해서 잘못 썼으니까. 내가 틀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이 무안해할까봐 혹은 예의가 아닐까봐 수업 중에 말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실수를 엄청 많이 하는 사람이다. 앞으로는 의심이 나거나 틀렸다고 생각되면 교실 안에서 다 같이 이야기하고 토론해보자.”
그는 인터뷰 중에도 여러 차례 “교수는 완벽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특히 컴퓨터 기술이나 새로운 통계 방식, 새로운 이론에 대해 오히려 학생들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단순히 일방통행식 강의가 아니라 교수도 학생들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진 점이 신선해 보였다.
○ “고민하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전트 교수는 과거에도 몇 차례 “한국 경제의 놀라운 성과는 정부가 잘해서라기보다는 한국인의 교육열과 개개인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한 열정을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강조한 바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칭찬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한국인 사이에는 ‘과연 우리 교육이 본받을 만한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시선도 일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어떨까.
사전트 교수는 “한국의 교육열이 지나치다고 하는데 미국도 마찬가지다. 중산층 이상이 들어가는 유치원에서는 네 살짜리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를 함께 불러서 면접을 한다. 미국 부모들도 점수에 무지 신경 쓴다. 따라서 한국의 교육열에는 잘못된 점이 없다. 다만 성적에만 신경 쓰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건 쥐가 통 속에서 쳇바퀴를 계속 빠르게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 진화심리학 교수인 스티븐 핑커의 말을 인용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꼭 배워야 하는 세 가지가 있다. 통계학, 생물학, 기초경제학 지식이다. 사람은 주어진 정보를 갖고 잘못 인식하거나 한쪽에만 정신을 집중해 중요한 데이터나 자료를 놓치기 쉽다. 통계학 생물학 기초경제학, 이 세 가지를 열심히 공부하는 건 점수를 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개인이 어떤 선택의 순간에 놓일 때 어리석은 결정이 아니라 본인에게 가장 올바른 선택을 내리도록 이끌어준다”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그에게 “한국 학생들이 행복해 보이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단호한 얼굴로 “그렇다”고 말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진지하고 어두운 얼굴로 고민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넋두리와 고민을 늘어놓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민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기자가 듣기엔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답변이었다. 기자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고민을 왜 하는가? 미래에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 아닌가. 나에게 좀 더 맞는 직업이 무엇일까,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나한테 유리할까 고민한다는 것은 최고의 합리적 선택을 지금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국의 청년실업이 드리운 그늘이 짙어 보였다.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시 경제학자다운 답이 돌아왔다.
“한국의 고용시장은 구조조정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 대학생들이 몇몇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그 회사에서 치르는 적성검사나 채용시험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구직자들이 줄을 길게 서서 문 안에 들어갈 순번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직자들도 이 과정을 거치면서 선택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로스쿨을 예로 들었다.
“지금은 로스쿨 입학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계속 변호사가 늘다 보면 수임료나 근무 환경이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근무지에 지원하게 된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 로스쿨 진학 자체가 바보 같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돈은 돈대로 들지만 이익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색다른 지적을 했다.
“한국의 고용시장 구조조정 과정에는 다른 나라와 다른 요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이다. 한국은 외국과 달리 오랜 기간 부모와 동거하면서 경제적인 원조를 끊임없이 받는다. 돈 있는 부모가 자식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수많은 청년 구직자가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원하는 일자리가 나올 때까지 대기한다면 고용 구조조정 기간이 매우 길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갤럭시노트의 터치 펜이 창조경제”
정부의 시장 개입에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그가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창조경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창조경제’라는 말 자체가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며 갑자기 옆에 놓여 있던 메모지에 X축과 Y축, 수평선을 죽 그었다.
“1인당 소득이 매우 낮은 상태로 오랫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갑자기 크게 수직으로 올라서는 시점이 오는데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이 그랬다. 미국, 유럽이 뒤를 이었고, 한국은 1960년대 후반이 그랬다.”
그는 수직으로 솟구치는 그 지점에 점을 찍으며 “바로 이때가, 창조가 발현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국가는 카피(모방)를 하면서 경제를 성장시킨다. 지금은 일본이 인건비가 높은 나라라고 하지만 1960년대 내가 미국에서 듣기로는 일본은 저임금에 노동집약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파는 나라였다. 2000년대 중국처럼 말이다. 한국도 처음 자동차를 외국에 수출할 때 모방에서 시작했다. 그러던 한국이 변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전화인 삼성 갤럭시노트2를 꺼내더니 옆에 붙어 있는 펜을 뽑아들었다. “카피로만 끝나면 창조경제가 아니다. 더 많이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이 펜은 아이폰에는 없다. 남이 만들어내지 않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창조경제다. 하지만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는 반대다. 정부가 개입해 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천혜의 자원을 가진 데다 경제 사정도 좋았던 아르헨티나가 기울기 시작한 것도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규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경제정책, 무능 때문이다.”
그를 만나기 전, 기자는 A4용지에 빼곡하게 쓴 질문지를 준비했었다.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한 그의 혜안을 기대하면서, 또 혹시라도 노벨상 수상자가 ‘너무 무식한 질문을 하는 것 아니냐’고 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경제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하자 그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현재 냉각된 부동산 시장에 대한 해결책을 묻는 질문에서도 껄껄 웃으며 “나도 잘 모른다. 아마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도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일 거다”라고 말했다.
겉으론 “나는 실수도 하고 잘 틀리는 사람이다. 교수가 모든 걸 알 것이라는 편견을 깨라”는 가르침처럼 들렸지만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습이 캠퍼스의 여느 20대보다 더 열정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요즘 관심은 한국의 통화정책을 연구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의 연구실을 나오면서 기자가 느낀 것은 ‘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호기심과 도전정신이었다. 하긴, 그것이야말로 이 노교수를 물설고 낯선 땅으로 오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 토머스 사전트 교수는 ::
거시경제, 화폐경제학, 계량경제학에 정통한 미국 경제학자다. 1964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학사를, 1968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이후 거시경제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합리적 기대가설’을 발전시킨 경제학자로 2011년 프린스턴대 크리스토퍼 심스 교수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가 쓴 ‘거시경제학이론’은 경제학도의 교과서로 널리 쓰인다. ‘합리적 기대가설’은 사람들은 모든 정보를 이용해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한 후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정부가 어떤 경제정책을 펴더라도 미리 미래를 예상해 행동한다는 가설이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깜짝 정책을 내놓아도 왜 효과가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는 올해 3월부터 서울대 경제학부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부터 한국은행 국외 고문을 맡는 등 한국과 인연이 깊다.
인터뷰=노지현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30527/554298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