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13:06

#몽골 초원을 헤맨 한국인이 있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소속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찾은 곳은 사막(沙漠)이다. 여기서만 자라는 천연 야생초에서 '드라코 세팔룸포에티디움'이란 성분을 뽑은 것이다.거기에 시나몬, 유칼립투스, 레몬, 제라늄, 고삼 추출물, 오일을 섞어 탄생한 것이 '아톨로저DF 항균(抗菌) 비누'다. 한 번 씻으면 9시간 동안 피부가 촉촉하게 유지되는 것은 물론 온갖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아준다. 비누는 100g당 1만4000원이다. 꽤 비싼데 효능을 맨 먼저 인정한 것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세이부백화점이었다. 이 비누는 세이부의 입점(入店) 테스트를 한 번에 통과한 뒤 시부야·이케부쿠로 등 5곳에 깔렸다.

#비슷한 시기 태백산맥을 동서로 가르는 대관령(大關嶺)을 헤집고 다닌 연구원도 있었다. 수백 종의 산나물을 분석한 끝에 그가 주목한 것이 '이고들빼기'란 식물이다. 거기서 뽑아낸 게 '퀴논 리덕타아제'란 효소다. 지금껏 강원도 산(山)사람 중 일부가 이 나물을 김치로 담가 먹을 뿐이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니 술을 많이 마시거나 오랜 기간 약물을 복용해 간(肝)이 상한 이들에게 이것이 기막힌 치료제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대관령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안의 돌기해삼(海蔘)을 여태껏 사람들은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줄만 알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기막힌 화장품 소재였다. 과학으로 무장한 지성에 자연은 보고(寶庫)인 것이다.

지난 금요일 강릉과학단지 안에 있는 KIST 강릉 분원(分院)에 갔다. 나들이엔 오건택 KIST경영지원본부장과 임환 문화홍보실장이 동행했다. 비가 영서(嶺西)를 적시던 날씨가 대관령을 넘자 거짓말처럼 화창하게 변했다.때마침 하루 전이 분원이 생긴 지 10년 되는 날이다. 오 본부장은 KIST가 보유한 2개 분원의 건설을 도맡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강릉과학단지 50만평 중 강릉분원의 입지(立地)는 기막히다. 진산(鎭山)을 등에 지고 좌청룡·우백호 정남향에 경포호가 차로 5분 거리다.
 
"처음엔 맨 높은 쪽이 배정됐어요. 경치는 그럴듯했지만 바람이 셌어요. 어느 눈 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강릉으로 달려가니 여기만 눈이 녹아 있어요. 제일 양지바른 곳이죠. 알고 보니 강릉시청이 탐내던 자리였대요." 용(龍) 머리에 오 본부장은 연구센터를 지었다. 지방 과학의 첨병(尖兵)이 되란 뜻이었다. 거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KIST가 주목한 것은 농업이었다. 누구나 낡았다고 생각한 농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은 역발상이다. 이렇게 탄생한 것은 이른바 '케이 팜(K-Farm) 프로젝트'다. 40년 전 포항제철과 삼성전자와 현대중공업 같은 중후장대(重厚長大)형 기업의 청사진을 그려 근대화의 씨앗을 뿌린 KIST가 농업에 고개를 돌린 이유가 있다.


미래의 이슈는 수명 연장, 그게 바로 국민 행복지수와 연결되는 산업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KIST의 과학자들이 옛 심마니처럼 심산유곡을 헤매야 한다는 뜻인가? 천연산업이라지만 원료는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여기서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KIST의 ICT가 동원됐다. 식물의 크기, 색, 형태, 향기, 맛을 이미지-영상 기술과 로봇 자동화 기술과 센서 기반 모니터링 기술과 성분 분석 기술로 분석하니 땅 없는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해서 10년간 일궈낸 성과가 SCI급 논문 304편을 포함한 논문 394편과 특수출원 114건이다. KIST의 기술을 이전받은 회사는 돈방석에 앉게 됐고 KIST는 번 돈으로 연구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처음엔 '구라' 같던 오 본부장의 입담이 들으면 들을수록 '기적'처럼 들리는 것은 취재 후 동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소주잔을 기울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김영현 연구지원부장이 뭔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인삼(人蔘)에 포함된 사포닌 성분을 400배로 높여 만든 '진삼(眞蔘)'이라는 술이었다. 부르기는 술이라 하지만 그는 이것을 "하루에 딱 두 잔만 마시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워낙 효능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꽤 취기(醉氣)가 돌아 내심 "무슨 효과가 있으랴" 싶었지만 순간 경이(驚異)가 일어났다. 갑자기 눈앞이 맑아지는 것이 아닌가. 오랜 취재 생활에서 이런 경험은 언젠가 명의에게 침(鍼)을 맞았을 때뿐이다. 눈만 맑아진 게 아니었다. 새 대통령 등장 후 많은 석학(碩學)에게 '창조경제'에 관한 설명을 들었을 때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바로 KIST는 창조경제를 실천하고 있고 그게 지방 과학을 선도했던 것이다.

참으로 상쾌한 출장이었지만 그 느낌이 귀경길 소양강 근처에서 깨지고 말았다. 윤창중 청와대 전(前) 대변인의 성추문 의혹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는 전언을 받은 것이다. 속세로 돌아오고 있다는, 그래서 몸도 마음도 때묻어간다는 느낌이 그때만큼 강하게 든 적이 없다.



문갑식 선임기자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