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12:32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외국인 연구원 신분으로 2008년 1년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어느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일본 언론인을 만났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서울 특파원과 홍콩 특파원을 지낸 지한(知韓)·지중(知中) 인사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한·중·일 삼국인 중 자기 속에 있는 이야기를 곧바로 말하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다. 오늘은 (일본인인) 내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겠다"며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이랬다. 일본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한국이 중국과 연대하는 경우다. 중국 위안화는 조만간 아시아 지역 기축통화가 된다. 이때 한국이 중국과 손을 잡으면 일본은 큰 위기를 맞는다. 과거 대륙을 지배했던 몽골은 고려(高麗)와 함께 일본을 공격했다. 몽골은 당시 배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배를 만든 건 고려였다. 대륙의 힘과 한반도의 기술이 만나는 상황이 가장 두렵다. 이렇게 말했던 그는 2년 후 한국이 중국과 연대해 일본을 상대로 '안보·경제 전쟁'을 벌이는 경우를 상정한 소설책을 냈다.

여몽(麗蒙) 연합군이라는 740년 전 옛일을 사례로 든 건 좀 억지다 싶었는데 나중에 이해가 됐다. 외세 침입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 일본은 당시 일을 엄청난 공포로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 역사 교과서는 몽골·고려군 내습(來襲)을 일본사 10대 사건 중 하나로 적고 있다. 일본어에도 공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는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할 때 예전엔 "무쿠리고쿠리(むくりこくり) 귀신이 온다"고 했다 한다. '무쿠리'는 몽골을, '고쿠리'는 고려를 뜻한다. 일본인들은 규슈(九州) 앞바다에 새까맣게 밀려든 몽골·고려군 전함을 보면서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강렬한 기억이 뇌리에 새겨진 것이다.

일본 언론인이 우려하던 한·중 연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국수주의 민얼굴을 드러낸 이후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에 이어 조만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지난달 한·일 회담을 취소하고 중국을 찾아 리커창(李克强) 총리,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났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 한국 정부가 일본과 소원한 관계에 빠지는 걸 원한 까닭이 아니다. 이는 아베 내각이 자초한 일이다. 일본이 진정 한·중 연대와 일본 고립을 두려워한다면 사전에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일본 국익에 부합하는 일이다. 아베 총리는 그러나 "한·중에 신경쓰지 않는다"며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하고 있다.

여몽 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이르렀을 때 마침 '신풍(神風)'이 불어 일본을 구했다 한다. 일본은 70년 전에도 '신풍'을 기대했으나 '가미카제(神風)' 자살 공격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다시 '신풍'을 기다린다면 그건 우연에 나라를 내맡기는 무책임한 일이다. '가미카제'는 더 이상 인류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아베 총리가 결자해지(結者解之) 않는다면 일본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한수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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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