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가서 소아마비 예방 접종을 했다. 이번이 네 번째다. 이제 아들은 소아마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소아마비는 예방 접종만 하면 피할 수 있는 질병이고, 한국에서는 1983년 이후 발생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도 소아마비는 사라지는 추세다. 1988년 이후 전 세계 소아마비 감염자 수는 99%나 줄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소아마비 근절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사 창업자 등이 거액을 기부해 퇴치를 적극 지원한 결과다.
그런데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등 3개 국가에서는 소아마비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왜 유독 이들 국가에서만 소아마비를 퇴치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소아마비 예방 백신 접종에 반대하면서 접종 요원들에 대한 테러까지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심각한 나라는 파키스탄이다. 지난해 12월 9명의 접종 요원이 살해된 것을 시작으로 20여 건의 접종 요원 공격 사건이 일어났다. 16일에도 접종 요원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프간과 나이지리아에서는 지난해 12월과 올 2월 소아마비 백신 접종 요원이 살해됐다.
알카에다, 탈레반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은 ‘미국이 이슬람 여성을 불임으로 만들려고 백신을 접종한다’ ‘소아마비 백신에는 이슬람에서 금지한 성분이 들어 있다’ 등의 낭설을 퍼뜨리며 백신 접종에 대한 거부감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백신 접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사마 빈라덴 사건’ 때문이라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이는 2011년 3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빈라덴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파키스탄의 한 마을에 가짜로 B형 간염 예방 접종을 해주면서 빈라덴의 소재를 파악하려 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사건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은 ‘미국이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각종 예방 접종을 해주고 있다’고 믿게 됐다”고 지적했다. 아프간과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접종 요원 공격도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미국에 대한 반감을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막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피할 수 있는 병에 걸려 아이가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갖게 된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미국도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9·11테러의 주범인 빈라덴을 추적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했더라도 방법은 신중했어야만 했다. 그 피해는 테러와 아무 상관 없는 일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고, 전 세계에서 소아마비가 근절되는 날은 늦어지고 있다.
장택동 국제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30619/559598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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