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제일 끝으로 올라가면 연못가에 카페가 하나 있다. 작고 아담한 찻집이지만 CD는 물론 고풍스런 LP와 이제는 보기 힘든 릴 테이프까지 갖추고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다. 직접 만든 각종 소품과 인테리어에서 주인의 안목과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주인장은 문학과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가끔 손님을 보면 생각나는 시를 직접 읽어주기도 한다. 부창부수이니 부인은 아름다운 손글씨로 마을 곳곳을 시밭으로 만들었다.
마을 어귀의 펜션 사장은 밴드광이다. 펜션식당에 무대를 만들어 악기와 음향기기를 갖추어 놓았고, 야외에는 노천무대를 만들어 휴가 시즌이면 음악회도 연다. 마당 한편에 합주실도 만들어 누구든 연습을 할 수 있다. 차량 앞에는 아예 업소이름 대신 밴드이름을 떡 써 놓았다. 부인과 아들, 딸 넷이서 가족밴드도 하는 데 '귀한' 외동아들을 아예 실용음악을 시킬 요량으로 있다. 읍내의 직장인들과 만든 밴드는 지역 문화행사의 단골 출연팀이고, 부녀회밴드도 조직해 직접 지도를 한다. 세상을 잘 만나 대접받지 원래 한량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못 말리는 열정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교인 30명 남짓의 작은 마을교회는 목사님은 물론 사모와 두 아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악기를 하고 있어 시골 예배당이 음악당으로 변신한다. 크리스마스이브면 온 교인이 함께 만드는 '성탄극장'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여는데 크리스천이 아닌 주민들도 다 같이 한바탕 축제를 즐긴다. 무용, 음악, 연극에서 블랙라이트씨어터까지 그 레퍼토리도 실로 다채롭다. 근엄한 장로님과 집사님들을 영화 그리스의 존 트라볼타와 같이 만들어 놓기도 했다.
보건소 소장님은 마을의 어머니, 할머니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다.(한국일보 1월26일자 '문화산책'소개했었다) 직접 음악을 고르고 안무를 짜고 연습을 시켜 부녀회 회원들에게 춤바람을 일으켜서 건강하게 겨울을 나고 신나게 여가를 보내고 있다. 춤추러 온 참에 각종 건강교육과 보건서비스를 제공하니 참석도, 만족도 다 최고다. 오월에 있을 마을축제에 나갈 연습에 벌써 돌입했단다.
마을꼭대기의 또 다른 펜션은 많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로커, 배우, 인디밴드와 국악인에 감독, 기획자들이 모두 팬이다. 워크숍으로 온 손님들에게 아카펠라와 브라스밴드 공연까지 섭외하여 산속이지만 최고의 행사로 만들어 준다. 겨울에는 눈 덮인 산길을 활용한 개썰매를 고안하고 오밤중에는 이른바 오픈카투어라 하여 화물차 뒷 칸에 손님들을 태우고 산속에서 별자리를 설명하니 접근성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말이 무색하다. 최근에는 마술까지 배워서 어린이 손님들에게 깜짝쇼를 선사한다.
고등학생 시절 기타가 좋아 교내 밴드동아리에 열심이었던 청년은 졸업 후 자신이 음악을 배우던 폐교를 활용한 문화공간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가 들어앉아 있으니 공익근무요원, 대학생, 군청의 공무원 등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듯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전통을 이어간다. 연말 모임도 술판이 아니라 공연식으로 만들어 폼 나는 송년파티를 만들었고, 이제 곧 음반도 나올 예정이다.
이외에도 농활 온 대학생에게 민요를 배워 두었다가 주민 생일날 불러주는 쌍둥이 할머니, 농사일 틈틈이 지역의 민속인 축성놀이 보존활동에 열심이신 아주머니, 마을 특산물을 홍보하는 가사로 민요를 바꾸어 부르는 명창이자 상쇠 토마토농장 주인, 퉁소 부는 아저씨 등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마을 곳곳에 끼가 넘치는 주민들이 숨어있다.
농촌에는 이제 개미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베짱이도 필요하다. 어쩌면 마을을 활기차게 하고, 지역과 소통하며,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는 데에는 이들의 활약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들이 생업을 팽개치고 신선놀음에만 정신 팔려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본업에서도 뛰어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문화가 있는 삶으로 창의적인 경영을 일구는 작은 실천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선철 용인대 교수ㆍ감자꽃스튜디오 대표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3/h201303222101161217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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