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각) 저녁 뉴욕의 주유엔 한국대표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표정은 매우 침통해 보였다. 이날 아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긴급회의 결과를 설명하고자 연 자리였다. 그는 “마음이 매우 무겁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를 마무리하는 이때, “북한과의 관계를 결국 이런 상황으로 마감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도 했다.
북한 핵실험만 없었다면 이날은 우리나라 외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날로 언론에 대서특필될 수도 있었다. 비록 15개 이사국이 월별로 돌아가며 맡는 것이긴 하나, 국제평화와 안전을 책임지는 안보리의 의장국으로서 국제사회에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를 공개토론에 부쳐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의제는 ‘무력분쟁에서 민간인 보호’였다. 참가한 나라도 70개국이 넘었다. 106년 전인 1907년 6월 44개국이 참가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려던 고종의 밀사들이 문전박대를 당했던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계략으로 회의 참가 자격조차 얻지 못한 이준 열사는 헤이그의 호텔방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그러나 안보리 공개토론은 북한의 핵실험 탓에 빛이 바랬다. 애초 오전 10시에 열기로 했던 이날 행사는 북한 핵실험 대응책을 논의하는 안보리 긴급회의가 갑자기 오전 9시로 잡히는 바람에 1시간30분이나 늦게 열렸다. 이 토론을 주재하고자 뉴욕까지 날아온 김성환 장관은 그나마 토론의 절반밖에 주재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갑자기 대북 제재 논의가 그의 방문 목적이 돼 버린 셈이다. 우리 외교사에서 축제일이 되어야 할 날, 간담회장에서 나온 발언들은 대결과 응징의 언어가 지배했다.
13일 오후 한국대표부와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주유엔 북한대표부 건물. 13층에 입주한 북한대표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깐 밖에 나온 한 직원은 인터뷰 요청에 “대표가 출타 중”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핵실험 이후 외무성을 통한 ‘성명’만 접할 수 있었을 뿐, ‘말’을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같은 뉴욕 하늘 아래 있지만, 북한대표부 앞엔 마치 38선이 둘러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 이날 유엔본부 앞에선 티베트인 50~60명이 ‘티베트에 자유를 달라’라고 쓰인 손팻말과 티베트 국기를 들고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1950년 강제병합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 무리엔 노인과 여성, 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행색은 비록 초라했으나 이들의 얼굴은 근엄해 보였고 눈빛은 강렬했다.
갑자기 1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이 이들 티베트인과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우리 조상들도 강대국들과 국제회의 등을 돌아다니며 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것을 막아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을 것이다. 조상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고 뭐라고 할까. 나라가 두 개로 쪼개진 뒤, 한 나라는 안보리 의장국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한 나라는 그 회의에서 제재의 대상이 돼 있는 현실을.
행진을 하는 티베트인들에게, 자유는 쟁취했으나 평화는 저당잡힌 우리의 과오를 들려주고 싶었다.
박현 워싱턴 특파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39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