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 중국 농촌에서는 ‘자본주의 꼬리를 베는 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자류지도, 가축도 ‘사회주의 범위 안’에서만 가꿀 수 있었다. 범위 밖에서 자라는 곡식은 아예 낫으로 허리를 잘라버렸다. “사회주의 풀을 기르더라도, 자본주의 곡식은 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닭이나 오리는 얼마만큼 기르면 사회주의이고 얼마만큼 기르면 자본주의라는 논리도 펼쳐졌다. “빈곤한 사회주의로 살더라도 부유한 자본주의로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공자가 말한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빈곤을 걱정하지 않는다”(君子憂道, 不憂貧)고나 할까. 있는 것이 수치이고, 부를 창조하겠다는 것이 수치였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문화대혁명 때만이 아니었다. 개혁개방에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명제는 바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것이었다. 10여년 동안 걸음마다 논쟁을 벌였다. 이 논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이념이 정립되고 사상 해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이 겪은 ‘사’(社·사회주의)와 ‘자’(資·자본주의)의 투쟁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다 겪었던 과정이다.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사회주의 나라들의 숙명적 과제였던 것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은 오늘까지도 ‘시장경제’를 자본주의로 인식하며 배격하고 있다.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슨 일이나 다 ‘사’냐 ‘자’냐를 따져가며 시시비비를 가린다. 효율이 제고되더라도 ‘자본주의’로 판단되면 멈춰야 한다. 농민들의 적극성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역시 ‘자본주의’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 의한 효과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면 금방 많은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겠지만 역시 ‘자본주의’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결국 북한에 자본주의는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는 고리인 ‘긴고아’와 같은 것이다. 긴고아는 사실상 스스로 발목을 묶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독점물이고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독점물일까? 한국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가 큰 몫을 했다. 역으로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경제가 급성장하였다. 두 나라는 사유제와 공유제로 체제가 다르지만, 모두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상호 조절, 상호 보완하면서 발전을 이룩했다. 계획과 시장은 경제수단이지 체제·이념의 분계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만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사상을 해방해야 할 것이다. 목표는 공동부유이지 공동빈곤이 아닌 것이다.
지난해 세계는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행보에서 “중국의 방법이든, 러시아든 일본이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도입하라고 지시했다”는 데 주목하였다. 일언흥방(一言興邦)이라는 말이 있다, 사고만 바꾸면 나라가 흥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라는 등식을 깨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사고로 중국을 바꾸었다. 북한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선을 보였던 ‘신사고’로 시장경제의 일부분을 사회주의에 ‘편입’시킨다면, 천지개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진징이 중국 베이징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18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