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3일의 일이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선인 간 만남이 있었다. 박 당선인이 이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을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정작 현안은 공천 문제였다. 3개월 뒤가 총선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날 공정 공천 원칙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훗날 달리 전개됐지만 말이다.
여기까진 공개된 내용이다. 뒷얘기가 더 있다. 이른바 ‘노란 봉투’ 건이다. 박 당선인은 이날 이 대통령에게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유력 대선 주자지만 여당 소수파 리더인 사람이 대통령에게 노란 봉투를 건넨 건 처음이 아니었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때 YS도 그랬다. 당시 봉투 안엔 YS의 ‘자질 부족’을 다룬 정보보고서가 담겨 있었다. YS는 그걸 근거로 “나를 고사시키려는 거냐”고 노 대통령을 강하게 압박했었다.
박 당선인의 봉투엔 무엇이 있었을 것 같은가. 한 인사가 현 정부 말미까지 비보도를 전제로 전한 정황은 이랬다. “대통령이 곧바로 봉투를 참모들에게 넘겼다. 한 참모가 봉투를 뜯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거다. 다시 원상태로 해보더라. 도중에 누가 뜯어봤나 싶어서였다. 아니었다. 빈 봉투를 밀봉해서 준 거였다. 공천 명단이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대통령에게 빈 봉투를 들이민다? 쉽게 내기 어려운 계책이고 담력이었다. 이 대통령 쪽에선 박 당선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몰라 더 당황했었다.
박 당선인은 이렇듯 정치적 심리전에 강했다. 세밀한 부분까지 계산, 상대의 기를 통제하곤 했다. 한때 의원들과 ‘007 방식’으로 만난 것도 그중 한 예다. “어디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차가 대기 중이었고 그 차를 타고 가니 박 당선인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했다. 의원들에게 보안을 중시한다는 걸 알리면서 동시에 “나를 신경 써서 만난다”는 인상을 줬다.
뭐니뭐니해도 박 당선인이 즐긴 방식은 일단 공언하면 꿈쩍을 안 했다는 거다. 이른바 ‘원칙’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박 당선인과 150분간 대화한 뒤 벽을 마주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낀 사람, 그 후에도 많았다. 박 당선인은 여느 정치인과 달리 절충과 타협을 추구하지 않았다. 상대가 질릴 때까지 밀어붙였고 그래서 이기곤 했다. 참모들이 “싸우면 다 이긴다. 싸움의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찬탄할 정도였다.
분명한 건 그게 야당 대표 또는 사실상 야당 대표였던 여당 2인자 시절에나 통하는 ‘문법’이란 거다. 정치적 약자(弱者) 말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약자는 지분 이상의 힘을 발휘하곤 했다. 게다가 박 당선인은 인생사까지 얽혀 더한 측은지심의 대상이었다. 겉보기론 을(乙)이었지만 실상은 갑(甲)이었다. 말만 해도 충분했다. 대통령들도 박 당선인의 눈치를 봤다.
이젠 다르다. 대통령은 절대 강자(强者)이자 갑으로 여겨진다.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결실로 이어갈 책무를 진다. 과정도, 결과물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에 만족해야 할 때도, 자신이 절대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거래’해야 하고, 야당과 합의하에 “강행처리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한다. 실상 을의 자세가 되는 것, 그게 대통령 정치의 요체다.
박 당선인은 그러나 정부조직법의 원안 통과를 고수하고, 문제가 심한 장관 후보자도 그대로 안고 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옛 정치 방식이다. 정치를 안 한다고 내내 타박받았던 이 대통령도 정부 출범을 위해 두 개 부처를 되살려내고 후보자 3명을 하차시켜야 했다. 야당이 옳아서가 아니라 국정운영의 1차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야당 시절 박 당선인이 한 말이다. “소수당은 양보할 게 사실상 별로 없다.” “여당만의 안(案)이라고 본다.” 역지사지할 때다.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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