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5. 13:49

한동안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이웃 간의 언쟁을 목격했다. 원인은 항상 세탁기에 있었다. 스무명 정도의 세입자가 세탁기 한대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별도의 세탁실이 없이 복도 구석에 세탁기가 있다 보니 바로 그 앞에 사는 세입자가 늘 괴로움을 호소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기가 집에 없을 때만 사용해 달라고 했다.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세입자들은 집에 세탁기를 두고 빨래방에 가서 돈을 쓸 수는 없다고 또 따진다. 나는 싸우기 싫어 손빨래를 하다가 지쳤다. 아무도 틀리지 않으나 모두가 힘들다.

이렇게 피곤한 나의 주거환경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늘어놓다 보면 간혹 “없는 것들이 요구사항도 많고 성질도 더러워서 그래”라는 말이 돌아올 때가 있다. 계단 옆의 비좁은 공간에 세를 주기 위해 억지로 만든 그 방에서 날마다 세탁기 소리와 함께 사는 세입자는 소음피해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요구사항이 많고 성질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 이런 분쟁이 벌어지는 이유가 과연 세입자 개개인의 성격 때문일까. 결국 마당에 세탁실을 새로 지으면서 이웃들이 싸우는 풍경이 사라졌다. 문제는 집의 구조였던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사회의 빈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빈곤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살피기보다 개인의 생활습관, 성격, 소비유형 등에 주목한다. 그래서 술, 게으름, 잦은 이직, 도박과 같은 개인의 탓으로 가난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나타난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가난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한 사회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산업화 이후 빈농의 자식들은 도시에 와서 도시빈민이 되었다. 대부분 육체노동으로 살아가지만 육체노동자일수록 일용직이며 잦은 부상으로 규칙적인 일자리를 갖기 어렵다. 규칙적인 수입을 갖기 어려울수록 소비행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회의 보호장치가 없을수록 빈곤은 자식에게서 또 그 자식에게로 이어진다.

이러한 빈곤의 고리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빈곤을 멸시하려는 감정이 사회에 일상적으로 퍼져 있다. 그리하여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 하는 개인의 탓이 되고, 복지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피 같은 세금으로 게으른 인간들에게 퍼붓는 시혜가 된다.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무시의 감정은 그렇게 자라난다. 이는 한국에서만 목격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에서 복지 수혜자들을 향해 빈대라는 뜻을 가진 ‘무처’(moocher)라는 표현으로 비하하거나, 생산 없이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들이라며 ‘테이커’(taker)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감정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가난을 ‘구경’할 때는 그 비참함에 가슴 저려하는 이들도 막상 현실 속의 가난 앞에서는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고, 무식하고, 게으른 인간들이란 타박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몹시 듣기 힘들어한다. 가난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난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 그러나 가난은 ‘무소유’를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가난을 착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회학자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밑으로부터 사회학 하기”란 어떤 것인지 깊은 성찰을 보여준 연구였다. “이제 나는 한때의 도시빈민이 25년이 지난 뒤 빈곤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질문에 확답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책은 한 가정을 25년간 연구하며 빈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속되는지 담아내었다. 개인의 빈곤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4780.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