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저서 작가와 대화 즐긴 대통령 작가 집도 남몰래 종종 찾아가
점심 식사 하면서 주로 얘기 들어… 허리띠 푼 채로 문학 토론하고
민심 듣고 새 아이디어도 얻어… 세속 이득 무관한 문화적 윤활유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 전 프랑스 대통령의 딸 마자린 팽조는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미테랑이 여비서와의 혼외정사로 낳아 오랫동안 숨겨뒀던 딸이다. 팽조는 미테랑 재임 중에 '국가 기밀'로 분류돼 숨어 살았지만, 언론의 추적 보도로 스무 살에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는 1998년 스물네 살에 장편 '첫 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2002년 팽조를 파리의 쥘리아르 출판사에서 만난 적이 있다. "왜 소설을 쓰기로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미테랑의 딸이란 사실 때문에 타인들 앞에서 내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며 입을 열었다. "내면 속으로 퇴각해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벽을 쌓은 채 소설을 쓰는 것에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소설책 앞 장에 '아버지에게'란 헌사(獻辭)를 붙인 까닭을 물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문학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준 이에게 첫 작품을 바치는 법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스탕달·졸라를 좋아했던 아버지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미테랑은 젊은 시절에 시와 소설을 썼던 문학 청년이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미테랑의 외교 보좌관은 그를 가리켜 '읽으면서 인생을 보낸 사람'이라고 했다. 미테랑은 '글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년필에 푸른색 잉크를 담아 원고 쓰기를 좋아했다. 미테랑은 1960년대부터 1981년 대통령 당선 때까지의 정치 생활을 담은 책 '정치학'을 비롯해 서른 권을 펴낸 저술가였다.
미테랑의 딸 팽조에게 14년 동안 집권한 아버지의 업적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유럽 통합, 사형제 폐지, 사회개혁' 등을 꼽더니 '루브르 박물관 개보수와 국립도서관 건립 같은 문화적 역사(役事)'라고 답했다. 미테랑에겐 늘 '문화 대통령'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생전에 그는 "모든 도시에 가면 나는 황제 혹은 건축가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금을 긋고 결정하고 (새 건물을) 심는다"라고 말했다.
미테랑은 '문화 대통령'이기에 앞서 '문학 대통령'이었다. 그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으로 불러 같이 밥 먹기를 좋아했다. 그는 민가(民家)에서 쓰던 식탁을 엘리제궁으로 가져와 마치 자기 집으로 초대한 양 작가들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내에 소설 '연인'으로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다. '누보 로망'이라는 실험소설 운동을 이끈 뒤라스는 미테랑과 함께 독일군 점령기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기에 막역한 사이였다.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을 좋아했던 미테랑은 뒤라스 소설이 취향에 맞진 않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문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모은 책도 나왔다.
2002년 팽조를 파리의 쥘리아르 출판사에서 만난 적이 있다. "왜 소설을 쓰기로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미테랑의 딸이란 사실 때문에 타인들 앞에서 내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며 입을 열었다. "내면 속으로 퇴각해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벽을 쌓은 채 소설을 쓰는 것에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소설책 앞 장에 '아버지에게'란 헌사(獻辭)를 붙인 까닭을 물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문학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준 이에게 첫 작품을 바치는 법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스탕달·졸라를 좋아했던 아버지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미테랑은 젊은 시절에 시와 소설을 썼던 문학 청년이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미테랑의 외교 보좌관은 그를 가리켜 '읽으면서 인생을 보낸 사람'이라고 했다. 미테랑은 '글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년필에 푸른색 잉크를 담아 원고 쓰기를 좋아했다. 미테랑은 1960년대부터 1981년 대통령 당선 때까지의 정치 생활을 담은 책 '정치학'을 비롯해 서른 권을 펴낸 저술가였다.
미테랑의 딸 팽조에게 14년 동안 집권한 아버지의 업적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유럽 통합, 사형제 폐지, 사회개혁' 등을 꼽더니 '루브르 박물관 개보수와 국립도서관 건립 같은 문화적 역사(役事)'라고 답했다. 미테랑에겐 늘 '문화 대통령'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생전에 그는 "모든 도시에 가면 나는 황제 혹은 건축가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금을 긋고 결정하고 (새 건물을) 심는다"라고 말했다.
미테랑은 '문화 대통령'이기에 앞서 '문학 대통령'이었다. 그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으로 불러 같이 밥 먹기를 좋아했다. 그는 민가(民家)에서 쓰던 식탁을 엘리제궁으로 가져와 마치 자기 집으로 초대한 양 작가들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내에 소설 '연인'으로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다. '누보 로망'이라는 실험소설 운동을 이끈 뒤라스는 미테랑과 함께 독일군 점령기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기에 막역한 사이였다.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을 좋아했던 미테랑은 뒤라스 소설이 취향에 맞진 않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문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모은 책도 나왔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미테랑이 퇴임한 뒤 측근들이 정리해 보니 그가 재임 중 작가와 지식인을 식사에 초대한 횟수가 200번이 넘었다고 한다. 미테랑이 개인적으로 몰래 만난 경우는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미테랑은 엘리제궁에서만 작가를 만난 게 아니었다. 종종 작가의 집을 직접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국내엔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도 미테랑이 존경한 작가였다. 투르니에는 파리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생 레미 슈브류즈에 있는 중세의 수도원을 개조한 집에서 살았다. 미테랑은 그곳까지 가서 홀로 사는 작가가 구워주는 스테이크를 맛있게 비웠다.
미테랑이 작가의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늘 밥맛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 시오랑이 늙고 병들었을 때 미테랑이 그 집을 찾아가 식사한 적이 있다. 시오랑이 미테랑에게 불편한 소리를 자꾸 해서 분위기가 어색했다고 한다.
아무튼 미테랑은 작가를 만나선 주로 듣는 편이었다. 대화 주제도 허리띠 풀고서 거론할 만한 인생과 사랑, 문학과 역사에 집중됐다. 하지만 측근을 통해선 들을 수 없는 민심의 동향을 알게 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미테랑이 나눈 작가와의 밥 한 끼는 뒤끝을 남기지 않았기에 오래 계속됐다. 미테랑과 함께 밥을 먹은 작가들이 세속적으로 이득을 본 게 없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문학을 즐겼고, 작가들은 대통령에게 문학의 즐거움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 생각의 윤활유를 제공했다.
미테랑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생활을 즐기면서 그런 만남을 바탕으로 문화 정책을 세우고 실천해 문화 대통령이 됐다. '아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게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게 낫다'고 공자가 말했다. 문화 대통령이 되는 데도 정도(正道)로 삼을 만한 말이다.
박해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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