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4. 14:14



1985년 여름 미국 국무부 핵감시국장이 전문가 6명을 이끌고 한필순 한국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원 전신) 소장(79)을 찾아왔다. 이들은 범죄 수사를 하듯 연구시설을 샅샅이 뒤졌다. 핵연료 기술을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도입하기로 결정한 데 대한 항의성 방문이었다. 이들은 떠나면서 “미국 일류 대학 출신이 왜 이렇게 많으냐”라고 따졌다. 한 소장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욕구는 먹고사는 문제다. 밥을 지어 먹으려면 불이 있어야 된다. 한국은 석유 한 방울 안 나온다. 석탄은 저질탄밖에 없다. 에너지 문제는 생존권과 관련된 것이다.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맞받아쳤다.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인 2009년 12월, 한국은 원자력 분야에서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아랍에미리트(UAE)가 추진하는 원전 건설 사업에 프랑스 미국 일본이라는 막강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수출 경험이 전혀 없는 한국전력 컨소시엄이 선정된 것이다. 

이 사업은 2020년까지 총 4기의 원전을 건설하는 200억 달러(부가사업을 포함하면 40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다. 한국형 ‘원자력 연탄(핵연료)’과 ‘원자력 아궁이(원자력발전소)’를 통째로 수출하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인 한 박사는 우리나라 원전 시스템 대부분을 총괄한 주인공이다. 한국 원자력은 모두 그의 구상과 지휘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아부다비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왕세자와 함께 착공 기념식에 참석한 직후 기자는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아부다비를 방문한 한 고문 일행과 현장을 찾았다. UAE 서쪽 끝 바라카 지역의 페르시아 만을 낀 광활한 사막에 자리 잡은 원전건설 현장은 우리나라 신월성 원전 터의 4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기자는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인 5일 한 고문과 마주앉았다. 

―현장을 둘러본 소감은….

“어마어마하다. 거대한 공룡을 보는 것 같다.”

한 고문은 건물 20층 높이로 들어설 원자로 격납용기를 보고 거대한 공룡을 떠올렸다고 한다. 현재 공정 25%인 격납시설에 들어갈 철제 원형 격납용기는 지름 60m에 무게만 해도 1600t. 초대형 크레인으로 이 ‘공룡’을 번쩍 들어 격납시설에 옮기고 그 속에 원자로를 넣은 뒤 격납시설을 완공하게 된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원전 기술을 절묘하게 배합한 ‘한국형 원전’이다. 한 고문은 “한국형 원전이 머나먼 중동의 사막에서 차례차례 조립되는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하다”라고 했다. 

―석유가 펑펑 나는 나라가 왜 원전을 만드나.

“누가 봐도 UAE는 지금 당장 원전을 건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원유 매장량이 세계 4위, 가스 매장량이 세계 3위이니 말이다. 불과 50∼60년 전만 하더라도 사막에서 대추야자를 재배하거나 바닷가에서 진주조개를 캐던 극빈층 국민이 어느 날 갑자기 석유를 발견하면서 세계 최고 부호로 수직 상승했다. 하지만 석유가 주는 호사(豪奢)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래의 에너지로 원자력을 선택한 것이다.”

―태양도 뜨겁고 바람도 많은데 이걸 이용하면 안 되나.

“왜 검토하지 않았겠나? 그쪽 투자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태양과 바람만으로는 실용적인 에너지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현재의 석유와 미래 재생에너지 사이의 간격을 메워 줄 에너지로 원자력을 택한 것이다.”

한 고문은 “이 나라는 2030년까지 에너지 수요를 석유·가스 3분의 1, 원자력 3분의 1, 재생에너지 3분의 1로 분담하는 에너지믹스(Energy Mix) 계획이 있다”라고 소개했다. 

“UAE의 셰이크 자이드 국왕은 석유만으로 미래의 발전을 더는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부다비를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탈바꿈시킨다는 ‘아부다비 플랜 2030’을 발표했다.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의 분원을 아부다비에 유치하여 석유가 고갈되는 먼 미래에 아부다비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이다.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석유는 아껴서 비싸게 수출하고, 필요한 에너지는 원자력과 재생 에너지로 분담하는 에너지믹스 전략을 세운 거다.”

―다른 중동 국가들은 어떤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요르단 같은 나라도 원전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석유가 풍부한 주변 국가들을 보라. 석유가 많다고 다 잘사는 건 아니다. UAE나 카타르처럼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있고, 시리아 리비아 이라크처럼 뒤처지는 나라도 있다.”

―요르단이 건설하겠다는 원자로는 발전용이 아니라 연구용이지 않은가.

“요르단은 중동에서 석유가 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관광 수입과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다. 자원도 없고 가난하다. 요르단은 에너지를 거의 대부분 수입하는데, 자립하기로 하고 압둘라 2세 국왕의 주도 아래 2040년까지 원자력으로 30%를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도 UAE를 통해 해외 실적을 갖춘 만큼 요르단의 원전 계획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이와 함께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대우건설과 함께 2014년 가동을 목표로 요르단과학기술대학교(JUST)에 연구용 원자로를 설치하는 프로젝트로 현지 경험을 쌓고 있다.”

―UAE는 왜 한국을 파트너로 결정했나. 

“기술 자립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원전 기술 자립 경험이 있는 한국에 후한 점수를 준 것 같다. 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원전은 인공위성에 버금갈 정도로 기술 집약도가 굉장히 높은 사업이다. UAE는 칼리파대를 통해 한국 전문가들을 받아 원전 운영에 필요한 기술을 교육하고 훈련할 만큼 기술 자립 의지가 대단히 강하다.”

―처음에는 프랑스 아레바 내정설이 퍼졌었다. 

“사실이다. 그 소식을 듣고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전화를 걸어 포괄적인 협력을 제안한 뒤 왕세자 초청으로 아부다비를 방문하고 그랜드 모스크까지 참배했다. 기독교 장로인 이 대통령이 이슬람 사원까지 참배한 것은 쉽지 않은 용단이었으리라 본다. 와서 보니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참 좋다. UAE와 한국이 마치 형제국처럼 가까워진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뒤 세계적으로 원전 계획을 축소하는 분위기다.

“여기서는 후쿠시마 같은 원전 사고에 대한 우려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평화롭고 차근차근 진행되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원전에서 대형 사고가 나면 반핵 분위기로 돌아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조금만 길게, 또 크게 보면 일본의 사고는 한국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

한 고문은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로 우리나라가 덕을 본 게 적지 않다”라고 털어놓았다. 체르노빌 사고로 세계 각국이 반핵 분위기로 돌아서자 웨스팅하우스를 비롯한 선진국의 원전 업체들이 기술을 헐값에 넘겨줬기 때문에 한국형 핵연료와 원자력발전소 개발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이제 후쿠시마 덕을 볼 차례다. 일본이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면 안전설계에 대한 기술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체르노빌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전 기술을 계속 향상시킨 경험이 바라카 원전을 수주할 수 있게 했듯이,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안전 기술을 새로운 차원에서 확보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원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은 원전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쓰나미가 위험한 게 아니라 안전불감증이 위험한 거다. 또 원전이 위험한 게 아니라 문화가 위험한 거다. 정전 은폐, 입찰 비리, 납품 비리, 마약 복용, 시험 성적서 위조…. 이 쓰레기 같은 비리를 조금이라도 묵인하고 용인하는 문화 말이다. 엄정하게, 정말 엄정하게 다뤄야 원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원자력을 과연 미래의 에너지로 제시할 수 있나.

“석유가 펑펑 나는 이 나라가 고민하는 주제는 ‘후손을 위해 아껴 둬야 할 자원을 마구 태워 물이나 전기로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것이다. 정유해서 석유화학제품이나 의약품을 만들면 훨씬 더 가치가 높은데 말이다. 자원은 ‘고귀한 용도(Noble Use)’로 사용할 수도 있고, ‘비천한 용도(Humble Use)’로 사용할 수도 있다. 원자력도 마찬가지다. 발전(發電)을 비롯해서 치료용 가공용 연구용으로 고귀하게 사용할 수도 있지만, 핵폐기물이나 대량 살상무기로 후손에게 엄청난 부담과 재앙을 주는 살벌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자원이 다 그렇듯 원자력도 ‘고귀한 용도’로 사용해야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 한필순 고문은… 한국형 원자로-핵연료 개발주도 ‘원자력의 대부’

1933 년 평남 강서 출신으로 공군장교(공사 5기)로 시작하여 서울대(물리학)를 졸업한 뒤 미국 일리노이대와 캘리포니아대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에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한 한국형 수류탄, 낙하산, 방탄 헬멧, 벌컨포, 각종 레이저 무기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국산화됐다고 할 정도로 황무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국방 기술을 자립시켰다.

1984년부터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을 맡아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운 7년 동안 한국형 원자로와 한국형 핵연료를 개발하여 ‘원자력의 대부’로 꼽힌다. 1992년 우리나라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1997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환경정화기계 회사인 ㈜가이아를 설립하여 중국의 기술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대덕연구단지의 중견 과학자 모임인 대덕클럽을 만들어 회장을 지냈으며, 2011년부터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ttp://news.donga.com/3/all/20121224/51799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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