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4. 12:07

중국 내 외국인 유학생 29만명, 한국인 유학생 6만여 명… 1위
100년 전 유학 숱하게 보냈던 일본은 활력 잃고 유학생 급감
韓流와 한국 기업의 기세처럼 우리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

 

이달 중순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거리를 걸으니 공해로 얼굴이 푸석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동차엔 양보란 없었고, 사람은 불친절이 몸에 밴 듯했다.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는데 종업원이 다가와 "문 닫을 시간이니 빨리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래도 북부 도시보다는 공기가 덜 매캐하고 인심이 덜 팍팍하다는 게 오래 산 사람들 이야기였다.

이런 곳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한국 학생 180명을 만났다. 한국인 안평모 교장이 2003년부터 운영하는 남경에코국제학교 학생들이다. 이들 중 주재원 자녀를 제외하고 "중국 대학에 진학해 중국을 배우겠다"는 뜻으로 홀로 유학 온 학생은 60명에 달했다. 물론 학생 의지보다 부모님 의욕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자식의 미래를 중국에 건 것이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이런 불편한 도시에 아이를 홀로 보낼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 통계를 뒤져봤을 때 한국인에겐 이런 걱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올 초 중국 교육부 발표를 보면 중국 내 외국인 유학생 29만명 중 6만2442명이 한국 학생이었다. 2위인 미국인 유학생의 2배에 달한다.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기에 "앞으로 너희가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뻔한 덕담으로 들렸겠지만 진심이었다. 일본·미국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만큼 남의 장점을 쏙쏙 빼먹으면서 발전한 나라도 드물다. 안에선 서로 싸우면서 매몰되는 듯하지만 밖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역동적이고 도전적이다.

100년 전 일본이 지금의 한국 같았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이 내보낸 유학생은 2만4700여명에 달했다. 유학생 최다 배출국이었다.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이 서구 열강에 뿌린 유학생 43명 가운데에 6세 소녀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유학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의 눈부신 발전은 유학생들이 '원숭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문물을 이식하고 강대국의 가교 역할을 한 결과였다. 일본이 차고 있던 쇄국(鎖國)의 족쇄를 풀어준 것도 유학생이었다.

지금 중국 내 일본인 유학생은 한국인 유학생의 절반도 안 된다. 미국 내 일본인 유학생은 한국인 유학생의 28%에 불과하다. 남에게 배울 것이 없는 나라가 됐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은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에도 1980년대까지 많은 유학생을 내보냈다. 유학생 숫자가 급감한 것은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사회가 활력을 잃기 시작한 이후였다.

해외 유학생은 국가의 희망과 국민의 역동성을 거의 정확하게 반영한다. 일본의 우경화를 '폭주(暴走) 노인의 몸부림' 정도로 관망할 수 있는 것도 100년 전 일본의 역동성을 지금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춤추게 하는 한류(韓流)는 100년 전 유럽과 미국이 열광하던 자포니즘(Japonism)만큼 화려하고, 한국 기업의 시장 장악력은 전후(戰後) 일본 기업의 기세를 느끼게 한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난징에서 만난 한국 학생들에게 '애국(愛國)'이란 구닥다리 같은 말도 꺼냈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97년 외환위기 때 겪은 기억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망한 나라였고, 원화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무심히 찾아가던 단골 카레 집 앞에서 500엔짜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발길을 돌렸을 때, 학비 송금을 못 받아 일본을 떠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보았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라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유학은 작은 경험에서도 큰 것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낭비'라고 해도 괜찮다.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유학은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선우정 사회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27/20121127026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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