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온 딸이 엄마한테 투덜댄다. “데모 때문에 차 막히고 난리 났어요.” 엄마가 딸에게 핀잔을 주며 말한다. “불쌍한 간호사들이 파업도 못하니? 여긴 미국이 아냐.” 프랑스 영화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의 한 장면이다. 파업을 하면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고 파업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나 가능하다는 의미다. 어느 강연에서 하종강 선생이 소개한 이 장면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면서 말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금요일 하루 총파업에 나섰다. 파업에 참가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조리사, 청소원, 행정보조원 등 전국 3443개 학교 총 1만5897명에 이른다.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뻔하다. “학교급식 중단”, “급식대란, 학생들 빵·김밥 들고 등교”, 심지어 “빵만 먹으니 배고파”라는 제목의 기사도 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도 “아이들의 교육 활동에 지장을 주는 파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엄정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여론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의 밥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거나 능력이 없어서 비정규직이 되었으면 참고 일할 것이지 욕심부리지 말란다. 교과부, 언론, 그리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는 교과부의 태도는 치졸하기 짝이 없다. 교사와 달리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파업을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파업에 앞서 조정과 조합원 찬반투표 등 필요한 모든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도 교과부는 아이들의 교육에 지장을 주는 파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두루뭉술한 말로 파업을 호도하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파업이 가져오는 불편함에 대해서만 원색적으로 보도한다.
이런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중교통의 파업에 대해서는 ‘교통대란’, 화물노동자 파업에 대해서는 ‘물류대란’이라는 표현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해왔다. 교과부와 언론의 농간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어떤가. 아이들 밥이 귀한 만큼 그 밥을 지어주는 노동자의 소중함을 이번 기회에 깨달을 수는 없는 노릇인가. 밥하고 청소하고 업무를 보조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능력이 없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학교 비정규직 조리사도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 소위 정규직 조리사처럼 국가기술자격인 조리사 자격을 따야 한다. 공무원 총정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정부가 정규직 조리사를 뽑지 않았을 뿐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 주된 이유에는 ‘교육감 직접고용’과 ‘호봉제 실시’가 있다. 원래 학교 비정규직은 교육감이 선발했다. 지금도 학교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은 교육감이 결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파업에 앞서 고용노동부 역시 단체교섭의 주체는 학교장이 아니라 교육감임을 분명히 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노조법상 사용자로 해석되는 교육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호봉제 실시’는 어떤가. 같은 업무를 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호봉제’의 적용을 받는다. 그래서 근무연수가 늘어감에 따라 이들의 임금도 올라간다. 그러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1년 일한 조리보조원과 10년 일한 조리보조원의 임금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불편함을 이유로 파업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타인을 향해 겨눈 화살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윤지영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변호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01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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