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리먼 쇼크로 빚 무서움 알면서 국가 빚 돌려막기 눈감고 오히려 권장…
빚더미 미국에 전 세계가 기대… 부채 돌려막기 언제까지 먹힐까
인간은 과연 생각하는 동물일까? 통념과 달리 많은 증거에 따르면 인간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검은 백조(白鳥)' 사태를 겪고도 거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흰 백조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검은 백조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2008년에 겪었던 리먼 쇼크라는 검은 백조는 빚의 무서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빚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빚을 더 늘리라고 재촉한다. 개인의 카드 돌려막기는 죄악시하면서도 국가의 빚 돌려막기에는 눈을 감고 오히려 미덕으로 권장한다.
미국의 이른바 재정절벽(fiscal cliff) 문제야말로 코미디의 극치다. 재정절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국 경제가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재정절벽 문제의 해결이란 미국 정부가 돌려막기를 하라는 말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올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된 각종 세금 감면 조치를 더 연장하는 것이 '해결'이다. 또 지난해 미 여야가 정부 부채가 더 늘어나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하면서 2013년부터 자동적으로 지출 삭감에 돌입한다고 약속했는데, 이것을 번복하는 것도 '해결'이다. 그렇게 하면 당장은 도움이 되겠지만 빚은 더 늘어나고 진정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주가가 대세 상승기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하는 한 증권사 리포트엔 이렇게 쓰여 있다. '글로벌 정책 당국은 부채를 줄이자는 디레버리지보다 자산을 증가시키자는 리플레이션의 입장에 서 있다. 결국 버블로 터진 상처를 새 버블을 잉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정책 스탠스는 여전히 진행형이다.'낙관론의 근거라는 게 고작 돌려막기인 것이다.
미국 경제가 바닥을 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2.2%의 성장을 위해 8.7%(GDP 대비)의 재정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국의 무한 부채는 신종 마약과 같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미국의 부채에 기대고 있다. 빚더미 미국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금리로 채권을 발행하는데도 전 세계 투자자들이 줄을 선다. 중국이 세계의 유일한 성장 엔진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부채 증가 없이 중국의 고성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게다가 유럽 재정 위기는 급한 불만 끈 상태이며, 독일과 프랑스로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
한국도 부채의 무풍지대가 아니다. 국가재정이 상대적으로 건전하다지만 1000조원 가계 부채, 500조원 공기업 부채와 맞바꾼 불안한 균형이다.
범세계적인 부채 돌려막기가 과연 언제까지 먹힐까. '채권왕'이라는 빌 그로스는 현재 세계가 겪고 있는 악성 채무 위기는 두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첫째, 부도를 내는 것이다. 둘째, 돈을 더 찍어 인플레이션을 유발함으로써 빚의 실질 가치를 줄이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느 나라의 정책 당국도 취하기 힘든 극단적인 정책이지만 그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검은 백조를 놓치는 이유는 지나치게 단기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에만 뇌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경기 침체가 1~2년 내에 바로 회복되곤 했던 경험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번 침체가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검은 백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심각한 부채 위기는 20년 이상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대공황 당시엔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위기 이전으로 회복하는 데 10년 이상이 걸렸다.
우리는 내일 당장 또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나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거짓 번영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지훈 경제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18/20121118012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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