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기세에 눌려 지레 겁부터 먹는다면 협상이 될 수 없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고려 조정은 무조건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어느 대신은,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넘겨주자’고 말할 정도였다. 자포자기에 빠진 성종은 서경의 곳간을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조금씩 나눠준 다음, 나머지는 강물에 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협상의 대가 서희가 역사의 무대 위로 떠올랐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라, 틈을 보아 잘 운용하는 데 있습니다. 어찌하여 쌀을 버리게 하십니까?” 서희는 성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협상을 하려면 우선 이편의 대오부터 정리해야 한다.
다음은 적의 의도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거란이 고려의 영토를 탐내어 침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한 서희는 이쪽의 협상력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그가 내린 결론은 거란군이 비록 강병이라 할지라도 그에 맞서 한두 번은 제대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종 역시 서희의 전략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발해 유민인 명장 대도수를 안융진(안주)에 보내 거란의 허를 찔렀다. 예봉이 꺾인 소손녕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말로만 위협했다. 상대방이 주춤거리는 것을 확인한 고려 조정은 서희를 소손녕에게 보냈다. 거란의 진중에 도착한 서희는 또 상견례를 구실로 치열한 샅바싸움을 벌였다. 그의 엄숙하고 조리 있는 태도와 주장에 기가 질린 소손녕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고려에 강동 6주를 넘겨주었다.
실학자 안정복의 평이 온당하다. “싸워 보고 화친을 요구해야 화친이 성사된다. 적을 두려워하여 화친만을 주장한다면 적의 농락과 능멸은 끝이 없는 법이다. 그때 대도수의 승첩과 서희의 불요불굴이 아니었더라면 화친이 성사되기는커녕 적의 야욕에 시달리기만 하였으리라.”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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