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추석 민심이다. 연말 대통령 선거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기자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누가 될 것 같아’라고 먼저 묻는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저 호기심이다.
다음으로 많이 묻는 것은 ‘누구 찍으면 좋을까’이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나 지역의 이해관계를 묻는 질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역 민심은 단순하다. 대구·경북에선 ‘박근혜’가 정답이다. 반대로 호남에선 ‘박근혜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정답이다. PK는 ‘해양수산부 부활하고, 신공항 지어줄 사람’이 정답이다.
이런 것들이 바람직한 질문과 대답이 아니기에 답답하다. 문제는 ‘누가 대통령 자격이 있나’다. 자격도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대목,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외교·안보 역량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가 추석 연휴 내내 머리를 짓누른 것은 세계적 석학 폴 케네디와의 만남 후유증이었다. 『강대국의 흥망』이란 명저로 유명한 케네디는 추석 직전 중앙일보를 찾아 국제정세를 논했다.
헨리 키신저를 인용한 두 대목은 충격적이었다. 키신저는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이자 친중파(親中派)다. 그가 자신의 외교적 업적을 총정리한 책 『중국이야기(On China)』의 에필로그에서 중국에 대해 경고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는 설명이었다.
키신저는 ‘역사는 반복되는가’라는 제목의 에필로그에서 영국 외교관 에어 크로(Eyre Crowe)의 1907년 보고서를 인용했다. 크로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은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라는 국왕의 하문에 답했다. 결론은 전쟁. 급성장한 독일은 국력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 중이고, 충분한 무력을 확보했을 때 헤게모니를 추구할 것이며, 현재의 패권국가인 영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양국 간의 쟁패는 ‘구조적으로 결정된’ 숙명이란 분석이다.
보고서는 시대를 꿰뚫은 혜안이었다. 당시 영국과 독일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다. 영국 왕실은 독일 출신이었으며, 양국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광범한 협력관계를 다져 왔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독일의 부상’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키신저가 크로의 예언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과연 100년 전 독일처럼 오늘날 중국의 부상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할 것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다. 크로의 구조론에 따르면 전쟁을 불가피하다. 지금의 중국은 100년 전 독일과 너무나 비슷하다. 100년 전 독일의 명장 몰트케는 “평화는 환상이다. 무력 없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외쳤다. 지금 중국의 장군들은 댜오위다오(일본명 센가쿠 열도) 분쟁과 관련해 “군사적 역량이 쌓이면 최종적으로 섬을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키신저는 ‘평화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화와 협력을 통해 양국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양국 지도자들의 탁월한 식견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케네디는 키신저와 관련해 또 다른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를 말해줬다. 키신저는 예일대에 초청받은 자리에서 “미국과 중국의 미래와 관련해 가장 걱정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중국 젊은 세대의 오만”이라고 대답했다. 키신저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외교 협상을 할 당시 상대했던 중국 지도자들은 매우 신중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전혀 다르다. 내전이나 대약진 운동과 같은 가난과 광기(狂氣)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최근 중국의 경제발전과 무력증강에 자만하고 있다. 점점 더 그럴 것이다. 그들과의 협상은 여러분 몫이다.” 객석의 외교학도들은 순간 모두 얼어붙었다고 한다.
키신저의 책과 강연 내용을 조합해 보면 미·중 관계의 미래는 매우 불안하다. 미·중 관계를 복원한 외교관 키신저는 끝까지 희망을 얘기했지만, 외교사학자로서의 키신저는 끝내 묵시록적 메시지를 외면하지 못한 셈이다. 비관론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문제는 강대국의 흥망에 따른 패권전쟁에서 전쟁터는 엉뚱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놓인 플랜더스 지역처럼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전쟁터가 되곤 했다. 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의 출발점도 조선 땅에서 벌어졌던 청일전쟁이다.
케네디는 ‘신중하고 치밀한 외교적 대응과 준비’를 당부하고 한국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치지도자 중 누가 과연 탁월한 식견과 지혜를 갖추었을까. 판단은 유권자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이런 외교·안보 역량이 중요한 대통령의 자격요건이란 점은 모든 유권자가 잊어선 안 될 필수 고려사항이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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