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5. 14:29


돈에도 서열이 있다. 현재 서열 1위는 물론 달러다. 처음부터 1등은 아니었다. 파운드화를 끌어내리고 쟁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기였다.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에서 전후(戰後) 세계 대표 화폐를 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달러는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됐다. 다른 통화는 금 대신 달러를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그 유명한 브레턴우즈 체제다. 영국이 강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돈의 서열은 국력이 결정한다. 미국의 국력은 당시 세계 1등이었다.

그 후 약 70년, 달러는 몇 차례의 통화전쟁을 모두 이겨냈다. 주로 강약 조절로 1등 자리를 지켰다. 나라 경제가 잘나가고 힘 좀 쓸 때는 강한 달러로, 빚이 늘고 경쟁력이 떨어지면 약한 달러로, 시절에 따라 능강능약(能强能弱)했다. 대개는 ‘약한 척’이 잘 통했다. 베트남 전쟁 후, 1차 석유 파동 때, 80년대 일본의 도전을 모두 ‘약한 달러’로 이겨냈다. 약한 달러는 만병통치약, 금세 미국의 수출을 늘리고 빚을 줄여줬다. 약한 달러를 만들기 위해 미국은 돈 풀기와 평가절하를 즐겨 썼다. 세계 각국이 비난했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유명한 일화도 있다. 닉슨 정부 시절 재무장관 존 코널리(John connally)는 ‘달러발 통화전쟁’을 걱정하는 각국 재무관료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달러 가치 하락은) 당신들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잘랐다. 당신들 걱정이나 잘 하라는 투다.

통화전쟁은 가끔 영토전쟁보다 격렬하다. 결과도 더 참혹하다. 이유도 없이 지는 건 물론이요, 지고도 진 줄 모른다. 일본 가나가와 대학 요시카와 모토타다(吉川元忠) 교수는 『머니패전(Money敗戰)』에서 “무형의 전쟁에서 패배하고는 기꺼이 자기 강산을 적의 손에 공손히 넘기고도 전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패배야말로 더 비참하고 고통스럽다”고 썼다. 그는 1990년 일본 버블 붕괴를 ‘약한 달러’의 공격에 ‘강한 엔’이 패배한 것으로 봤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패배와 맞먹을 만큼 충격적”이었다고 돌아봤다.

요즘 다시 돈 전쟁이 불붙고 있다. 미국이 또 ‘약한 달러’를 꺼내들면서다. 지난주 미국은 한 달에 400억 달러씩, 기한 없이 돈을 풀기로 했다. 이른바 ‘양적 완화 시즌3(Q3)’다. 유럽·일본이 가세했고 곧 중국도 뛰어들 전망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보름 사이에 미국·유럽·일본이 일제히 돈 풀기에 나섰다”며 “세계 금융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당장 비난의 목소리가 크다. 경기는 못 살리고 인플레만 부추길 것이란 우려다. 브라질 재무장관 기도 만테가는 “미국의 돈 풀기는 신흥국 수출만 더 힘들게 만들 것”이라며 “브라질도 환율 방어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도 남의 일이 아니다. 벌써 외국인 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미국이 돈 풀기를 발표한 다음 날,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채권을 1조6000억원어치 넘게 사들였다. 올 들어서만 40조원어치가 넘는다. 덕분에 주가는 2000을 넘어섰다. 원화 가치도 연중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들어올 땐 좋지만 한꺼번에 빠져나갈 땐 큰 고통을 주는 게 외국인 자금이다. 이미 경험도 꽤 있다. 2010년 미국의 2차 돈 풀기 때도 그랬다. 오죽하면 “한국 시장은 외국인들의 현금자동출납기(ATM)” 소리까지 나왔을까. 주가·원화 값 오르는 것에만 취해 있어선 곤란하다. 필요하면 기준금리도 낮추고 자본 통제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달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금리를 동결했다. 기획재정부는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아직 손쓸 기색이 없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정권 입장에선 대선이 끝나는 연말까지 주가가 오르게 놔두는 게 낫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 말, 유혹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원화가 몰락한 뒤엔 백약이 무효다. 하버드대 교수 니얼 퍼거슨은 『금융의 지배』에서 파운드화 몰락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1945년을 지나면서 영국인들은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국력이 강대해야만 그 나라의 화폐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 아니면 결국 그 부담을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정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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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