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학생이 줄어 폐업하는 학원이 속출하고, 수천만원·수억원의 권리금을 주고도 얻기 힘들었던 학원 빌딩에 임대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유입 인구가 줄어 원룸·월세·전세 시장도 위축되고 있다. 교육당국은 반색한다. 외고 입시 단순화, 입학사정관제, 저렴한 EBS(교육방송) 강의 같은 정책이 먹혀들어 마침내 사교육 열풍이 한풀 꺾이는 거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반세기 동안 사교육과 전쟁을 벌여왔다. 박정희 정부는 중·고교 평준화, 전두환 정부는 과외 금지라는 칼을 뽑아들었다. 다음 정부들도 입시제도를 숱하게 뜯어고치고 갖은 행정수단을 총동원했다. 그렇지만 사교육 시장은 끄떡도 하지 않고 줄곧 덩치를 키워왔다. 이 정부가 휘두르는 잔펀치 몇 방에 기세가 꺾일 사교육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생명이 다했을 것이다. 요사이 학원 숫자가 줄어들었다지만 그 이면에선 개인 과외업체가 2008년 6만1100개에서 작년 8만8400개로 급증했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튀어오르는 전형적인 풍선효과다.
사교육은 우리뿐 아니라 입시경쟁이 있는 나라에는 다 있다. 미국에선 초등학교 때부터 학과성적은 물론 펜싱·체스·바이올린 같은 예체능까지 전 분야 'A'를 목표로 하는 고액 과외가 성행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욕 상위권 사립학교 학생의 절반 이상이 개인 과외를 받고 있고, 10년 새 사교육 시장이 2배로 커졌다. 신문에 소개된 한 학생은 SAT(수능) 대비 과외에 50분당 425달러, 선행학습 과목 과외에 100분당 750~1500달러씩 1년에 10만달러(1억1000만원) 이상을 과외비로 지출한다. 프랑스는 사교육 시장 규모가 연간 22억유로(3조2000억원)로 유럽에서 제일 크다. 정치·행정·상경계열 그랑제콜, 의과대학, 회계사 양성학교 등을 노리는 학생들이 학원에서 짧게는 1~2주, 길게는 1년씩 집중적으로 시험을 준비한다. 저널리즘 스쿨 준비반 수강료는 주 1회 수업 16주 코스에 2500유로나 된다. 독일에서는 과외 선생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사설 교육기관이 호황이고, 학부모들이 갈수록 자녀 상담을 학교 교사보다 과외 선생에게 더 의지하는 추세다. 독일 사교육 시장은 연간 15억유로에 이른다.
사교육 열기만 놓고 보면 저들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저들에게는 사교육이 극히 일부 계층, 일부 집단의 관심사일 뿐이다. 미국에 3500개의 대학이 있지만 입학 경쟁이 있는 대학은 상위 175개쯤이다. 일찍부터 성적 관리하고 스펙 쌓는 아이들은 이런 대학을 목표로 하는 극소수다. 프랑스나 독일도 마찬가지다. 공부에 흥미와 소질이 없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자기 적성을 찾아 다른 길을 간다.
반면 우리는 거의 모든 아이가 같은 출발선에 서서 일제히 대학 진학을 목표로 달려간다. 학부모들에게 왜 사교육을 시키느냐 물으면 10명 중 4명이 '남들이 하니까 불안해서'라고 대답한다. 공부도 운동·노래·그림·기계조립·목공 같은 수많은 재능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부모는 자녀의 재능이 어느 쪽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일단 사교육 대열에 뛰어들고 본다. 가정·학교뿐 아니라 우리 교육 시스템 자체에 아이들의 재능을 일찍 찾아내 진로를 설계해주는 기능이 없다. 저마다 잘할 수 있는 게 따로 있는데, 모두가 공부에만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건 비효율적일뿐더러 고통이다. 이 같은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의 대치동이 일시 저문다 해도 이내 제2, 제3의 대치동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김형기 논설위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24/20120924026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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