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여행객에게 숙소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호텔이든 모텔이든 숙소에서 보낸 몇 시간이 도시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20여 년 전 파리에 처음 가서 우연히 들어간 지하철역 주변의 시끄럽고 지저분한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난 뒤 파리에 대한 나의 환상은 무참히 깨졌다. 숙소가 꼭 호화로운 고급 호텔일 필요는 없다. 초라한 호텔이라도 그곳의 공기를 느끼며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면 된다.
추석 연휴를 이용해 대만 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 타이난(臺南)에 다녀왔다. 1887년 타이베이(臺北)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대만성의 수도였던 곳이다. 타이난에 대한 인상은 복잡한 구도심에 자리 잡은 가가서시장(佳佳西市場) 호텔에서 결정됐다. 일제강점기였던 1905년 조성돼 타이난의 물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던 서시장통에 최근 건립된 작은 호텔이다. 객실이라고 해야 27개밖에 안 된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과는 거리가 멀다.
기치로 내건 ‘문화호텔’답게 방마다 컨셉트가 다르다. 영화감독부터 미술관장, 사진작가, 소설가, 화가, 건축가 등 문화·예술 분야의 다양한 인사가 방 하나씩을 맡아 디자인과 설계에 참여했다고 한다. 내가 묵었던 ‘신농가방(神農街房)’은 과거 항운(航運)이 성행했던 오조항(五條港)의 거리 풍경을 재현한 방이었다. 흰 벽면을 장식한 검은색 페인트 그림이 옛날 해안가의 집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소파 앞에 있는 둥근 철망 형태의 탁자는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품이다. 한쪽에 놓여 있는 골동품 같은 낡은 여행용 가방은 방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멋진 소품이다. 일인용 철제 안락의자와 발받침대는 가구이면서 동시에 문화상품이다. 관심 있는 투숙객을 위해 연락처까지 붙여 놨다.
요컨대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편리하고 친근한 호텔이다. 단순히 잠자는 곳이 아니라 그 동네의 스토리가 있는 호텔이다. 문화와 예술이 만나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갤러리를 겸한 로비에선 전시회가 열리고, 호텔 지하에선 콘퍼런스가 열린다. 구도심의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에 맞춰 크고 작은 건물의 용도와 디자인을 바꿔 나가고 있는 타이난시 당국의 ‘타이난 스타일’ 정착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최대 고민 중 하나가 숙소라고 한다. 약간 과장하면 값비싼 호텔과 싸구려 모텔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텔을 개조해 중간급의 특색 있는 호텔로 바꾸는 사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여건과 능력을 갖춘 모텔부터 지자체 및 지역의 예술가들과 힘을 합쳐 동네의 특성에 맞는 개성 있는 중급 호텔로 리노베이션할 필요가 있다. 어두컴컴한 모텔에서 보낸 하룻밤이 한국의 첫인상을 좌우하도록 방치해서는 ‘동북아 관광 허브’의 꿈은 공염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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