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5. 20:59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팔아서 먹고사는 매설가가 직업이 되어 버렸다. 이 세상의 그 많은 직업 중에 나는 왜 이 직업을 갖게 되었나. 매설가로서 살아가려면 팔리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짚어내야 한다. 남들 다 하는 이야기, 진부한 이야기, 범속한 이야기는 장사가 안된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영화 <아바타>를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감독. 그 영화감독도 내가 보기에는 매설가 계보에 속한다. 이야기에다 알록달록한 필름을 입힌 것이 영화 아니겠는가.


캐머런은 이야기의 소재를 인도의 고대 서사시집인 <마하바라타>에서 구했다고 한다. 수많은 신이 등장하고, 그 신들이 쏟아내는 신통력과 영험담의 스토리가 <마하바라타>이다. 왜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자기들 것 놔두고 인도의 뜬구름 잡는 부황한 신화에서 영감을 얻는단 말인가. 할리우드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이야기 밑천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눌려 천대받던 동양의 신화들이 이제 이야기산업의 기반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꼽는 한국의 3대 고전은 <삼국유사>와 <정감록>, 사주명리학의 대가였던 이석영이 1960년대에 저술한 <사주첩경>(四柱捷徑, 6권)이다. 삼국유사는 나의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정감록은 정치적 상상력을, 사주첩경은 운명적 상상력을 증폭시켜 준다. 이 가운데 대선정국이 올 때마다 매설가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고전은 단연 정감록이다. 다른 사람은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나는 그 쓰레기통에서 다시 주워 담아 쓰고 있다.


정감록에서는 ‘해도진인’(海島眞人)을 이야기한다. 바다의 섬에서 진인이 출현하여 도탄에 빠진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다는 스토리이다. 왜 섬에서 진인이 출현하는가? 한국은 삼면이 바다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 쪽이 한반도를 괴롭히는 지배와 체제의 상징이었다면, 바다와 섬은 대륙의 지배와 체제에 맞서는 대항세력의 거점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해양세력인 해도진인은 조선 사람들이 생각하는 혁명의 아이콘이었다. 박정희 체제에 대항했던 디제이와 와이에스가 각각 하의도와 거제도라는 섬 출신이었고, 노무현도 따지고 보면 바닷가 사람이고, 노무현을 치고 나온 이명박도 어찌 되었든 고향이 포항이다.


최근 30년 역사를 보니까 그 해도진인의 육지 상륙 거점이 바로 부산인 것 같다. 해도진인이 일으키는 바람은 부산에서 불기 시작하였다. 유신체제에 금이 가게 만든 79년의 ‘부마항쟁’도 부산에서 시작되었고, 그 연속선상에 와이에스가 있고, 2002년의 노무현 바람, 그리고 2012년의 안철수·문재인 바람도 부산이 연고지 아닌가.


부산은 지명도 솥단지 ‘부’(釜) 자를 쓴다. 같은 솥이라도 다리가 셋 달린 정(鼎)은 권력층이 파티 할 때 쓰는 솥이고, 부는 민초들이 밥해 먹는 솥이라는 차이가 있다. 6·25 전쟁 때 전국의 피난민들이 부산에 몰려들었고, 부산은 3년간 그 난민들에게 밥을 해 먹인 공덕이 있다. 인물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다. 낚시터에서도 밑밥을 미리 뿌려 놓아야 고기가 모이는 것처럼, 적선을 해놓은 토양에서 인물이 나타난다. 인물이 나오려면 밥을 해준 공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부산은 6·25 때 전국의 피난민들에게 솥으로 불을 때서 밥을 해 먹인, 공덕을 쌓은 도시다. 이 솥단지에 해도진인이 상륙할 때 일어나는 해풍이 불어와 불을 때고 있는 형국이다.


서민 얼굴인 ‘문둥이 관상’의 노무현이 등장하였던 2002년도 임오(壬午)년이었고, 2012년은 임진(壬辰)년이다. 양쪽 다 천간에 ‘임’(壬)이 들어간다. 임은 양이 아니라 음이고, 바다와 같은 큰 물을 상징한다. 임이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것은 지배를 받고 있던 음이 위로 올라가고,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는 점괘로 해석하고 싶다. 맞을지 안 맞을지는 앞으로 지나봐야 알겠지만 임진년은 새로운 물결이 몰려오는 해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변화를 관찰하기 위하여 관란정(觀瀾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급히 꺾어지는 물살의 변화를 보았던 것이다. 



조용헌 칼럼니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53537.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