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 제1회
모범생 내 친구와 사사건건 달랐던 취향에 관하여
아시아를 꾸준히 여행한 소설가 박정석씨가 타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도 등을 여행자의 시점에서 풀어냅니다. 그동안의 여행기와 다른 스타일로 아시아를 보여줄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은 5회 연재됩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아무리 하찮아도 서론-본론-결론이 있고, 지금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처음은 중요하다.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은 잊는 것뿐이지만 처음은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일이, 단추 끼우는 것이, 연애가, 인생이, 그리고 여행이 그렇다.
여행도 정말 그렇다. 처음 발을 디딘 외국 땅은 향후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사람의 고향처럼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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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시장에서 아시아의 생동하는 문화를 느낀다. 시장 사이에 숨은 뒷골목은 시장의 또다른 풍경이다. |
대학 가면 학원 등록할래 여행 떠날래
내가 처음 간 곳은 동남아였다. 고등학교 졸업 뒤 떠난 생애 최초의 외국 여행이었다. 홍콩에서 시작해 대만까지, 첫 경험치고는 무지하게 긴 일정이었다. 고생스러웠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돌아오자마자 다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 나라면 차라리 유럽에 한 번 더 가겠어.”
그때 내 두 번째 여행 계획을 듣고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그 애는 중학시절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아주 모범생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딸을 원했을 것 같다. 지각도, 결석도, 2등도, 절대 하지 않는 애였다. 목표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재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생관의 소유자였다.
나는 허위허위 팔자로 걸었지만 그 애는 전족이라도 한 것처럼 종종 걸었다. 나는 빨간색을 입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지만 친구는 그 색깔을 즐겨 입었다. 나는 잘생긴 남자를, 그 애는 공부 잘하는 남자를 최고로 쳤다.
“대학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뭐 할 거니?”
“나는 해외여행.”
내 대답이다. 바다 건너 저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나는 학원에 등록해서 뭐든 열심히 배워보고 싶어.”
그 애가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달랐고 그것이 우리 우정의 기반이었다.
지금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애의 양 갈래 머리-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고 극히 단정했다-와 웅변대회에 나가기 위해 방과 후 빈 교실에 남아 연습하던 모습이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친구는 진지했다. 허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 애 앞에서 메롱, 아무리 기를 쓰고 웃겨도 웃지 않았다. 먼저 한 주먹, 그리고 나머지 주먹.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무리를 하면 나는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다. 학교 대표로 앞에 나가 저렇게 고함칠 용기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거의 기묘하게 느껴졌다. 부럽고도 무서운 확신이여.
“네가 아직 안 가봐서 그렇지, 동남아도 꽤 좋아.”
내가 대학생이 되던 그해 그 애는 재수생이 되었다. 생애 첫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두 번째 입시 준비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해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카오산 로드라는 곳에서 잤는데, 닭장처럼 좁은 방이 1박에 단돈 3천원이야. 싼 게 비지떡이라고 창문도 없는 방이라 질식할까 봐 선풍기도 못 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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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우드’의 산실답게 인도 문화에서 영화는 가깝다. 종교의식에 필요한 꽃을 파는 꽃장수도 흔히 보인다. |
“타이가 좋다고? 거긴 더럽고 가난하잖아”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반나체의 남자애들을 실컷 봤단다. 나는 내가 홀린 것처럼 친구를 매혹시키고 싶었다. 잘 익은 망고가 얼마나 황홀한 맛인지, 연푸른 열대 바닷가에 누워 바람결에 잠이 드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면 함께 가자.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타이가 좋다고? 내가 듣기로는 거기 우리나라 1970년대 같다던데. 더럽고 가난하고 ….”
친구는 내 이야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난 동남아보다는 유럽에 가고 싶어.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그렇게 멋있대.”
이듬해 친구는 무사히 대학생-희망하던 의대에는 결국 가지 못하고 약대에 입학했다-이 되었다. 여행 자유화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이 붐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나와 친구도 시간차를 두고 각각 유럽을 다녀왔다.
유럽은 과연 근사했지만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타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했다. 맹세컨대, 싼 물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 갈 시간과 돈이면 난 차라리 유럽에 한 번 더 가겠다”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뭔가 보고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선진국 말이야. 유럽이 역시 최고지.”
대학 4년 내내 우리는 한 학기에 두어 번씩 꾸준히 만났다. 변화가 곧 성숙으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귀를 뚫고, 파마를 하고, 화장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최대 고민은 연애 문제였다. 우리는 예쁘지도,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았다. 눈은 높고 남자는 없었다. 시집이라도 가기 전에는 처녀성을 잃을 날이 요원해 보였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렇다면 우리 둘이 사귀는 것도 괜찮을 텐데.”
어릴 적부터 이상한 소리 잘하기로 소문난 내가 말했다.
“우린 잘 통하고 생전 싸우지도 않으니 남녀였어도 분명히 사이가 좋았을 거야.”
“그래 … 어쩌면 … 그럴지도 … 모르겠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보던 친구는 곧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네가 남자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벌이 나보다 좋았어야지. 이를테면, 의대에 들어간다거나 ….”
서로 연락이 뜸해진 것은 내가 유학을 가면서부터였다. 우리는 가끔 안부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애가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청첩장이었다. “나 결혼해. 몇 달 전에 선으로 만난 남자야. 네가 보면 매력 없다 하겠지만, 나한테 잘해주고 에스(S)대 의대 출신이란다.”
나는 축하카드를 보냈다. 새색시는 바빴고 유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뒤 내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세월은 술술 잘도 흘렀다. 강산이 변하고 대통령이 바뀌고 내 주소와 몸무게도 변했다. 그러나 전화 몇 통이면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전화는 필요도 없다. 인터넷으로 못 하는 것이 없는 요즘이다. 작정하고 찾으려 든다면 우리는 아마 이번 주말에라도 당장 대학시절 자주 만나던 압구정 모처에서 십 몇 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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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중부에서 스친 푸른 논. |
어느 새 내 주변은 비슷한 사람들로 우글우글구차한 핑계가 다 그러하듯 내가 친구를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늙은 얼굴 보이기 싫어서, 만나면 어색할 것 같아서, 소득 격차가 창피해서, 그 애가 나를 먼저 찾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 등등.
그리고 또 하나. 만나봤자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 그 만남은 아마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이 매력이 되던 시절,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신기함이 순수한 호감으로 이어지던 시간은 이미 끝났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성숙한 우리는 보통 망각으로 대처한다.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 혐오감이나 일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느새 내 주변은 나 비슷한 사람들로 우글거린다.
과거에 훌륭한 학생이었던 내 친구는 이제 훌륭한 시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유능한 중견 약사에 돈 잘 버는 의사의 현숙한 아내, 그리고 현명하고 열성적인 학부모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유럽에 몇 번쯤 더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간과 함께 사람은 변한다. 나도 변했다. 이젠 빨간색이 없어 못 입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팔자 걸음걸이 같은 것. 그리고 지금 든 생각인데, 내가 여행지로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좋아하게 될 일은 앞으로도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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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동북부의 핑우린. 화사한 마차가 서 있다. |
글·사진 박정석/ 소설가·<내 지도의 열두 방향> 저자
여행과 완고한 아빠의 추억
어린 처녀들이 처음 떠나면서 극복해야 했던 것들
곱게 자라난 어린 숫처녀가 물 건너 먼 곳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의 세 가지를 극복해야만 한다. 비용 문제, 강간에 대한 공포, 아버지의 반대.
나의 첫 여행.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친구 한 명과 동행하는 것으로 앞선 두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마지막 난관은 우리 아버지.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절대 안 돼!” 아버지는 펄펄 뛰며 화를 내셨다. 세상은 너무 위험하며 안전한 곳은 오직 집뿐이라고 믿는, 워낙에도 모험이나 자유정신, 여행과는 상극인 분이었다.
동행인 친구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마침 말레이시아 피낭의 어느 한국 공장에서 책임자로 계셨다. 우리가 숙소로 찍어 둔 홍콩의 청킹맨션을 미리 가서 답사하는 열성을 보이셨다. “그런 곳에서 하루쯤 자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더라.”
마침내 우리는 길을 떠났다. 홍콩에서 시작, 타이로 가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이동, 대만을 들렀다가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은 복대에 넣어 배 속 깊숙이 차고, 강도에게 몽땅 털리면 비상금으로 쓸 100달러 지폐도 한 장 신발 속에 깔고 다녔다.
비용을 아끼느라 날마다 볶음밥을 먹었고 잠은 가장 싼 숙소에서 잤다. 모처럼 탄 비행기에 비즈니스석이 텅텅 빈 것을 보고 잽싸게 달려가 앉았다가 쓸쓸하게 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국에서의 하루는 고생과 실수, 학습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호랑이연고를 사고, 팟타이를 먹고, ‘코사무이’의 ‘코’(Koh)가 섬을 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 떠난 지 3주쯤 지나니 교양과목 몇 개를 수강한 것보다 더한 교양을 쌓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어 피낭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조지타운 매음굴의 값싼 여인숙에 투숙,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인력거를 잡아타고 친구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빠!” 친구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었다. 부녀의 감격적인 상봉 모습을 목격하자 맥이 풀렸다. 친구의 아버지는 다정하고 합리적이었고, 고국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집 나간 딸 돌아오기만을 몽둥이 들고 벼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내가 어딜 가든 여전히 아버지는 싫어한다.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어느새 아버지는 칠순이 넘었고 딸인 나는 당신에게 허락 받지 못해 울던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젠 괜찮아요, 아빠.
글·사진 박정석/ 소설가·<내 지도의 열두 방향> 저자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2754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