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3. 02:46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읽기 위해서다. 과거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최근 무인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긴장고조를 보면서 떠오르는 역사의 한 장면이 있다.

기원전 416년, 그리스의 강대국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펠로폰네소스전쟁이 한창인 무렵의 일이다. 아테네가 이끄는 전함이 ‘중립’을 선언한 작은 섬 멜로스에 도착했다. 아테네 사절단이 멜로스 대표단을 만났다. 대략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무조건 항복하라. 그것이 쌍방에 이익을 가져오는 일이다.”(아테네)

 “당신들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이 어찌 우리에게 좋은 일인가.”(멜로스)

 “여러분은 무서운 피해를 입기 전에 투항해서 좋고, 우리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고 이익을 얻으니까 좋다.”(아테네)

 “우리는 중립을 선언했다. 적이기보다 우호국으로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상태를 인정할 수 없나.”(멜로스)

 “당신들은 그럴 권한이 없다. 자국의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강대국에만 있다.”(아테네)

멜로스 사람들은 ‘신탁’과 ‘스파르타’의 지원을 믿고 항복을 거부한다. 아테네 사절단의 주장이 맞았다. ‘약육강식’이란 자연의 법칙이 곧 신(神)의 뜻이었고, 육상 강국 스파르타는 멜로스를 위해 아테네와 바다에서 싸우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아테네는 멜로스를 포위한 다음 성인 남성을 모두 죽이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아버렸다.

흔히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멜로스의 비극이다. 2500년 전 사례가 지금까지 자주 인용되는 것은 이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극을 초래한 전쟁의 원인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불가피했던 원인을 ‘신흥 강대국의 부상에 대한 기존 강대국의 공포’라고 설명했다. 전통적 강자 스파르타가 무섭게 성장하는 아테네를 경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국제정치의 패권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터진다는 설명이다. 전쟁은 늘 세계사의 변곡점이 되어 왔다.


2500년 전 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중국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은 서진(西進)해왔다. 그리스-로마를 거쳐 서유럽을 지나 영국을 징검다리 삼아 미국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지금은 아시아의 시대, 태평양의 시대라 불리고 있다. 중국이 새로운 패권 국가로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2500년 전 아테네를 연상하게 만든다. 아테네가 강국으로 떠오른 것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에서 부(富)를 축적한 덕분이다. 최근 30년간 중국의 경제적 급성장은 경이로울 정도다.

중국은 당연히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동북아의 영토분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독도나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한 것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일본 영토를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분명한 선을 긋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줄 때도 부속 무인도인 센카쿠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과 갈등이 생길 경우 늘 미국을 배후로 의심한다.

국제사회는 독도보다 센카쿠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다. 센카쿠는 중국과 일본, 나아가 중국과 미국의 패권다툼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센카쿠는 확전일로다. 중국의 한 장군은 센카쿠 둘레에 기뢰를 심고, 섬을 목표물로 삼아 폭격훈련을 하자고 주장했다. 중국은 실제로 필리핀과 분쟁 중인 스카버러 암초 주변에 최근 3척의 함선을 배치해 봉쇄했다. 필리핀은 난감할 뿐이다.

중국 관영언론은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 ‘센카쿠가 미·일 방위조약에 포함된다’는 미 국무부 논평에 대해 인민일보는 ‘포함된 적 없다. 고대부터 중국 땅이기에 협상의 여지도 없다’고 반박했다. 신화통신은 지난 주말 사설에서 ‘미국은 영토 문제에 끼어들어 이익을 챙기려 하지 말라. 영토 문제에 외세가 개입하면 비극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솔직히 말해 미국은 쇠퇴일로다. 세계를 지배한다는 초현실주의적 야망을 포기하라’고 덧붙였다.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패권이 이동 중이며 마찰열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멜로스의 비극이 재연되진 않겠지만, 패권국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가 자국의 의지대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란 예측은 가능하다.

넓은 안목과 냉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신탁은 없으며, 스파르타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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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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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7

2006년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에서 이렇게 썼다. “코쿠가 평생 동안 썼던 미완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이 헌책방 구석에 쌓여 있었다. 독자는 고사하고 폐지로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파무크는 불운한 작가가 공들여 쓴 책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이스탄불 거리의 헌책방이 파무크라는 거장을 만든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사라진 헌책방을 떠올려 보았다.

거리의 책방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의 서점은 2000년대 서서히 줄다가 2007년 이후 매년 200개 이상 없어져 2009년 2850개만 남았다. 이는 인구 1만7000명당 한 개꼴이며 이웃 일본의 절반 수준이다. 서울시 한 개 동의 평균 서점 수는 한 개가 안 된다. 그나마 수험생 참고서와 가벼운 베스트셀러가 대부분이라 다양하고 깊이 있는 책들을 찾기가 어렵다. 서점이 줄어드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점의 대형화, 양극화와 더불어 온라인 서점으로 무게 중심이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온라인 서점의 시장 점유율은 35%를 넘어섰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네 서점을 더욱 옥죄는 것이 있다. 바로 온라인 서점에서 제값 받고 책을 파는 ‘도서 정가제’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독자는 쉽고 싸게 책을 사는 혜택을 누리는 것 같지만 컴퓨터 화면에 뜨는 소수의 베스트셀러를 편식하게 되고, 출판계는 할인액만큼 책값에 거품을 넣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출판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간을 펴내려 하지 않고, 독자의 선택권은 점차 줄어든다. 하지만 출판·서점계의 항의와 절규는 규제개혁과 공정거래를 내세운 논리 속에서 파묻히고 있다.

책값을 시장에 맡기자는 무한경쟁 논리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가 주도한다. 이들은 거대 경영을 통해 출판 산업을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 묵직한 전문 서적을 펴내도 영어를 읽는 수억 명의 잠재적 독자가 있다. 또한 동네 서점이 사라지는 문제보다 서점의 대형화로 얻는 이익이 크다.


반면 인구 500만 명이 조금 넘는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에서 국민이 다양한 책을 제값 주고 사주지 않으면 자국어로 쓴 문화콘텐트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동네 서점을 지키고 도서 정가제를 고수하는 이유다. 인구 1억2000만 명이 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은 일본에서 도서 정가제를 지켜야만 한다.


한편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있는 미국의 경우 마을 단위의 공공도서관이 출판계를 지탱한다. 미국을 비롯한 G8 국가에는 인구 6000명당 공공도서관이 한 개 이상 있다. 일본은 G8에 속하지만 4만 명당 한 개로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7만 명당 한 개가 있다. 서점이 사라져 가는 마당에 이를 보완하는 공공도서관마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서점과 도서관이 없는 거리에서 도시 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런 사례를 보거나 듣지 못했다. 경제와 문화가 결합되어 경쟁력을 지닌 세계적 도시는 모두 보행문화가 정착된 곳이다. 이런 거리에서 무목적 배회를 허락하는 책방과 도서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저장고다.

지난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에 있는 알메르에 갔었다. 바다를 메워 만든 이 신도시의 중앙 광장에는 크고 근사한 공공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땅값이 가장 비싼 곳에 교육문화시설이 자리 잡은 도시 구조는 도심을 상업건축이 차지한 우리의 신도시와 극명히 대비되었다.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도시는 작지만 창의적인 기업이 살아있을 때 번성한다. 거대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생산성이 높지만 역동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서점과 도서관은 창의적 도시 네트워크의 접점이 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이름난 가로수길, 홍대앞, 인사동길, 북촌길, 서래마을길에 서점이 몇 개나 있나 검색해 보았더니 통틀어 두 곳이었다. 걷고 싶은 거리에서 느끼는 왠지 모르는 빈곤함은 이 때문이 아닐까.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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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5

‘기술(technology)과 인문학(the liberal arts)의 만남’. 2011년 3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2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애플이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내는 지향점을 이렇게 밝혔다.

단순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채 깨닫기도 전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미리 파악해 전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주는 것. 예컨대 ‘더 빠른 말(馬)’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과는 전혀 다른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애플의 비결이었다. 그러니 ‘와’ 하는 환호성은 절로 따랐고 ‘애플 빠’가 만들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단순함 혹은 간결함(simplicity)으로 대표되는 애플 제품의 디자인 역시 ‘가슴을 울리는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애플은 불과 다섯 가지 품목(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맥북·맥피시)으로, 엑손모빌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됐다. 또 아이폰 출시를 계기로 모바일혁명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정말 위대한 기업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2011년 10월 잡스의 죽음을 계기로 그 위대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 ‘애플 빠’는 ‘스티브 잡스 빠’다. 현재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인 ‘팀 쿡 빠’가 아니라는 것이다. 잡스는 이윤이나 돈보다는 최고의 제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팀 쿡은 스티브 잡스라면 결코 하지 않았던 일-현금 배당·자사주 매입-을 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잡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제품을 바꾸기 시작했다.


뉴아이패드는 아이패드2에 비해 51g이 무겁다. 해상도가 증가하고 배터리 사용시간이 늘었다지만 잡스라면 결코 무게를 늘리지 않았을 것이다. 601g이라는 아이패드2의 무게는 손목에 부담을 주지 않고 누워서 빈둥거리기에 딱 좋은 무게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곧 출시될 아이폰5의 화면은 기존의 3.5인치가 아닌 4인치일 가능성이 크다. 잡스가 3.5인치 화면에 집착한 이유는 한 손으로 조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이즈이기 때문이다.


이런 잡스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이뿐 아니다. 아이패드 미니가 나온다. 킨들파이어나 갤럭시 노트에 대항하기 위해서라지만 잡스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는다. 지금의 애플은 제품과 함께 ‘돈’과 ‘시장 지배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애플 제품은 아이튠스(i-tunes)를 축으로 하는 매우 폐쇄적인 생태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디지털경제의 역사상 폐쇄성은 결코 개방성을 이기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소니의 베타 방식이 마쓰시타의 VHS 방식에 굴복한 것, 애플의 맥 컴퓨터가 IBM 호환 PC에 굴복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애플이 잘나간(나가고 있는) 것은 잡스가 가졌던 인간 중심의 철학, 그리고 거기에 열광한 소비자 때문이었다.

 부자가 망하면 삼대는 간다. 스티브 잡스는 죽었어도 애플은 최소 2년은 간다. 하지만 잡스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제품에 대한 철학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애플은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잡스가 살아 있다면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은 더 치열했을지라도 혁신적인 제품의 출시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줄어들면서(애플 TV 혹은 애플 자동차는 어느 정도 혁신적일까) 특허전쟁을 빌미로 ‘돈’과 ‘시장 점유율’에 천착한다면, 그리고 그 폐쇄성을 유지해 간다면 애플의 마법은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성을 특허전쟁에서 이긴 지금 애플은 마법이 스러지기 전 마지막 불꽃을 찬란히 불태우고 있다. 그러니 나라면 지금 당연히 애플 주식을 팔겠다.

김기홍 부산대 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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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2

[매거진 Esc]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 제1회 
모범생 내 친구와 사사건건 달랐던 취향에 관하여

아시아를 꾸준히 여행한 소설가 박정석씨가 타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도 등을 여행자의 시점에서 풀어냅니다. 그동안의 여행기와 다른 스타일로 아시아를 보여줄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은 5회 연재됩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아무리 하찮아도 서론-본론-결론이 있고, 지금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처음은 중요하다.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은 잊는 것뿐이지만 처음은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일이, 단추 끼우는 것이, 연애가, 인생이, 그리고 여행이 그렇다.

여행도 정말 그렇다. 처음 발을 디딘 외국 땅은 향후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사람의 고향처럼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인도의 시장에서 아시아의 생동하는 문화를 느낀다. 시장 사이에 숨은 뒷골목은 시장의 또다른 풍경이다.
대학 가면 학원 등록할래 여행 떠날래


내가 처음 간 곳은 동남아였다. 고등학교 졸업 뒤 떠난 생애 최초의 외국 여행이었다. 홍콩에서 시작해 대만까지, 첫 경험치고는 무지하게 긴 일정이었다. 고생스러웠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돌아오자마자 다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 나라면 차라리 유럽에 한 번 더 가겠어.”

그때 내 두 번째 여행 계획을 듣고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그 애는 중학시절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아주 모범생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딸을 원했을 것 같다. 지각도, 결석도, 2등도, 절대 하지 않는 애였다. 목표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재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생관의 소유자였다.

나는 허위허위 팔자로 걸었지만 그 애는 전족이라도 한 것처럼 종종 걸었다. 나는 빨간색을 입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지만 친구는 그 색깔을 즐겨 입었다. 나는 잘생긴 남자를, 그 애는 공부 잘하는 남자를 최고로 쳤다.

“대학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뭐 할 거니?”

“나는 해외여행.”

내 대답이다. 바다 건너 저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나는 학원에 등록해서 뭐든 열심히 배워보고 싶어.”

그 애가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달랐고 그것이 우리 우정의 기반이었다.

지금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애의 양 갈래 머리-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고 극히 단정했다-와 웅변대회에 나가기 위해 방과 후 빈 교실에 남아 연습하던 모습이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친구는 진지했다. 허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 애 앞에서 메롱, 아무리 기를 쓰고 웃겨도 웃지 않았다. 먼저 한 주먹, 그리고 나머지 주먹.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무리를 하면 나는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다. 학교 대표로 앞에 나가 저렇게 고함칠 용기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거의 기묘하게 느껴졌다. 부럽고도 무서운 확신이여.

“네가 아직 안 가봐서 그렇지, 동남아도 꽤 좋아.”

내가 대학생이 되던 그해 그 애는 재수생이 되었다. 생애 첫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두 번째 입시 준비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해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카오산 로드라는 곳에서 잤는데, 닭장처럼 좁은 방이 1박에 단돈 3천원이야. 싼 게 비지떡이라고 창문도 없는 방이라 질식할까 봐 선풍기도 못 틀었지.”

‘볼리우드’의 산실답게 인도 문화에서 영화는 가깝다. 종교의식에 필요한 꽃을 파는 꽃장수도 흔히 보인다.
“타이가 좋다고? 거긴 더럽고 가난하잖아”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반나체의 남자애들을 실컷 봤단다. 나는 내가 홀린 것처럼 친구를 매혹시키고 싶었다. 잘 익은 망고가 얼마나 황홀한 맛인지, 연푸른 열대 바닷가에 누워 바람결에 잠이 드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면 함께 가자.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타이가 좋다고? 내가 듣기로는 거기 우리나라 1970년대 같다던데. 더럽고 가난하고 ….”

친구는 내 이야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난 동남아보다는 유럽에 가고 싶어.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그렇게 멋있대.”

이듬해 친구는 무사히 대학생-희망하던 의대에는 결국 가지 못하고 약대에 입학했다-이 되었다. 여행 자유화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이 붐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나와 친구도 시간차를 두고 각각 유럽을 다녀왔다.

유럽은 과연 근사했지만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타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했다. 맹세컨대, 싼 물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 갈 시간과 돈이면 난 차라리 유럽에 한 번 더 가겠다”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뭔가 보고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선진국 말이야. 유럽이 역시 최고지.”

대학 4년 내내 우리는 한 학기에 두어 번씩 꾸준히 만났다. 변화가 곧 성숙으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귀를 뚫고, 파마를 하고, 화장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최대 고민은 연애 문제였다. 우리는 예쁘지도,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았다. 눈은 높고 남자는 없었다. 시집이라도 가기 전에는 처녀성을 잃을 날이 요원해 보였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렇다면 우리 둘이 사귀는 것도 괜찮을 텐데.”

어릴 적부터 이상한 소리 잘하기로 소문난 내가 말했다.

“우린 잘 통하고 생전 싸우지도 않으니 남녀였어도 분명히 사이가 좋았을 거야.”

“그래 … 어쩌면 … 그럴지도 … 모르겠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보던 친구는 곧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네가 남자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벌이 나보다 좋았어야지. 이를테면, 의대에 들어간다거나 ….”

서로 연락이 뜸해진 것은 내가 유학을 가면서부터였다. 우리는 가끔 안부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애가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청첩장이었다. “나 결혼해. 몇 달 전에 선으로 만난 남자야. 네가 보면 매력 없다 하겠지만, 나한테 잘해주고 에스(S)대 의대 출신이란다.”

나는 축하카드를 보냈다. 새색시는 바빴고 유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뒤 내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세월은 술술 잘도 흘렀다. 강산이 변하고 대통령이 바뀌고 내 주소와 몸무게도 변했다. 그러나 전화 몇 통이면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전화는 필요도 없다. 인터넷으로 못 하는 것이 없는 요즘이다. 작정하고 찾으려 든다면 우리는 아마 이번 주말에라도 당장 대학시절 자주 만나던 압구정 모처에서 십 몇 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트남 중부에서 스친 푸른 논.
어느 새 내 주변은 비슷한 사람들로 우글우글

구차한 핑계가 다 그러하듯 내가 친구를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늙은 얼굴 보이기 싫어서, 만나면 어색할 것 같아서, 소득 격차가 창피해서, 그 애가 나를 먼저 찾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 등등.

그리고 또 하나. 만나봤자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 그 만남은 아마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이 매력이 되던 시절,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신기함이 순수한 호감으로 이어지던 시간은 이미 끝났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성숙한 우리는 보통 망각으로 대처한다.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 혐오감이나 일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느새 내 주변은 나 비슷한 사람들로 우글거린다.

과거에 훌륭한 학생이었던 내 친구는 이제 훌륭한 시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유능한 중견 약사에 돈 잘 버는 의사의 현숙한 아내, 그리고 현명하고 열성적인 학부모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유럽에 몇 번쯤 더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간과 함께 사람은 변한다. 나도 변했다. 이젠 빨간색이 없어 못 입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팔자 걸음걸이 같은 것. 그리고 지금 든 생각인데, 내가 여행지로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좋아하게 될 일은 앞으로도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 같다.

버마 동북부의 핑우린. 화사한 마차가 서 있다.

글·사진 박정석/ 소설가·<내 지도의 열두 방향> 저자

여행과 완고한 아빠의 추억

어린 처녀들이 처음 떠나면서 극복해야 했던 것들

곱게 자라난 어린 숫처녀가 물 건너 먼 곳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의 세 가지를 극복해야만 한다. 비용 문제, 강간에 대한 공포, 아버지의 반대.

나의 첫 여행.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친구 한 명과 동행하는 것으로 앞선 두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마지막 난관은 우리 아버지.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절대 안 돼!” 아버지는 펄펄 뛰며 화를 내셨다. 세상은 너무 위험하며 안전한 곳은 오직 집뿐이라고 믿는, 워낙에도 모험이나 자유정신, 여행과는 상극인 분이었다.

동행인 친구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마침 말레이시아 피낭의 어느 한국 공장에서 책임자로 계셨다. 우리가 숙소로 찍어 둔 홍콩의 청킹맨션을 미리 가서 답사하는 열성을 보이셨다. “그런 곳에서 하루쯤 자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더라.”

마침내 우리는 길을 떠났다. 홍콩에서 시작, 타이로 가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이동, 대만을 들렀다가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은 복대에 넣어 배 속 깊숙이 차고, 강도에게 몽땅 털리면 비상금으로 쓸 100달러 지폐도 한 장 신발 속에 깔고 다녔다.

비용을 아끼느라 날마다 볶음밥을 먹었고 잠은 가장 싼 숙소에서 잤다. 모처럼 탄 비행기에 비즈니스석이 텅텅 빈 것을 보고 잽싸게 달려가 앉았다가 쓸쓸하게 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국에서의 하루는 고생과 실수, 학습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호랑이연고를 사고, 팟타이를 먹고, ‘코사무이’의 ‘코’(Koh)가 섬을 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 떠난 지 3주쯤 지나니 교양과목 몇 개를 수강한 것보다 더한 교양을 쌓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어 피낭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조지타운 매음굴의 값싼 여인숙에 투숙,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인력거를 잡아타고 친구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빠!” 친구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었다. 부녀의 감격적인 상봉 모습을 목격하자 맥이 풀렸다. 친구의 아버지는 다정하고 합리적이었고, 고국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집 나간 딸 돌아오기만을 몽둥이 들고 벼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내가 어딜 가든 여전히 아버지는 싫어한다.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어느새 아버지는 칠순이 넘었고 딸인 나는 당신에게 허락 받지 못해 울던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젠 괜찮아요, 아빠.

글·사진 박정석/ 소설가·<내 지도의 열두 방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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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9. 23. 02:00

"어머니는 늘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하셨지요. 나의 꿈은 마틴 루터 킹처럼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김용 세계은행 총재) "실력은 기본입니다. 인격과 헌신이야말로 세계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로 성장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강영우 전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인간성이 결여된 엘리트주의는 사회의 리더를 만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풍족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

 한국계 미국인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부터 6자녀를 각 분야 엘리트로 키워낸 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 고경주 미국 보건부 차관보, 김용 세계은행 총재, 강영우 전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 조선일보DB

지난달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 선임되면서 국내 학부모들 사이에 '글로벌 인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용 총재를 비롯해 얼마 전 작고한 강영우 전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그리고 형제지간인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고홍주 국무부 법률고문 등 한국계 미국인들이 그 관심대상이다.

'인재혁명'의 저자로, 한국 교육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실천전략을 제시해온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로부터 이들을 모델로 한 글로벌 인재론을 들었다. 그는 미시간공과대학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교수법의 권위자다. 조 교수는 "김용 등 한국계 미국인들의 눈부신 성공은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은 한국 부모의 교육열과 미국의 열린 교육시스템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만들어낸 결실"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우리 교육의 새로운 방향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글로벌인재, 가정교육이 만든다

조벽 교수는 글로벌 인재에게 필요한 세 가지는 '창의성' '전문성' '인성'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인성은 글로벌 인재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인성이 바탕이 돼야만 창의성과 전문성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성이란 도덕 혹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삶에 대한 열정, 모험심, 호기심, 자신감, 가치관 등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다. 조 교수는 그 전형적인 사례로 김용 총재를 꼽았다. 이는 김용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 과정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경제전문가가 아닌 그가 세계은행 총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비영리 의료봉사기구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세계보건기구와 공동으로 결핵과 에이즈 등 저개발국의 질병 퇴치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 온 삶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봉사와 헌신에 삶의 가치를 둔 인성 교육을 그가 '가정'에서 받고 자랐다는 점이다. "오늘의 나를 만든 가치는 아버님의 실용성과 어머니의 헌신하는 삶에 대한 강조"라고 했을 만큼 김용 부모의 가정교육은 철저히 인성을 토대로 이뤄졌다. 특히 어머니 전옥숙 씨는 미국에서 퇴계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로, 아들에게 늘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내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퇴계와 마틴 루터 킹을 가슴에 품고 자란 김용은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김용처럼 성공하진 않지요. 100명 중 1명에 불과할까요? 한국 부모 특유의 교육열로 많은 한국계 미국 학생이 고등학교까지는 각종 상을 휩쓸며 수재로 자라나지만, 대학에 들어가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 인성적 토대가 허약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열보다 교육의 방향이 중요

글로벌 인재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삶의 목표가 뚜렷했다는 점이다.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 고홍주 국무부 법률고문 등 6명의 자녀를 각계 엘리트로 키워낸 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는 "아이들에게 삶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열정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걸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기면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 실제로 장남인 고경주 차관보는 "어머니는 항상 우리에게 개인적인 성공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라고 했다. 내가 공중보건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잘 세운 보건정책 하나가 수백만, 수천만 명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벽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하지만, 교육열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열의 방향"이라고 지적한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려면 우주선을 받쳐주는 발사대 시스템, 로켓과 연료, 그리고 방향을 정하는 조정실이 필요한 것처럼 인재교육도 교육시스템, 교육열, 교육방향이 삼박자를 이뤄야 가능합니다."

조벽 교수는 또 글로벌인재들은 단지 IQ가 높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버드대 출신 학생들과 보스턴 빈민가 출신 젊은이들의 삶을 72년간 추적연구한 결과를 들려줬다. "단기적으로는 하버드생들이 훨씬 성공하지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가면 하버드생 그룹에서도 빈민층 그룹만큼이나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같은 실패자들이 나옵니다. 사고력·판단력·분석력 같은 인지적 능력 이상으로 가치·태도·감성을 다루는 정의적(情意的) 능력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지요."

개같이 공부하면 정승된다? '짐승' 된다
김용母 "1등보다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
큰 꿈 심어주며 풋볼·농구 마니아로 키워
백악관 입성 고경주·고홍주 형제母
"목숨 바칠 대상 찾아주면 알아서 공부해"

첫째도 둘째도 '인성교육'… IQ는 잊어라
하버드생 그룹·빈민층 그룹 삶 72년 추적
하버드생도 마약·알콜 중독자 분포 비슷해
지능보다 모험심·배려심 등이 인생 좌우
세상에 주려 공부할 때 성공도 찾아와

캘리포니아의 영재 1528명의 삶을 90년간 추적한 연구도 마찬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IQ가 145 이상 되는 영재 집단에서도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의 분포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IQ지수 위주로 디자인된 대중교육, 두뇌에 누가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교육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여실히 느끼게 하죠. 인간의 IQ란 지능의 아주 작은 부분, 수치로 보면 겨우 5%에 불과합니다. 당장 학교에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훨씬 복잡한 사회로 나와서는 정의적 영역, 감성적 영역에서의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긍정과 소통, 그리고 팀워크의 힘

시각장애인 박사로 유명한 강영우 전 차관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가난한 소년가장으로 장애를 딛고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낸 뒤 8년간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로 일한 그의 힘은 '긍정과 소통'에서 비롯됐다. 생전의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시각장애로 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그것 때문에 이룬 일도 많다. 시각장애 때문에 오히려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끈기가 생긴다"고 말했다.

강 박사 부부는 자식농사에도 성공했다. 장남 진석씨는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최고의 안과의사로 뽑혔고, 차남 진영씨는 백악관 최연소 특별보좌관(입법담당)이다. "부모와의 소통, 지식보다는 인성과 가치교육, 창의성과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자녀교육의 핵심이었다. 생전 모국을 방문해 리더십 강의를 했던 강영우 박사는 "21세기 지도자의 본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가 내세웠던 '3C형 인재'는 유명하다. 3C란,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commitment). "교육열이 뜨거운 한국의 부모들은 이 중에서 자녀의 실력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던 그는, "이 세상에 주기 위해 공부할 때 자기의 성공도 찾아온다"고 했다.

조벽 교수는 "21세기는 머릿속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체험에 의해 얼마만큼 몸에 녹아내렸는가가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이 또한 인성과 관련돼 있다. "세상에는 혼자 잘나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양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전문가가 함께 모여 팀워크를 이뤄야 하는 세상이죠. 노벨상에 공동수상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의 성공은 그들만큼이나 훌륭했던 파트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아무도 나와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으면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짐승'된다

현재 한국 학생들의 인성 수준은 거의 바닥. PISA에서 수학과 과학은 1·2위를 다투지만 IEA의 국제시민의식 교육연구 조사(2009)에서는 36개국 중 사회성 35위, 협력성 36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조 교수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려면 '누가 더 똑똑한가', '더 많이 아는가'를 필터처럼 가려내는 우리 초·중·고 교과과정이 전면 쇄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답 지상주의'다. "한국 학생들은 대학입시준비 과정에서 약 100만개의 문제를 풀어본다고 합니다. 더 큰 걱정은 100만개의 문제에 죄다 정답이 있다는 거죠. 실패에 대한 공포와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닫힌 마음이 문제에요. 교과서적인 지식을 토대로 정답 신봉자를 키우는 교육에서 창의력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교육의 다양성 부재도 걸림돌이다. '교육=공부=국·영·수·사·과'라는 편견이 지배적. 조벽 교수는 "우리가 하는 공부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스포츠, 예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학교공부를 확대시켜야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 실제로 김용 총재는 스포츠 마니아였다. 풋볼팀에선 쿼터백으로, 농구팀에선 포워드로 맹활약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김용 총재로 인해 이른바 '타이거 맘'으로 불리는 아시아계 극성 부모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조벽 교수는 인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인재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사와 부모들이 '어른십(ship)'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인성을 강조해온 나라입니다. 지혜와 아량, 신뢰가 있는 어른들이 많아져야 가정과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인성과 학습이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호기심, 모험심, 배려심 등을 키우는 교육은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킵니다. 학교폭력도 사라지게 합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정승 된다고요? 짐승이 될 뿐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4/20120504014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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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58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이 50만원 하던 시절 연 2억원을 벌던 과외선생, '손사탐'이라 불리며 수천명의 수강생을 몰고 다니던 유명 학원강사, 그리고 지금은 시가총액 8000여 억원의 메가스터디 대표, 손주은 회장(50). 

지난달 27일 기자는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가 마흔 때 했다는 동영상 강의를 보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색깔분필을 많이 쓰는 선생은 처음이었다. 노랑 파랑 빨강 분필에다, 별표도 한 개짜리, 두 개짜리, 세 개짜리, 거기에다 가는 선과 분필 눕혀서 굵게 그린 선 등 분필들의 호화 경연장이었다. 

"여러 색깔을 쓰면 저 스스로 집중력이 생기고, 그 집중력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거죠. 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요? 제발, 너희들은 이거 까먹으면 안돼, 제발 좀 알아줘야 해, 정말 중요한 거야, 뭐 그런 절규에요. 소리치는 거에요." 기자는 이 정도 열정, 이 정도 진정성이면 힘들어 하는 청춘들에게 메시지를 줄 자격이 된다 싶었다. 

"공부로 구원을 받는다? 기득권 뒷다리만 잡을 뿐이다"
동영상 강의 얘기를 다시 꺼냈다. 10년 전 동영상 속의 손사탐은 "공부말고 니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목숨 걸고 해봐, 이넘들아. 알겠어?" 고교생들에게 거의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이 돼있을 이들에게 또다시 "취업공부, 고시공부말고는 니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목숨 걸고 해봐. 알겠어?"라고 협박할 것인가, 기자는 따지듯 물었다. 대답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목숨 걸고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생각이 모자랐어요. 이젠 신자유주의 시대 아닙니까?" 국내 최고의 사교육업체 대표가 "목숨 걸고 공부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다 소용없다고, 그것도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이유로 말이다. 

"취업공부, 고시공부에 목매는 건 두렵기 때문이에요.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다, 안전망이라도 찾자는 거죠. 양극화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공부해서 취업한들 대기업 부속품밖에 더 됩니까. 얄팍한 인생밖에 더 됩니까. 이제 공부는 구원이 아니라, 기득권층 뒷다리만 잡고 편하게 살자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기자는 잠시 멍했다. 사교육으로 돈 버는 회사 대표라면 "신분 상승하려면 공부뿐이다", "몇 년만 참으면 인생 바뀐다"고 해야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아닌가. 

그는 "메가스터디가 나쁜 기업일 수도 있다"고 했다. "메가스터디는 컸는데 젊은이들이 절망적 상태에서 꿈도 못 꾼다면 엄청나게 나쁜 기업이죠. 몸에 안 좋은 약 파는 짓보다 더 나쁠 수 있죠.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매출의 덫에 빠지지 말자고 해왔지만 교육보다 기업에 더 관심을 뒀던 것 같고. (인터뷰 하고 있는) 지금처럼 CEO의 가면을 벗고 싶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도 얄팍한 수작일지 모르고…" 


"좀 '깽판'도 치다가 다른 길로 치고 들어가라"
공부해도 소용없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랬다. "가진 사람들이 부를 세습하는 장치들이 너무 단단해요. 가진 사람들이 자식들을 위해 너무나 튼튼한 안전장치를 만들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공부 잘한다고, 명문대 나온다고 중산층으로, 그 이상으로 올라가긴 쉽지 않아요. 대학 잘 가는 건 경쟁력 요소의 하나일 따름이지, 그렇게 큰 경쟁력은 아니라는 거죠." 어차피 바닥부터 시작해서는 아무리 공부 잘해도 중상층 이상으로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죽도록 공부해봐야 얄팍한 인생 면하기 힘들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손주은은 스티브 잡스 이야기를 꺼냈다. "마르크스 혁명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냐?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기술적 변화, 기술적 혁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잡스가 보여주었던 변화, 남들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창의성, 이것이 미래 경쟁력이 아닌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손주은은 "깽판도 칠 수 있는 젊은이들이게 미래가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대학 잘 간 애들이 보이는 행태가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려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깽판도 좀 칠 수 있는 애들한테 미래가 있지 않을까요.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차라리 기득권의 안전장치가 없는 곳, 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넘 볼 수도 없는 다른 길로 팍 치고 들어가라는 거지요. 어차피 그들의 안전장치는 쉽게 풀리지 않거든요. 다른 길에서 승부하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손주은은 하나 더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면 너무 튼튼한 안전장치는 만들지 마라는 것, 그건 어른으로서의 작은 당부이지요."

손주은은 새로운 사교육 모델을 구상중이다. 학생들 역량을 평가해 공부 잘할 수 있는 학생, 공부는 안 맞아도 다른 걸 잘할 수 있는 학생을 판별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러면서 이익은 얻지 않는 것. 그가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알만했다. 

"자식 떠나보낼 때까지 내 삶은 엉터리였다" 
손주은은 대학(서울대 서양사학과) 시절 두 번의 실연으로 절망의 선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고, 도박당구에 빠지기도 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을 했고, 그러다 덜컥 애를 낳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과외선생을 했고, 계속 돈 벌려고 학원 강사를 했다. 그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야합하면서 완전 엉망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네 살짜리 아들, 두 살짜리 딸을 몇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보냈다. 그땐 그도 세상을 떠나보내고 싶었다. 한강에 몸을 던지지 않는 한, 방법은 '오로지 강의' 뿐이었다. 머리 속에 1%의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죽을 만큼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것. 딸아이를 묻은 바로 다음날부터 그는 그렇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강한 펀치를 한대 얻어맞고 나니까 고통 같은 건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멍한 것, 고통보다 더 큰 멍한 것. 닥치는 대로 강의를 했죠. 잊을 수 있으니까. 그때 이후로 다들 큰일났다고 해도 전 큰일났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드는 거에요.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해버려서 그런지, 충격을 별로 안 받는 기제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때까지도 그의 삶은 '엉터리 삶, 가식적인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새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이러다간 어이없는 인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벤츠 타고 살 순 있지만 가진 사람들 뒤나 핥아주는, 그런 인생 말이죠.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생각했는데 전혀 새로운 인생이란 게 저한텐 없더라고요. 가르치는 일을 내가 잘하니깐, 사교육의 현실을 인정하고 차선책을 구하자 싶었죠." 그래서 손주은이 시작한 것이 강남 부잣집 아이들 상대의 스파르타식 사교육대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강의와 뒤이어 온라인 강의였다. 


"영혼의 울림에 몰입하면, 상상 이상의 결과가 나온다" 
남들이 안 해본 극한의 경험을 해서 그런지, 청년들에 대한 그의 당부는 철학적이었다. '무엇을 하고 살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지' 천착하는 것, '얄팍한 중독'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에 몰입하는 것', 그래서 '농구공이 골대에 빨려 들어가듯 자신을 어딘가에 갖다 꽂는 것'이었다. 

"시급알바하며 용돈 벌고, 남는 시간 여자친구 만나고 게임하고, 하루하루 그렇게 보내면서 바쁘다고 하고. 도서관 가서 시험공부 취업공부 좀 열심히 하면 그걸 몰입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얄팍하게 살다가는 답이 안 나옵니다. 젊은 친구들에게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은 폭도 작고, 엉터리경험, 가짜경험, 기성의 논리에 편입되는 경험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까. "그간의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입니다. 난 이렇게 살았다, 저렇게 살았다, 잘했다, 성공했다, 노력을 덜했다, 이런 차원의 반성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 '가치'의 문제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거죠.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빨리 안전망이나 찾자는 건 아닌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게 몰입인지 중독일 뿐인지,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바로 거기서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해요. 청춘이기 때문에 더 자기인생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인생의 본질에 충실한다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죠. 하지만 8800만원을 벌어도 눈치 봐야 하고 속으로 절망할 수 있어요. 반대로 88만원 밖에 못 벌어도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당당할 수 있어요. 물론 당장은 큰 결과를 못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자기내부에 양심과 영혼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면, 그 울림에 귀 기울이고 몰입한다면, 그래서 모든 걸 던진다면, 상상 이상의 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거지요." 

청춘들은 많이 불안하고 초조한데, 그렇다고 대기업에 취업하고 고시에 패스하면 그 불안은 가실까. 손주은의 얘기대로 갈비뼈 윙윙거리는 영혼의 울림을 가지고, 그 울림에 모든 것을 꽂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오히려 덜 불안하고, 덜 초초하지 않을까. 

손주은은 기자가 도착하기 전 2시간 동안 앉아서 '이렇게 살아선 안 되는데, 아! 이건 아닌데'하며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최소한 남을 속이진 말자, 아니 나 스스로를 이젠 좀 덜 속이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도 지금 나 자신을 많이 속이고 있거든요." 

인생의 정답은 그의 말처럼 '변증법'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이건 아닌데' 하며 반성하고 고민하는 과정 속에, 끊임없이 영혼의 울림에 모든 걸 꽂으려는 과정 속에 정답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젠 손에서 분필을 놓았지만, 그의 영혼엔 여전히 색깔분필의 열정이 가득했다.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110416553915832&outlink=1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56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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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킬러로 불리는 박웅현 ECD는 “창의성은 들여다보는 힘”이라고 말했다. “창의성은 한마디로 볼 ‘견(見)’ 입니다. 시청(視聽)이 아니라 견문(見聞)입니다. 일반인은 담쟁이를 시청하지만 도종환은 견문해서 시를 씁니다. 그리고 이 見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촉수가 바로 인문학이자 휴머니즘인 것이죠.” /사진= 이동훈 기자 photoguy@


<박웅현의 대표 카피> :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1993)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1995) '잘 자! 내 꿈 꿔'(1999)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2001)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200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2002) '커피 앤 도넛(2002) '생활의 중심 - 현대생활백서'(2005) '생각이 에너지다-지구 반대편을 찼다'(2007) 'SEE THE UNSEEN'(2008) '진심이 짓는다'(2009)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현역 광고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친다는 박웅현(50) TBWA ECD의 4평 남짓 사무실에 붙어있는 시 구절이다. 그의 사무실은 기대와 달리 아주 평범했다. ECD(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면 크리에이티브가 생명인 광고회사에서도 광고제작 실무를 총 책임지는 임원급인데, 특별히 크리에이티브하다거나 튀는 인테리어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여느 사무실과 다른 게 있었다. 벽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A4, B4, A3 종이들. 붙일 수 있는 데는 다 붙여놓았다. 처음엔 명카피들을 적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구절들, ‘靑山不墨千秋畵(청산불묵천추화(청산은 먹이 없어도 천추에 남는 한촉의 그림)로 시작되는 한시… 
박웅현의 사무실 벽은 인문학 교수의 칠판 같았다. 그는 벽을 가리키며 “다들 ‘어디다 써먹을 거냐?’라고 묻는데, 이게 바로 내 청춘을 지탱했고 지금도 나를 받쳐주는 힘이자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사람을 향합니다’ ‘진심이 짓습니다’ 등 그의 카피가 유달리 휴머니즘적인 것도 이런 ‘본질’때문인 듯했다. 

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책상 위에 공책은 왜 그렇게 또 많은지. 기자는 그 중에 표지에 ‘젊음’이라고 쓰여진 공책을 볼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젊은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틈틈이 적어놓은 것”이라며 펼쳐보였다.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1.本質(본질)을 봐라 2. 클래식(고전)을 궁금해 하라 3. 强者(강자)에게 강하고 弱者(약자)에게 약해라 4. 동의된 권위에 굴복하고 강요된 권위에 저항하라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6. 答(답)은 ‘여기’ 있다.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7. 주변의 고수를 활용하라 8. 외로워하지 마라. 다 똑같다. 

벽에 닥지닥지 붙은 ‘본질’의 내공이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이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면서 왜 박웅현을 게스트로 초대했는지 알만 했다. 


◇왕따의 경험, 어느 순간 별이 돼 있었다

기자는 8번을 먼저 골랐다. 아무래도 지금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였다. ‘외로워 하지 마라’고, ‘다 똑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박웅현도 젊은 시절 똑같았다. 무섭도록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대학(고려대 신방과)을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입사했을 때 그는 ‘왕따’였다. ‘회의에 방해만 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회의참석도 못하고 혼자 사무실을 지켰다. 그것도 3년을 그랬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절 그는 광고계 ‘지진아’였다.

“어머니가 표주박을 사주셨죠. 종이컵 쓰지 말라고요. 하루종일 벽보고 있는데 뭐 할 게 있나요. 동양철학서 서양미술사 보면서 박으로 머리나 때렸죠. 깨지면 서랍에서 또 꺼내서 때리고. 한 10개는 깨먹었을 겁니다. 박이 원래 잘 안 깨지는데 제 머리도 단단하거든요.”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외로움이라는데,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너무 외롭다고, 왕따라고 ‘어떡하지!’ ‘뭘 해야 잘 보일 수 있지!’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중심을 잃으면 다 무너지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중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웅현에게 ‘박’과 ‘책’은 외로움에 저항하며 자기중심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광고 하기에는 너무 사변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3년 뒤 우연히 새팀에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위치가 달라졌다. 한 의류업체 광고가 자신의 카피로 채택된 것.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제일모직의 '빈폴' 광고였다. 동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하루아침이었다. “그때 드디어 ‘광고를 만드는 사람의 본질은 통찰력과 인문학이다’는 확신을 얻었죠. 내가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게 확신이 된 거죠.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니가 그린대로 인생은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왜 그래?’라고 물으면 ‘인생은 원래 다 그래. 답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죠.” 

박웅현은 나무 전문가가 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국내 지리정보시스템(GIS) 최고전문가가 된 운동권 출신의 송규봉씨 사례를 들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점(點)들을 뿌리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싹 깔렸다가 필요한 순간 점 다섯 개가 연결되면서 별이 됩니다. 이 분들이 나무학자가 되고, GIS 전문가가 되기까지 그 그림을 미리 머리에 그려놓고 달리진 않았을 겁니다. 매 순간 자기중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박웅현에게 젊은 시절 왕따의 경험과 수없이 읽었던 고전의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면서 별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나의 수험서는 상식책, 토플책이 아니라 안나카레리나

흩어진 점들은 언젠간 연결돼 별이 될 수 있겠지만, 그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한 점 한 점 찍으며 산다는 것은 청춘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살아야 별을 그릴 확률이 높은 걸까. 

“입사 초기에 이런 얘기 많이 들었죠. ‘요새 홍대 뜨는 음악 뭔지 아냐?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광고하냐?’ ‘그런 책이나 읽고 있으면 광고 못해’ 등등 말이죠. 그런데 요즘도 그렇지만 마케팅 서적, 자기계발서 같은 책엔 관심이 안 가요.(기자의 상식으로는 광고가 곧 마케팅인데도 그의 책꽂이에는 마케팅 책이 거의 없었다) 대학 때도 정말 신문사 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상식책 달달 외우는 게 너무 싫었죠. 스물 일곱 지식인으로서 내 자존이 허락하질 않았어요. 그래서 <안나카레리나>를 집어 들고 줄기차게 읽었죠. 같이 신문사 준비하던 친구들이 뭐라고 얘기하면 ‘(상식책) 그게 상식이냐? (안나카레리나) 이게 상식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때 내 고집은 당시로서는 의미 없는 하나의 점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의미가 있는 거죠.” 

언젠가 별이 될지도 모를 점을 찍으며 산다는 것, 박웅현에게 그건 바로 자존(自尊)이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죠. 사람은 다 다릅니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과정이 있죠. 그래서 그 사람만의 정답이 있는 겁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자기 존중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젊은 친구들이 추상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진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박웅현은 허전하고 불안하고, 뒤 처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읽었고, 지금도 읽는다. “그렇게 읽었던 게 내 자양분이 됐던 것 같아요. 자양분을 계속 채워넣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힘이 약해지는 것 같죠.” 그가 자기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었던 자존유지의 방법 역시 바로 책이었던 것이다. 


◇ 창의력은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

박웅현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주로 클래식으로 뽑는다. 그는 자신이 지난해 TBWA 신입사원 선발 때 출제한 문제지를 보여주었다. 

‘제시된 것들에 대해 아는 바를 한 줄로 정리하고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세줄 이내로 정리하시오.’ 1) 아서 밀러 2) 마이클 샌델 3) 황지우 4) 병산서원 5)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6) 마뉴엘 푸익 7)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8) 브론테 자매 9)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0) G.I.F.T 11) 엘라 핏제랄드 

“바탕에 충실한 친구를 뽑으려 해요. 바탕이란 건 바로 생각이죠. 토플 점수 몇 점 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싶다는 겁니다. 스펙은 포장에 불과합니다. 영화도 ‘해리포터 죽여요!’가 아니라 히치콕이 뭔지, 라쇼몽이 뭔지 알고 있나 그런 걸 보고 싶은 거죠. 생각의 기초체력이 있으면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카피 어떻게 쓸지는 훈련하면 됩니다. 마케팅 이론도 1년이면 다 가르칩니다.” 

박웅현은 면접도 한 사람 당 1시간씩 카페에 앉아서 한다고 했다. 이력서 보고 질문 하는 식이 아니라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서로 물어보는 식이라고 했다. ‘사회가 만든 취업 매뉴얼대로 준비한 청년들에게 오히려 가혹한 게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TBWA같은 회사가 생기고, 또 생기면 기성세대가 잘못 만든 시스템도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현이 설명하는 창의력도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창의력은 스필오버(spillover, 차고 넘치는 것)가 돼야 나오는 것이지 스퀴즈아웃(squeeze out, 쥐어 짜는 것)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넣어야 합니다. 스폰지처럼 모든 색깔 잉크를 다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스필오버돼서 나오는 겁니다. 청년들이 취업하려면 뭔가 보여줘야 하니깐 포장하고 계속 짜내는데 그건 아닙니다. 30살까지 살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넣어야 합니다. 나중에 짤 기회가 와요. 스필오버하는 사람은 그 기회를 잡는 것이고 짜대기만 한 사람은 못 잡는 겁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등록금 벌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스펙도 채워야 하는 20대들은 박웅현에게 이렇게 하소연할지 모르겠다. “선배는 이미 성공의 최정상에 섰으니깐 덕담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루하루 불안에 쫓기는데 느긋하게 클래식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초조하고 불안할수록 그 시기를 얼마나 묵직하게 자존을 지키며 보낼 수 있냐가 성공의 관건임을 이미 성공한 박웅현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현수 기자 hyde@ 최우영 기자 young@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092016331580783&outlink=1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49

베스트 국가’를 뽑는 조사에서 15위에 올랐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은 9위를 차지한 일본에 이어 아시아 국가 중 2위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6일(현지시간) 100개 국가를 교육, 건강, 삶의 질, 경제적 역동성, 정치적 환경 등 5개 부문을 평가해 종합평가한 결과, 이중 한국이 평균 83.28점으로 15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번 조사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면 건강하고 안전하며 적당히 부유하고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삶을 영위할 기회가 많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특히 교육 부문에서 세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뉴스위크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교육 투자가 큰 몫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에서 종합순위 1위 국가는 평균 89.31점을 받은 핀란드가 차지했다. 이어 2위 스위스, 3위 스웨덴, 9위 일본, 11위 미국, 16위 프랑스 순이었다.

이와 관련 뉴스위크는 ‘존경받는 10대 지도자’를 선정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7번 째로 소개했다.

뉴스위크는 이 대통령을 ‘최고경영자(CEO) 대통령, 이명박’이라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전직 현대그룹 CEO로서 쌓은 경험으로 한국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경제회복이 가장 빠른 국가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외 지도자들은 만모한 싱 인도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원자바오 중국 총리, 브라이언 코웬 아일랜드 총리,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 엘렌 존슨-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 모하메드 나시드 몰디브 대통령 등이 포함했다.



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10081711010356129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45


첫째, 대학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글로벌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 과정에는 세계 문명, 전통, 외국어 습득 등이 포함된다.


둘째, 여행을 통해 다른 사회, 문화, 언어를 배워보기 바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사회와 국가에 거주해 보는 경험은 글로벌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다.


셋째, 자국의 오랜 전통, 철학, 문화, 윤리적 전통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자국의 전통에 대해서 잘 알고 문화와 문명을 넘나드는 의미있는 토론에 참여해 보기 바란다.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41

편집자주: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박병선 박사다. 재불 역사학자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큰 힘을 보탰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도서 297권 중 75권이 14일(한국시각)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외규장각 도서는 5월말까지 4차례에 걸쳐 옮겨질 예정이다.

이에 프랑스 파리에 살며 도깨비뉴스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파리아줌마’가 지난달 7일 직접 인터뷰 했던 박병선 박사와의 일문일답을 소개한다. 상당히 길지만 적절한 시기라 판단해 그대로 옮겨 싣는다.


145년 만에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영구임대라는 어설픈 딱지가 붙었지만 우리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건 반가운일입니다. 하지만 그뒤안에는 반평생을 바쳐 직지고증과 외규장각을 발견하고, 연구한 박병선 박사님의 외롭고 지난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쓴소리 한마디하렵니다. 우리 문화유산 안돌려준다고 프랑스 비난만 할줄 알았지, 이런 분의 숨은 노고가 있는줄은 알았는지요? 알려고는 했는지요? 가끔 제가 프랑스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련도 없는 글에다 우리 문서 안돌려주는 프랑스를 비난한 댓글을 남기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무척 씁쓸하더군요.비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런 분의 노력을 알려고 하는 일은 단순히 비난만하려는 마음으로는 쉽지 않을것입니다. 욕을 해도 전후좌우, 깊은 사정까지 잘 알고 하자고요.

그럼 비난이 비판이 될수 있을것이고, 비판이 된다면 변화할수 있는 힘을 가질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 유학생 1호 박병선 박사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 고증으로 동백상을 수상한 "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님은 625전쟁이후인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왔습니다.

은사의 부탁으로 파리에 있던 외규장각을 찾아 나라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외로운 연구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1979년에는 한국에 외규장각을 알렸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아 도서관 사서일을 그만두기도 했었습니다.

반평생 연구에만 몰두하여 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한쪽을 찾아주는 업적은 이루었지만 그분은 후회하는게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교수제의가 들어왔을때 받아들이지 않은것이랍니다. 그분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분의 삶을 대하는 저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듭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암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여든 연세에 수술이 힘겨우셨지만 다시 일어나 파리로 돌아와 연구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병마도 그분의 열정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현재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박사 일행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독립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계시며, '왜 한국 사람들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프랑스어로 자세히 설명한 '조선조의 의궤' 증보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제는 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그간 숨겨왔던 고충을 동포신문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지난주 삼일절 기념식이 파리의 한국 문화원에서 있었는데, 박사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셨다고 합니다. 

다소 길지만 어느 한말씀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 박사님, 병을 이겨내시고 파리로 돌아오셨습니다.

파리의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랐어요. 결코 저 혼자 병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천주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셔서 ‘그래, 이번 한번만 봐줄게’ 하신 것 같아요. 의사도 수술을 하면서 처음에는 3시간 내지 3시간 반이 예정되었던 것이 7시간이 걸리니까 나중에는 다리에 쥐가 나서 못 견딜 정도였대요. 이 할머니가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수술대에서 죽으려니 각오를 했대요. 그런데 살아나니, ‘참 명도 기십니다’ 하시더라고요 (미소).

내 명이 긴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정말 진심으로 기도 드려주시고, 도와주시니까, 그 덕분에 천주님께서도 ‘이렇게 까지들 하는데 내가 좀 돌봐주면 되겠다’ 하고 놓아주신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 지금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하죠.


- 직지 고증과 외규장각 도서 연구에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을 매달리셨는데, 그 뒤에 숨은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아요.


숨겨진 역사가 어디든 다 있죠. 학생신분으로 좋은 조건도 아니었지만, 직지 고증 당시 당했던 고충이라든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하면서 겪은 고생 등 에피소드가 너무나 많아요. 이야기 거리가 많죠. 시간과 경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것을 이제는 숨겨놓지 않고 공개하고 싶어요. 이런 숨겨진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비화’란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직지고증과 외규장각 도서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뒤에서 고생했던 이야기가 되겠죠. 지금은 외규장각 도서네, 직지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 학자들의 냉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떤 교수님께는 조언을 구했더니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도 있어요. 불란서 사람들의 냉대는 이해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냉대는 더 차갑고 매서웠어요.


- 직지고증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직지 고증을 시작한 것은 1972년 때 일이에요. 당시 직지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불란서 사람들은 “혹시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이라면, 역사적인 공헌이 크다” 라면서, 꼭 ‘-면 Si c’etait’ 이라는 표현을 썼죠. 당시 누구나 조건적으로 ‘면’ 자를 붙였어요. 그러면 좋다, 이 ‘면’ 자를 면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 했지요.

하지만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시작을 하려니, 어떻게 하면 이 ‘면’ 자를 면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어요. 도대체 한국의 활자사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의 흐름을 알아야지 무엇을 어떻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죠. 한국의 학자들과 교수님들께 열 통도 넘는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한국의 활자사나 활자에 관련된 책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요청을 드렸죠.

그런데 이에 대한 답신을 전혀 받을 수 없었어요. 고맙게도 어떤 한 교수님께서는 답변을 주셨는데, 며칠을 두고 찾아봤지만 그런 책이 없다는 대답이었어요. 그렇게까지 라도 알려주신 교수님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죠. 당시 불행 중 다행으로, 일본과 중국의 인쇄사 관련 책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일어도 그렇고 중국 한자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것을 파고 들기 시작했어요.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죠. 어떤 때는 눈이 시뻘개져서, 아침에 근무하러 도서관에 가면, “너 어제 울었니?” 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넣으면 며칠 있다 또 괜찮아지고, 그러한 일상이 반복됐죠.


- 직지 고증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한 가지, 한국 활자사를 추측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일본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활자사 같은 것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니까 놔두기로 하고,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인지 아닌지가 문제니까,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것만 고증하면 된다는 생각에 활자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지우개로도 만들고, 감자로도 만들고, 흙으로도 만들고. 그때만해도 불란서에 세라믹을 굽는 오븐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부엌에서 쓰는 오븐에서 구우면, 세라믹 오븐에서 구운 것처럼 되지는 않을지언정 형태가 조금은 나왔어요. 글자 몇 개를 흙으로 만들어서 굽기를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오븐이 ‘펑’ 하고 터져서 부엌 유리창이 다 깨지고 얼마나 놀랬는지. 주인에게도 욕깨나 먹었죠.

그런데 그 때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생각했어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을 미리 생각을 못하고 나 자신이 활자를 만들어서 어떻게 해서든 증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가지고 직접 잉크에 찍어보면서, 직지에 찍힌 글자를 확대한 것과 내가 찍은 활자를 비교해봤더니 이것이 토활자인지, 사기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금속이나 납 같은 것으로 만든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더라고요. 이렇게 쉬운 것을 활자를 스스로 만드느라 죽으라고 고생을 하고 돈은 돈대로 쓰고 화덕을 세 개나 깨트렸으니.


-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하게 된 것이네요.

인쇄소에서 받은 금속활자를 찍어본 것과 책에 찍힌 활자의 형태가 동일한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 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한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조건이 있었죠. 예전에는 조판이 쉽지 않으니까, 앞의 글자가 뒤의 글자와 물린 것도 있고, 삐뚤어진 것도 있어요. 삐뚤어진 것이나 물린 것을 하나하나 꼬집어서 확대해서 대조해보니, 그것이 모두 정확히 일치했어요. 금속활자가 아닌 붓으로 썼거나 나무로 팠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그 대조표와 사진을 가지고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했죠.

- 그 때는 어떤 심정이 드셨는지.

사실 겁이 났어요.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이것을 그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도서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대담하게 직지가 ‘1377년에 금속으로 만든 활자본’ 이라고 썼어요. 이제까지 ‘-면 Si c’?tait’ 라는 가정이 붙었던 것에서, ‘Si’를 과감히 뺐더니 도서관에서도 겁이 나니까, 나보고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지, 이것이 금속활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서관 명예로 돌리지만, 이것이 잘못되어 실수라면 그것은 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겠다는 조건을 붙였어요. 나 개인이야 실언 했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까지 조심성 있게 전시를 진행했어요. 전시가 시작되고, 이를 본 인쇄업자들이나 그쪽에 관계가 있는 분들로부터 구텐베르그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 앞선 시간에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항의가 왔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금속활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그 경우만 딱 설명해주었죠.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래, 네 말도 옳다’, ‘알아들었다’ 라는 반응과 함께 처음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 직지 고증 3년 동안 정말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 같네요.

나는 그것을 위해 3년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지냈어요. 시간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장을 보러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니 매일 물만 끓여서 커피하고 빵하고 먹는 게 보통이었어요. 머리가 딴 데 있어서 장을 보러 가도 하나만 사고는 다 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죠. 얼마나 나 자신이 답답했겠어요. 너 같은 맹꽁이도 없다 생각했어요. 이렇게 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살아도 살아는 나더라고요.

- 당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동양학자회의 때 발표를 하고 나니, 한국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어떤 학자는, 서지학도 안 한 사람이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그리고 그런 고증을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어떻게 네가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 네가 했다고 하지만 그건 한국 학자들이 다시 보고 판단을 해야 하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당시 너무 화가 나서 찢어버렸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겠어요, 몇 년 동안을 고생해서 고증하고 발표를 해서 인정을 받은 다음의 이야기인데, 그런 소리를 하면서 항의가 들어오니.

나중에 직지 영인본을 내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한국 서지학자들에게 내가 고증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고증을 했다는 것을 발표했더니 그분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리고 영인본 서문에는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병선이 가지고 온 사진을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고증해본 결과 이것은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 라고 적었어요. 나는 완전히 심부름꾼이 되고, 그분들이 다 했다고 된 것이죠. 내가 교수님께 가서 너무하셨다고, 그리고 그 한마디만 고치시라고,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아니라 ‘한국의 서지학자들도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고 고쳐달라고요. 하지만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직도 그 해설문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 프랑스에서의 반응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시 출판된 영인본이 파리 도서관에 왔는데, 도서관 과장이 불어로 된 해설문을 보더니 이것을 읽어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알면서도 안 읽었다고 얘기하니까, 이게 말이 되느냐고, 네가 고생해서 우리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고 인정을 받은 것인데 저희들이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불어 같은 경우는 말 마디가 시원찮게 번역이 되어 더 심하기도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고소를 하겠다고 나왔어요.

그때 드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 교수들인데, 소위 그분들을 국제 재판에 내세우는 것은 너무하다고, 지금 너희들은 영광을 다 차리지 않았느냐, 세계 최고 활자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는 것, 소유권도 너희에게 있다는 것만도 크지 않냐며 설득했어요. 나는 곧 있으면 갈 사람이지만, 그것만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 그것을 봐서라도 참으라고 했죠.

동시에 이것이 서울에 있었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고, 소위 너희 도서관 서고 속에 있었으면 그대로 있었을 걸, 내가 꺼내 고증을 해서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증명이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도서관 쪽에서도 영광이요, 나도 인간적으로 기쁨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고 했죠. 이 후 한국에서도 소식이 없고 해서 일이 일단락 됐어요.


한 식당안에서 찍은 사진.

- 청주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은 어떤 계기로 설립된 것인가요?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엘리제궁에 돈을 빌리러 왔대요. 들어갈 적에는 땅만 쳐다보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서 성공하나 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들어갔더니 미테랑 대통령이 직지 영인본을 탁 내놓으면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국가의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인사를 먼저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전 대통령도 당신도 잘 몰랐다가 용기를 내게 되었고, 회의도 잘 끝나고 결과도 좋았다고 해요. 엘리제궁에서 나오는데 들어갈 때와는 달리 어쩌면 하늘이 그렇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모르겠더라고 하는 회고담을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 직지가 만들어진 청주에 고인쇄박물관 설립을 지시하게 된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죠? (미소)


- 외규장각 도서와 관련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에 매달리신 기간만해도 10년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요. 297권에 달하는 외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는 작업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외규장각 도서는 너무도 역사가 길어요. 무려 30여 년에 걸친 이야기죠.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것은 1977년에 알았어요. 1979년도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 목록과 제목을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병인양요 때 약탈된 도서들이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줬어요. 당시 바짝 관심을 갖다 그만이었죠. 하지만 책의 제목만 알았을 뿐이지, 내용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이를 요약을 해서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10여 년에 걸친 조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때부터 10년 간을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조사를 하는 거예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지만 문제는 책이 크기도 하고, 297권에 달하는 만큼 장 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의궤의 내용을 잘 못 알아 듣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소위 이조시대 이두(한글 발음을 한자를 빌려 적은 것)가 섞여 있어서 한문을 아무리 해석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예단 관련 내용에 저고리가 있다면, 저고리의 ‘저’ 자를 한자를 골라서 쓰는 거죠. 빨간 ‘적(赤)’ 자를 쓰고, ‘고’ 자는 고대라는 ‘고(古)’, ‘리’ 는, 몇 리 하는 ‘리(里)’를 적어 ‘적고리(赤古里)’ 라고 써 놓았으니, 이것이 옷 이름이라고 누가 상상을 하겠어요. 이런 것에 하나하나에 잡히다 보니, 10년 이라는 시간이 가는 것이죠.


- 시간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고충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요약한 내용을 불어로 타이핑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고, 내가 백만장자도 아니고 돈이 없으니까, 이것을 타이핑하는 분께 맡길 때마다 우리 집 골동품을 한 개씩 갖다 파는 거예요. 당시 내가 알던 골동품 가게가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께서 계셨어요. 그 중 한 분이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어요. 골동품을 의탁을 해 놓으면 팔리면 연락이 오는데, 원칙적으로 당신 몫을 챙기시고 나를 주시는데, 어떤 때는 ‘너를 보니 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얼마에 팔았으니 다 줄게 가지고 가’ 하시고, ‘네 꼴을 보니 너무 안됐으니까 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 고 그러셨죠.

그 분께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 할아버지께서 나를 제일 많이 도와주셨죠. 또 옛날 빨레 후아얄 Palais Royal 근처에 일본 판화 파는 집이 있었어요. 당시 이를 운영하던 분이 국립도서관에 판화가 많으니까 판화를 보러 오셨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게 통역을 부탁했어요.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분인데, 판화의 경우 구멍이 있으면 값이 툭 떨어지니까 그것을 감쪽같이 고쳐야 해요. 그것을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주말에는 그곳에 가서 판화를 고쳐주는 거예요. 그 분도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기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있어서, 오늘은 30유로 줘야 하는 것을 어떤 때는 50유로 주고, 어떤 때는 300유로를 주고 그런다고요. 그리고 당시 일을 하면서 점심, 저녁을 주인이랑 같이 먹어야 하니까 밥을 먹는데, 밥을 안 먹다가 먹으니 크게 배탈이 나는 거에요. 한번 두면 나면 모르는데, 월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을 계속 들락날락하니까 수위가 이걸 보고 약을 줘서 먹고 나은 적도 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원고를 완성하게 되었죠.


- 출판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이것을 요약해놓고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죠. 출판을 해야 하는데, 그 때 개인적으로 알던 대사관 영사님께 말씀 드리니 다른 방법은 없고 민원을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민원을 냈더니 규장각에서 이태진 교수님이 이를 받아주셔서 그곳에서 불어판을 출판을 하게 됐어요. 당시 직판사를 지적해주셨는데, 문제는 불어로 된 텍스트라 그들이 찍기를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오자가 많았죠.

이것을 한 열 번은 고쳤을 거예요. 그래도 또 틀리고 또 틀리고, 지금도 오자가 투성이예요. 나중에는 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어요. 당시 출판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태진 교수님이 총장께 말씀 드려 반환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참 반대가 많고. 처음 시작할 당시 밥 먹고 할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은, 내가 미워 죽겠다고, 하지 말랬는데 이렇게 쓸 데 없는 일을 해서 남 골치 아프게 만든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 때는 이메일도 없으니까 편지나 전화로 그런 소릴 들어야 했죠. 어떤 때는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이런 전화를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어요. 당시 그렇게 냉대했던 분들이 지금은 그런 말들이 다 없어지고 앞장서시는 걸 보면 사람이 저렇게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 그런 냉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해내셨네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병도 교수님께서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시지 않았으면 난 중간에 그만 뒀을 거예요. 그 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지언정, 생전에 저에게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셨던 그 말마디가 저에게 큰 힘을 준 거예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하나 못 들어주겠어요. 그래서 끝까지 버텨냈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저도 모르게 갔어요.

저는 아침에서 저녁 밖에는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더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죠. 하루하루 진행이 되어가니까 나는 계속 파고 있는 거예요. 오죽하면 그 쪽 도서관 열람실에서 내 별명이 ‘파란 책 속에 묻혀 있는 여성’ 이겠어요. 의궤 표지가 파랗거든요. 그리고 책이 크니까 나는 그 책을 펴 놓고 밑에 묻혀 있으니까. 그래서 어디 조금 나가 있으면, 이름도 뭐도 모르고 ‘파란 책에 묻혀 있는 여성 어디 있냐’ 고 그렇게 물었다고 해요. 그렇게까지 됐었어요. 그래도 해냈어요.

시간이 아까워 식사도 못하며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양기섭 문화원장이 방문하여 잠시 나가자고 하여 나갔더니 도서관 근처 까페에서 오믈렛을 시켜주시더라구요. 그 분주하신 분이 도서관에 까지 찾아오시는 것도 고마운데 식사까지 시켜주신 그 마음이 고맙고 잊을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방해하고 냉대하는데 오직 한 분 문화원장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정을 너무나 감사하며 잊지 못하지요.


- 의궤가 145년 만에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시는 기분이 남다르실 텐데요.

우리나라 의궤의 소유권을 못 찾고 대여로 온다는 것이 너무 맘이 아파요. 그 책이 어디 있든 간에 우리나라 것이라는 소유권만은 찾고 싶다고요. 그것이 우리 것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것은 불란서 것을 빌려오는 것 아녜요. 5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정권도 바뀌고,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서류 상 돌려 달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썼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죠.

- 현재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병인양요 1권은 이미 출판이 되었으니, 지금은 2권을 집필하고 있어요. 하지만 애로가 많고,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다행히 문화재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최대 노력하겠다고 하니까 두고 보는 것이죠. 1권은 의궤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었다면, 지금 하는 작업은 병인양요 발발 전과 그 후 프랑스 정부에 보고된 공문 등을 찾아 번역하고 재확인하는 것이죠.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이 와서 쓴 논문과 보도 내용을 몇 개 찾아냈는데, 아직 다 찾지 못했어요. 1866년에서 1867년까지의 신문을 하나하나 보면서 기사가 있나 없나 찾아야 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그것을 다 못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고,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이런 것을 전문으로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많이 들죠.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우선 그것부터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보다 더 충실하게 보충하고 완벽한 책을 만들고 싶어요.


- 외규장각 도서를 찾고 나서 도서관 측과의 갈등으로 결국 도서관을 떠나게까지 되셨다면서요. 그 때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 당시 도서관하고 한국 정부, 대사관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참 복잡해요. 내가 시간적으로 정리를 한 번 해봤는데, 그래도 참 복잡해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사건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에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주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초기에 외규장각 도서를 찾았을 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을 종류별로 모두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보고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기자들이 거기에다가 제멋대로 '발견'이라는 말을 썼다고요.

당시 도서관에서 한국에서 나온 신문을 일일이 최악으로 번역을 해가지고, 물론 가짜로 꾸밀 순 없지만, 똑같은 말마디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규장각 도서가 있는 것을 네가 <찾은 거지>, 어떻게 그것이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고요. 그래서 기자 분들께 사실 찾은거지 발견이 아니다, 발견 소리 좀 쓰지 말아달라고 하니까, 한국에서는 그 말 밖에 다른 말이 없다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냐고 말하는 거예요. '찾음'이라고 쓰면 맥이 없는 것 같고, '발견'이란 단어도 한국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까 해석하기에 달렸는데 말이죠.

결국 제가 발견이라고 해서 마치 최초로 찾아낸 것처럼 얘기를 했다고 그것을 가지고 도서관에서는 저를 달달 볶았어요. 외규장각 도서에 관한 언급은 제일 먼저 모리스 쿠랑이 했어요. 당시 모리스 쿠랑도 책 제목과 왕립도서관(Biblioth?que Royale)에 있다고만 썼지, 책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고, 제목과 크기에 대한 정도만 이야기를 했다고요. 도서관은 모리스 쿠랑이 이미 발표한 것을 네가 다시 발표한 것이지, 왜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문제를 삼았어요. 그래서 나는 다른 것 발표한 것 없다, 이 책이 어디에 있고, 그 제목이 무엇인지 알렸을뿐이지 더 구체적으로 말한것도 없다고 말했죠.


얼마전 파리를 찾은 민주당 5선 김영진 의원과 함께한 박병선 박사.

- 직접적으로 도서관과 갈등을 일으킨 계기가 있나요.

도서들이 오래되다 보니 몇 권만 표지가 제대로 남아있었지, 대부분은 모두 상해서 수선을 하게 되었어요. 의궤 표지들이 두꺼운 종이에다가 비단으로 싸여져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어디서 누가 한 일인지 모르지만, 수선을 맡긴 사이에 누가 의궤에 있는 그림을 면도칼로 잘라갔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조금 똑똑했으면, 제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모두 빼갔으면 잘라버린 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그 옆에 도막을 남겨두고 그림만 가져간 거예요.

당시 무엇보다 도서관 측에서 예민했던 부분은 한국 대사관 사람들이 알게 될 까봐, 그것을 무척 신경을 썼던 가봐요. 저는 내용적으로 그들이 겁냈던 것을 알 수 없었죠. 그들은 그것을 수선을 해서 파리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오겠다고 계획을 짰겠지요. 그 당시 수선을 한 다음에 종이에 싸 놓은 것을 제가 제일 먼저 열었다고요. 내용을 보는데 그림이 잘려 있으니까 이건 수선소에서 잘린 것 같다고 바로 말을 해줬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라간 것처럼 오해를 받을 테니까요. 도서관쪽에서는 이게 국제문제가 될까봐 겁을 낸 거예요.

그런데 내가 도서의 존재를 기자들에게 얘기했기 때문에 책임이 저한테 전가된 거예요. 그 전에는 과장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고 친했다고요. 그런데 하루 사이에 사람이 싹 변하는데, 저 멀리에서 나를 보면 돌아서서 딴 길로 가고 그 정도로 냉담해졌어요. 그리고 또 한국 외무부에서는 저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 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냐고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요. 당시 의궤를 찾았을 때에 대사관에 제가 매일 같이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대사님께 지금 이것이 창고 속에 있으니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간단하다, 보통 서적도 아니고 파지로 분류되어 있으니까 찾는 것이 간단할 테니 어떻게 좀 힘을 써달라고 했죠.

그런데 대사님 말씀은 한불관계가 지금 묘하고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 비위를 건드릴 수 없으니까 당신이 말할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한테 참 잘해주신 분인데, 그 문제만큼은 본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가난할때니까 문화재 같은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죠.

대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본국에 보고를 하셨는데 본국에서 묵살을 했는지, 그 분께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가만히 계셨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거든요. 당시 제가 매일 대사관에 출근하다시피 하니까, 대사님께서는 '병선이 왔으니까 나랑 가서 점심이나 먹어' 하시면서 매일 같이 쌩 미쉘에 있는 우동집에 갔어요. 가서 먹으면서 저는 또 '대사님, 이 우동이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이 문제가 더 중요한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면, '그 얘기는 그만 하고 밥 좀 먹자' 하시면서 넘어가시고 (웃음).


- 도서관에서 나오시게 된것은 그 후의 일인가요?


그 때에도 보도 기관 사람들이 '발견' 소리를 빼달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그 말을 쓰는 거예요. 난 그 말 때문에 있는 대로 당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도서관 내에서 냉전이 일어난 거예요. 도서관 측하고 나하고. 도서관에서는 나를 반역자 취급을 했어요.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다 누설시켰다는 죄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백 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도서관에 책이 있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공고를 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관의 임무라 생각하는데, 제가 반역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도서관에 있는 책이 있다고 말을 한 건데 그것이 왜 비밀이냐, 뭐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그리고 당시 도서가 있으면 카드가 있거나 대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강화도에서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가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떠들기 시작하고, 한국에 신문기사가 하나라도 또 나면, 그 신문을 번역을 해서 도서관 내 보도 담당실(service de presse)에 보고가 된다고요, 이런 기사가 또 나왔다고. 이 사람들은 이를 계속해서 문제로 삼으려고 충동을 한 거예요. 이렇게 몇 달이 계속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제가 도서관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를 하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는지. 그것까지도 좋아요. 제가 뭐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문제 될 것은 없었죠.

그런데 하루는 관장님께서 저를 호출을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도서관에는 천 여명이나 되는 직원이 있고, 나는 당시 정식직원도 아니고, 말단에 말단, 그야말로 임시기간 직원(saisonnier)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관장님이 직접 호출을 해서 사표를 내라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거죠. 직원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비서를 시켜서 해결을 했겠죠. 호출을 해서 갔더니,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거냐고 직접 물으시더라고요. 과장도 같이 갔는데, 과장이 제가 오랫동안 그 책을 찾았다는 것을 말하고, 동시에 이것을 도서관 측과 상의하지 않고 외부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듣고 있다가, 도서관에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데 일일이 과장하고 상의를 해야 하느냐, 또 어떻게 그것이 도서관 비밀로 들어갈 수 있느냐,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니, 관장님도 머리골치가 아프신 모양이에요.

옆에 있는 관장님 비서도 진정하라고, 결국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고 일을 좋게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그 책을 찾고 있는 것을 과장이 알았으면, 이 책을 찾으면 자기한테 먼저 말을 해달라든지, 또는 외부사람한테 말을 하면 안 된다든지 했다면 나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않고 자기도 함께 협조해주면서 그 책을 같이 찾았던 사람이 나를 반역자로 모니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 때 도서관 측에서는 저에게 다른 취직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일년 봉급을 준대요. 그것도 그때서 알았죠. 그런데 저는 그 때 이미 꼴레쥬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했어요. 비서는 나보고 실직자가 아니고 옆에 다른 직장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하더라고요. 말은 사표지만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죠 (웃음).


- 처음 반환 교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시나요?

그 도서에는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어요. 그것만은 알아야죠. 처음에 프랑스에 반환 교섭을 오신다기에 그 분께 그것을 충고해 드리고 싶었다고요. 왜냐면 아무 소리 말고 도서관에 가서 너희들 카드 좀 보자 하면, 없는 카드를 어떻게 갑자기 만들어 주겠어요. 그리고 대장은 외부사람들한테 안보여주는 것이지만 대장 좀 보자, 그렇게 하라고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저를 만날 필요 없다고 안 만나고 그냥 갔다고요. 그러니까 처음에 교섭을 하러 오신 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내용은 모르지만 나는 이쪽 사람들한테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교섭 온 분이 책 내용도 모르고 와서 책만 내놓으라고 그러니 말이 되냐, 그러면서 툴툴거리는 소리를 제가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또 무슨 말인가 했어요. 한국 측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은 것이 없어 모르고, 이쪽 사람들을 통해 들은 것이죠. 당시 회의에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 내용을 외부에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규칙을 세웠대요. 그런데 툴툴거릴 수는 있잖아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그러니까 회의에 갔다가 나와서 내가 옆에 있으니까 '골치 아파' 그러면서 혼자서 툴툴거리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를 보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툴툴거린 것을 제가 들은 거예요. 그 사람도 비밀을 지키라는 것 위반한 거 없고요.


- 지금은 외규장각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그 긴 시간을 혼자 이겨내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 학자들의 냉대. 그리고 불란서 도서관 쪽에서 당한 냉대는 정말 지독했어요. 제가 잠을 참 잘 자는 사람이에요. 불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 때는 정말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불면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 때 처음으로 경험해보고 알았어요. 주변에 계신 분들도 많이 안타까워하시고 저 때문에 고생들 많이 하셨죠.

한국에 가면 한번씩은 예전에 저한테 그렇게 냉대하신 분들께 전화를 드렸어요. 그러면 한번 만나자 하셔서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 때는 커피를 마셔도 커피 맛이 나지가 않아요. 그 교수님도 그 때 얘기는 꺼내시지도 않고 지금 뭐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만 물으시죠. 그래서 한번은 제가 그랬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말씀 드리면 전과 똑같이 말씀하실 것 아녜요' 하고 웃었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잊어버려' 그러고 마시더라고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심인가 그렇게 생각해요.


- 박사님 제일의 마지막 소원은 파리 독립기념관 건립이라고 들었어요.

이제 갈 때도 됐고, 빨리 빨리 일을 정리하고 원고도 마쳐야죠. 그런데 가기 전에, 제가 눈감기 전에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샤또덩 가에 독립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아니면 만드는 기세라도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몇 십 년 동안 입이 마르도록 독립기념관 만들어야 된다고 했는데, 이제까지는 파리 교민들이 너무도 냉정했다고요. 거기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만들어 뭐하냐는 식으로 그랬었죠. 그대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독립기념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시작되어 다행이에요.

- 독립기념관 설립은 왜 중요한가요.

김규식 박사의 활동이 외교 활동의 시초라 할 수 있어요. 파리에 오셔서 몇 달 밖에 안 계셨지만, 같이 일하시던 분이 샤또덩 가의 그 집에서 2년간 버티셨잖아요. 집세가 없어서 방 한 칸에서 지내시면서, '자유한국'도 발행하시고, 꾸리에와 팜플렛도 발행하시고,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하셨다고요. 불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 분들이. 제 추측인데 여기 사용했던 사무실이 크지도 않았을 거예요. 낮에는 사무실로 쓰고, 저녁에는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 분들이 그렇게 활동하지 않았다면 불란서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지 못했을 거예요.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한국을 알리신 분들은 그분들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더군다나 구라파 쪽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독일에도 가셨었고, 영국, 이태리에도 가셨어요.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한국을 알리셨죠. 이런 일들을 잊지 않아야 해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제 제일 큰 소원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한 데 모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파리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거에요. 우리가 움직인다면 틀림없이 정부도 도와줄 거예요.

프랑스 파리= 동아닷컴 도깨비뉴스 통신원 파리아줌마 



http://news.donga.com/3/all/20110414/36419670/2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36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서울행 티켓이 확정됐다. 그동안 G20은 네 차례 정상회의를 열면서 관례적으로 비회원국을 초청해 왔다. ‘지구촌 유지 클럽’인 G20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G20 참여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은 것도 비회원국을 초청하게 된 배경이다. G20 정상회의의 모태인 G20 재무장관 모임은 경제규모와 지역 등을 고려한 선택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세계 10위권 대국이면서 G20 비회원국인 스페인이 연이어 초청장을 받았다.


G20 정상회의에 초청받느냐, 못 받느냐는 G20 비회원국엔 외교적으로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이다. G20은 금융위기 이후 ‘프리미어 포럼(Premier forum)’으로서 최고의 국제경제 협의체로 부상했다. 실제로 많은 개도국이 서울 G20 정상회의의 초청 리스트에 포함되기 위해 우리 정부와 G20 회원국들을 상대로 치열한 물밑 외교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까지 열린 네 차례의 G20 정상회의에 참여했던 네덜란드가 초청 대상에 빠진 것은 지역적 배분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다. G20에는 이미 다수의 유럽국가와 유럽연합(EU)이 포진해 있다. 유럽의 강소국이자 금융강국인 네덜란드는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G20 의장국인 한국 정부에 서운함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덜란드의 탈락에 대해 한국 정부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G20 교섭대표인 셰르파 회의를 통해 전체 G20 차원에서 초청국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5개 비회원국과 함께 유엔·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금융안정위원회(FSB)·국제노동기구(ILO)·경제협력개발기구(OECD)·세계무역기구(WTO) 등 7개 국제기구도 이번에 초청을 받았다.

한편 정상회의 의제 조율차 프랑스를 방문 중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중국 위안화 절상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라고 23일(현지시간) 말했다. 윤 장관은 이날 파리에서 로이터통신과 인터뷰를 하고 “오픈 포럼인 G20의 특성상 환율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해결방법이나 환율이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논의할 수 있다”며 “그러나 특정 국가의 환율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경호 기자 



http://news.nate.com/view/20100925n00239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34

에드윈 정(Edwin Chung·35) 미국 NBC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부문 부사장을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에 이어 마련한 ‘할리우드 멘토 세미나 2011’에서 멘토 역할을 하러 왔단다. 확실히 젊다. 해외에서 성공한 한국인은 많지만 분야도, 나이도 젊다. 할리우드리포터지(紙)도 그를 ‘35세 미만 영향력 있는 문화산업 간부 35인’으로 뽑았다. 실제로 에미상을 휩쓴 ‘30록(30 Rock)’ ‘오피스(The Office)’ 등을 비롯해 ‘윌앤드그레이스(Will&Grace)’ ‘라스베이거스(Las Vegas)’ 등 잘나가는 NBC 드라마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할리우드 넘버원 생존법칙’은 부모님에게 35년 동안 들어온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세계 최강 무적의 비법, ‘남보다 더 열심히 해라’.



 
●그 나이에 부사장이라니 대단하다.

 “하하. 미국에선 다 이렇다. 직급 체계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니까. 열심히 하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미국 방송계의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수익률 문제다. 5년 전부터 TV 시청률은 떨어지고, 쇼 제작비는 연간 6%씩 올라가고 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까지 반영하면 비즈니스 전체가 빡빡하다. TV 방송은 지금 이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변해야 한다. NBC뿐만 아니라 ABC, CBS, 폭스 등 모든 방송국이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선 어떤 장르가 잘나가나.

 “올가을 시즌부터 30분짜리 코미디가 진짜 잘된다. 항공기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팬암(Pan-Am)’ ‘플레이보이클럽’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업 올 나이트’ ‘뉴걸’ ‘라스트맨 스탠딩’ 등의 시청률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 경제가 어렵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에서 탈출해 잠시라도 잊고 웃고 싶어 하니까.”

●잘되는 코미디와 드라마는 뭐가 다른가.

 “코미디는 그냥 웃기면 되는 게 아니다.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아, 내 삶, 내 친구랑 비슷하구나. 이런 게 반영돼야 사람들이 편안하게 웃는다. 주인공이나 인물들한테 애정도 느끼고….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스토리 자체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캐릭터들이 아주 매력적이어야 한다.”

●역시 캐릭터가 중요한가.

 “드라마건 쇼건 코미디건 TV를 본다는 것은 내 집으로 캐릭터를 매일, 매주 초대하는 것과 같다. 영화는 두 시간 보고 나면 끝인데 이건 계속 보는 거니까. 그만한 시간을 투자할 명분, 가치를 줘야 한다. 희망을 느끼든지, 웃는다든지,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을 즐긴다든지 강력한 매력이 있어야 한다.”

 에드윈은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여기까지는 똑똑한 이민 1.5, 2세대와 다를 바 없는 ‘정통 수재’코스다. 실제로 많은 한국계 학생이 의사,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부모님이 이렇게 고생하셨으니까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성공해 효도하고 싶었다. 대신 생각은 사뭇 달랐다. ‘부모님이 이렇게 고생하셨으니까 난 결코 안전한 길만 걸으려 해선 안 된다’고 굳게 다짐했단다.

●어쩌다 이 길로 가게 됐나.

 “어릴 때부터 TV 프로들을 정말 좋아했다. 부모님이 영화를 보여주고 동화책을 읽어줄 때마다 상상이 끊이지 않았다. 글짓기도 좋아하고 언제나 창조적인 데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좋아해도 실제 직업으로 하기는 어렵던데.

 “솔직히 한국계 미국인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 부모님이 돈도 없이 미국에 와 우리를 위해 몇십 년 동안 일을 몇 가지씩 하면서 고생했는데 음악, 스포츠, 연극 이런 거 한다고 하기가 미안하다. 그래서 법조인이나 의료인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좀 다르다. 부모님이 열심히 해오신 덕에 더 많은 선택권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실패가 두렵다고 무조건 똑같이 사는 게 답은 아닌 거 같다.”

●‘안전한’ 직업을 택했으니까 다른 민족보다 빨리 성공한 것 아닌가.

 “분명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안전지향적 성향 때문에 스포츠나 음악, 엔터테인먼트 부문에서 성공을 못한 면도 있다. 스스로 제한하는 ‘셀프 리미팅(self limiting)’인 셈이다. 이제 확실히 바뀌고 있다. 한국인이라고 할리우드에서 못하란 법이 없다.”

●미국 방송계는 살벌할 거 같다.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으로 굴러간다. 영화나 드라마, 음악 쪽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똑같은 열정,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일을 두 배, 세 배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본인도 그렇게 했나.

 “미친 듯이 일했다. 여기는 적자생존인 동시에 아주 민주적인 분야다. 고생을 한 만큼 성과를 얻게 된다. 남들보다 특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자발적으로 열심히, 필사적으로 일하느냐, 열정을 갖느냐의 문제다. 안 그러면 오래 못 버틴다.”

 그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건 1998년 월트 디즈니의 영화제작 재정담당 사업기획을 맡으면서다. 그러다 제작 자체를 배우고 싶어 베리 레빈슨 감독 밑에서 1년 동안 무보수로 온갖 잡일을 자청했다. 레빈슨은 ‘레인맨’ ‘굿모닝 베트남’ 등을 만든 유명한 감독이다. 돈보다 경험이 훨씬 귀한 바닥이라 가능한 얘기다.


●이 일이 왜 좋나.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하니까. 어렸을 때 TV나 동화책 속 좋아하는 캐릭터를 흉내 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이제 그 스토리를 내가 만들게 된 거다. 정말 흥분된다. 내가 옛날에 그랬듯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TV쇼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요즘은 어떤 스타들이 대중에게 어필하나.

 “1980년대에는 실베스터 스탤론이나 아널드 슈워제네거처럼 근육질 액션 히어로들이 잘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흥미로운’ 배우, ‘훌륭한’ 배우를 찾는다. 단순히 잘생기기만 해선 안 되고 지적이면서 무게감과 깊이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영화 ‘노트북’에 나오는 라이언 고슬링이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그렇다. ”

●친한 배우는.

 “켄 정(Ken Jeong)과 친하다. 프로듀서에게 쇼에 섭외해 달라고 했을 정도로 켄 정의 코미디 팬이다. 존 조(John Cho)도 같이 작업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친구다. 이제 미국의 주요 방송국에서 배우가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

●롤 모델이 있나.

 “배울 사람은 아주 많다.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J J 에이브럼스 등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영화나 TV프로그램을 만든다. 그들은 성공이 아니라 자기의 열정과 영감을 좇아간다. 돈은 따라오는 거다. 내가 만나본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아이 같은(childlike)’ 사람들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우와, 이거는 잘못 얘기하면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겠다. 내 친구가 드라마 ‘가십걸’을 만드는데…(웃음) 옛날 명작 중 ‘사인필드’ ‘코스비쇼’ ‘웨스트 윙’ ‘ER’을 정말 좋아한다.”

●한국도 종합편성채널 사업자들이 생겨나면서 채널 수가 늘고 있다.

 “미국에 ‘크림은 항상 위로 떠오른다(Cream always rises to the top.)’란 말이 있다. 커피에 크림을 부으면 위로 떠오르듯 아무리 채널이 많아져도 뛰어난 프로그램은 결국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거다. 채널 수가 늘어나는 게 옛날 마인드로는 부정적일 수 있겠지만 시청자나 스타 입장에선 더 많은 선택권,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산업 전체엔 좋은 일이다.”

●도대체 엔터테인먼트가 뭘까.

 “기쁨(joy)과 해방감(escape)이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을 서로 연결해준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짐바브웨든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고, 사람을 사귀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떠난다. 가장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는 뭔가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프로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는 것,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몰래 좋아해온 여자에게 ‘사실은 좋아해’라고 말하게 하는 것, 10년 전 크게 싸우고 연락을 끊고 사는 형에게 전화해 ‘그땐 내가 미안했어’라고 하는 거다. 인간성을 자극하고 고무시키는 것!”

●꿈이 야심 찰 것 같다.

 “하하하. 아닌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덜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이틀이나 회사 이름, 돈에 연연하기 싫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멘토 프로그램도 그래서 좋아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변화가 빠르고 치열해 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많은 한국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헤이, 내가 할 수 있으면 모두 할 수 있어요’라고. 힘들어 죽겠는데 우리는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이 일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 아닐까?”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늘 내 옆에 계신다는 그 느낌이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든 다른 곳에서 일하든 산다는 건 힘든 거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두면 자기가 실행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일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 간에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j칵테일 >> “한국 배우들, 영어만 된다면 …” 

에드윈은 한국 방송·연예계에 관심과 애정이 넘쳐났다. 그만큼 아쉬움도 많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배우를 많이 알고 있나. 김윤진은 알 것 같고.

 “김윤진? 당연히 안다! 배용준, 이병헌, 원빈, 비, 송혜교, 신민아…한국 드라마는 거의 다 본다.”

●미국에서도 뜰 수 있을까.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언어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세계 시장에서 가진 매력을 다 보여주려면 영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

●틈새시장이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성룡이나 이연걸도 영어는 완벽하지 않지만 환상적 무술로 커버가 된다. 하지만 이건 일상적 연기가 아니다. 10분의 1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이병헌이나 비도 액션연기가 최고지만 무술만 하면 역할이 너무 제한적이다.”

●언어만 되면 한국 배우가 미국 TV의 주연도 될 수 있다는 얘긴가.

 “당연하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너무나 매력적이고 카리스마가 있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안 한다. 그건 한국TV나 미국 TV나 똑같다.”

●조언을 한다면.

 “할리우드에서 인정받으려면 자신만의 관점과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인간관계도 아주 중요하다. 이 바닥에 아시아계 미국인은 5%, 한국계 미국인은 고작 0.9%밖에 안 되니까. 다행히 지금 할리우드엔 다양성에 대한 압력들이 있다. 아시아계 배우들이 게스트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앞으로 액션 가이(Action guy)나 술집 주인 말고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한국계 배우들이 점점 늘어날 거다.”


글=이소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537442&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29

조국교수 페이스북에 ‘뉴욕 판사 벌금형’ 올려 화제
‘청소년에 자존감 처분’ 한국 판사 이야기도 이어져

15일 트위터와 인터넷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판사 이야기가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조국 서울대 교수(법대)가 14일 자신의 페이스북(http://facebook.com/kukcho)에 올린 글이 네티즌과 트위터 이용자의 가슴에 불을 붙인 것이다.

조 교수는 뉴욕시장을 3연임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1930년대초 대공항 시기 뉴욕치안 판사 재직시 배가 고파 빵 훔친 노인에게 10달러 벌금형을 내리면서 한 말이라며 판결내용을 소개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벌금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피고인에게 주자, 피고인은 10달러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라과디아는 아주 작은 체구의 ‘리버럴’한 공화당원으로 뉴욕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공화당원이지만 루즈벨트의 ‘뉴딜’을 지지했구요. 뉴욕 공항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지요.”

글이 소개되자 “감동적이다” “법위에 사람 있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약자에 대한 보호망을 만들지 못한 사회와 그 구성원의 책임을 강조한 라과디아의 판결 내용은 법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판결로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강하고 ‘정의’란 말이 화두로 떠오른 한국사회에서는 새삼 화제가 되고 것이다.

한 네티즌은 서울가정 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의 특별한 판결내용이 실린 <경인일보>의 한 칼럼 내용을 띄워 연쇄반응을 낳기도 했다.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은 지난해 5월28일치에 쓴 칼럼에서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양에게 소년원 시설 감호 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처분이 아니라 과감하게 불처분 결정을 내린 사유를 자세히 소개했다.


김 관장은 한 신문에서 읽었다는 김판사의 판결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A양은 2009년초까지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다 남학생에게 집단 폭행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병원치료를 받으면서 학교에서 겉돌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렴.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김 관장은 칼럼에서 라과디아 판사 이야기도 소개하면서 “법과 법조인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더할 수 없이 깊은 우리 사회에 이런 명판결이 더 많이, 더 자주 나오기를 기대한다”면서 “그러려면 법을 다루는 분들의 사람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더 깊어져야 할 것”이라고 끝맺었다.

<경인일보 칼럼>

참 아름다운 이야기 - '法廷에 핀 法情' 
소녀 망가뜨린건 사회 불처분결정… "나는 혼자가 아니다" 감동의 외침 

김이환

벌써 한 해의 허리에 접어드는 초여름이 다가들고 있다. 유난히 변덕이 심한 날씨여서 개나리, 벚꽃, 목련이 앞뒤 없이 피고지더니 어느새 모란도 꽃잎을 뚝뚝 떨어뜨렸다. 고개들어 미술관 주변 산을 둘러보면 온 산자락에 흰 아카시아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고 있다. 봄이 떠난 것이다. 이런 초여름 아침 나절 몸에 밴 습관대로 일주일치 신문을 정리하다가 '法情에 울어버린 소녀犯'이란 5월17일자 ㅈ신문의 기사가 눈에 띄어 단숨에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건 이런 것일까? 아카시아꽃 향기를 먹먹한 가슴 깊숙이 들여마셔 보았다. 그날 따라 아카시아 향기에는 전에 없이 신선함이 가득했다.

내 심금을 울린 그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지난 4월초 서초동 법원 청사 소년 법정은 감동의 눈물에 젖었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16)양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가 내린 특별한 처분 때문이었다. 김 판사는 법적으로는 아무 처분을 하지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리는 한편 피고로 하여금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라는 특별한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법정에 섰던 전력조차 있었다. 법대로라면 소년보호시설 감호 위탁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김 판사가 과감히 불처분 결정을 내린 연유는 무엇일까? A양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남학생 여러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그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도 받았고 죄책감에 시달려 학교에서 겉돌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그러면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렴.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A양에게 따뜻하게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다. 그리고 판사를 따라 점점 더 크게 외쳤다.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고 외칠 때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법정에 있던 A양의 어머니도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도, 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젖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 전 이 '금요산책'란에도 소개했던 미국의 라과디아 판사가 떠올랐다. 대공황으로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1930년대 뉴욕의 치안법정에서 라과디아 판사가 빵을 훔친 한 가난한 할머니에게 내렸던 감동적인 판결을 기억하시는지?

"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죄를 지었으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난으로 굶주리는 어린 손녀들을 먹이기 위해 늙은 할머니가 빵을 훔쳐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의 시민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그동안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온 저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합니다. 할머니의 벌금을 대신 내겠습니다. 그리고 이 법정의 뉴욕 시민 여러분에게도 각기 50센트씩을 선고합니다."

김귀옥 부장판사의 '대처분'과 라과디아 판사의 판결은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깊고 크다. 법과 법조인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더할 수 없이 깊은 우리 사회에 이런 명판결이 더 많이, 더 자주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려면 법을 다루는 분들의 사람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더 깊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부디 A양이 모성의 판결을 한 김 부장판사의 '대처분'대로 자존감을 회복하여 건실한 숙녀로 성장하기를 빈다.

[출처: 경인일보 홈페이지(http://www.kyeongin.com/)]

디지털뉴스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200.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27

기업화·시장화된 대학에서 대학생들은 타자의 삶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요즘 학교 가기에 앞서 학생증을 잘 챙겼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서울대학교 식당은 외부인에게 밥값을 1000원 더 받기 때문이다. 서울대 식당은 싼값에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다 보니 많이 먹을수록 적자가 커지는 구조다. 이에 생활협동조합(생협)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차적으로 외부인의 밥값만 올리는 밥값차등정책을 시행했다. 나아가 이 조처는 외부인들 때문에 발생하는 재학생의 식사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한 학생복지 구현임을 표방했다.


대학본부와 생협 입장에서는 학내 구성원의 반발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적자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먼저 도입할 수 있는 정책이 외부인 식대 인상이었을 수 있다. 서울대 재학생들은 밥값차등정책이 도입되기 전부터 외부인의 학내 식당 이용에 매우 큰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에 관악산 등산객과 택시기사들의 집단적 식당 이용으로 자신들의 식사권이 침해받는다는 토로가 학내 누리집에 올라와 재학생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나는 기사들의 학내 식당 이용까지 불편해하는 재학생들의 감정에 외려 불편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택시기사들이 학내 식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팍팍한 삶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타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일차적으로 타자의 삶에 친숙해야 한다. 경제성장기인 1970~80년대 많은 서울대생의 부모님은 중산층 이하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이후 서울대 신입생은 급속히 부유층의 차지가 되었다. 즉 택시기사처럼 힘겨운 노동자가 자신의 부모님이거나 친척일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따라서 생계를 위해 밥값의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택시기사들의 애환은 서울대생의 시야에 들어오기 힘들 수 있다. 어쩌면 부유해진 서울대생 개인의 문제만도 아닐 수 있다. 대학의 기업화·시장화라는 저 거대한 시대적 변화가 대학생들의 ‘공감력’을 뺏어버렸을 수 있다. 서울대라는 학벌이 더 이상 좋은 직장을 백퍼센트 보장하지 못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이제 서울대생들은 과거 선배들처럼 핍박받는 노동자를 위해 공장에 잠입하거나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 시위에 나갈 ‘여유’가 없다.


대학의 공공성은 어느새 불필요한 사치품이 돼버렸다. 대학은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공간이 아니라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직업양성소가 된 지 오래다. 기업 로고가 박힌 건물들이 대학을 점령했으며 그곳의 학생들은 기업이라는 주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의 스펙 단장에 여념 없다. 어느새 대학 풍경은 대기업이 선사한 건물과 경영·경제학 서적을 움켜쥔 대학생들로 가득 채워졌다. 대학 안과 밖은 밥값을 경계로 더욱 명확히 분리됐으며 대학은 자본을 끌어들이기에 혈안이다. 대학생들은 타자의 삶에 점점 무감각해진다.


인간에게 ‘밥’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대학에서 밥 먹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일한 식당에서 동일한 밥값을 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대학생들은 반값 대학등록금을 주장하기에 앞서 대학 안팎의 경계를 나누는 밥값 ‘차별’ 정책을 스스로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왜냐하면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 지원과 대학 외부 사람들의 지지가 매우 절실하기 때문이다.



김도민 서울대 대학원생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360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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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25

韓 中 日 인터넷서점 5년치 베스트셀러 분석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한국인, 갈수록 기가 사는 중국인, 쿨한 건지 속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일본인.

최근 5년간 한·중·일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에 나타난 세 나라 국민들의 집단 심리다. 북스팀이 예스24(한국)·당당닷컴(중국)·아마존재팬(일본) 등 한·중·일 각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이 발표한 2007~2011년 베스트셀러 목록을 분석해봤다. 어떤 책을 집는지 보면 그 사람 속내가 엿보이는 법.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유럽발 금융위기가 걱정스럽긴 세 나라가 마찬가지지만, 다가오는 나날에 대해 각자가 갖고 있는 자신감은 서로 달랐다. 북스팀이 베스트셀러 내용을 ①분노 ②성공 ③위로 ④기타 등 크게 네 가지 코드로 분류해보니, 화가 제일 많이 난 건 역시 한국인들이었다.

글로벌금융위기(2007년) 전까지 한국인은 "악착같이 살자"고 독려하는 책을 즐겨 읽었다. 예스24 종합베스트셀러 30위 안에 든 책 가운데 11권이 "하면 된다"고 설파하는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서였다. '시크릿'(살림비즈), '이기는 습관'(쌤앤파커스),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명진출판사)가 대표적이다. 그다음으로 많이 팔린 게 위로하는 책이었다. 30위 중 여섯 권이 '배려'(위즈덤하우스), '파페포포 안단테'(홍익출판사)처럼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다독거리는 책이었다. 그런데 2008~2009년 분위기가 달라졌다. 성공을 파는 책이 주춤했다. 그 대신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과 '도가니'(창비)처럼 체제와 사회의 모순을 분석하고 폭로한 책이 대중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2010~2011년에는 이런 풍조가 한층 확연해졌다. 삼성그룹 비자금 파동과 관련한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개)가 돌풍을 일으키고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100만부를 찍었다. 작년 10월부터는 격한 말로 꽉 찬 책 '닥치고 정치'(푸른숲)가 찍기 무섭게 동나고 있다.

이젠 성공이 안 팔린다―한국

한편 성공을 파는 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스티브 잡스'(민음사),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혼창통'(쌤앤파커스)이 명맥을 잇는 정도다.

반면 조용히, 그러나 점점 더 많이 팔리고 있는 게 위로·성찰·공감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들이다. 작년 8월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가 출간 8개월 만에 100만부를 찍었을 때만 해도, 출판계에는 "그 책은 이제 팔릴 만큼 팔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수능을 마친 고3과 재수생이 대거 '아픈 청춘' 대열에 합류하면서 새해 들어 150만부도 가뿐히 넘어섰다. 요컨대 한국에선 성공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이 쪼그라들고 ①정의·자본주의에 대한 회의(懷疑) ②위로·공감에 대한 갈증이 몸집을 불렸다. 그 사이 중국과 일본은 저마다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수퍼파워로 간다―중국

중국 당당닷컴이 집계한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정의를 부르짖는 책이 상위 20위 안에 5년간 한권도 없다. 오히려 수퍼파워 중국의 부활을 내세운 책 '불쾌한 중국'이 인기를 모았다(2009년). 전반적으로 건강·육아·역사를 다룬 책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시크릿'이나 '불평없이 살아보자'처럼 성공을 파는 책들이 갈수록 많이 팔리고 있다.

여전히 개혁개방이 진행 중인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지, 이따금 예상을 깨는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미국 심리학자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먼 길'이 20위에 들고, 작년엔 마르케스의 소설 '100년 동안의 고독'이 돌풍을 일으켰다.

안정인가 무기력인가―일본

일본은 한국보다 더 오래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지만, 체제와 사회에 성내는 책이 20위에 든 것은 최근 5년 새 '정의란 무엇인가' 한권밖에 없었다(2010년·종합 5위). 그렇다고 성공을 파는 책이 잘 나가느냐 하면 그것도 들쭉날쭉했다. 글로벌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의 경우, 상위 20위 중 11권이 '꿈을 이루어주는 코끼리'나 '초보 과장의 교과서'같은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서였다. 글로벌금융위기가 지나간 2010년에는 오히려 자기계발서·경제경영서 비중이 8권으로 줄었고, 작년에는 5권에 그쳤다.

일본은 출판대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중일 가운데 자국 작가가 쓴 '국산'(國産) 베스트셀러 비중이 가장 높았지만,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만화·미용·다이어트 책이 해마다 종합 베스트셀러 20위를 절반 이상 채웠다. 건강 책이 잘 팔리긴 중국과 마찬가지지만, 같은 건강 책이라도 중국에선 양생법을 폭넓게 다룬 책이 인기인 반면 일본에서는 '여의사가 가르치는 정말 기분좋은 섹스' '누워있기만 해도 살이 빠지는 골반 베개 다이어트'처럼 좁은 영역을 가볍게 다룬 책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분노로 끓는 한국과는 온도가 다르다고나 할까. 최근 5년간 한중일 세 나라 독자들이 동시에 만장일치로 사랑한 책은 딱 한 권,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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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20

1980년대 중반 유학시절, 동아시아 관련 강의는 인기 절정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신흥산업국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도 그랬거니와, 태평양시대의 편대장 격인 일본 때문이었다. 강의조교였던 필자는 담당 학생들과의 한 시간 토론을 위해 밤을 새워야 했다. 30분 정도의 요약 강의에서 허점을 보였다간 오만한 저 미국의 수재들에게 망신당하기 일쑤였다. 긴장된 대본 암송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갈 즈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한국은 어디에 있나요?” 오잉? 천연덕스러운 뜻밖의 질문에 대본은 흐트러졌다. 요즘 말로 ‘멍 때리는’ 한국인 조교를 미국 수재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들에게 제국 일본은 있었으나 식민지 한국은 없었다.

2년 전 여름, 외국 대학생들과 같은 주제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사뭇 바뀐 동아시아 판도를 차분히 설명하는데 유럽에서 온 듯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한국이 일본보다 큰 나라죠?” 오잉? 그거 정말 듣고 싶은 얘기였다. 사실대로 답은 했지만 그 학생이 무한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어쨌든 30여 년 만에 세계인의 인식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증거였다. 세계 주요 공항과 도시마다 삼성·LG 광고가 번쩍이고, 김연아의 빙무가 세계를 열광시킨 덕분이었다. 유엔 사무총장, 세계은행 총재가 모두 한국인이고, 미국 일류대학에 한국 학생이 매년 이삼백 명씩 입학하고, 세계 구석구석을 한국인들이 누비고 있으니 그런 인식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터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뇌리에는 ‘일본은 대국(大國)’이란 불변의 명제가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영토 분쟁에 나선 최근 일본의 정치권과 언론의 행보에는 대국다운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본 명문대학과 십여 년을 교류한 경험은 조금 알쏭달쏭하다. 우리 학생들은 득의만만하게 이렇게 푸념한다. “말이 안 통해요.” 연구 주제가 너무 잘기 때문이란다. ‘편의점 알바 근로환경’ ‘자원봉사자의 구성’ ‘청년 취미생활의 실태’ 등에 집착하는 일본 학생들에게 국가, 민주주의, 사회운동, 변혁, 성평등같이 한국 학생들이 열 올리는 거대담론이 통할 리 없다. 교수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처음 온 신임교수에게 인사 겸 전공을 물어봤다. 그 친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렇게 답했다. “섹스 라이프.” 오잉, 성생활이라고? 하기야 사적 비밀과 내면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라는 질문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술 한잔으로 꼴깍 넘겼다.

일본은 선진국임에 틀림없다. 저 단편적 일화가 일본의 학문수준을 폄하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작고 튼실한 소립자가 서로 엮여 촘촘히 짜인 사회가 일본이다. 일본의 힘은 거기서 나왔다. 자기헌신적, 자기완성적 소인(小人)들이 뭉치면 대인(大人)이 된다는 것을 터득한 일본인들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최상의 상징체계를 창안했다. 천황제가 그것이다. 천황제는 소립자들의 규합을 일사불란한 우주로 만드는 신화이자 종교다. 그래서 덴노헤이까를 위해 대동아전쟁을 일으켰고, 덴노헤이까를 외치며 산화했다. 종전 후 전범을 면한 덴노헤이까 상징체계는 일본의 경제 기적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경제적 성공은 위기의식을 갉아먹었고, 위기의식의 실종은 그 상징체계를 부식시켰다.


1989년 1월 히로히토 천황이 서거할 당시 미국 사회학자 노마 필드는 ‘절망의 통곡’과 ‘희망의 서곡’이 교차하는 일본의 이중적 집단심을 목격했다(박이엽 역,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전자는 소인(小人)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후자는 원래의 자리, 진정한 소인에서 시작하자는 외침이었다. 양자 모두 대국환상(大國幻想)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원래 소국(小國)이었다! 천황이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정점에 서자 대국환상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이 바다를 넘어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질주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토점령과 징병, 징용, 군위안부 강제동원은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우리에게 뼈아픈 역사는 그들에겐 환상이었다.


그래서 5000만 한국인의 염장을 지르는 적반하장 격 질문이 가능하다. ‘증거를 대봐라?’ 증거를 대라는 것은 소인배의 어법이다. 대인(大人)이라면 스스로 한 짓을 부끄러워한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 36년간 강토를 유린했다면, 엎드려 있는 게 대국(大國)의 정도(正道)다. 8월 29일, 102년 전 한국을 불법 합병한 그날, 일본 의회는 바위섬 독도를 떼 가려고 일장기 앞에서 전원 기립했다. 시들어가는 대국환상 속에서 감행한 소국(小國)의 편벽한 단결이었다.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역사를 냉혹하게 바라볼 집단 지성이 날개라면, 대국에서 소국으로 추락하는 일본은 날개가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국은 대국적(大國的)인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 사회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226075&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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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8

태풍 '볼라벤'은 소멸했지만 기상청에는 불명예의 상흔을 남겼다. 기상청이 볼라벤의 진로를 초기 예보와 가깝게 맞추기 위해 조작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는 데서 그렇다. 기상청은 2년 전 정확한 일기예보를 위해 외국 전문가를 '기상선진화추진단장'으로 영입해 기상예보 선진화에 진력해 왔다. 정말 볼라벤의 진로가 조작되었는지는 조만간 가려지겠지만, 두어 가지 분명한 게 있다. 기상청의 예보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태풍 등 폭풍의 속도 단위는 초속(秒速)으로 하지 말고 시속(時速)으로 해야 한다. 기상청 예보는 강풍의 풍속을 '초속'으로 발표한다. 하지만 일반 시청자들은 초속 30m, 40m 강풍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지붕이 날아갈 정도"라고 부연 설명해야 알 듯 말 듯하다.

미국이나 유럽은 강풍의 속도를 시속으로 표시한다. 유럽에서는 시속, ㎞ 단위를 쓰고 미국은 마일(mile)을 쓴다. 강풍 속도를 '시속 180㎞'라고 하면 내 자동차의 속도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90㎞로 달리는 내 자동차의 속도보다 2배나 빠르다며 머리에 그 속도를 그릴 수 있다. 미국 CNN이나 영국 BBC 일기예보를 보면 ㎞나 마일로 표기된다는 데서 그날 강풍의 위력을 자동차 속도와 비교해 단박에 실감케 된다.

또한 TV 일기예보는 단순히 날씨를 평면적으로 읽어주는 데 그치지 말고 기상 상태를 기상학적으로 해설해 주어야 한다. 예컨대 내일이나 일주일 날씨를 예보할 때 춥거나 더워지는 원인에 관해 '아나운서'가 아닌 일기 '해설자'로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이다. 미국 CNN 방송의 여성 기상 캐스터 마리 라모스는 '넉넉한' 풍채에 의상마저 칙칙해도 기상 전문지식으로 쉽게 해설해 시청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 풍속 단위를 바꾸는 데는 돈도 들지 않는다. 일기예보도 기상전문 지식 캐스터로 형식보다 내용으로 경쟁해야 한다.



 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2/20120902013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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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7

태풍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뉴스가 있다. 채소 값이 올라 식탁물가가 비상이라는 기사다. 2,600원 하던 배추가 3,700원 하고 2,200원어치 상추가 4,880원을 줘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깻잎과 호박은 두 배로 올랐다고 숫자로 퍼센트까지 나열한다.

그런데 진짜 이런 가격 때문에 서민 식생활에 비상이 걸릴까? 아니다. 작년 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김치 소비량은 1인당 연 28kg으로 4인 가족이면 한 달에 9.3kg꼴이니 배추 네 통쯤 된다. 1주일이면 배추 한 통을 먹는다. 젓갈과 파, 생강 고춧가루 등 부재료가 있지만 일주일에 4,000원도 안 되는 배추 값 인상이 문제될 리 없다. 호박이나 깻잎, 상추도 소비량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큰 문제가 아니다.

9월 말까지 지켜봐야겠지만 올해는 쌀이 여물어야 할 시기에 햇볕이 쨍쨍 나지 않고 비 내리는 날이 많아 쌀 작황도 예년보다 나쁠 수 있다. 그러면 또 쌀값이 오른다고 식탁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1인당 쌀 소비량은 작년 기준 하루 195g으로 밥 두 공기가 채 안 된다.(2012년 2월 통계청 발표) 쌀 한 가마니면 4인 가족이 100일 넘게 먹는다. 쌀값이 올라 봐야 가계에 미치는 부담은 생각보다 작다. 그런데도 가물면 가문대로, 홍수가 나면 홍수가 나는대로 기상재해만 생겼다 하면 식료품 물가가 비상이란다.

관료들이 책상에 앉아 수치로만 보고 퍼센트로만 따지기 시작하면 식료품 가격 인상이 큰 것처럼 보여서 정책당국이 중국에서 값싼 배추니 마늘이니 수입한다 하여 그나마 소출이 덜 나온 걸 가격으로 만회해 보려는 농민들을 낭패에 빠지게 한다.

실상 서민가계를 위협하는 것은 이런 식품류가 아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가스 버스 전기요금 같은 공공요금의 인상이자 무엇보다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집값이 문제다.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작년 기준 384만원인데 평균 주택가격은 1억1,800만원이다.(한국은행 통계청 발표) 월평균 소득을 가진 이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3년은 되어야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반면에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2배 이상 많은 미국의 평균 주택가격은 우리보다 훨씬 싼 7만5,000달러(8,500만원 정도, 2010년 기준 미국연방준비제도 통계)이다. 그러니 우리의 집값은 아직도 비싸고 한참 더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몇 천원하는 식품 물가에는 농업재해대책상황실을 24시간 연다는 정부가 집값은 여전히 부채질하는 기현상을 보인다. 7월에 총부채 상환비율(DTI) 규제를 완화하여 집을 사기 위해서라면 은행에서 더 많은 대출을 받을 수 있게 길을 터 놓더니 그래도 집값이 오르지 않자 이번에는 '하우스푸어'를 위한 대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하우스푸어'들의 주택을 사들여 임대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새누리당이 제안해서 당정협의를 거치겠다는 것인데 공적 펀드를 조성해 '하우스푸어' 집을 사들인 뒤 본인에게 월세 또는 전세로 임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원래의 소유자가 여력을 갖추게 되면 집을 우선적으로 살 권리도 부여한다고 한다.

안 자체는 참신하다. 그러나 이것은 채권회수에 묘책을 발휘해야 할 민간은행이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는 있어도 정부가 나설 일은 아니다.

'하우스푸어'란 엄밀히 말하면 빈곤계층 그 자체는 아니다. 여력 이상의 주택을 사려고 은행에서 대출 받았으나 집이 팔리지 않아 대출금 반환에 고통을 겪는 이들이므로 사정은 딱하지만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할 경제 주체이다. 집값이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공적 자금으로 '하우스푸어'대책을 세우는 것은 '하우스푸어'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국민 전체가 떠맡아 준다는 뜻이다. '하우스'조차 갖지 못한 진짜 '푸어'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정책이다.

집값은 더 떨어져야 한다. 이 명제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주택정책은 있는 자를 위한 선심정책일 뿐이다.



서화숙 선임기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30201854678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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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6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 경제의 ‘페이스메이커’였다.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에서 동료의 기록 단축을 위해 함께 뛰는 조력자다. 한국은 “잘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웃 나라 일본을 맹추격해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반도체, TV, 스마트폰 분야에서는 이미 전자왕국 일본을 따라잡았다. 최근 국가 신용등급도 사상 처음 일본과 같은 반열인 ‘Aa3’로 올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올림픽 성적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일본과 거리가 좁혀질수록 고민도 깊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을 따라가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앞장서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에서는 “이제는 글로벌 기업이나 선진국을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재빠른 추격자)’ 전략이 아니라 우리만의 콘텐츠로 승부를 거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발자)’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경영컨설턴트 피터 언더우드는 그의 책 ‘퍼스트 무버’에서 “퍼스트 무버의 핵심은 창의성인데 창의성은 도전정신에서 출발한다. 이 점에서 일본은 빵점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가 문자로 만들고, 인도 카레를 카레라이스로 바꿨지만 스스로 한자와 카레를 개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모방과 개선’의 천재 일본이 더는 한국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맨땅에 헤딩’하듯 새로운 분야만 기웃거린다고 해서 성공한 선발자가 될 수는 없다. 경영학에서는 ‘선발자의 이익’으로 기술 자원 고객의 선점을 꼽지만 시장 개척에 따르는 실패 위험과 후발자 무임승차와 같은 ‘선발자의 불이익’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한국형 퍼스트 무버의 제1조건은 우리 속에 내재된 창조혁신 DNA의 발현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자(製字)원리를 갖고 있는 한글을 창조한 민족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세계 각국 문자를 연구하고 우리만의 혁신적 상품인 한글을 창제해 사람들의 행동까지 성공적으로 바꿨다. 

제2조건은 시장 판도를 바꾸는 미국식 시스템적 사고다. 에디슨이 위대한 혁신가인 이유는 전구가 아니라 전구의 상업적 사용이 가능한 전력 인프라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애플의 히트작 중 원조는 거의 없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까지 창의적으로 활용해 게임의 룰을 바꿨을 뿐이다. 한국이 처음 개발한 MP3를 음악듣기 서비스(아이튠스)를 결합한 아이팟으로 내놓아 판을 바꿨다. 복사기회사 제록스의 그래픽모드에 착안해 매킨토시 컴퓨터 운영체제를 디자인했고, 미국의 팜과 림이 개념을 잡은 스마트폰을 아이폰으로 만들어 성공시켰다. 

제3조건은 개방과 협력이다. 1990년대 “왜색문화로 도배될 것”이라는 반발에도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빗장을 과감히 열었다. 지금은 일본이 한국 드라마, 케이팝(K-pop)의 최대 시장이 됐다. 자유무역협정(FTA)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활력을 잃었으나 부품소재 산업은 여전히 세계 최고다. 대일 무역적자의 80%가 여기서 나온다. 이기동 한일경상학회장(계명대 교수)은 “일본 기업의 투자 유치와 같은 경제 협력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기적’에서 보여준 기업가 정신이다. 폐선(廢船)을 바다에 가라앉혀 방조제 공기(工期)를 앞당긴 ‘정주영식 물막이 공법’이나 리비아의 국토를 바꾼 대수로 사업과 같은 극한상황 속의 도전이 혁신과 창조를 만들어낸다. 한국형 퍼스트 무버를 굳이 정의하자면 ‘패스트 무버(패스트 팔로어+퍼스트 무버)’쯤 될 것이다.

박용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20831/490045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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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4

시대의 흐름을 읽는 더듬이가 남다른 이어령 중앙일보 상임고문은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 판결을 단순한 법정 분쟁이나 기술 다툼으로 보지 않는다. 문명·문화사적으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신호로 해석한다. 이 상임고문은 “우리는 무서운 변화의 한 모서리를 목격하고 있다”며 비(非)기능적·감성적 가치까지도 재산권의 배타적 권리로 인정하는 새로운 지식게임의 시대가 열렸다고 진단한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 충격을 어떻게 소화 흡수하여 문명·문화의 대전환점을 모색할 것인가. 이 고문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부터 크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전자·애플의 특허 소송을 ‘세기적 재판’으로 부른다.

 ▶이어령=기업경영이나 특허법 전문가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을 보아도 이 재판이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기업이, 우리 사회가, 그리고 각각의 개인이 걸어온 길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판결의 정당성 논란이나 천문학적인 벌금 액수에만 눈길을 빼앗겨선 안 될 일이다. 우리 의식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창조적 긴장과 도전 없이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이 세기적 재판의 파장을 우회할 길은 없다.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며 전독위약(轉毒爲藥)의 역전극을 마련해야 한다.

 -왜 우리의 기존 인식이 문제라는 것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청기와 장수’의 문화 속에 살아왔다. 저 혼자 청기와를 만들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아 그 비법이 후세에 재현되지 않았다. 서양도 중세까지는 특별한 기술을 비방(秘方)으로 숨겨 ‘미스터리’라 불렀다.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 기술의 독점적 가치를 인정하되 그 비법을 공개하자는 사회적 타협이 바로 특허다. 지적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는 창의성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독점적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사회 시스템으로 공개·승화시키느냐에 따라 동·서양의 운명이 갈라졌다.

 -인류 문명사에 특허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특허법의 기원은 르네상스의 발생지인 이탈리아다. 1474년 베네치아에서 공포된 특별조례로 지적 재산에 10년간 독점권을 보호해주자 주변의 창의적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몰려들었다. 르네상스의 불꽃은 그렇게 타올랐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그때 양수기 기술로 특허권을 따낸 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 이 특허법을 도입한 나라가 바로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이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과 아크라이트의 방적기 등이 모두 그 특허법의 산물이다. 그 다음이 독립과 함께 아예 헌법 제1조에 특허 보호 조항을 명시하고, 10년 뒤 영국의 전매조례를 본떠 특허법을 만든 미국이다. 이것이 팍스 브리타니카를 뒤이어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기를 연 힘이다. 이렇게 근대 문명을 창조한 르네상스·산업혁명·팍스 아메리카나의 삼각대 노릇을 한 것이 바로 특허제도요 그 정책이다.

 -특허는 언제나 긍정적으로 기능했는가.

 ▶특허법은 수문(水門)과 같다. 수문을 닫으면 기술과 창조력이 고이지만, 너무 차고 넘치면 해를 끼친다. 열어서 방류해야 한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의 불을 붙였지만 동시에 그 발전을 저해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는 독점권을 연장하면서까지 증기기관을 개발하려는 다른 기업과 기술자들을 억압하거나 저지했다. 독점 동안 증기기관 출력은 연 750마력의 증가에 그쳤지만, 특허가 끝난 1800년부터 4000마력으로 늘어나고 에너지 효율은 다섯 배나 높아졌다. 증기기관차 등 혁신적인 파생상품들까지 쏟아지면서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했다. 이같이 특허법은 너무 엄격해도 너무 약해도 안 되는 양날의 칼이다. 지적 독점과 지적 공유의 모순을 조정하는 사회문화적 인식이 법보다 앞서야 한다.

 -이번 판결이 보호무역주의가 아닌가.

 ▶미국은 시대에 따라 특허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링컨 시대에서 대공황까지는 친특허 정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 특허청 건물 정면에는 “특허제도는 천재라는 불꽃에 이익이라는 기름을 붓는다”는 링컨 대통령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링컨은 그 자신이 배가 좌초됐을 때 빠져나오는 특허를 출원했던 인물이며, 미국의 초석을 닦은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도 모두 발명가를 겸했었다. 이런 친특허 분위기를 바탕 삼아 생전에 1300종 이상의 특허를 획득한 에디슨이 출현하고, 전화·비행기 같은 세기의 발명품들이 미국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독과점 폐해가 나타나고 대공황이 찾아오자 반(反)특허 흐름이 고개를 들었다. 지적 개방과 공유의 분위기가 강해진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 이후 다시 친특허 쪽으로 돌아섰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특허로 울타리를 치는 전략이 아니냐는 해석도 적지 않다. 리먼 쇼크 이후 미국은 여야 없이 친특허 정책을 지지하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특허기술을 내세워 스티브 잡스의 애플로 상징되는 정보산업에서 다시 그 활로를 찾으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오바마는 링컨·카터·레이건에 버금가는 친특허 대통령에 속한다.

 - 판결이 과도하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미국의 특허법 자체가 특이하다. 미키마우스보호법이니 물밑에 숨어있다 나타나는 잠수함법이니 하는 별명이 붙을 만큼 국제 상식과 위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이번 삼성이 고배를 마신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의 특허는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다 낯설어하는 개념이다. 직역하자면 상품의 옷으로 상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포장하고 있는 외형 일체를 보호하겠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네모 굴리기, 메탈릭한 프레임 등 해당 상품이 갖고 있는 이미지의 요소를 인지하는 감각·감성 등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비(非)기능적인 요소까지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술 특허와 달리 전문인보다 오히려 일반인의 감(感)에 맡기는 주관적 심사의 길을 터놓게 된 것이다.

 지적재산권(IP)이라는 표현까지 고쳐야 할 만큼 특허가 이제 지적 기술의 차원을 넘어 감성과 정서의 심미적 산물로 변하고 있다. 상품 개념이 기능에서 소통으로, 사용에서 감동으로 바뀌면서 특허 심사도 예술품처럼 감상하고 감정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초(超)지적재산권이라는 새로운 아레나(로마 원형극장의 모래 경기장)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아야만 하는 시대를 맞게 됐다.

 -애플이 이번 판결의 진정한 승자라고 보는가.

 ▶얼핏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와트처럼 특허분쟁을 일으켜 창조력이 아니라 법으로 경쟁자를 제압하고, 특허료만 챙기는 행위를 경제에선 렌트 시킹(rent seeking)이라 하며, 부정적으로 본다. 일종의 준지대(地代)다. 창의성과 지식이 고갈될수록 특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특허에 안주하는 기업에겐 미래가 없다. 이번 재판으로 애플은 두 가지 마이너스 이미지를 갖게 될지 모른다. 하나는 ‘기술개발자’였던 가장 창조적인 기업이 ‘기술 보호 감시자’로 바뀔 수도 있다. 한때 애플도 마이크로소프트에 특허소송을 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애플이 특허를 무기로 경쟁기업을 억압하는 쪽으로 이미지가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삼성의 안드로이드 OS는 지적 독점을 반대하는 오픈 소스인 데 반해 애플은 NIH의 폐쇄적 기술 독점을 대표한다. 현재 미국에는 스톨맨이나 레시그 등 반(反)지적 독점을 주장하며 정보시대를 리드하는 지식인이 많다. 애플은 삼성을 넘어 그 뒤에 버티고 선, 구글을 위시한 정보 프리를 주장하는 세력과 충돌하기보다는 상생하는 게 지혜로울 것이다. 창의력이 고갈되면 사과도 다른 과실과 마찬가지로 떨어지게 된다. 애플은 와트의 전철을 밟지 않고 그야말로 스티브 잡스가 주장한 인문학적·미학적 창조의 매력으로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할 것이다.

 -지적재산권 보호가 어디까지 확산될 것인가.

 ▶물론 특허를 자유롭게 개방하자는 압력도 존재한다. 페니실린은 인류의 생명을 위해 특허 등록조차 안 했고, 인터넷의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한 유럽 입자물리연구소의 팀 버너스 리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처음부터 완전 개방했다. 아마존은 원 클릭을 개발해 특허소송에서 이겼으나 소비자들의 여론으로 사실상 굴복한 적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미키마우스법으로 저작권 보호기간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했다. 지적 독점에서 공유로 가는 큰 흐름에 역류하는 미국의 경향을 주목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미국은 175년만에 선 발명을 선 출원제로 수정하는 등 복잡한 특허법을 크게 개정했다. 보통 3년 걸리던 수속을 1년이면 가능하게 되었다. 구글과 스탠퍼드대에서 보듯 미국 대학들은 IP(지식재산) 전담부서를 만들어 학생들이 특허를 얻도록 북돋우고, 그 특허료를 나눠가져 학교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는 낮은 차원의 ‘반값 등록금’ 목소리만 요란하다. 미국은 대선 때마다 줄기세포 등 새로운 특허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지만, 우리 대선 후보들 가운데 특허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기업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된다. 트레이드 드레스가 일반화하는 미래 상품시장에서는 한눈에 어디서 본 듯한 것이 아니라 “저거 삼성 거잖아”라고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 감각과 창조적 상상력으로 차별화한 제품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그 접촉면에서 일어나는 인터페이스 혁명을 통해 새로운 지적재산의 강국이 돼야 한다. 이미 수년 전 중앙일보는 디지로그의 제안으로 그 길을 제시한 바 있지 않은가.


대담·정리=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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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3

‘미국이 그러면 그렇지’. 삼성전자와 애플 간 디자인특허 소송에서 미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북부지방법원 배심원단이 일방적으로 애플 편을 든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게 변함 없는 ‘미국 스타일’이라서다. 경제전쟁에 임하는 미국인의 태도는 언제나 그랬다. 미국이 경쟁우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 악이라는 것.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디자인특허 침해 소송을 냈을 때, 약 30년 전 미국과 일본 간에 벌어졌던 반도체 전쟁이 떠올랐었다. 이는 국가 간 산업전쟁의 효시였고, 이후 미·일 간 무역분쟁은 마구 확전됐다. 이 전쟁은 반도체 불황이 닥쳤던 1985년 미 반도체업체들 모임인 SIA가 미 무역대표부(USTR)에 “일본 반도체 메이커의 불공정 행위로 미 업체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잇따라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일본의 반도체 메이커들을 상대로 ‘약탈적’ 방법으로 가격덤핑을 했다며 고소했고, 인텔·AMD·내셔널세미컨덕터 등이 일본산 메모리 EP롬에 대해 반덤핑 제소를 하는 등 파상공세를 펼쳤다.

 이듬해 미국 상무부는 일본 반도체에 불문곡직하고 21.7~188%의 덤핑마진을 부과했고, 일본은 미·일 반도체협정에 서명한다. 일본 시장에서 미국 반도체 점유율 20%를 보장한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20%가 안 되자 미 상원이 일본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잇따라 무서운 관세보복이 이루어져 엉뚱한 일본산 TV에 보복관세 100%가 부과되기도 했다. 이 공방은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반도체 전쟁을 전후로 미국엔 반일 서적들이 넘쳤고,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 공동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70%가 ‘미국 정부가 당장 손쓰지 않으면 일본이 미국을 사버릴 것’이라고 답해 현지 언론들도 맹목적 애국주의인 ‘신 외국인 기피증’을 우려했다. 이때 개발된 ‘반덤핑·보복 관세’ 모델은 다른 무역전에도 그대로 적용돼 우리 기업들도 누차 당했다. 이번엔 대상이 한국 기업으로 바뀌고, 구형무기(반덤핑) 대신 한층 강화된 ‘특허’라는 신무기가 투입됐을 뿐, 양상은 똑같다.

 그런데 치열했던 미·일 반도체 전쟁의 최종 승자는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었다. 미국에선 인텔이 메모리를 포기하는 등 업체들이 속속 메모리에서 철수했고, 지친 일본 반도체 업계는 지리멸렬해졌다. 그 사이 한국 업체들은 혁신을 거듭해 이 시장의 패자(覇者)가 된다.


옛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진진(陳陣)이 한(韓)과 위(魏)의 전쟁이 1년 이상 계속되자 혜왕에게 “큰 호랑이와 작은 호랑이가 싸우면 작은 호랑이는 물려 죽고 큰 호랑이는 상처를 입을 테니 그때 기진한 큰 호랑이만 잡으면 양국을 멸할 수 있다”고 간했던 일은 그저 옛말이 아니다.


 최근 모바일 시장을 ‘삼국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번 애플 평결 결과를 ‘죽은 제갈공명(스티브 잡스)이 산 사마중달을 이겼다’는 고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데 그 후 촉(蜀)은 어떻게 되었던가. 공명을 계승한 강유는 위(魏)를 상대로 아홉 번이나 ‘삽질’만 했고, 촉 조정은 음평절벽에서 몸을 굴려 성도(成都)로 질러 간 말더듬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의 북소리에 미친 듯이 무기를 내리고 투항하지 않았던가.

 나라를 세우는 일과 지키는 일은 다르다. 미국은 근대 이후 혁신적인 제품은 거의 다 내놨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창의적인 ‘나라’들을 세웠다. 그런데 수성(守城)기술이 축성(築城)기술을 못 따라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혁신을 거듭하고 시장에 민감한 제품으로 시장을 장악했다면, 어떻게 후발주자들이 그 시장을 넘봤겠는가. 그런데 반도체도 자동차도 어느 순간 혁신을 멈추고, 제품은 지리멸렬해져 소비자가 외면했다. 그래, 경쟁자를 탓하고 저주해서 시장이 회복되었던가?

 ‘혁신을 멈춘 애플이 미국인의 애국심에 호소한 특허 공세로 다시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한 외지가 지적한 대목이다. 미국 스타일의 응전 방식, 시장 전략에 대한 반성이나 혁신은 외면한 채 경쟁자를 공격하고 상처 내며 지칠 때까지 기운을 빼 피아(彼我)가 공멸하는 역사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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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2

국내 숱한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범(典範)으로 통하는 미국 폭스TV의 '아메리칸 아이돌'은 올해도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미국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특히 흥미로운 건 10여명의 경쟁자가 남은 뒤부터 매회 첫 장면에 등장한 3분짜리 '뮤직 비디오'다. 출연자들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거나 세차를 하며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이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은 실은 포드 자동차이다. '아메리칸 아이돌' 프로그램에 거액을 협찬하고 있는 대기업 포드가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한 일종의 변종(變種) 광고다.

이처럼 TV 프로 속 간접광고가 일상화된 미국 방송가이지만 '시에스아이(C.S.I)'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클로저(Closer)' 등 각종 드라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간접광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상품 광고에 대한 고려 때문에 드라마의 스토리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는 제작진의 고집 때문이다. 대형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의 한 마케팅 간부는 "간접광고로 사소한 수익을 올리는 것보다 콘텐츠의 완성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2010년 방송법 개정으로 TV 프로 속 간접광고가 일부 허용된 뒤 갖가지 상업적 실험에 골몰하고 있는 국내 드라마 제작진이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분별력이다.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모하는 국내 드라마 속 간접광고를 보면 이제 스토리는 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최근 종영된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은 간접광고의 조악한 습격으로 점철된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장동건이 김하늘에게 '지미 추' 명품 구두를 선물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능력 좋네. 명품 구두 선물이라. 130만원짜리 한정판이야"라는 친구의 말로 구두 가격까지 친절하게 알려준 작가는 장동건의 입을 통해 "사치스럽게 말고 가치스럽게 신어봐요"라는 광고 카피성 대사까지 제공했다.

이 밖에도 '유령' '더 킹 투 하츠' '골든타임' 등 억지스러운 간접광고로 구설(口舌)에 오른 드라마는 한두 편이 아니다. 최근에는 걸그룹 티아라의 함은정이 드라마 '다섯손가락'에서 갑자기 하차한 것을 두고도 간접광고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며 방송가를 달구고 있다. "팀 내 왕따 문제로 이미지가 실추된 은정으로 인해 간접광고 수주에 문제가 있어 제작사가 캐스팅을 무리하게 변경했다"는 주장이다. 요즘 간접광고에 대한 제작진의 강박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국내 방송법에는 전체 방송시간의 5%, 전체 화면의 25% 이내로 간접광고가 허용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법의 한계를 넘지 않더라도 드라마의 스토리에 무리한 부담을 주면서까지 간접광고를 집어넣는다면 시청자의 짜증과 조소(嘲笑)만 유발할 뿐이다. 게다가 이로 인해 제작 과정의 잡음까지 불거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드라마는 한류(韓流) 바람을 타고 이미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콘텐츠로 성장한 지 오래다. 20여년간 쌓아올린 한국 드라마의 국제적 위상이 눈앞의 작은 수익에 대한 제작진의 욕심 때문에 무너져서야 되겠는가.



최승현 대중문화부 방송·음악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30/20120830025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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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10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관 뚜껑을 덮을 때 나는 청탁(淸濁)의 소리는 제각기 다르다. 최근 개봉한 전투기 조종사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 '알투비(R2B)'를 보고 한 공군 애호 단체 모임에서 들었던 어느 순직 조종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주인공은 2010년 3월 2일 신참 조종사의 비행훈련을 돕기 위해 F-5/F 전투기에 동승했다가 추락 사고로 순직한 고(故) 오충현 공군 대령이다. 그는 공사(38기)를 수석 졸업한 인재였고 유도도 잘했다. 또 축의금 봉투에는 항상 '대한민국 공군 중령 오충현'이라고 쓸 만큼 공군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비행시간도 2792시간이나 되는 베테랑 조종사였다. 그는 공군 역사에 비행훈련 중 순직한 첫 번째 비행대대장으로 기록되었을 만큼 솔선수범과 책임정신이 투철했던 지휘관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숙연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일기장<아래 사진>이다. 인간은 의식이 언어를 주관하고, 언어가 행동을 지배한다. 내가 오 대령의 일기에 주목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1992년 12월 한 동료의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마치 18년 후에 있을 자신의 유언처럼 일기를 썼다.
'내가 죽으면 가족은 내 죽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행동을 했으면 좋겠다. 장례는 부대장으로 치르되, 요구 사항과 절차는 간소하게 했으면 한다. 또 장례 후 부대장과 소속 대대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돈 문제와 조종사의 죽음을 결부시킴으로써 대의를 그르치는 일은 일절 없어야 한다. 조국이 부대장을 치러주는 것은 조종사인 나를 조국의 아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의 슬픔만 생각하지 말고, 나 때문에 조국의 재산이 낭비되고 공군의 사기가 실추되었음을 깊이 사과해야 한다. 군인은 오로지 '충성'만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세상이 변하고 타락한다 해도 군인은 조국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의 운명이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난중일기'를 쓰며 해전 승리에 골몰했던 이순신 장군을 떠올려 보았다. 고(故) 오충현 공군 대령! 그는 '독수리는 떠난 자리도 깨끗하다'는 전설을 남겼다. 이기주의와 보신주의가 판치고 권도(權道)가 상경(常經)을 밀어내는 혼탁한 세상에 참 군인정신을 우리 가슴에 각인시키고 홀연히 먼 길을 떠난 그의 순수한 조국애와 숭고한 희생에 깊은 애도와 존경을 표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쪽 발은 이 세상에, 나머지 한쪽 발은 관(棺) 속에 넣고 애기(愛機)에 올라 우리나라 영공 수호에 전념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안전한 '리턴 투 베이스(R2B)'를 기도한다.

김덕수 공주대 교수·일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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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08

어느 세대나 나름의 목표와 기대가 있다. 소위 개발 세대에는 '한번 잘살아 보는 것'이 그것이었다. 5·16이 나던 해 추경예산의 52%가 미국의 원조로 채워졌다. 본예산도 원조로 반을 채우곤 하던 시절, 매년 예산안을 작성하면 미국 경제협조처(USOM)에 가서 설명해야 했다. 1963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국가의 기본 살림인 예산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니, 겉으로는 독립국가이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발언권이 52%인 셈이라고 개탄했다. 나라와 개인 모두 가난에 찌들었고 가난 때문에 비굴해야 했으니 가난을 벗어나는 것 말고는 달리 열망할 것이 없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 인생의 전부였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며 분신한 청년도, 밤새 미싱을 돌리는 청계천의 소녀들도, 피폐해가는 농촌도 모두 마음에 묻은 채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는 눈부셨다. 인구 3000만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를 제외하면 우리는 지난 50년간 연 5% 수준의 경제 성장을 지속한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사전트 교수는 몇 달 전 한 인터뷰에서 한국을 '기적의 나라'라고 불렀다. 개발 세대는 너무나 훌륭히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면 우리 세대의 과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경제 발전의 첫 수혜자이다. 자신들이 가져보지 못한 기회를 자식이 가질 수 있도록 무지하게 애쓴 부모와 성장의 그늘에 가린 수많은 희생을 기억하는 유일한 세대다. 그렇기 때문에 고속 성장이 낳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일 수밖에 없다.

초고속 성장은 탄탄한 선(善)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고효율의 집중 투자로 단시간에 빈곤을 탈피했지만, 경제의 일부분에서 발생한 부(富)가 다른 부분으로 확산되면서 구매력의 저변을 넓히고, 국민의 취향과 소비 패턴이 고급화되면서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키는 구조가 없어 충격에 취약하다. 1990년대 초반 중국 등 저임금 국가와의 경쟁에서 밀린 경공업이 붕괴하면서 제조업에서 떨려난 노동력은 서비스업으로 대거 유입됐다. 그러나 초고속 성장 속에 낙후 상태에 머물러온 서비스 부문에 밀려든 인력은 막다른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고, 여기서 희망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은 아예 경제활동을 접었다.

지난 15년간 상위 10%는 별 변동이 없는 데 비해 하위 10%의 시장소득 점유율은 반도 넘게 잘려나갔다. 저소득층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최대 수준의 낙폭으로 감소했고, 빈곤은 만성화되고 있다. 경제 개발이 시작된 이후 들어보지 못했던 '빈곤 계급의 형성'이다. 경제적 계층은 뛰어넘으면 그만이었던 사회에서 한 번 격차가 벌어지면 장기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사회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이를 극복하도록 돕는 시스템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이 또한 초고속 성장의 유산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부지런하면 잘 살 수 있었고 대부분이 승자여서 패자를 따로 돌볼 필요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요즘 정치가들이 외치듯 '이제는 복지'라는 단순한 접근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앞 세대의 성취를 말아먹지 않으면서 닥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닥치고 복지'가 아니라 '어떤 복지'인지가 중요하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도와 일으키려면 그가 변화에 잘 대처하고 적응하도록 도와야 한다. 물살이 거셀수록 튼튼한 뗏목을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개인이 성공적으로 물살을 탈 때 경제도 성장한다. 그러니 복지의 요체는 시장에서 뒤처진 패자를 신속히 부활시켜 시장에 재진입시키는 것이며 복지와 경제는 더 이상 별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지정책은 굳이 배우거나 일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도록 돕는 데 방향이 맞춰져 있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지만 계속 빈곤 속에서 살도록 눌러 앉히는 방식이다. 새로운 기술과 더 나은 일자리로 이들을 연결시키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턱없이 빈약한 데다 비효율적이다. 당장 붙잡을 말뚝을 국가가 나눠주는 것만 중요하다는 인식이 관료와 전문가들 사이에 팽배할 뿐 아니라 부처 간, 전문 영역 간 기득권 다툼과도 얽혀 있어 바꾸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뗏목 탈 줄 아는 이와 말뚝에만 의지하는 이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니 복지정책이 오히려 계층 간 격차를 키우고 고착시키는 셈이다.

당신 세대는 제 몫을 다하고 있느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지금으로서는 당당하기 어렵다. 앞 세대보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과제 앞에서 굳어버린 관념과 관행, 온정주의로 포장된 집단이기주의를 떨쳐내는 것이 우선 급하다.


윤희숙 KDI 연구위원·보건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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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