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박병선 박사다. 재불 역사학자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큰 힘을 보탰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도서 297권 중 75권이 14일(한국시각)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외규장각 도서는 5월말까지 4차례에 걸쳐 옮겨질 예정이다.
이에 프랑스 파리에 살며 도깨비뉴스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파리아줌마’가 지난달 7일 직접 인터뷰 했던 박병선 박사와의 일문일답을 소개한다. 상당히 길지만 적절한 시기라 판단해 그대로 옮겨 싣는다.
쓴소리 한마디하렵니다. 우리 문화유산 안돌려준다고 프랑스 비난만 할줄 알았지, 이런 분의 숨은 노고가 있는줄은 알았는지요? 알려고는 했는지요? 가끔 제가 프랑스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련도 없는 글에다 우리 문서 안돌려주는 프랑스를 비난한 댓글을 남기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무척 씁쓸하더군요.비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런 분의 노력을 알려고 하는 일은 단순히 비난만하려는 마음으로는 쉽지 않을것입니다. 욕을 해도 전후좌우, 깊은 사정까지 잘 알고 하자고요.
그럼 비난이 비판이 될수 있을것이고, 비판이 된다면 변화할수 있는 힘을 가질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 유학생 1호 박병선 박사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 고증으로 동백상을 수상한 "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님은 625전쟁이후인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왔습니다.
은사의 부탁으로 파리에 있던 외규장각을 찾아 나라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외로운 연구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1979년에는 한국에 외규장각을 알렸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아 도서관 사서일을 그만두기도 했었습니다.
반평생 연구에만 몰두하여 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한쪽을 찾아주는 업적은 이루었지만 그분은 후회하는게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교수제의가 들어왔을때 받아들이지 않은것이랍니다. 그분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분의 삶을 대하는 저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듭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암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여든 연세에 수술이 힘겨우셨지만 다시 일어나 파리로 돌아와 연구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병마도 그분의 열정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현재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박사 일행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독립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계시며, '왜 한국 사람들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프랑스어로 자세히 설명한 '조선조의 의궤' 증보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제는 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그간 숨겨왔던 고충을 동포신문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지난주 삼일절 기념식이 파리의 한국 문화원에서 있었는데, 박사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셨다고 합니다.
다소 길지만 어느 한말씀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 박사님, 병을 이겨내시고 파리로 돌아오셨습니다.
파리의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랐어요. 결코 저 혼자 병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천주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셔서 ‘그래, 이번 한번만 봐줄게’ 하신 것 같아요. 의사도 수술을 하면서 처음에는 3시간 내지 3시간 반이 예정되었던 것이 7시간이 걸리니까 나중에는 다리에 쥐가 나서 못 견딜 정도였대요. 이 할머니가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수술대에서 죽으려니 각오를 했대요. 그런데 살아나니, ‘참 명도 기십니다’ 하시더라고요 (미소).
내 명이 긴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정말 진심으로 기도 드려주시고, 도와주시니까, 그 덕분에 천주님께서도 ‘이렇게 까지들 하는데 내가 좀 돌봐주면 되겠다’ 하고 놓아주신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 지금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하죠.
- 직지 고증과 외규장각 도서 연구에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을 매달리셨는데, 그 뒤에 숨은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아요.
숨겨진 역사가 어디든 다 있죠. 학생신분으로 좋은 조건도 아니었지만, 직지 고증 당시 당했던 고충이라든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하면서 겪은 고생 등 에피소드가 너무나 많아요. 이야기 거리가 많죠. 시간과 경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것을 이제는 숨겨놓지 않고 공개하고 싶어요. 이런 숨겨진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비화’란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직지고증과 외규장각 도서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뒤에서 고생했던 이야기가 되겠죠. 지금은 외규장각 도서네, 직지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 학자들의 냉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떤 교수님께는 조언을 구했더니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도 있어요. 불란서 사람들의 냉대는 이해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냉대는 더 차갑고 매서웠어요.
- 직지고증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직지 고증을 시작한 것은 1972년 때 일이에요. 당시 직지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불란서 사람들은 “혹시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이라면, 역사적인 공헌이 크다” 라면서, 꼭 ‘-면 Si c’etait’ 이라는 표현을 썼죠. 당시 누구나 조건적으로 ‘면’ 자를 붙였어요. 그러면 좋다, 이 ‘면’ 자를 면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 했지요.
하지만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시작을 하려니, 어떻게 하면 이 ‘면’ 자를 면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어요. 도대체 한국의 활자사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의 흐름을 알아야지 무엇을 어떻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죠. 한국의 학자들과 교수님들께 열 통도 넘는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한국의 활자사나 활자에 관련된 책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요청을 드렸죠.
그런데 이에 대한 답신을 전혀 받을 수 없었어요. 고맙게도 어떤 한 교수님께서는 답변을 주셨는데, 며칠을 두고 찾아봤지만 그런 책이 없다는 대답이었어요. 그렇게까지 라도 알려주신 교수님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죠. 당시 불행 중 다행으로, 일본과 중국의 인쇄사 관련 책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일어도 그렇고 중국 한자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것을 파고 들기 시작했어요.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죠. 어떤 때는 눈이 시뻘개져서, 아침에 근무하러 도서관에 가면, “너 어제 울었니?” 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넣으면 며칠 있다 또 괜찮아지고, 그러한 일상이 반복됐죠.
- 직지 고증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한 가지, 한국 활자사를 추측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일본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활자사 같은 것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니까 놔두기로 하고,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인지 아닌지가 문제니까,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것만 고증하면 된다는 생각에 활자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지우개로도 만들고, 감자로도 만들고, 흙으로도 만들고. 그때만해도 불란서에 세라믹을 굽는 오븐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부엌에서 쓰는 오븐에서 구우면, 세라믹 오븐에서 구운 것처럼 되지는 않을지언정 형태가 조금은 나왔어요. 글자 몇 개를 흙으로 만들어서 굽기를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오븐이 ‘펑’ 하고 터져서 부엌 유리창이 다 깨지고 얼마나 놀랬는지. 주인에게도 욕깨나 먹었죠.
그런데 그 때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생각했어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을 미리 생각을 못하고 나 자신이 활자를 만들어서 어떻게 해서든 증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가지고 직접 잉크에 찍어보면서, 직지에 찍힌 글자를 확대한 것과 내가 찍은 활자를 비교해봤더니 이것이 토활자인지, 사기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금속이나 납 같은 것으로 만든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더라고요. 이렇게 쉬운 것을 활자를 스스로 만드느라 죽으라고 고생을 하고 돈은 돈대로 쓰고 화덕을 세 개나 깨트렸으니.
-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하게 된 것이네요.
인쇄소에서 받은 금속활자를 찍어본 것과 책에 찍힌 활자의 형태가 동일한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 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한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조건이 있었죠. 예전에는 조판이 쉽지 않으니까, 앞의 글자가 뒤의 글자와 물린 것도 있고, 삐뚤어진 것도 있어요. 삐뚤어진 것이나 물린 것을 하나하나 꼬집어서 확대해서 대조해보니, 그것이 모두 정확히 일치했어요. 금속활자가 아닌 붓으로 썼거나 나무로 팠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그 대조표와 사진을 가지고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했죠.
- 그 때는 어떤 심정이 드셨는지.
사실 겁이 났어요.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이것을 그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도서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대담하게 직지가 ‘1377년에 금속으로 만든 활자본’ 이라고 썼어요. 이제까지 ‘-면 Si c’?tait’ 라는 가정이 붙었던 것에서, ‘Si’를 과감히 뺐더니 도서관에서도 겁이 나니까, 나보고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지, 이것이 금속활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서관 명예로 돌리지만, 이것이 잘못되어 실수라면 그것은 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겠다는 조건을 붙였어요. 나 개인이야 실언 했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까지 조심성 있게 전시를 진행했어요. 전시가 시작되고, 이를 본 인쇄업자들이나 그쪽에 관계가 있는 분들로부터 구텐베르그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 앞선 시간에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항의가 왔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금속활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그 경우만 딱 설명해주었죠.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래, 네 말도 옳다’, ‘알아들었다’ 라는 반응과 함께 처음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 직지 고증 3년 동안 정말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 같네요.
나는 그것을 위해 3년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지냈어요. 시간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장을 보러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니 매일 물만 끓여서 커피하고 빵하고 먹는 게 보통이었어요. 머리가 딴 데 있어서 장을 보러 가도 하나만 사고는 다 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죠. 얼마나 나 자신이 답답했겠어요. 너 같은 맹꽁이도 없다 생각했어요. 이렇게 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살아도 살아는 나더라고요.
- 당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동양학자회의 때 발표를 하고 나니, 한국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어떤 학자는, 서지학도 안 한 사람이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그리고 그런 고증을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어떻게 네가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 네가 했다고 하지만 그건 한국 학자들이 다시 보고 판단을 해야 하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당시 너무 화가 나서 찢어버렸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겠어요, 몇 년 동안을 고생해서 고증하고 발표를 해서 인정을 받은 다음의 이야기인데, 그런 소리를 하면서 항의가 들어오니.
나중에 직지 영인본을 내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한국 서지학자들에게 내가 고증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고증을 했다는 것을 발표했더니 그분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리고 영인본 서문에는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병선이 가지고 온 사진을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고증해본 결과 이것은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 라고 적었어요. 나는 완전히 심부름꾼이 되고, 그분들이 다 했다고 된 것이죠. 내가 교수님께 가서 너무하셨다고, 그리고 그 한마디만 고치시라고,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아니라 ‘한국의 서지학자들도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고 고쳐달라고요. 하지만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직도 그 해설문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 프랑스에서의 반응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시 출판된 영인본이 파리 도서관에 왔는데, 도서관 과장이 불어로 된 해설문을 보더니 이것을 읽어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알면서도 안 읽었다고 얘기하니까, 이게 말이 되느냐고, 네가 고생해서 우리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고 인정을 받은 것인데 저희들이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불어 같은 경우는 말 마디가 시원찮게 번역이 되어 더 심하기도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고소를 하겠다고 나왔어요.
그때 드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 교수들인데, 소위 그분들을 국제 재판에 내세우는 것은 너무하다고, 지금 너희들은 영광을 다 차리지 않았느냐, 세계 최고 활자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는 것, 소유권도 너희에게 있다는 것만도 크지 않냐며 설득했어요. 나는 곧 있으면 갈 사람이지만, 그것만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 그것을 봐서라도 참으라고 했죠.
동시에 이것이 서울에 있었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고, 소위 너희 도서관 서고 속에 있었으면 그대로 있었을 걸, 내가 꺼내 고증을 해서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증명이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도서관 쪽에서도 영광이요, 나도 인간적으로 기쁨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고 했죠. 이 후 한국에서도 소식이 없고 해서 일이 일단락 됐어요.
한 식당안에서 찍은 사진.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엘리제궁에 돈을 빌리러 왔대요. 들어갈 적에는 땅만 쳐다보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서 성공하나 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들어갔더니 미테랑 대통령이 직지 영인본을 탁 내놓으면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국가의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인사를 먼저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전 대통령도 당신도 잘 몰랐다가 용기를 내게 되었고, 회의도 잘 끝나고 결과도 좋았다고 해요. 엘리제궁에서 나오는데 들어갈 때와는 달리 어쩌면 하늘이 그렇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모르겠더라고 하는 회고담을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 직지가 만들어진 청주에 고인쇄박물관 설립을 지시하게 된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죠? (미소)
- 외규장각 도서와 관련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에 매달리신 기간만해도 10년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요. 297권에 달하는 외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는 작업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외규장각 도서는 너무도 역사가 길어요. 무려 30여 년에 걸친 이야기죠.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것은 1977년에 알았어요. 1979년도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 목록과 제목을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병인양요 때 약탈된 도서들이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줬어요. 당시 바짝 관심을 갖다 그만이었죠. 하지만 책의 제목만 알았을 뿐이지, 내용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이를 요약을 해서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10여 년에 걸친 조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때부터 10년 간을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조사를 하는 거예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지만 문제는 책이 크기도 하고, 297권에 달하는 만큼 장 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의궤의 내용을 잘 못 알아 듣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소위 이조시대 이두(한글 발음을 한자를 빌려 적은 것)가 섞여 있어서 한문을 아무리 해석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예단 관련 내용에 저고리가 있다면, 저고리의 ‘저’ 자를 한자를 골라서 쓰는 거죠. 빨간 ‘적(赤)’ 자를 쓰고, ‘고’ 자는 고대라는 ‘고(古)’, ‘리’ 는, 몇 리 하는 ‘리(里)’를 적어 ‘적고리(赤古里)’ 라고 써 놓았으니, 이것이 옷 이름이라고 누가 상상을 하겠어요. 이런 것에 하나하나에 잡히다 보니, 10년 이라는 시간이 가는 것이죠.
- 시간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고충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요약한 내용을 불어로 타이핑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고, 내가 백만장자도 아니고 돈이 없으니까, 이것을 타이핑하는 분께 맡길 때마다 우리 집 골동품을 한 개씩 갖다 파는 거예요. 당시 내가 알던 골동품 가게가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께서 계셨어요. 그 중 한 분이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어요. 골동품을 의탁을 해 놓으면 팔리면 연락이 오는데, 원칙적으로 당신 몫을 챙기시고 나를 주시는데, 어떤 때는 ‘너를 보니 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얼마에 팔았으니 다 줄게 가지고 가’ 하시고, ‘네 꼴을 보니 너무 안됐으니까 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 고 그러셨죠.
그 분께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 할아버지께서 나를 제일 많이 도와주셨죠. 또 옛날 빨레 후아얄 Palais Royal 근처에 일본 판화 파는 집이 있었어요. 당시 이를 운영하던 분이 국립도서관에 판화가 많으니까 판화를 보러 오셨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게 통역을 부탁했어요.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분인데, 판화의 경우 구멍이 있으면 값이 툭 떨어지니까 그것을 감쪽같이 고쳐야 해요. 그것을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주말에는 그곳에 가서 판화를 고쳐주는 거예요. 그 분도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기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있어서, 오늘은 30유로 줘야 하는 것을 어떤 때는 50유로 주고, 어떤 때는 300유로를 주고 그런다고요. 그리고 당시 일을 하면서 점심, 저녁을 주인이랑 같이 먹어야 하니까 밥을 먹는데, 밥을 안 먹다가 먹으니 크게 배탈이 나는 거에요. 한번 두면 나면 모르는데, 월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을 계속 들락날락하니까 수위가 이걸 보고 약을 줘서 먹고 나은 적도 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원고를 완성하게 되었죠.
- 출판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이것을 요약해놓고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죠. 출판을 해야 하는데, 그 때 개인적으로 알던 대사관 영사님께 말씀 드리니 다른 방법은 없고 민원을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민원을 냈더니 규장각에서 이태진 교수님이 이를 받아주셔서 그곳에서 불어판을 출판을 하게 됐어요. 당시 직판사를 지적해주셨는데, 문제는 불어로 된 텍스트라 그들이 찍기를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오자가 많았죠.
이것을 한 열 번은 고쳤을 거예요. 그래도 또 틀리고 또 틀리고, 지금도 오자가 투성이예요. 나중에는 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어요. 당시 출판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태진 교수님이 총장께 말씀 드려 반환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참 반대가 많고. 처음 시작할 당시 밥 먹고 할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은, 내가 미워 죽겠다고, 하지 말랬는데 이렇게 쓸 데 없는 일을 해서 남 골치 아프게 만든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 때는 이메일도 없으니까 편지나 전화로 그런 소릴 들어야 했죠. 어떤 때는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이런 전화를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어요. 당시 그렇게 냉대했던 분들이 지금은 그런 말들이 다 없어지고 앞장서시는 걸 보면 사람이 저렇게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 그런 냉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해내셨네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병도 교수님께서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시지 않았으면 난 중간에 그만 뒀을 거예요. 그 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지언정, 생전에 저에게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셨던 그 말마디가 저에게 큰 힘을 준 거예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하나 못 들어주겠어요. 그래서 끝까지 버텨냈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저도 모르게 갔어요.
저는 아침에서 저녁 밖에는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더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죠. 하루하루 진행이 되어가니까 나는 계속 파고 있는 거예요. 오죽하면 그 쪽 도서관 열람실에서 내 별명이 ‘파란 책 속에 묻혀 있는 여성’ 이겠어요. 의궤 표지가 파랗거든요. 그리고 책이 크니까 나는 그 책을 펴 놓고 밑에 묻혀 있으니까. 그래서 어디 조금 나가 있으면, 이름도 뭐도 모르고 ‘파란 책에 묻혀 있는 여성 어디 있냐’ 고 그렇게 물었다고 해요. 그렇게까지 됐었어요. 그래도 해냈어요.
시간이 아까워 식사도 못하며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양기섭 문화원장이 방문하여 잠시 나가자고 하여 나갔더니 도서관 근처 까페에서 오믈렛을 시켜주시더라구요. 그 분주하신 분이 도서관에 까지 찾아오시는 것도 고마운데 식사까지 시켜주신 그 마음이 고맙고 잊을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방해하고 냉대하는데 오직 한 분 문화원장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정을 너무나 감사하며 잊지 못하지요.
- 의궤가 145년 만에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시는 기분이 남다르실 텐데요.
우리나라 의궤의 소유권을 못 찾고 대여로 온다는 것이 너무 맘이 아파요. 그 책이 어디 있든 간에 우리나라 것이라는 소유권만은 찾고 싶다고요. 그것이 우리 것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것은 불란서 것을 빌려오는 것 아녜요. 5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정권도 바뀌고,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서류 상 돌려 달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썼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죠.
- 현재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병인양요 1권은 이미 출판이 되었으니, 지금은 2권을 집필하고 있어요. 하지만 애로가 많고,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다행히 문화재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최대 노력하겠다고 하니까 두고 보는 것이죠. 1권은 의궤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었다면, 지금 하는 작업은 병인양요 발발 전과 그 후 프랑스 정부에 보고된 공문 등을 찾아 번역하고 재확인하는 것이죠.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이 와서 쓴 논문과 보도 내용을 몇 개 찾아냈는데, 아직 다 찾지 못했어요. 1866년에서 1867년까지의 신문을 하나하나 보면서 기사가 있나 없나 찾아야 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그것을 다 못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고,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이런 것을 전문으로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많이 들죠.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우선 그것부터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보다 더 충실하게 보충하고 완벽한 책을 만들고 싶어요.
- 외규장각 도서를 찾고 나서 도서관 측과의 갈등으로 결국 도서관을 떠나게까지 되셨다면서요. 그 때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 당시 도서관하고 한국 정부, 대사관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참 복잡해요. 내가 시간적으로 정리를 한 번 해봤는데, 그래도 참 복잡해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사건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에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주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초기에 외규장각 도서를 찾았을 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을 종류별로 모두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보고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기자들이 거기에다가 제멋대로 '발견'이라는 말을 썼다고요.
당시 도서관에서 한국에서 나온 신문을 일일이 최악으로 번역을 해가지고, 물론 가짜로 꾸밀 순 없지만, 똑같은 말마디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규장각 도서가 있는 것을 네가 <찾은 거지>, 어떻게 그것이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고요. 그래서 기자 분들께 사실 찾은거지 발견이 아니다, 발견 소리 좀 쓰지 말아달라고 하니까, 한국에서는 그 말 밖에 다른 말이 없다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냐고 말하는 거예요. '찾음'이라고 쓰면 맥이 없는 것 같고, '발견'이란 단어도 한국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까 해석하기에 달렸는데 말이죠.
결국 제가 발견이라고 해서 마치 최초로 찾아낸 것처럼 얘기를 했다고 그것을 가지고 도서관에서는 저를 달달 볶았어요. 외규장각 도서에 관한 언급은 제일 먼저 모리스 쿠랑이 했어요. 당시 모리스 쿠랑도 책 제목과 왕립도서관(Biblioth?que Royale)에 있다고만 썼지, 책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고, 제목과 크기에 대한 정도만 이야기를 했다고요. 도서관은 모리스 쿠랑이 이미 발표한 것을 네가 다시 발표한 것이지, 왜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문제를 삼았어요. 그래서 나는 다른 것 발표한 것 없다, 이 책이 어디에 있고, 그 제목이 무엇인지 알렸을뿐이지 더 구체적으로 말한것도 없다고 말했죠.
얼마전 파리를 찾은 민주당 5선 김영진 의원과 함께한 박병선 박사.
도서들이 오래되다 보니 몇 권만 표지가 제대로 남아있었지, 대부분은 모두 상해서 수선을 하게 되었어요. 의궤 표지들이 두꺼운 종이에다가 비단으로 싸여져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어디서 누가 한 일인지 모르지만, 수선을 맡긴 사이에 누가 의궤에 있는 그림을 면도칼로 잘라갔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조금 똑똑했으면, 제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모두 빼갔으면 잘라버린 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그 옆에 도막을 남겨두고 그림만 가져간 거예요.
당시 무엇보다 도서관 측에서 예민했던 부분은 한국 대사관 사람들이 알게 될 까봐, 그것을 무척 신경을 썼던 가봐요. 저는 내용적으로 그들이 겁냈던 것을 알 수 없었죠. 그들은 그것을 수선을 해서 파리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오겠다고 계획을 짰겠지요. 그 당시 수선을 한 다음에 종이에 싸 놓은 것을 제가 제일 먼저 열었다고요. 내용을 보는데 그림이 잘려 있으니까 이건 수선소에서 잘린 것 같다고 바로 말을 해줬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라간 것처럼 오해를 받을 테니까요. 도서관쪽에서는 이게 국제문제가 될까봐 겁을 낸 거예요.
그런데 내가 도서의 존재를 기자들에게 얘기했기 때문에 책임이 저한테 전가된 거예요. 그 전에는 과장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고 친했다고요. 그런데 하루 사이에 사람이 싹 변하는데, 저 멀리에서 나를 보면 돌아서서 딴 길로 가고 그 정도로 냉담해졌어요. 그리고 또 한국 외무부에서는 저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 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냐고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요. 당시 의궤를 찾았을 때에 대사관에 제가 매일 같이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대사님께 지금 이것이 창고 속에 있으니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간단하다, 보통 서적도 아니고 파지로 분류되어 있으니까 찾는 것이 간단할 테니 어떻게 좀 힘을 써달라고 했죠.
그런데 대사님 말씀은 한불관계가 지금 묘하고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 비위를 건드릴 수 없으니까 당신이 말할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한테 참 잘해주신 분인데, 그 문제만큼은 본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가난할때니까 문화재 같은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죠.
대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본국에 보고를 하셨는데 본국에서 묵살을 했는지, 그 분께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가만히 계셨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거든요. 당시 제가 매일 대사관에 출근하다시피 하니까, 대사님께서는 '병선이 왔으니까 나랑 가서 점심이나 먹어' 하시면서 매일 같이 쌩 미쉘에 있는 우동집에 갔어요. 가서 먹으면서 저는 또 '대사님, 이 우동이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이 문제가 더 중요한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면, '그 얘기는 그만 하고 밥 좀 먹자' 하시면서 넘어가시고 (웃음).
- 도서관에서 나오시게 된것은 그 후의 일인가요?
그 때에도 보도 기관 사람들이 '발견' 소리를 빼달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그 말을 쓰는 거예요. 난 그 말 때문에 있는 대로 당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도서관 내에서 냉전이 일어난 거예요. 도서관 측하고 나하고. 도서관에서는 나를 반역자 취급을 했어요.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다 누설시켰다는 죄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백 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도서관에 책이 있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공고를 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관의 임무라 생각하는데, 제가 반역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도서관에 있는 책이 있다고 말을 한 건데 그것이 왜 비밀이냐, 뭐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그리고 당시 도서가 있으면 카드가 있거나 대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강화도에서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가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떠들기 시작하고, 한국에 신문기사가 하나라도 또 나면, 그 신문을 번역을 해서 도서관 내 보도 담당실(service de presse)에 보고가 된다고요, 이런 기사가 또 나왔다고. 이 사람들은 이를 계속해서 문제로 삼으려고 충동을 한 거예요. 이렇게 몇 달이 계속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제가 도서관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를 하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는지. 그것까지도 좋아요. 제가 뭐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문제 될 것은 없었죠.
그런데 하루는 관장님께서 저를 호출을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도서관에는 천 여명이나 되는 직원이 있고, 나는 당시 정식직원도 아니고, 말단에 말단, 그야말로 임시기간 직원(saisonnier)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관장님이 직접 호출을 해서 사표를 내라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거죠. 직원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비서를 시켜서 해결을 했겠죠. 호출을 해서 갔더니,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거냐고 직접 물으시더라고요. 과장도 같이 갔는데, 과장이 제가 오랫동안 그 책을 찾았다는 것을 말하고, 동시에 이것을 도서관 측과 상의하지 않고 외부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듣고 있다가, 도서관에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데 일일이 과장하고 상의를 해야 하느냐, 또 어떻게 그것이 도서관 비밀로 들어갈 수 있느냐,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니, 관장님도 머리골치가 아프신 모양이에요.
옆에 있는 관장님 비서도 진정하라고, 결국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고 일을 좋게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그 책을 찾고 있는 것을 과장이 알았으면, 이 책을 찾으면 자기한테 먼저 말을 해달라든지, 또는 외부사람한테 말을 하면 안 된다든지 했다면 나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않고 자기도 함께 협조해주면서 그 책을 같이 찾았던 사람이 나를 반역자로 모니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 때 도서관 측에서는 저에게 다른 취직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일년 봉급을 준대요. 그것도 그때서 알았죠. 그런데 저는 그 때 이미 꼴레쥬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했어요. 비서는 나보고 실직자가 아니고 옆에 다른 직장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하더라고요. 말은 사표지만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죠 (웃음).
- 처음 반환 교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시나요?
그 도서에는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어요. 그것만은 알아야죠. 처음에 프랑스에 반환 교섭을 오신다기에 그 분께 그것을 충고해 드리고 싶었다고요. 왜냐면 아무 소리 말고 도서관에 가서 너희들 카드 좀 보자 하면, 없는 카드를 어떻게 갑자기 만들어 주겠어요. 그리고 대장은 외부사람들한테 안보여주는 것이지만 대장 좀 보자, 그렇게 하라고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저를 만날 필요 없다고 안 만나고 그냥 갔다고요. 그러니까 처음에 교섭을 하러 오신 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내용은 모르지만 나는 이쪽 사람들한테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교섭 온 분이 책 내용도 모르고 와서 책만 내놓으라고 그러니 말이 되냐, 그러면서 툴툴거리는 소리를 제가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또 무슨 말인가 했어요. 한국 측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은 것이 없어 모르고, 이쪽 사람들을 통해 들은 것이죠. 당시 회의에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 내용을 외부에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규칙을 세웠대요. 그런데 툴툴거릴 수는 있잖아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그러니까 회의에 갔다가 나와서 내가 옆에 있으니까 '골치 아파' 그러면서 혼자서 툴툴거리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를 보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툴툴거린 것을 제가 들은 거예요. 그 사람도 비밀을 지키라는 것 위반한 거 없고요.
- 지금은 외규장각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그 긴 시간을 혼자 이겨내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 학자들의 냉대. 그리고 불란서 도서관 쪽에서 당한 냉대는 정말 지독했어요. 제가 잠을 참 잘 자는 사람이에요. 불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 때는 정말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불면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 때 처음으로 경험해보고 알았어요. 주변에 계신 분들도 많이 안타까워하시고 저 때문에 고생들 많이 하셨죠.
한국에 가면 한번씩은 예전에 저한테 그렇게 냉대하신 분들께 전화를 드렸어요. 그러면 한번 만나자 하셔서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 때는 커피를 마셔도 커피 맛이 나지가 않아요. 그 교수님도 그 때 얘기는 꺼내시지도 않고 지금 뭐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만 물으시죠. 그래서 한번은 제가 그랬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말씀 드리면 전과 똑같이 말씀하실 것 아녜요' 하고 웃었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잊어버려' 그러고 마시더라고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심인가 그렇게 생각해요.
- 박사님 제일의 마지막 소원은 파리 독립기념관 건립이라고 들었어요.
이제 갈 때도 됐고, 빨리 빨리 일을 정리하고 원고도 마쳐야죠. 그런데 가기 전에, 제가 눈감기 전에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샤또덩 가에 독립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아니면 만드는 기세라도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몇 십 년 동안 입이 마르도록 독립기념관 만들어야 된다고 했는데, 이제까지는 파리 교민들이 너무도 냉정했다고요. 거기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만들어 뭐하냐는 식으로 그랬었죠. 그대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독립기념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시작되어 다행이에요.
- 독립기념관 설립은 왜 중요한가요.
김규식 박사의 활동이 외교 활동의 시초라 할 수 있어요. 파리에 오셔서 몇 달 밖에 안 계셨지만, 같이 일하시던 분이 샤또덩 가의 그 집에서 2년간 버티셨잖아요. 집세가 없어서 방 한 칸에서 지내시면서, '자유한국'도 발행하시고, 꾸리에와 팜플렛도 발행하시고,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하셨다고요. 불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 분들이. 제 추측인데 여기 사용했던 사무실이 크지도 않았을 거예요. 낮에는 사무실로 쓰고, 저녁에는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 분들이 그렇게 활동하지 않았다면 불란서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지 못했을 거예요.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한국을 알리신 분들은 그분들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더군다나 구라파 쪽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독일에도 가셨었고, 영국, 이태리에도 가셨어요.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한국을 알리셨죠. 이런 일들을 잊지 않아야 해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제 제일 큰 소원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한 데 모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파리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거에요. 우리가 움직인다면 틀림없이 정부도 도와줄 거예요.
프랑스 파리= 동아닷컴 도깨비뉴스 통신원 파리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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