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현역 광고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친다는 박웅현(50) TBWA ECD의 4평 남짓 사무실에 붙어있는 시 구절이다. 그의 사무실은 기대와 달리 아주 평범했다. ECD(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면 크리에이티브가 생명인 광고회사에서도 광고제작 실무를 총 책임지는 임원급인데, 특별히 크리에이티브하다거나 튀는 인테리어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여느 사무실과 다른 게 있었다. 벽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A4, B4, A3 종이들. 붙일 수 있는 데는 다 붙여놓았다. 처음엔 명카피들을 적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구절들, ‘靑山不墨千秋畵(청산불묵천추화(청산은 먹이 없어도 천추에 남는 한촉의 그림)로 시작되는 한시…
박웅현의 사무실 벽은 인문학 교수의 칠판 같았다. 그는 벽을 가리키며 “다들 ‘어디다 써먹을 거냐?’라고 묻는데, 이게 바로 내 청춘을 지탱했고 지금도 나를 받쳐주는 힘이자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사람을 향합니다’ ‘진심이 짓습니다’ 등 그의 카피가 유달리 휴머니즘적인 것도 이런 ‘본질’때문인 듯했다.
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책상 위에 공책은 왜 그렇게 또 많은지. 기자는 그 중에 표지에 ‘젊음’이라고 쓰여진 공책을 볼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젊은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틈틈이 적어놓은 것”이라며 펼쳐보였다.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1.本質(본질)을 봐라 2. 클래식(고전)을 궁금해 하라 3. 强者(강자)에게 강하고 弱者(약자)에게 약해라 4. 동의된 권위에 굴복하고 강요된 권위에 저항하라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6. 答(답)은 ‘여기’ 있다.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7. 주변의 고수를 활용하라 8. 외로워하지 마라. 다 똑같다.
벽에 닥지닥지 붙은 ‘본질’의 내공이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이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면서 왜 박웅현을 게스트로 초대했는지 알만 했다.
◇왕따의 경험, 어느 순간 별이 돼 있었다
기자는 8번을 먼저 골랐다. 아무래도 지금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였다. ‘외로워 하지 마라’고, ‘다 똑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박웅현도 젊은 시절 똑같았다. 무섭도록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대학(고려대 신방과)을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입사했을 때 그는 ‘왕따’였다. ‘회의에 방해만 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회의참석도 못하고 혼자 사무실을 지켰다. 그것도 3년을 그랬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절 그는 광고계 ‘지진아’였다.
“어머니가 표주박을 사주셨죠. 종이컵 쓰지 말라고요. 하루종일 벽보고 있는데 뭐 할 게 있나요. 동양철학서 서양미술사 보면서 박으로 머리나 때렸죠. 깨지면 서랍에서 또 꺼내서 때리고. 한 10개는 깨먹었을 겁니다. 박이 원래 잘 안 깨지는데 제 머리도 단단하거든요.”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외로움이라는데,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너무 외롭다고, 왕따라고 ‘어떡하지!’ ‘뭘 해야 잘 보일 수 있지!’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중심을 잃으면 다 무너지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중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웅현에게 ‘박’과 ‘책’은 외로움에 저항하며 자기중심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광고 하기에는 너무 사변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3년 뒤 우연히 새팀에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위치가 달라졌다. 한 의류업체 광고가 자신의 카피로 채택된 것.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제일모직의 '빈폴' 광고였다. 동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하루아침이었다. “그때 드디어 ‘광고를 만드는 사람의 본질은 통찰력과 인문학이다’는 확신을 얻었죠. 내가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게 확신이 된 거죠.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니가 그린대로 인생은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왜 그래?’라고 물으면 ‘인생은 원래 다 그래. 답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죠.”
박웅현은 나무 전문가가 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국내 지리정보시스템(GIS) 최고전문가가 된 운동권 출신의 송규봉씨 사례를 들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점(點)들을 뿌리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싹 깔렸다가 필요한 순간 점 다섯 개가 연결되면서 별이 됩니다. 이 분들이 나무학자가 되고, GIS 전문가가 되기까지 그 그림을 미리 머리에 그려놓고 달리진 않았을 겁니다. 매 순간 자기중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박웅현에게 젊은 시절 왕따의 경험과 수없이 읽었던 고전의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면서 별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나의 수험서는 상식책, 토플책이 아니라 안나카레리나
흩어진 점들은 언젠간 연결돼 별이 될 수 있겠지만, 그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한 점 한 점 찍으며 산다는 것은 청춘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살아야 별을 그릴 확률이 높은 걸까.
“입사 초기에 이런 얘기 많이 들었죠. ‘요새 홍대 뜨는 음악 뭔지 아냐?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광고하냐?’ ‘그런 책이나 읽고 있으면 광고 못해’ 등등 말이죠. 그런데 요즘도 그렇지만 마케팅 서적, 자기계발서 같은 책엔 관심이 안 가요.(기자의 상식으로는 광고가 곧 마케팅인데도 그의 책꽂이에는 마케팅 책이 거의 없었다) 대학 때도 정말 신문사 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상식책 달달 외우는 게 너무 싫었죠. 스물 일곱 지식인으로서 내 자존이 허락하질 않았어요. 그래서 <안나카레리나>를 집어 들고 줄기차게 읽었죠. 같이 신문사 준비하던 친구들이 뭐라고 얘기하면 ‘(상식책) 그게 상식이냐? (안나카레리나) 이게 상식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때 내 고집은 당시로서는 의미 없는 하나의 점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의미가 있는 거죠.”
언젠가 별이 될지도 모를 점을 찍으며 산다는 것, 박웅현에게 그건 바로 자존(自尊)이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죠. 사람은 다 다릅니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과정이 있죠. 그래서 그 사람만의 정답이 있는 겁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자기 존중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젊은 친구들이 추상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진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박웅현은 허전하고 불안하고, 뒤 처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읽었고, 지금도 읽는다. “그렇게 읽었던 게 내 자양분이 됐던 것 같아요. 자양분을 계속 채워넣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힘이 약해지는 것 같죠.” 그가 자기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었던 자존유지의 방법 역시 바로 책이었던 것이다.
◇ 창의력은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
박웅현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주로 클래식으로 뽑는다. 그는 자신이 지난해 TBWA 신입사원 선발 때 출제한 문제지를 보여주었다.
‘제시된 것들에 대해 아는 바를 한 줄로 정리하고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세줄 이내로 정리하시오.’ 1) 아서 밀러 2) 마이클 샌델 3) 황지우 4) 병산서원 5)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6) 마뉴엘 푸익 7)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8) 브론테 자매 9)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0) G.I.F.T 11) 엘라 핏제랄드
“바탕에 충실한 친구를 뽑으려 해요. 바탕이란 건 바로 생각이죠. 토플 점수 몇 점 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싶다는 겁니다. 스펙은 포장에 불과합니다. 영화도 ‘해리포터 죽여요!’가 아니라 히치콕이 뭔지, 라쇼몽이 뭔지 알고 있나 그런 걸 보고 싶은 거죠. 생각의 기초체력이 있으면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카피 어떻게 쓸지는 훈련하면 됩니다. 마케팅 이론도 1년이면 다 가르칩니다.”
박웅현은 면접도 한 사람 당 1시간씩 카페에 앉아서 한다고 했다. 이력서 보고 질문 하는 식이 아니라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서로 물어보는 식이라고 했다. ‘사회가 만든 취업 매뉴얼대로 준비한 청년들에게 오히려 가혹한 게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TBWA같은 회사가 생기고, 또 생기면 기성세대가 잘못 만든 시스템도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현이 설명하는 창의력도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창의력은 스필오버(spillover, 차고 넘치는 것)가 돼야 나오는 것이지 스퀴즈아웃(squeeze out, 쥐어 짜는 것)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넣어야 합니다. 스폰지처럼 모든 색깔 잉크를 다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스필오버돼서 나오는 겁니다. 청년들이 취업하려면 뭔가 보여줘야 하니깐 포장하고 계속 짜내는데 그건 아닙니다. 30살까지 살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넣어야 합니다. 나중에 짤 기회가 와요. 스필오버하는 사람은 그 기회를 잡는 것이고 짜대기만 한 사람은 못 잡는 겁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등록금 벌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스펙도 채워야 하는 20대들은 박웅현에게 이렇게 하소연할지 모르겠다. “선배는 이미 성공의 최정상에 섰으니깐 덕담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루하루 불안에 쫓기는데 느긋하게 클래식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초조하고 불안할수록 그 시기를 얼마나 묵직하게 자존을 지키며 보낼 수 있냐가 성공의 관건임을 이미 성공한 박웅현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현수 기자 hyde@ 최우영 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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