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계 미국인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부터 6자녀를 각 분야 엘리트로 키워낸 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 고경주 미국 보건부 차관보, 김용 세계은행 총재, 강영우 전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 조선일보DB
지난달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 선임되면서 국내 학부모들 사이에 '글로벌 인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용 총재를 비롯해 얼마 전 작고한 강영우 전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그리고 형제지간인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고홍주 국무부 법률고문 등 한국계 미국인들이 그 관심대상이다.
'인재혁명'의 저자로, 한국 교육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실천전략을 제시해온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로부터 이들을 모델로 한 글로벌 인재론을 들었다. 그는 미시간공과대학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교수법의 권위자다. 조 교수는 "김용 등 한국계 미국인들의 눈부신 성공은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은 한국 부모의 교육열과 미국의 열린 교육시스템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만들어낸 결실"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우리 교육의 새로운 방향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글로벌인재, 가정교육이 만든다
조벽 교수는 글로벌 인재에게 필요한 세 가지는 '창의성' '전문성' '인성'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인성은 글로벌 인재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인성이 바탕이 돼야만 창의성과 전문성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성이란 도덕 혹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삶에 대한 열정, 모험심, 호기심, 자신감, 가치관 등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다. 조 교수는 그 전형적인 사례로 김용 총재를 꼽았다. 이는 김용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 과정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경제전문가가 아닌 그가 세계은행 총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비영리 의료봉사기구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세계보건기구와 공동으로 결핵과 에이즈 등 저개발국의 질병 퇴치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 온 삶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봉사와 헌신에 삶의 가치를 둔 인성 교육을 그가 '가정'에서 받고 자랐다는 점이다. "오늘의 나를 만든 가치는 아버님의 실용성과 어머니의 헌신하는 삶에 대한 강조"라고 했을 만큼 김용 부모의 가정교육은 철저히 인성을 토대로 이뤄졌다. 특히 어머니 전옥숙 씨는 미국에서 퇴계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로, 아들에게 늘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내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퇴계와 마틴 루터 킹을 가슴에 품고 자란 김용은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김용처럼 성공하진 않지요. 100명 중 1명에 불과할까요? 한국 부모 특유의 교육열로 많은 한국계 미국 학생이 고등학교까지는 각종 상을 휩쓸며 수재로 자라나지만, 대학에 들어가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 인성적 토대가 허약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열보다 교육의 방향이 중요
글로벌 인재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삶의 목표가 뚜렷했다는 점이다.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 고홍주 국무부 법률고문 등 6명의 자녀를 각계 엘리트로 키워낸 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는 "아이들에게 삶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열정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걸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기면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 실제로 장남인 고경주 차관보는 "어머니는 항상 우리에게 개인적인 성공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라고 했다. 내가 공중보건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잘 세운 보건정책 하나가 수백만, 수천만 명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벽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하지만, 교육열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열의 방향"이라고 지적한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려면 우주선을 받쳐주는 발사대 시스템, 로켓과 연료, 그리고 방향을 정하는 조정실이 필요한 것처럼 인재교육도 교육시스템, 교육열, 교육방향이 삼박자를 이뤄야 가능합니다."
조벽 교수는 또 글로벌인재들은 단지 IQ가 높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버드대 출신 학생들과 보스턴 빈민가 출신 젊은이들의 삶을 72년간 추적연구한 결과를 들려줬다. "단기적으로는 하버드생들이 훨씬 성공하지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가면 하버드생 그룹에서도 빈민층 그룹만큼이나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같은 실패자들이 나옵니다. 사고력·판단력·분석력 같은 인지적 능력 이상으로 가치·태도·감성을 다루는 정의적(情意的) 능력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지요."
개같이 공부하면 정승된다? '짐승' 된다
김용母 "1등보다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
큰 꿈 심어주며 풋볼·농구 마니아로 키워
백악관 입성 고경주·고홍주 형제母
"목숨 바칠 대상 찾아주면 알아서 공부해"
첫째도 둘째도 '인성교육'… IQ는 잊어라
하버드생 그룹·빈민층 그룹 삶 72년 추적
하버드생도 마약·알콜 중독자 분포 비슷해
지능보다 모험심·배려심 등이 인생 좌우
세상에 주려 공부할 때 성공도 찾아와
캘리포니아의 영재 1528명의 삶을 90년간 추적한 연구도 마찬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IQ가 145 이상 되는 영재 집단에서도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의 분포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IQ지수 위주로 디자인된 대중교육, 두뇌에 누가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교육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여실히 느끼게 하죠. 인간의 IQ란 지능의 아주 작은 부분, 수치로 보면 겨우 5%에 불과합니다. 당장 학교에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훨씬 복잡한 사회로 나와서는 정의적 영역, 감성적 영역에서의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긍정과 소통, 그리고 팀워크의 힘
시각장애인 박사로 유명한 강영우 전 차관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가난한 소년가장으로 장애를 딛고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낸 뒤 8년간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로 일한 그의 힘은 '긍정과 소통'에서 비롯됐다. 생전의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시각장애로 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그것 때문에 이룬 일도 많다. 시각장애 때문에 오히려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끈기가 생긴다"고 말했다.
강 박사 부부는 자식농사에도 성공했다. 장남 진석씨는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최고의 안과의사로 뽑혔고, 차남 진영씨는 백악관 최연소 특별보좌관(입법담당)이다. "부모와의 소통, 지식보다는 인성과 가치교육, 창의성과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자녀교육의 핵심이었다. 생전 모국을 방문해 리더십 강의를 했던 강영우 박사는 "21세기 지도자의 본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가 내세웠던 '3C형 인재'는 유명하다. 3C란,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commitment). "교육열이 뜨거운 한국의 부모들은 이 중에서 자녀의 실력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던 그는, "이 세상에 주기 위해 공부할 때 자기의 성공도 찾아온다"고 했다.
조벽 교수는 "21세기는 머릿속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체험에 의해 얼마만큼 몸에 녹아내렸는가가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이 또한 인성과 관련돼 있다. "세상에는 혼자 잘나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양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전문가가 함께 모여 팀워크를 이뤄야 하는 세상이죠. 노벨상에 공동수상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의 성공은 그들만큼이나 훌륭했던 파트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아무도 나와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으면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짐승'된다
현재 한국 학생들의 인성 수준은 거의 바닥. PISA에서 수학과 과학은 1·2위를 다투지만 IEA의 국제시민의식 교육연구 조사(2009)에서는 36개국 중 사회성 35위, 협력성 36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조 교수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려면 '누가 더 똑똑한가', '더 많이 아는가'를 필터처럼 가려내는 우리 초·중·고 교과과정이 전면 쇄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답 지상주의'다. "한국 학생들은 대학입시준비 과정에서 약 100만개의 문제를 풀어본다고 합니다. 더 큰 걱정은 100만개의 문제에 죄다 정답이 있다는 거죠. 실패에 대한 공포와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닫힌 마음이 문제에요. 교과서적인 지식을 토대로 정답 신봉자를 키우는 교육에서 창의력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교육의 다양성 부재도 걸림돌이다. '교육=공부=국·영·수·사·과'라는 편견이 지배적. 조벽 교수는 "우리가 하는 공부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스포츠, 예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학교공부를 확대시켜야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 실제로 김용 총재는 스포츠 마니아였다. 풋볼팀에선 쿼터백으로, 농구팀에선 포워드로 맹활약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김용 총재로 인해 이른바 '타이거 맘'으로 불리는 아시아계 극성 부모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조벽 교수는 인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인재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사와 부모들이 '어른십(ship)'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인성을 강조해온 나라입니다. 지혜와 아량, 신뢰가 있는 어른들이 많아져야 가정과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인성과 학습이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호기심, 모험심, 배려심 등을 키우는 교육은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킵니다. 학교폭력도 사라지게 합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정승 된다고요? 짐승이 될 뿐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4/20120504014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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