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그러면 그렇지’. 삼성전자와 애플 간 디자인특허 소송에서 미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북부지방법원 배심원단이 일방적으로 애플 편을 든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게 변함 없는 ‘미국 스타일’이라서다. 경제전쟁에 임하는 미국인의 태도는 언제나 그랬다. 미국이 경쟁우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 악이라는 것.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디자인특허 침해 소송을 냈을 때, 약 30년 전 미국과 일본 간에 벌어졌던 반도체 전쟁이 떠올랐었다. 이는 국가 간 산업전쟁의 효시였고, 이후 미·일 간 무역분쟁은 마구 확전됐다. 이 전쟁은 반도체 불황이 닥쳤던 1985년 미 반도체업체들 모임인 SIA가 미 무역대표부(USTR)에 “일본 반도체 메이커의 불공정 행위로 미 업체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잇따라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일본의 반도체 메이커들을 상대로 ‘약탈적’ 방법으로 가격덤핑을 했다며 고소했고, 인텔·AMD·내셔널세미컨덕터 등이 일본산 메모리 EP롬에 대해 반덤핑 제소를 하는 등 파상공세를 펼쳤다.
이듬해 미국 상무부는 일본 반도체에 불문곡직하고 21.7~188%의 덤핑마진을 부과했고, 일본은 미·일 반도체협정에 서명한다. 일본 시장에서 미국 반도체 점유율 20%를 보장한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20%가 안 되자 미 상원이 일본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잇따라 무서운 관세보복이 이루어져 엉뚱한 일본산 TV에 보복관세 100%가 부과되기도 했다. 이 공방은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반도체 전쟁을 전후로 미국엔 반일 서적들이 넘쳤고,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 공동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70%가 ‘미국 정부가 당장 손쓰지 않으면 일본이 미국을 사버릴 것’이라고 답해 현지 언론들도 맹목적 애국주의인 ‘신 외국인 기피증’을 우려했다. 이때 개발된 ‘반덤핑·보복 관세’ 모델은 다른 무역전에도 그대로 적용돼 우리 기업들도 누차 당했다. 이번엔 대상이 한국 기업으로 바뀌고, 구형무기(반덤핑) 대신 한층 강화된 ‘특허’라는 신무기가 투입됐을 뿐, 양상은 똑같다.
그런데 치열했던 미·일 반도체 전쟁의 최종 승자는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었다. 미국에선 인텔이 메모리를 포기하는 등 업체들이 속속 메모리에서 철수했고, 지친 일본 반도체 업계는 지리멸렬해졌다. 그 사이 한국 업체들은 혁신을 거듭해 이 시장의 패자(覇者)가 된다.
옛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진진(陳陣)이 한(韓)과 위(魏)의 전쟁이 1년 이상 계속되자 혜왕에게 “큰 호랑이와 작은 호랑이가 싸우면 작은 호랑이는 물려 죽고 큰 호랑이는 상처를 입을 테니 그때 기진한 큰 호랑이만 잡으면 양국을 멸할 수 있다”고 간했던 일은 그저 옛말이 아니다.
최근 모바일 시장을 ‘삼국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번 애플 평결 결과를 ‘죽은 제갈공명(스티브 잡스)이 산 사마중달을 이겼다’는 고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데 그 후 촉(蜀)은 어떻게 되었던가. 공명을 계승한 강유는 위(魏)를 상대로 아홉 번이나 ‘삽질’만 했고, 촉 조정은 음평절벽에서 몸을 굴려 성도(成都)로 질러 간 말더듬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의 북소리에 미친 듯이 무기를 내리고 투항하지 않았던가.
나라를 세우는 일과 지키는 일은 다르다. 미국은 근대 이후 혁신적인 제품은 거의 다 내놨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창의적인 ‘나라’들을 세웠다. 그런데 수성(守城)기술이 축성(築城)기술을 못 따라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혁신을 거듭하고 시장에 민감한 제품으로 시장을 장악했다면, 어떻게 후발주자들이 그 시장을 넘봤겠는가. 그런데 반도체도 자동차도 어느 순간 혁신을 멈추고, 제품은 지리멸렬해져 소비자가 외면했다. 그래, 경쟁자를 탓하고 저주해서 시장이 회복되었던가?
‘혁신을 멈춘 애플이 미국인의 애국심에 호소한 특허 공세로 다시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한 외지가 지적한 대목이다. 미국 스타일의 응전 방식, 시장 전략에 대한 반성이나 혁신은 외면한 채 경쟁자를 공격하고 상처 내며 지칠 때까지 기운을 빼 피아(彼我)가 공멸하는 역사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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