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 있느냐 없느냐 따라 아이들 꿈과 미래 좌우된다면 사회는 국가는 왜 있는가
남매는 할머니와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은 사업 실패 뒤 도피생활을 하다 연락이 두절된 지 10년이 넘었다. 가족의 수입은 할머니가 받는 지원금 70만원뿐이다. 호적상 근로능력이 있는 부모를 둔 남매는 지원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복지기관을 통해 후원자를 만나면서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어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웃는 모습이 예쁜 다섯살 주연이는 희귀병에 걸렸다. 보험혜택 하나 받을 수 없고 치료비는 이미 부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아이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고 있는 것은 주연이가 출연한 방송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고 있는 후원자들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아이들, 몸이 아픈 아이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는 사람들 또한 많이 있다. 아직은 살 만한 세상, 따뜻한 세상이란 말과 함께 이 안타깝고도 가슴 따뜻한 이야기는 끝없이 지속된다. 매주 방영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고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특히 어린이날, 가정의 달이 되면 방송사와 언론사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마음 따뜻한 후원자를 찾아 나선다.
아이들을 돕는 후원자들에게는 ‘천사’라는 호칭이 부여된다. 천사들은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지원 여부를 심사하는 정부 대신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주고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의료비를 주고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아이들에게 희망도 준다. 불쌍한 아이들과 천사를 찾아 연결하는 일은 사회복지기관의 몫이다. 마치 매치메이커처럼 서로를 연결한다.
천사들만 있어 준다면 아픈 아이들, 돈이 필요한 아이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모두 지켜줄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천사를 만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아직 후원자를 만나지 못한 아이, 모금 방송에 출연할 용기를 내지 못해 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 수많은 사연의 아이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갑작스런 정리해고 등 천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사연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도 존재한다. 이 아이들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행운을 기다려야만 한다.
천사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아이들의 생명이, 아이들의 꿈이,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면 과연 이것이 가슴 따뜻한 이야기일까? 아이가 아플 때 내 이웃과 내 나라에 의지하고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언론에 나가 눈물 흘려야 하고 가장 아프고 가장 불쌍해져야 많은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나라라면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나라일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사가 아니다. 조건 없이 생명을 지켜주는 나라, 차별 없이 교육시켜주는 나라, 아프고 가난하다고 티브이에 나가 눈물 흘리지 않아도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나라, 아이들을 위한 국가가 필요하다.
정부는 우리나라는 이미 복지국가라며 사상 최대 복지예산을 쓰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거나 조건 없이 생계를 지원하면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복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계 역시 누가 누가 더 가난한지 고르고 누가 누가 더 착한지 찾아내는 역할을 하며 현재와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언론 역시 아이들을 위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대책을 논의하고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그려보는 것보다는 시즌성 이슈 만들기에 연연하고 있다.
다가오는 어린이날과 가정의 달에는 더이상 아이들이 눈물 흘리며 천사를 찾지 않기를 기대한다. 정부와 사회복지계, 언론이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늘 해오던 대로 하는 대신 변화를 시도해보기를 기대한다. 천사들의 선행에 아이들의 생명과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안전망이자 울타리인 국가가 아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리고 걱정한 이 땅의 모든 천사들이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이선영 서울시 중구 무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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