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0. 15:18
이젠 진짜 롤모델이다.

존 우드는 한때 나의 롤 모델이자  내가 '그래! 나도 존 우드처럼 세상을 바꾸겠어'라고 외치며 1년 동안 국제개발 분야를 뛰어다니도록 만든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히말랴야 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원서는 제목이 leaving Microsoft to change the world 인가보다.

제목에서 말하듯이 존우드는 MS를 다니다가 나왔다. 그냥 MS 직원이 아니라 빌게이츠의 오른팔 스티브 발머의 오른팔(?)이었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FYI 스티브 발머는 엑셀프로그램 만든 개발자.


네팔. 정말 열악하다.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때문에 발전할 수 없는 땅이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관광으로 먹고 사는 네팔을 찾는 사람들 일 년에 5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관광객 대부분은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똑같은 코스를 오르는데 그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사탕, 초콜렛을 주고, 돈을 쥐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관광객만 보면 'sweet, sweet' or "1 달러, 1달러" 하면서 달려든다.

양치를 못하는 환경에서 오히려 충치를 키운다며, 관광객에 지나친 의존도를 키운다며 입산 부터 절대 돈과 사탕을 주지말고 만약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으면 치약, 칫솔, 학용품을 주길 권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마음 때문에 줘버리니깐 부모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 교육시키기 보다는 앵벌이를 시키거나, 단 것만 먹어 이가 썩는 등의 부작용이 계속해서 나타나 버린다.


그런데 존 우드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수만명이 똑같은 코스를 올랐지만 존 우드만이 그 곳을 실질적으로 바꾸려고 결심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나오고, 비결은 실행력+ 인적 네트워크.






처음 존 우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을때는 나도 들떠서 아시아 빈곤 퇴치를 위해 힘쓰겠어라는 마음을 먹었지만 

나는 아마도 존 우드처럼 숭고한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존우드는 나의 롤모델이고, 나는 존 우드 같은 선진국형 인간이 되고 싶다.


좋은 나라에 태어나서 세계에서 충분히 경쟁력 있는 자국 대학 졸업해서 상대적으로 쉽게 다국적기업에 취직해서 세계를 출장을 다니고 주말엔 가족들과 보트를 끌고 다니고 와인 테이스팅을 취미로 가진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실행하는 인간 말이다. 



2010년  미 뉴스위크지에서 한국을 베스트 국가 15위로 꼽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있다. 질문이 멋있어서 메모해둔 기산데


'지금 이 순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면 건강하고 안전하며 적당히 부유하고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삶을 영위할 기회가 많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


(솔직한 심정으로 한국인의 경쟁심리에 내 앞에 14개의 나라나 더 있어? G7 갈려면 멀었네. 라는 생각이 먼저란건 부인하지 않겠다)


그래도 나는 200개가 넘는 나라 가운데 15 번째로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건강하고, 안전하고, 적당히 부유하고, 내 노력의 여하에 따라 신분상승이 가능한 삶을 살 기회를 받았다. 게다가 인터넷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중요하다!) 온갖 신기술의 베타테스트장에 되는 곳에 살고 있다. 특히나 교육 부문에서는 세계 2위라고 하니 내가 받은 교육은 우주최강라는 뜻 아닌가(도대체 기준이 뭘까-_-)



맞다. 나도 존 우드처럼 살아야한다. 


이름 있는 연봉 높은 직장에 취직해서 좋은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삶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동안은 나만 잘 살고, 내 민족만 잘 살고, 내 나라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방법을 찾고, 
실제로 실행하면서 내가 받은 행운을 세계에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것이 내가 얻은 행운을 갚는 방법이다. 

안그러면 나는 다음 생엔 이상한 걸로 태어날지도 모르잖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공부할거다.

그리고 다음에 꼭 그 일을 실행한거다.



선진국형 인간으로 살기.




+) 여행한 후 깨달은 생각은 나라마다 너무나 생각, 문화, 현실이 다르므로 최빈국을 제외하곤 원조보단

'기업가 정신'을 키워주는 교육을 하는게 어떨까. 뜬금없이 창업강의하는것도 웃기지만 자신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하면서 아이템을 찾고, 그걸 만들 창의력말이다.


Posted by 겟업
2012. 8. 17. 20:56

사실 나는 오바마에 대해 잘 모른다.

 

현존하는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그를 처음 봤을때 나는 그렇게 선해보이는 정치인을 처음 봤고.

컬럼비아-하버드 로스쿨 출신, 하버드 크림슨 흑인 최초 편집장 출신아라는 스펙.

전세계에 오바마 열풍을 몰고와 한때 서점가와 언론에 오바마 스피치, 오바마 스타일이 유행했던 것.





 

그런데 내가 오바마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은 당선 후 들었던 한토막의 뉴스 덕분이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되던 날 나는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mp3를 통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미국 특파원은 미국의 축제분위기를 전하면서 뉴욕의 흑인 커뮤니티에 가서  한 흑인을 인터뷰를 했다.

그 흑인이 말한 내용은 대략 이랬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때 항상 말씀하셨죠. 너는 앞으로 열심히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심지어 대통령도 할 수 있을거야. 하지만 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흑인 중엔 아무도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없으니깐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 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너는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제 아들은 믿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깐요."

 

 

그 후로 내 삶의 프레임이 참 많이 바뀌었다.


그 전엔 자국민은 천대하던 정책에 반대했고,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이 땅에 살려는 사람들에겐 2배, 3배 엄격한 잣대를 적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필리핀 결혼이주여성의 국회 진출, 외국인 국가대표축구팀 선발 논란 등의 문제에 있어서 한국인 경쟁자보다 2~3배 쯤은 뛰어나야만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바마 덕분에 꿈을 꿀 수 있는 흑인 사회 아이들을 보니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력만 있다면 그 자리에 반대 여론를 무릅쓰고라도 외국인을 앉히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의 자녀와 친구들 수백 ,수천명의 어린이들도 함께 꿈을 꿀 수 있을테니깐. 그러면 한민족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나와서 대한민국에 분명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롤모델은 꿈을 심어준다.

오바마가 미국에 뿌린 희망의 메시지는 얼마나 많은 미국의 흑인어린이들이 꿈을 꾸게 만들까.

그래서 나는 진심 앞으로 미국이 더 무섭다.


 

Posted by 겟업
2012. 8. 17. 20:35

"이효리씨 아시죠?"

"이름이 이상하네요..."

 

라고 대답해 국민요정 이효리에게 굴욕을 안긴 안철수 교수님 같은 극소수를 빼곤 아마 대한민국에서 이효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우상만 13498172 명이라 미어터지는 나의 우상 신전에서 누구를 가장 처음으로 선택해야할지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보다 내 관점을 가장 크게 많이 바꾼 인물 '이효리'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TV를 안보고 살아서 흔한 유행어도 모르는 내가

2000년도 이후 발매된 음악이면 다 최신곡이지 이런 소리하는 내가

연예인의 무식함이 싫어 퀴즈와 다큐멘터리를 선호하는 내가


이효리가 나의 첫번째 스승(?)이라고 말한다면 안 어울릴만도 하다....


사실 나는 '본성 불변의 불칙'을 믿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 약간은 유해질수 있지만 나도, 남도 본성은 바뀌지 않을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나에게 이효리는 인간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언니 예뻐요




 

 

10년 전 대한민국은 이효리에 열광했다. 이효리가 입고 나온 옷은 어김없이 다음날 인터넷쇼핑몰과 동대문시장에 효리st. 로 출시되었고, 스포츠신문사엔 이효리 전담반까지 생겼고, 당시 인기있던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님을 감히(?) 강효리라고 부를만큼 대한민국은 효리왕국으로 변했다  (서태지, H.O.T. 이효리 이렇게 대한민국 3대 신드롬이라던가? )


효리 신드롬 속에서 내가 이효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된 계기는 'off the record:이효리'라는 케이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말그대로 톱스타 이효리의 일상을 밀착취재한 프로그램이었고 프로그램은 이효리의 화려함과 고충을 여과없이 보여주고자 노력했고 인기도 상당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그 당시 이효리 말 한마디는 곧 다음 날 스포츠 기사 1면이었지...). 프로그램을 본지는 꽤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당시 내가 기억하던 이효리는 와 어쩜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이 잘난 것을 알고 당시 조용한 아이돌들과 달리 자신의 성격을 방송에 과감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였다. (이 언니는 젖소 천마리 내 것이 되는 시간이 just 10 minutes 이라잖아. 이건 알프스 목동의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해.)

자칫 거만하다고 비춰질 수 있었지만 요정출신 걸그룹에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솔직함과 톱스타답지 않은 털털함에 오히려 사람들은 반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겸손했다면 오히려 그 당시 이효리의 이미지를 갉아먹을 정도로 느껴졌달까? 

그 당당함 + 털털함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톱스타 이효리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인기라는건 역시나 화무십일홍, 그 후로 몇 년간  나도  TV없는 생활이 지속되고, 이효리도 점점 잊혀져갔다. 

간간히 앨범 발표때마다 노래는 없고 섹시함만 있다고 질타를 받았고, 대담하게 연기에 도전했다가 발연기 혹평을 받았고

표절, 고소 등등 안 좋은 소리가 나오면서 톱스타 타이틀을 빼앗기진 않았지만 상당히 큰 타격을 받았다.

 

 

 

 


내가 다시 이효리를 만난 것은 힐링캠프였다.


이번에 이효리는 10년 전과 다르게 너무나도 달라져있었다.

당당함은 간직하면서 겸손함을 더했고 자신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쓰기위해 사회 참여를 하는 소셜테이너로 변해있었다.


자신도 인정하듯 여전히 부족하지만 성장 중이다. 

수많은 걸그룹 여자들이 덤프트럭의 시멘트처럼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건 더 성장할 그녀의 10 년 후 모습을 더 기대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친딸처럼, 언니처럼, 조카처럼 쭉 지켜봐주세요"라는 

끝인사를 남긴 그녀를 보고 있으니 앞으로 10년은 더 건재할 것 같다.



"지금 내가 기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제가 쓰고 넘치는 것만 기부하고 있다. 나는 내가 쓸 것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효리 멋져요가 아니라 지금부터다)



그 후로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때 싸가지 없던 그 친구는 여전히 싸가지 없을 것' 이라고 단정짓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왜냐고?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깐. 

그래서 나 역시도 내 성격에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눈에 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걸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고?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깐.

게다가 이 바쁜 현대사회에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보이는 내 장점만 극대화하기도 바쁜데 

단점까지 개선하면 얼마나 비효율적냐는 자기합리화를 고수하면서 살아왔다.


이효리를 보고 저렇게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이효리도 변하는데 나라고 못 변하랴. 

다짐했고 매번 저지르고 넘기던 실수도 기록하고 곱씹으면서 내 단점을 고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한가지 더 있다. 

이효리 덕분에 인간이 참 재밌어졌다. 인간을 더 알고 싶어졌고, 인간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지더라.


이모든게 다 이효리 덕분이다.



이정도면 내 인생에서 이효리는 참 괜찮은 사람이지 않은가?


Posted by 겟업
2012. 8. 16. 18:07

시련을 이겨낸 100년을 지나… 새 100년을 이끄는 힘"한국인이 자랑스러워요" 88올림픽 전후로 탄생 글로벌 경쟁력으로 무장 맑고 밝고 낙관적인 세대'경술국치' 100년만에 "우린 뭐든지 할 수있다" 긍정의 힘으로 변화 주도자신감 충만한 G세대, '한국사회 신뢰도'를 처음으로 긍정 평가금기·좌절없이 커온 차세대 20대(代) 초반 사회 첫 발걸음 "한국국력 어느 정도냐"엔 20%가 "곧 세계5위권 진입"


하버드대 졸업생 이준석(25)씨는 2003년 서울과학고를 졸업한 뒤 대통령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건너가 컴퓨터공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병역특례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 근무하면서 3년째 자투리 시간을 쪼개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배나사)'이라는 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다. 국내외 명문대 재학생 300여명이 소외계층 중학생 200여명에게 공짜로 수학·과학 과외를 해주는 모임이다.그는 2007년 5월 서울과학고 동창생 10여명과 함께 배나사를 만들었다. 블로그 등을 통해 입소문 나면서 컬럼비아대·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국내외 대학 학생들이 "나도 시간을 내겠다"는 이메일과 인터넷 쪽지를 속속 보내왔다.이씨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골라 우리 또래에 알맞은 방식으로 해왔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또래 젊은이들을 "걱정이 줄어든 세대, 하고 싶은 일이 많고 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춘 세대"라고 정의했다."우리 또래는 의식주 걱정 크게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랐어요. 영어와 컴퓨터에 익숙하고 상상력과 창조력이 뛰어나요. 부모님 세대는 '고생 모르고 자라 시련에 약하다'고 걱정하시지만 안심하셔도 될 거예요. 한국의 미래요? 더 많이 발전하고, 위상도 높아질 겁니다. 우린 경쟁력 있어요.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에 태어나 한국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항진한 2000년대에 성장한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한 해 63만~70만명씩 속속 성년에 접어들면서 지난 100년간 고단하게 전진해온 한국사회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1910년 경술국치 후 한국은 망국의 폐허에 부강한 국가를 건설했다.그 결과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성장해 'G20 의장국 대한민국'에서 20대가 된 이들이 바로 'G세대 한국인'이다. 


지나간 100년(1910~2009년)이 망국을 극복하는 세월이었다면, 다가올 100년은 당당한 선진국으로 세계를 앞서나갈 세월이다. G세대는 집단적 가난을 체험하지 않은 첫 세대다. 압축성장 시대, 민주화 운동 시대를 몸으로 겪는 대신 교과서로 배웠다. 절반 이상이 20대 초반까지 최소한 한 번 이상 해외에 나갔고 수만명이 조기유학·단기연수 등을 통해 밀도 있게 글로벌 사회를 경험했다.  윗세대와 확연히 다른 G세대의 특징으로 전문가들은 '자신감'을 꼽았다. 연세대 생명공학과 정형일 교수는 "강대국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고 어떤 분야에서든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했다.G세대의 또 다른 특징은 '한국사회에 대한 신뢰'다. 본지 특별취재팀은 한국리서치를 통해 전국의 만20~24세 남녀 505명에게 "우리 사회가 매우 믿을 수 없다면 1점, 매우 믿을 수 있다면 10점을 줄 경우 당신은 몇 점을 주겠는가"라고 물었다.고려대 이명진 교수가 2004년 386세대(1960~69년생), 탈냉전세대(1970~78년생), 월드컵세대(1979~85년생) 1000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응답자들은 각각 4.1점(386세대), 4.4점(탈냉전세대), 4.7점(월드컵세대)을 매겼다. 어린 세대로 갈수록 한국사회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지만 전반적으로는 모든 세대가 부정적 평가에 머물렀다.이와 달리 G세대 응답자들은 한국사회에 5점을 줬다. 한국사회가 자기부정의 에너지를 동력 삼아 전진하는 사회에서 자기긍정의 에너지가 충만한 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이 교수는 "집단적 빈곤과 독재를 경험한 베이비붐 세대·386세대와 달리 G세대는 전반적으로 룰(rule)이 확립된 사회에서 성장했다"며 "이들은 더이상 한국사회를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G세대의 긍정적인 국가관은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도 잘 나타났다. 응답자 다섯 명 중 세 명(60%·489명 중 303명)이 발전·성장·민주화·기적·불굴·전진·격동 등 한국 현대사의 성취와 변화에 주목하는 낱말을 골랐다. '빛 좋은 개살구' '절망' 등 부정적인 낱말을 택한 응답자(18.2%·92명)는 적었다."'한국인이라서 자랑스럽다'는 말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G세대 응답자 과반수(53.3%)가 '동의한다'고 했다. '그저 그렇다'는 사람은 36%,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10.7%에 그쳤다. 한국이 자랑스러운 이유로는 ▲2002년 월드컵(78명) ▲스포츠 강국(39명) ▲국민의 단합(37명) ▲정감있는 국민(33명) ▲외국이 한국을 인정할 때(26명) ▲경제발전(25명) ▲IT강국(25명) 등을 꼽았다."한국을 부끄럽게 느낀 적이 있다면 언제 왜 그랬느냐"고 묻자 "한국인이 외국에서 예절과 공중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봤을 때"(94명)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강대국에 불리하게 당할 때"라는 응답, 다시 말해 실제로 우리 국력이 약해 서러웠다는 응답은 32명에 그쳤다. 오히려 "한국이 약소국을 차별할 때"라는 응답, 요컨대 한국이 '강자의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응답이 18명이나 됐다.


G세대의 자기긍정은 앞날에 대한 낙관으로 이어졌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했을 때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에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G세대 응답자들은 20위권(40.4%), 30위권(19.8%), 10위권(18.6%) 순으로 대답했다. "같은 기준으로 따졌을 때 미래의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을 것으로 보느냐"고 묻자 10위권(36.3%), 5위권(19.8%), 20위권(17.6%) 순으로 대답했다.베이비붐 세대인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한경구(54) 교수는 "윗세대와 G세대 사이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며 "윗세대는 '지구는 넓고 외국은 멀다'고 느끼며 살아왔지만 G세대는 '지구는 좁고 외국은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윤정로(56) 교수는 "금기와 좌절이 많던 윗세대와 달리 G세대는 '뭘 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어디서든 어떻게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했다.일본 NHK방송의 기무라 요이치로 특파원은 "G세대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부유한 나라가 된 한국만 경험했다"며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한국인과 대화하는 것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는 G세대를 보면서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태어난 일본의 '신인류'를 떠올린다고 했다. 그들도 패전의 기억 없이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만 알고 자랐다. G세대 한국인은 대한민국이 100년 걸려 키워낸 구김살 없는 차세대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다. 혹 그들도 일본의 신인류처럼 '개인'의 행복에만 침잠하는 건 아닐까.


G세대 한국인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태어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2000년대에 글로벌마인드(global mind)를 갖추고 자랐다. 'G20 의장국 대한민국'에서 어른이 된다. 88~91년생(10학번 새내기)으로 좁혀 잡으면 263만명, 86~91년생으로 넓혀 잡으면 389만명이다. 

Posted by 겟업
2012. 8. 15. 23:20

최근 한일 관계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이 연기되는 등 급랭한 데 대해 일부 일본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가 친중(親中)적으로 변화한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독도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는 주기적으로 냉·온탕을 거듭해왔지만 이번 GSOMIA 연기는 과거와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GSOMIA 반대론에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발전, 중국 포위망을 형성할 수 있다는 우려가 포함된 점에 주목하고 있다. GSOMIA 반대의 명분은 '반일(反日)'이지만, 본질은 '친중(親中)·탈미(脫美)'라는 것이다. 한국 국방부가 중국과 GSOMIA와 유사한 군사협정 추진계획을 밝힌 것과 관련, 한 전문가는 "한국 정부까지 중국 눈치를 노골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한국의 중국관은 실용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 경제적으로 최대 교역국이며 북한에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밖에 없다. 중국을 자극해서 경제적으로도, 남북한 관계에도 도움이 될 게 없다는 논리이다. 일부에서는 몰락하는 명(明)나라에 편중된 외교를 펴다가 청(淸)나라의 침략을 자초했던 조선시대의 '삼전도의 굴욕'까지 들먹이며 친중외교를 강조한다. 제주해군기지 반대론자들도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에 동참,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편다. '떠오르는 태양' 중국과 '지는 태양' 미국 사이에서 무엇이 국익(國益)인가 하는 질문도 던진다. '연미화중(聯美和中)'이니 '연미연중(聯美聯中)'이니 하는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이 결코 떠오르는 태양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중국이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공산당 독재라는 본질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심지어 방위백서에서 중국이 빈부격차·소수민족·인권문제 등으로 사회불안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를 외부에서 해소하기 위해 극단적 민족주의와 군사적 모험주의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군사대국화, 동·남중국해 진출 강화가 그 전조(前兆)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일 등이 군사·경제 협력을 강화, 중국을 국제사회의 규범을 지키는 국가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10년째 중국 붕괴론이 나오지만, 이제는 중국 붕괴론이 붕괴할 때가 됐다"는 주장을 펴는 전문가도 있다.

한국은 중국의 장래에 대해 일본과 달리 낙관적이다. 단기간에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달성한 우리의 성공 체험처럼 중국도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낙관론의 배경에는 중국이 극단적인 경제 침체나 사회 혼란에 빠질 경우 초래될 한국 경제의 타격이나 한반도 정세 격변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또 최악의 시나리오를 배제하고 좋은 것만 상상하고 싶어하는 심리도 작용한다.

하지만 한국도 동북공정 등 역사 왜곡, 이어도 분쟁, 탈북자 강제송환, 대북활동가 고문(拷問) 등 중국과의 갈등 요소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도 '중국 리스크'를 관리해야 할 선택의 순간이 임박하고 있다. 적당한 눈치 보기와 현실 외면은 올바른 생존전략도, 국익(國益)도 아니다.



차학방 도쿄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0/20120810026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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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19

프랑스의 유명 파티시에(제빵제과사) 피에르 에르메씨는 서양과자 마카롱의 맛과 멋을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려 부와 명예를 얻은 인물이다. 런던·도쿄·두바이에 분점이 있어 출장이 잦지만 주말만큼은 철저히 가족과 함께 지낸다. 며칠 전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가 그의 주말 일과를 소개했다. 토요일 오전엔 중학생 딸, 아내와 함께 거리 장터에 가서 유기농 채소와 생선을 직접 사고,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는다. 토요일 오후의 주된 일정은 미술관 나들이다. 일요일 오전엔 집 근처 수영장에서 딸은 수영을, 부부는 사우나를 즐긴다. 일요일 저녁엔 집에 부부동반으로 손님을 초대해 자신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수다를 떤다….

서울 사람들의 주말 풍경은 어떤가. 강남에 사는 대기업 임원 A씨는 몇 달째 토요일에도 출근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매출이 떨어지면서 회사가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여가가 없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피서철인 요즘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의 교통체증은 평소보다 더 심하다. 중·고등학생 학원 수강생을 실은 차량 행렬이 수도권 각지에서 몰려와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재정 위기 탓에 유럽 경제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는 있지만, 개인의 삶의 질로 보면 유럽은 여전히 지구촌 최고의 생활 선진국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미국인들에 비해 '덜 일하고 많이 노는' 유럽식 사회경제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유럽인들은 해고가 자유롭고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미국인들보다는 자기네 삶의 질이 더 낫다고 본다. 유럽인들이 유럽식 사회경제 모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경제학자들이 약점으로 꼽는 바로 그 근로시간이다. 미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1681시간(2011년 기준)인 반면 프랑스·독일 근로자의 근로시간은 1400시간대에 그친다.

유럽인들은 일에서 자유로운 시간에 집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이것저것 직접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가사노동과 보육활동이 생산하는 부가가치는 GDP(국내총생산)엔 반영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GDP라는 지표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스티글리츠 교수에게 의뢰해 '행복 GDP' 개념을 새로 만들어냈을까.

유럽인들이 주말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요인은 뭘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적게 일하고도 많은 수익을 뽑아내는 고(高)부가가치형 노동에 그 비결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예로 든 피에르 에르메씨는 1개당 3000원을 웃도는 최고급 과자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유럽산 패션 명품은 원가(原價) 대비 수천 배의 가격표가 붙지만 불티나게 팔리고, 독일산 최고급 승용차는 전 세계 부유층의 필수품이 됐다. 이런 고부가가치 제품 덕에 독일 근로자의 시간당 임금은 37달러로 미국 근로자(24달러)의 1.5배에 달한다.

민주당 손학규 대선 후보가 내세운 '저녁이 있는 삶'은 정치 구호로는 매력적이지만, 경제적으로 이를 구현하자면 사회경제 모델을 바꾸는 수준의 고강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홍수 경제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9/20120809031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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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18

11일 오전 내내 올림픽 축구 한일전의 짜릿한 여운이 가시지 않아 도쿄(東京) 특파원 시절 앨범을 꺼내 봤다.

2008년 봄, 필자는 도쿄한국학교(한국 기업의 도쿄 주재원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 3학년생이던 아들을 따라 도쿄 국립축구경기장에 갔다. 홍명보 감독이 일본의 축구 스타와 함께 도쿄한국학교와 일본 초등학교의 축구부원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쳐주고 이야기도 나누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선수 풀’의 차이가 크다고는 하지만 양국 초등학생들의 실력차는 민망할 정도였다. 유치원 시절부터 철저하게 기본기를 다지는 일본식 교육과, 기초는 대충 건너뛰고 다짜고짜 실전연습과 선행(先行)에 들어가는 한국식 교육이 빚어낸 차이가 여실히 보였다. 나중 일이지만 일본의 한 초등학교를 상대로 한 축구경기에서 도쿄한국학교가 0 대 13으로 지는 것을 보면서도 필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들이 수영을 배울 때도 비슷했다. 일본에서는 6개월 내내 물에 뜨는 연습만 시키는 바람에 팔 한 번 저어보지 못했는데, 한국에서는 6개월 만에 평영 자유형 배영은 물론이고 접영까지 배워왔다. 일본에서 2년 반 동안 피아노를 배우면서 체르니는 근처에도 못 가고 바이엘만 쳤다는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한국 부모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양국 교육문화의 차이는 기업 경쟁력과도 관계가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산업구조의 변화는 완만했다. 기업의 경쟁력은 결함을 줄인 제품을 얼마나 균일하게 생산해내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개인 간 편차를 최소화하면서 평균치를 끌어올리는 데 강점이 있는 일본식 교육의 힘은 생산관리를 산업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도요타 방식’이 그것이다. 이런 패러다임 아래서 한국이 경제로 일본을 앞서나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천재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되면서 사정은 변했다. 일본에 비해 영재·엘리트 교육에 상대적 강점이 있는 한국의 교육시스템과 거기에서 길러진 인재들의 경쟁력이 나름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김연아 박태환이 나온 것도 그렇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을 거듭 칭찬하는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을 압도하는 한국 기업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창의성과 속도가 중요한 전자나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한국의 일본 추월론’이 본격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은 6월 말 한류 관련 포럼에서 “(한국이) 일본 경제를 앞지르는 일도 최소 5년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확언했다. 또 일본 경단련(한국의 전경련에 해당) 산하 21세기정책연구소는 203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고 4월 전망했다.

한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양국 드라마산업을 한번 비교해 보자. 제작사들의 자금력이나 원작의 질과 양 등에서 한국은 일본에 크게 뒤처진다. 일본은 완전한 사전 제작을 통해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를 만들지만 한국은 ‘쪽 대본과 초치기 촬영’이 체질화돼 있어 ‘완성도’라는 용어를 꺼내기조차 무색하다. 그런데도 국제무대에서 일본 드라마가 한국 드라마 앞에 명함도 못 내미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빙산 아래 감춰진 일본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아는 필자는 솔직히 말해 일본이 두렵다. 하지만 필자가 만약 일본인이었다면 한국에 대해 느끼는 무섬증은 더 컸을 것 같다. ‘겨울연가’, ‘대장금’, 김연아, 박태환, 쏘나타, 갤럭시S, 소녀시대 그리고 일본 선수 4명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헤집고 다니는 박주영을 보면서….




천광암 경제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20812/48585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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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17

전 세계 203개국이 참여한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런던 올림픽이 12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한국팀이 금메달 13개, 종합순위 5위로 선전하면서 올림픽 기간 내내 신문·방송·인터넷 등에서 열기가 뜨거웠다. 런던 올림픽과 연계한 전 세계 기업들의 활동 역시 두드러졌다. 음료·패스트푸드·신용카드 등 많은 기업이 스폰서로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IT·통신·방송 관련 기업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제는 방송과 통신 미디어가 융합돼 지구촌 사람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올림픽 중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최초로 라디오 중계가 도입됐고 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첫 TV 중계가 이뤄졌다. 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통신위성을 이용한 국제 중계방송이 시도됐다. 한국 입장에서는 부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민은 70년대까지는 라디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중계방송을 듣다가 80년대 이후에야 온 가족이 TV 앞에 함께 모여 올림픽을 즐기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스마트폰 시대가 다가오면서 올림픽에 참여하고 즐기는 문화가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과거 집에 함께 모여 시청하던 문화가 내 손안의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경기를 관람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함께 응원하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 수십억 사람들과 경기의 감동과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과 SNS, 그리고 올림픽이 결합한 ‘스마트 소셜림릭’이 본격화한 것이다.

하지만 런던 올림픽은 서막에 불과하다. 6년 뒤 평창 겨울올림픽에선 지금보다 월등히 발전된 스마트 세계를 보여주게 될 것이고 보여줘야만 한다. 바야흐로 다른 나라가 부러워할, 진화한 스마트 소셜림픽의 역사를 한국의 손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4G 이동통신 서비스는 5G로 진화해 전 세계 최초로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유선망 속도는 10Gbps급으로 고도화돼 유·무선 인프라 모두 지금보다 10~100배 빠른 스마트폰 네트워크로 상용화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첨단 인프라를 기반으로 UD·3D 중계방송, 자동 통·번역기, 자원봉사 로봇, 증강현실 면세점 등 경기·교통·관광·생활 등 모든 분야에서 스마트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2018년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데이터가 다양한 단말에서 생성되어 축적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장에 설치된 센서를 통한 선수 개개인의 세밀한 경기 기록, 평창 곳곳에 설치된 첨단 기상 센서,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올리는 멀티미디어 SNS 등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활용한 대용량 데이터의 분석과 스마트폰 단말을 통해 경기예측, 기상예측 등 각종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스마트 올림픽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것이다.


평창올림픽은 한국 주도로 ‘미래형 스마트 사회’의 모델을 만들고 세계로 확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을 전 세계 스마트 사회의 모델로 각인시킬 수 있도록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 올림픽을 치러야 한다. 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을 점프의 기회로 삼았던 것처럼 한국이 또 다른 도약을 하기 위해선 ‘스마트 평창 겨울올림픽’을 차기 정부의 핵심 어젠다로 삼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스마트 사회를 완벽히 구현하려면 시간이 적지 않게 필요하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준비기간을 잘 계획하고 집약적으로 실천함으로써 평창 올림픽까지의 시간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2018년 평창 올림픽을 미래형 스마트 올림픽으로 만드는 데 역량을 모으는 것은 차기 정부의 핵심 과제가 돼야 한다. 예비후보로 나선 정치인들은 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김성태 한국정보화진흥원장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8/14/8664887.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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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15

2012 런던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12개 종목에서 메달 28개를 따내며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적을 거뒀다. 우리 앞에 있는 나라는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등이다. 고된 훈련과 가난, 부상, 좌절 등을 이겨내고 값진 성과를 일궈낸 선수와 지도자 모두 5000만 국민의 뜨거운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광복 후 처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한 1948년 14회 런던올림픽에서 우리는 동메달 2개를 따내 59개 참가국 중 32위였다. 당시 선수단의 공식 명칭은 '조선 올림픽 대표단'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됐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런던서 돌아오는 길에 대한민국의 탄생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때 우리는 1인당 소득 75달러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로부터 64년 만에 런던서 다시 열린 올림픽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205개 참가국 중 정상급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오늘의 성취를 이룩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쾌거이기에 더욱 대견하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은 메달 수뿐 아니라 경기 내용 면에서도 대한민국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펜싱·사격 등 한국 스포츠의 불모지 같던 종목에서 각각 6개, 5개씩 메달을 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체조에서 양학선은 자신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양학선'이란 신기술로 사상 첫 금메달을 차지했다. 리듬체조의 요정 손연재는 사상 처음으로 결선에 진출, 5위를 기록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실패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빛나는 결실을 이뤄낸 것이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기뻐서 울고 메달을 놓치면 아쉬워서 울고 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경기 한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실패해도 낙망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런던올림픽의 기억은 대한민국이 전 세계와 어깨를 겨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데 더없는 힘이 될 것이다. 64년 전 젊은이 67명이 신생(新生) 국가 대한민국에 조그만 희망의 불빛을 선물했던 것처럼 이번 우리 젊은 선수 245명도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 밝은 희망을 쏘았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2/20120812015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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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13

이번 올림픽에서 모두가 한국의 선전에 환호하고 오심 퍼레이드에 분노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 만한 사건 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레이스 막판 무서운 스피드로 수영 금메달을 거머쥔 한 소녀 선수 얘기다. 16세인 중국의 예스원은 개인혼영 400m 결승에서 마지막 50m를 남자선수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우승해 결국 세계기록마저 갈아 치웠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쏟아진 건 박수갈채가 아닌 의심의 눈초리였다. 작고 어린, 무명에 가까운 선수가 도저히 낼 수 없는 기록이란 것이다. 의혹 제기에 앞장선 건 서방 언론이었다. 이들은 중국 선수들이 각종 대회에서 약물 파동으로 대거 실격된 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며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넘겨짚었다. 미국의 한 코치는 “수영에선 누가 ‘슈퍼우먼’으로 떠올랐다 싶으면 어김없이 약물 복용으로 밝혀졌다”며 의혹을 부채질했다.

중국인들은 흥분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중국의 성공에 대한 질투심의 극치”, “‘여우와 신 포도’의 전형적 사례”라는 글이 쏟아졌다. 나무 높이 달린 포도를 포기하면서 분명히 포도 맛이 나쁠 것이라 자기합리화를 한 여우(이솝우화)에 서방을 비유한 것이다. 급기야 논란은 중국의 국가주의 체육과 인권문제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졌다. 한 서방 기자는 예스원에게 “중국 선수들은 메달을 따기 위한 로봇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예스원 공방’이 흥미로운 건 지금 글로벌 경제의 본모습과 헤게모니 다툼 양상이 그대로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개최국으로 세계의 이목을 모은 중국은 이번에도 가공할 경기력과 수많은 얘깃거리로 사실상 대회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다. 어느새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신흥 슈퍼파워와 이를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서방 간의 신경전이 스포츠라는 형식을 빌려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서방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중국은 30년 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 기적을 이뤄 냈지만 여전히 그 틀은 권위주의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다. 반면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정통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 버블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매년 8% 성장을 이어 가는 중국인들의 지갑에만 의존하는 꼴이 됐다. 중국이 예스원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신 포도로 비꼰 것은 사실 중국 경제를 바라보는 서방의 부러운 (그리고 두려운) 시선을 정확히 지칭하고 있다. 약물 의혹은 환율 조작이나 인권 탄압 등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국의 모든 면을 상징한다.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의 마음은 복잡하다. 국민소득이 5000달러 정도 됐으면 자신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받아들일 만한데도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체제가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듯 더 완고하게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의 원천은 물론 자국 경제다. 중국이 올림픽을 국가 파워를 과시하는 경연장으로 여기고 밀어붙이는 것 역시 경제적 자신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서구는 이 거대한 폭주 기관차가 언젠가 한계에 부닥치진 않을까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북한 경제 몰락의 이유는 분명하지만 중국의 성공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중국은 북한보다도 더 신기한 나라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의 위상과 이웃나라 국민을 전기 고문하는 후진성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이 세상에, 그것도 한반도 바로 옆에 보란 듯 자리 잡고 있다. 우리로선 벌써 반만 년째 이어지는 고약한 숙명이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20807/48411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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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09

일본의 자매대학에서 여름방학 집중강의를 하고 돌아왔다. 찜통인 도쿄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지하철에서도 손바닥만한 책을 들고 삼매경에 빠진 시민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독서천국 같았다. 일본서적출판협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약 7만6,000종의 새 책이 출간됐고, 모든 서적의 판매부수가 11억7,600만권에 달했다. 대략 3,800여개의 출판사들이 매년 1조8,000억엔(약27조원) 규모의 거대산업을 형성하고 있다.

전국 1만5,000여개의 크고 작은 서점들이 출판 시장의 모세혈관 역할을 수행한다. 서적출판협회를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전철역이든 쇼핑몰이든 일본에서 서점을 찾기 어려운 곳은 없다." 요즘 들어 주춤해졌다곤 하나 여전히 출판대국인 나라의 깊이를 여러 곳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한류니 K팝이니 하면서 하루아침에 문화국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동안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었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텔레비전, 인터넷, 모바일이 커뮤니케이션의 성격을 신속하고 수평적으로 만들었지만 아직도 인간 이성의 정수를 포착하는 데 있어 책 만한 도구가 없다. 부피와 무게에서 휴대용 전자기기에 약간 밀릴 뿐, 사용의 편의성이나 영구적인 보관성을 감안하면 아직까지도 책에 대적할 수단이 없다. 구형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해 놓은 원고는 이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기계조차 없지만, 그 원고로 만들어진 책은 여전히 필자의 책장에 꽂혀 있다. 어느 쪽이 우월한 매체인가. 또 책 읽기는 단순히 개인의 문화적 취향 또는 여가활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의 독서행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수록 개개인의 내면의 공간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책 읽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나라는 국토면적과 상관없이 엄청난 지성의 영토를 보유한 대국이 된다. 지성의 영토가 광대한 나라일수록 독재가 불가능하고 궤변이 설 자리가 없으며 프로파간다의 맨얼굴이 쉽게 폭로된다. 이런 점에서 책 읽는 행위는 인간의 권리문제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우매한 대중이 되지 않을 권리'는 인간 자력화의 가장 강력한 요구에 속하는 권리다. 인권의 원칙으로 보아 책 읽을 권리에는 세 차원이 있다.

첫째, 가용성의 원칙. 일단 책의 종류가 다양해야 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저렴하되 출판사의 출혈을 방지할 정책이 필요하다. 도서정가 문제, 우수출판 지원제 등을 인권의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문고판 도서의 활성화도 고려해 봄직하다. 문고판은 공간활용, 가격, 제작 등에 있어 장점이 많지만 출판사의 수익성이 떨어지는 분야다.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서울역의 노숙인들도 문고판으로 성석제의 소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둘째, 적합성의 원칙. 다양한 책이 나오되 일정한 수준의 도서를 지향해야 한다. 도서시장은 악화가 양화를 쫓아낼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와 더불어 금서니 불온서적이니 하는 사상검열을 원천적으로 없애야 한다. 책을 읽는 목적 자체가 인간사유를 넓히고 바꾸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온'하지 않은 책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접근성의 원칙. 동네의 작은 책방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공립 도서관이 촘촘히 들어서야 한다. 이미 도서관 운동들이 있지만 이런 분야에 대폭적인 정부 지원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세금이 아깝지 않은 일이다. 또한 장애인들을 위한 도서제작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시각장애인용 도서 콘텐츠 생산은 시급한 인권문제이며 국가인권위에서 오늘이라도 당장 조사와 연구를 시작해야 할 사안이다.

올해는 '독서의 해'이다. 많은 아이디어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책 읽기를 인권문제로 이해하는 관점은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책이야말로 인간자유를 위한 강력한 무기"라 했다. 인권운동으로서의 독서운동이 일어날 때가 됐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07210359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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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3:08



거북복(위)과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 [메르세데스벤츠]
미국 북서부 사막지대에서 번식하는 잡초인 회전초(回轉草)는 행성 탐사 로봇을 개발하는 기술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을바람에 의해 둥글게 뭉쳐서 날아가는 회전초를 본떠 로봇을 만들면 어떤 지형에서도 돌아다닐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2003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회전초처럼 바람이 불면 굴러다니는 행성 탐사 로봇을 만들어 그린란드에서 시운전에 성공했다. 이 로봇은 이틀 동안 128㎞를 이동하면서 30분마다 수집한 자료를 관제소로 보냈다. NASA는 바퀴 달린 로봇이 접근하기 어려운 구릉과 계곡이 많은 화성 탐사에 회전초 로봇을 활용할 예정이다.

연잎 표면의 나노 돌기 때문에 물은 방울 상태로 있다가 굴러떨어진다. [위키피디아]
일본의 의료기기 회사에서는 아프지 않은 주사, 곧 무통주사를 개발하기 위해 모기에 관심을 가졌다. 모기는 사람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고 피를 빨아먹는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모기의 주둥이는 주삿바늘보다 끝이 훨씬 가늘고 길게 생겼다. 모기의 바늘처럼 생긴 주삿바늘을 만들면 사람이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일본의 의료기기 전문가는 모기 주둥이를 흉내 내서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주삿바늘을 만들어 2004년 특허 승인을 받았으며 대박을 터뜨렸다. 특히 날마다 주사를 맞아야 하는 당뇨병 환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자동차 명품인 메르세데스벤츠는 거북복을 본떠 설계한 미래형 자동차를 선보였다. 일본·필리핀·남아프리카 등지에 사는 열대어인 거북복은 머리가 작고, 주둥이가 돌출되어 있으며, 외피는 딱딱한 갑판으로 덮여 있다. 몸 빛깔은 황금색이며 눈동자 크기의 작은 점이 흩어져 있다. 거북복의 몸체는 각이 지고 매끈한 유선형은 아니지만 물속에서 날렵하여 수압을 최소한으로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거북복은 몸 전체로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덕분에 수류의 저항을 받지 않고 최소한의 힘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며 자유자재로 헤엄칠 수 있다. 이러한 거북복의 특성을 자동차에 적용하면 차체 구조와 공기역학적 특성이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메르세데스벤츠 기술진은 거북복의 외형을 본떠 만든 자동차를 연료 절약과 환경 친화적인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미래 자동차의 설계 개념으로 소개한 것이다. 

나노기술 발달로 생명 본뜬 물질 만들어
전 세계의 늪에 서식하는 무척추동물인 완보동물(緩步動物)은 길이가 1㎜ 정도인 작은 생물이지만 생김새가 곰을 닮아 물곰이라 불리기도 한다. 물방울 속에 사는 물곰은 물이 마를 경우 움츠러들면서 생명 활동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가사 상태에 빠진다. 이 상태에서 물곰은 물이 끓는 100˚C 이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결빙 온도보다 훨씬 낮은 영하 200˚C에서도 얼어 죽지 않는다. 완보동물이 극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물질이 몸 안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특수물질을 모방할 수 있다면 식량이나 의약품을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우주 공간으로 여행할 때 이 물질을 활용하면 극한 환경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될 전망이다.

게코를 본뜬 로봇. [김상배 연구원]
21세기 초반부터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여 경제적 효율성이 뛰어난 물질을 창조하려는 과학기술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신생분야는 생물체로부터 영감을 얻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물영감(bioinspiration)과 생물을 본뜨는 기술인 생물모방(biomimicry)이다. 생물영감과 생물모방을 아우르는 용어가 해외에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아 필자는 지난 5월 하순 펴낸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에서 ‘자연중심기술’이라는 낱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자연은 위대한 발명가다. 지구상의 생물은 박테리아가 처음 나타난 이후 38억 년에 걸친 자연의 연구개발 과정에서 갖가지 시행착오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생물 전체가 자연중심기술의 연구 대상이 되므로 그 범위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다. 이를테면 생태학·생명공학·나노기술·재료공학·로봇공학·인공지능·인공생명·신경공학·집단지능·건축학·에너지 등 첨단 과학기술의 핵심 분야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21세기 들어 생물영감 또는 생물모방이 각광을 받게 된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나노기술의 발달이다.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나노미터, 곧 10억분의 1m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물을 본뜬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도마뱀붙이(게코) 발바닥과 연잎 표면을 모방하여 만들어낸 신소재다.

야행성 동물인 게코는 몸길이가 꼬리를 포함해 30~50㎝, 몸무게는 4~5㎏ 정도인 작지 않은 동물이지만 파리 따위의 곤충처럼 벽을 따라 기어 올라가는가 하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걷기도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게코의 능력은 발가락 바닥의 특수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코 발가락 바닥에는 사람의 손금처럼 작은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작은 주름들은 뻣뻣한 털(강모)로 덮여 있다. 작은 빗자루처럼 생긴 강모의 끝에는 잔가지가 나와 있다. 잔가지의 끝부분은 오징어나 거머리의 빨판처럼 뭉툭하게 생겼으며 지름은 200나노미터 정도다. 도마뱀붙이는 이런 나노 빨판을 10억 개 갖고 있다. 요컨대 발바닥의 나노 빨판 덕분에 게코는 벽이나 천장에서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기어다닐 수 있는 것이다. 2004년 게코의 나노 빨판을 모방한 접착제가 개발되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김상배 연구원은 게코처럼 미끄러운 벽면을 기어오를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하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2006년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로봇 발바닥에는 게코 발바닥을 모방해 만든 나노 크기의 털이 붙어 있음은 물론이다.

생태시대 여는 혁신적 접근방법
연은 흙탕물에서 살지만 잎사귀는 항상 깨끗하다. 비가 내리면 물방울이 잎을 적시지 않고 주르르 흘러내리면서 잎에 묻은 먼지나 오염물질을 쓸어내기 때문이다. 연의 잎사귀가 물에 젖지 않고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정화 현상을 연잎효과(lotus effect)라고 한다. 연잎의 표면이 작은 돌기로 덮여 있고 이 돌기의 표면은 티끌처럼 작은 솜털로 덮여 있기 때문에 연잎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솜털은 크기가 수백 나노미터 정도이므로 나노 돌기라 할 수 있다. 1999년 연잎 표면을 뒤덮은 나노 돌기의 자기정화 기능을 활용한 첫 번째 제품이 상용화되었다. 건물 외벽에 바르는 자기정화 페인트다. 때가 끼는 것을 막아주는 자기정화 표면은 자주 청소를 해야 하는 생활용품에 쓰임새가 많다. 연잎효과를 응용한 옷은 가령 음식 국물을 흘리더라도 손으로 툭툭 털어버리면 깨끗해진다.

자연중심기술이 각광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파란 행성 지구의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참신한 접근 방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1997년 미국의 생물학 저술가인 재닌 베니어스가 펴낸 『생물모방(Biomimicry)』에서 명쾌하게 일갈한 대목에 그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생물들은 화석연료를 고갈시키지 않고 지구를 오염시키지도 않으며 미래를 저당 잡지 않고도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전부 해왔다.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인류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해법을 모색하는 자연중심기술은 녹색기술의 한계를 보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녹색기술은 환경오염이 발생한 뒤의 사후 처리적 대응의 측면이 강한 반면에 자연중심기술은 환경오염 물질의 발생을 사전에 원천적으로 억제하려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중심기술이 발전하면 녹색경제의 대안으로 청색경제(blue economy) 시대가 개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2008년 10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회의에서 ‘자연의 100대 혁신기술(Nature`s 100 Best)’이라 불리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IUCN과 유엔환경계획(UNEP)의 후원을 받아 마련된 이 보고서는 생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생물을 모방한 2100개의 기술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100가지 혁신기술을 선정하여 수록한 것이다.

이 보고서를 만든 사람은 재닌 베니어스와 군터 파울리다. 파울리는 벨기에 출신의 저술가, 기업가, 환경운동가다. 그는 1994년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아 생물영감 연구조직인 제리(ZERI·Zero Emissions Research and Initiatives)재단을 설립했다.

2009년 5월 베니어스와 파울리는 이 보고서를 같은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2010년 6월 파울리는 자연의 100대 혁신기술을 경제적 측면에서 조명한 저서인 『청색경제』를 펴냈다. 이 책의 부제는 10년 안에, 100가지의 혁신기술로 1억 개 일자리가 생긴다(10 years, 100 innovations, 100 million jobs)이다. 파울리는 이 책에서 100가지 자연중심기술로 2020년까지 10년 동안 1억 개의 청색 일자리가 창출되는 사례의 밑그림을 제시하면서 자연의 창조성과 적응력을 활용하는 청색경제가 높은 수익과 부가가치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 측면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규모의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중심기술을 ‘청색기술(blue technology)’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을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에서 제안한 바 있다.

청색기술이 발전하면 기존 과학기술의 틀에 갇힌 녹색성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청색성장으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국내 산업정책 전문가들이 주목할 만도 하다.

자연의 지혜를 배우면 지구를 환경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생물영감 또는 생물모방을 단순히 과학기술의 하나로 여기지 않고 이른바 생태시대(Ecological Age)를 여는 혁신적인 접근 방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인식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KAIST 겸직교수를 지냈다. 신문에 470편, 잡지에 160편 이상의 칼럼을 연재했다. 『지식의 대융합』『이인식의 멋진 과학』『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등을 펴냈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역설하는 강연 활동으로 분주하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119

Posted by 겟업
2012. 8. 15. 23:07

“런던서 온 금빛 희망바이러스… 다음은 우리 차례” 펜싱 키즈가 자란다

방학인데도 맹훈련을 하는 서울체육고 펜싱부 학생들. 도복 마스크 등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칼을 쓰지만 여풍이 거셌다. 총 26명의 학생 중 여학생은 7, 8명가량 된다. “처음엔 칼이 좀 무거웠지만 곧 적응됐다”고 말하는 이들은 “부모님이 여자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며 팍팍 밀어준다”면서 주눅 든 모습이 없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서울체육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으로 들어서니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폭염과 함께 올림픽 열기도 뜨거웠다. 거리 곳곳에 메달을 딴 선수들의 명단이 적힌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9일 오전 10시 학교 4층 펜싱부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방학 중인 데다 이른 오전 시간인데도 비지땀을 흘리는 학생들의 땀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200여 평 되는 체육관은 에어컨이 돌고 있었지만 남녀 학생 20여 명의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했다. 양팔에 검(劍)을 쥔 모습으로 좌우로 빠르게 발 연습을 하는 모습이 TV 중계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다. 서울체고는 펜싱 6개 종목 중 3개 종목에서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꿈나무들의 산실이다. 

홍순영 코치(44·중고펜싱연맹 경기이사)의 얼굴은 밝았다. “어떻게 하면 펜싱을 배울 수 있냐는 전화가 많이 걸려옵니다. 아이들에게 동기부여가 된 게 큰 수확입니다. 그중에는 대충 하다 대학이나 가자던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열심히 해서 메달을 따겠다’고 합니다.” 

한국 펜싱은 이번 올림픽에서 6개 전 종목 메달(금 2개, 은 1개, 동 3개)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훈련하는 학생들 중 김도희(18·2학년·사브르) 양희원 양(19·3학년·사브르)과 황부영(19·3학년·플뢰레) 조성혁(19·3학년·플뢰레) 홍성운(19·3학년·사브르) 정병찬 군(19·3학년·에페) 등 6명을 만나봤다. 아직은 생소한 이 스포츠를 무슨 동기로 시작하게 됐는지가 가장 먼저 궁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체육 선생님이 펜싱부 코치였는데 체격조건이 좋다고 권유해서”(희원) “초등학교 때 태권도를 했는데 발이 빠르다고 관장님이 추천해서”(부영) “초등학교 수영 선생님이 제 운동신경이 펜싱에 맞겠다고 해서”(성혁) “달리기를 잘한다고 아빠 친구(펜싱 코치)가 권해서”(도희) 등등 대부분 비슷했다. 

기자는 이들을 만나기 전 펜싱이 소수 엘리트 체육의 산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홍 코치의 말이다.

“제가 뛸 때만 해도 선수로 선발되면 무조건 태릉으로 가 집단훈련을 받았지만 10년 전부터 중고교에 펜싱부가 생기면서 달라졌습니다. 현재 중고교 130여 곳에서 870여 명의 꿈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계기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단식 플뢰레에서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김영호)과 동메달(이상기)이 나온 것이었다. ‘펜싱 키즈’를 키우자는 국가적 목표가 세워졌고 국고와 대한펜싱협회의 지원으로 중고교에 펜싱부가 생긴 것. 물론 1차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밀어주겠다는 부모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펜싱은 검, 마스크, 도복 상하의, 보호대, 메탈재킷, 와이어, 펜싱양말, 신발, 장갑, 장비가방 등 풀 세트를 구입하려면 초기 비용이 수백만 원은 된다. 학생들은 “도복 등은 한 번 사면 5∼10년은 쓰지만 한 자루에 10만 원을 훌쩍 넘는 검은 그동안 수십 자루를 갈아 치웠다”고 했다. 게다가 100% 수입품이다. 풍족하진 않더라도 자식들에게 이 정도 지원은 해줄 수 있는 부모들이 있었기에 이들의 오늘이 가능했으리라. 결국 한국 펜싱의 성장은 한국 경제성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에게 펜싱의 매력을 물었다. “멋있어서” 혹은 “짜릿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명만 반짝이는 검은 무대, 은빛 칼, 표정을 감추는 마스크…세련되고 멋있잖아요.”(부영)

“‘진짜 칼을 들었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해요. 이 칼로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요. 찌르고 찔리는 순간 생과 사를 맛보는 운동이랄까(웃음), 머리회전도 빨라야 해요. 0.5초라는 짧은 순간에 공격과 수비 전략을 짜야 하는데 전략이 읽히면 당할 수밖에 없죠. 속이는 기술이 성공했을 때의 ‘스릴’은 정말 대단하죠.”(성혁)

“좁은 피스트(piste·펜싱 경기장) 위에 오로지 상대방과 나 둘만 있어요. 그 긴장감, 집중력, 한 포인트 한 포인트 찌를 때마다 경험하는 짜릿함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어요.”(성운)

지금 경기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지, 이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비인기 종목 선수로서 설움을 느낀 적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이들은 무심할 만큼 가볍게 받아 넘겼다. 승부에 매달리기보다는 운동 자체를 즐긴다는 사고가 역시 강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운동인데 남들한테 인기가 있나, 없나 하는 게 뭐가 중요하죠?”(성혁)

“TV에서도 중계를 잘 안 해 주니까 아쉽긴 하지만 서운하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열심히 해서 인기 종목으로 만들어야지 하는걸요. 피겨 종목을 유명하게 만든 김연아 선수처럼 말이죠(웃음).”(희원)

“펜싱 한다고 하면 다들 멋있다고 해요. 주눅 든 적은 없어요.”(병찬)

옆에 있던 홍 코치가 “우리만 해도 어쩔 수 없이 혹은 어른들이 무서워서(웃음) 열심히 했는데 요즘 애들은 절대 억지로 안 합니다. 그렇다 보니 중도 탈락하는 아이가 오히려 줄었어요”라고 덧붙였다. 

올림픽 기간에 펜싱 경기가 있는 날, 밤새워 TV 앞에 앉아 있었다는 이들은 오심(誤審)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작년 요르단에서 열린 유소년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제가 먼저 찔렀는데 상대 선수에게 유리한 판정이 났어요. 비디오 판독까지 했지만 정정을 해주지 않더라고요. 원래 아시아권 선수들에게 심판들이 점수를 잘 안 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인가 싶어 속상했죠.”(희원)

“저도 요르단 대회에서 유럽 선수들과 경기할 때 두세 개의 오심 판정을 받았어요. 일본인 심판이었는데 같은 아시아인인데도 유럽 선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속상했어요. 한국에서 잘 썼던 기술이 오심 판정이 나버려 자신감이 없어졌어요.”(부영)

그럴 때마다 펜싱에 회의감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묻자 역시 낙관적인 답들이 돌아왔다.

“올해 4월 모스크바 유소년대회에서 단체전 3위를 했는데 미국 선수와의 경기에서 심판이 끝났다는 신호를 하지 않아 잠시 멈칫하다 찔려 버렸어요. 너무 허탈했지만 이미 악수까지 하고 끝낸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죠. 하지만 저도 제게 유리한 판정을 받은 적이 있어요. 억울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오히려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병찬) 

“국내 경기에서도 오심 판정으로 억울한 적이 있었어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아쉬웠지만 좀 더 정확한 포인트를 찍기 위해 연습을 더 열심히 하게 됐어요.”(성운)

펜싱은 상대방의 몸에 칼날이 닿으면 불이 들어오는 전자 판정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워낙 ‘찰나의 스포츠’이다 보니 양 선수의 마스크에 동시에 불이 들어올 경우 심판의 판정도 쉽지 않다. 

“사람의 일이니 누구라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에 신아람 선수의 경기를 맡았던 심판도 순간적으로 판단착오를 한 것 같아요. 공격이나 수비 지시를 내릴 때는 이상이 없다가 마지막 1초가 문제가 됐는데 사실 (경기를) 끝냈어도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설마 1초라는 시간 안에 누군가를 찌를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물론 타임키퍼의 실수도 있었고요…. 어쨌든 그 일 이후 심판들이 ‘코리아’를 보면 더 바짝 긴장해서 경기를 본 건 사실이에요.”(홍 코치)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펜싱의 장기로 유명해진 ‘발 펜싱’ 이야기로 넘어갔다. 실제로 기자가 이날 지켜본 학생들의 운동시간 절반은 ‘풋 워크(다리운동)’에 집중됐다.

홍 코치에게 “우리의 발 펜싱 노하우를 세계가 알게 됐으니 금방 따라잡히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더니 “기본적으로 너무 힘든 트레이닝이라 견디지 못할 겁니다. 신체 조건이 동양인보다 좋기 때문에 그런 훈련 자체가 필요 없다고 느낄 수도 있고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결핍’이 때로는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지혜가 한국 펜싱에서도 적용되는 셈이다. 

3세트(1세트에 3분) 경기를 치르는 동안 약 500번의 공격을 하는 펜싱은 체력 소모가 심한 운동이다. 이날 만난 학생들의 연습량은 혹독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요즘 같은 방학에는 오전 10시∼낮 12시, 오후 2∼5시 운동이 이어지고 월·수·금요일에는 오후 7시∼8시 반에 야간운동까지 한다. 학기 중에는 오전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오후 2시 반∼5시 반, 역시 월·수·금요일 야간운동이 이어진다. 이들을 보며 케이팝(K-pop·한국대중음악) 한류를 만들고 있는 10대 연습생들의 집중력이 겹쳐졌다. 

이날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올림픽 메달을 꿈꿨지만 그렇다고 집착하는 모습은 없었다. “좋아하는 펜싱을 할 수 있다면 코치나 심판이 되는 길도 열려 있다”고 말하는 펜싱 키즈에게선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부러웠다.

● 펜싱, 아직은 먼 길

고대 로마에서 시작한 펜싱은 18세기 무렵 마스크를 쓰고 칼의 위험성을 없애고부터 스포츠가 됐다. 긴 칼만을 사용하는 현재 검법으로 틀을 갖춘 것은 프랑스에서다. 펜싱국제표준 용어가 ‘아탕시옹’(attention·차렷) ‘살뤼’(salut·인사) ‘앙가르드’(en garde·기본자세) ‘마르슈’(marche·앞으로 이동) ‘롱페’(rompez·뒤로 이동) ‘팡트’(fente·공격)처럼 프랑스어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1896년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지만 아시아권에서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플뢰레 여자부에서 루안줄리(중국)가 금메달을 딴 게 처음이다. 우리의 경우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남자 3명, 여자 1명이라는 미니 선수단이 출전한 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이르러서야 사상 처음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메달이 없었다. 

유럽엔 우리식 태권도장처럼 펜싱도장이 흔할 정도인 생활스포츠이지만 우리는 저변이 얇다. 국내 펜싱 동호인은 1000여 명에 불과하다. 독일에는 400여 개 클럽에 등록선수만도 40만 명에 이르지만 우리나라의 등록선수는 1500명 정도다. 

경기 종목은 찌르는 부위에 따라 플뢰레(fleuret·얼굴, 팔, 다리를 제외한 몸통만 공격) 에페(´ep´ee·마스크와 장갑을 포함한 상체 모두) 사브르(sabre·찌르기와 베기가 모두 가능하며 허리 위를 공격) 3종. 기본동작을 익힌 후 응용 동작까지 배워 경기를 하려면 6개월은 걸린다고 한다.

허문명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20813/48587747/1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54

펜싱, 팔 짧은 한국인 특성 맞게 빠른 발 동작에 몰두해 큰 성공
후발 주자는 새 룰 만들어 내야… 양궁처럼 끊임없는 변화도 필요
의외의 선수들이 메달 따듯 사무실 구석 인재들 끌어내야


많은 이들이 밤잠을 설치면서 런던올림픽을 지켜보는 건 거기에 날것 그대로의 경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어떤 보호막도, 기득권도 없이 오직 실력으로만 세계 최고를 가리는 현장이다. 우리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지만, 사실 많은 사람에게 경쟁은 추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올림픽은 생생한 경쟁의 모습을 3D 입체 영상으로 보여준다.

올림픽은 기업인들에게 승부의 비결을 전해주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기업인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배워야 할 게 있다면 그 첫째는 차별화의 중요성이다. 이번에 한국 선수단이 이룬 최대 이변 중 하나는 펜싱의 기대를 뛰어넘는 선전(善戰)이었다. 그것은 차별화 전략의 성공 사례이기도 했다.

한국 펜싱 선수들은 유럽 선수들에 비해 키가 작고 팔 길이가 짧은데도, 과거엔 손 기술 위주의 유럽 스타일을 모방만 해왔다. 그러다 10년 전 한국형 펜싱을 개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면서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에 맞는 기술 연구에 돌입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발동작을 빨리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펜싱 선수들이 느닷없이 등산과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등 하체 강화 훈련에 몰두한 이유다. 이렇게 단련된 우리 선수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빠른 잔발로 치고 빠지면서 유럽 선수들의 얼을 빼놓았다. 우리 선수들의 1분당 스텝 수는 최대 80회로 유럽 선수들의 2배 수준이고, 빠른 스텝을 이용해 1초 동안 5m를 이동하기도 했다.

기업의 경우에도 후발 주자는 결코 선발 주자가 만들어 놓은 게임의 룰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선발 주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전장(戰場), 그들이 행하지 않은 룰을 만들어내야 한다. 진정한 차별화란 약점을 수비적으로 보완하기보다 강점을 더욱 강화해 불균형의 상황을 더욱 불균형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한국 최초의 체조 금메달을 딴 양학선은 차별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그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최고난도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차별화의 세 가지 방안, 즉 최초(the first), 유일함(the only), 최고(the best)를 모두 이뤘다.

둘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한국 양궁이 30년 이상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스포츠에 접목시켜 창의적인 훈련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했기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65m 높이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군인 700명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야유하는 가운데 연습 시합을 치렀으며, 쉬는 시간에는 몇 달 후 올림픽이 열릴 경기장 영상이 담긴 특수 안경을 끼고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다. 대한양궁협회 서거원 전무는 "새 훈련 방법을 개발하면 외국 지도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내 5개월 후엔 더 발전된 방법으로 훈련한다"면서 "그 5개월간 우리는 전보다 새로운 것을 개발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셋째는 진흙 속 진주가 빛을 발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재 관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늘 그랬지만 이번 올림픽도 전혀 의외의 선수들이 등장해 메달을 따냈다. 펜싱의 김지연이나 사격의 김장미가 대표적이다. 기업에도 장차 큰일을 벌일 인재들이 사무실 어느 구석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가 필요한 이유다. 조직 내에 구성원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동질화 필터(homogenizing filter)'가 작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단기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긴 승부를 볼 수 있도록 보상시스템이 설계돼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이번 런던올림픽을 보면서 장기화하는 세계 경제 침체의 파도에 맞설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다.


이지훈 경제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7/2012080703188.html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52

올림픽이 인류 평화와 화합의 제전임을 누가 모를까만, 앳되지만 비장한 각오로 경기장에 들어서는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점잖은 상식은 콩닥거리는 심장박동에 그만 묻혀버리고 만다. 제국 열강 틈에 끼여 눈치 보며 살아온 주눅 든 세월이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된 까닭인지 패하면 분하고 이기면 가슴 후련한 우승열패의 원초적 감정을 버릴 수 없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지막 날, 황영조가 일본의 고이치 선수를 따돌리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필자는 정신 나간 짐승처럼 괴성을 질러 댔다. 새벽녘 일본 쓰쿠바대학 교수 숙소에서였는데, 더러 불이 켜진 방에서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열대야에 잠을 설치느니 애국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맥주캔을 들고 TV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건 웬 날벼락인가. 한국 낭자 신아람의 ‘멈춰버린 1초’는 오랫동안 무장해제 상태에 있었던 약소국의 상처를 건드리더니 급기야 자제할 수 없는 분노로 피어올랐다. 아니, 저런 몰상식하기 짝이 없는, 파렴치하고 오만 방자한,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이라니! 교양에 의해 억제된 욕설과 비속어(卑俗語)들이 뭉게뭉게 모이기 시작했던 거다.

스위치는 눌러졌건만 그건 가지 않는 시계였다. 아니 거꾸로 가는 시계였다. 스타 워즈에나 나올 만한 그 장면, 네 차례 공격을 무시간(無時間)으로 산정한 그 계측은 영국이 세계에 선포한 그리니치 표준시간이었다. 거꾸로 가는, 아니 가지 않는 이 시간 개념을 내로라하는 국제심판들과 국제펜싱연맹이 신기루처럼 신봉했으니 어쩌랴, 문명표준의 후예들이 그렇다면 그러려니 할 수밖에. 분통이 폭발하자 불온한 발상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다.

아무리 인류화합 운운하는 올림픽이라도 유럽이 타 인종에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는 종목이 있는 듯이 보인다. 승마와 펜싱. 이 종목들엔 유럽이 현대문명의 종주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역사적 원동력과 귀족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부영화의 주연 존 웨인이 야생마를 타고 텍사스 평원을 달리는 것은 그냥 질주지 승마가 아니다. 근위 기마병을 앞세워 정벌에 나섰던 전장의 기상을 궁정과 장원 뜰에서 재현하며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승마에 숨겨진 귀족들의 호사취향이다. 펜싱 역시 귀족문화의 꽃이었다. 중세의 유럽지도는 종교전쟁과 종족전쟁으로 수십 차례 바뀌었는데, 승패는 날씬한 칼과 갑옷으로 중무장한 귀족 출신 기사(騎士)들의 몫이었다. 병사들이 기진하면 양쪽의 기사들이 나서 일합을 벌였다. 종족의 우월성과 왕권의 계보는 기사들의 최종병기인 칼로 판가름 났다. 평화시대인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검법은 귀족계급의 필수교양으로 등록되었는데,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국가 명예를 드높인 귀족들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할 정도로 멸사봉공 정신과 신사의 품격을 높이 사고 있다.

그런데 몸통을 찌르는 플뢰레에서 최병철이 레드카드를 세 차례나 받은 것은 전진과 후퇴만으로 이뤄진 서양의 검법을 조선 무예가 흔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무사(武士)는 창, 칼, 화살, 도끼를 종합적으로 구사하는 ‘무예 24반’을 통달해야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1709년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는 무사들의 동작이 전후, 좌우, 상하를 막론하고 변화무쌍하다. 그러니 온몸을 흔들면서 돌진해오는 조선의 검객을 레드카드로나 황급히 막아야 했던 것이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독일의 하이데만이 조선 여검객을 찌를 때까지 ‘마지막 1초’가 멈춰서야 했던 이유다.

그러나 분노할 필요는 없다. 서양의 단조로운 검법이 동양의 신검에 의해 제압당할 날도 머지않은 듯이 보인다. 중국은 검법을 무술(武術)로 불렀고, 일본은 무도(武道)라 했는데, 조선은 그것을 모두 합친 종합예술 ‘무예(武藝)’라고 했다. 중국 무협영화 ‘와호장룡’에서 보았듯이 수면(水面)을 박차 오르고 대나무 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 무중량의 발놀림과, 일본 영화 ‘7인의 사무라이’가 보여준 현란하고 절제된 손놀림에다 쌍검, 삼지창, 언월도를 동시에 구사하는 조선의 복합예술적 검법에 펜싱 종주국이 당황한 나머지 저질렀던 실수라고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치 유럽이 의기양양하게 채택한 양궁에서 조선 신궁(神弓)이 서양 궁사들을 쩔쩔매게 만들 듯이 말이다. 봐라, 조선 검객들을 괜히 건드려 금 2, 은 1, 동 3개를 내주지 않았는가. 펜싱경기장이 극동의 작은 나라 국기로 뒤덮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다. 여하튼 대한체육회는 대응력 미숙, 외교력 부재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게 생겼다.

그러나, 동메달도 좋으니 한 개만이라도 따서 노메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기를 학수고대하는 80여 개국 힘없는 국민을 생각하면, 오심과 편파 판정에 광분해서 이렇게까지 보복논리를 열변하는 것은 왠지 천박하고 불온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더위 먹은 탓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979066&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48




정말 잘 만들었다. 나도 이런거 만들어야지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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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22:31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 6 17 () 오전 7 30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저는 지난 6 10일 오후 5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 1970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 700,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 700,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 700,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 8,657, 반대 7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 8,000, 반대가 7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그러나 7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 20,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100,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 1일 오후 4 50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 55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 5시간 48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 5시간 48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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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
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 42 51,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 12번 울리고 종료(鍾鬧)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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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22:27

인기 걸그룹 티아라 사태가 연일 확산일로다. 일주일 내내 언론과 포털을 달궜다. 팀의 막내이자 후발 멤버인 화영에 대한 ‘왕따설’이 떠도는 가운데 소속사가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 없이 화영을 계약해지(퇴출)시킨 것이다. 왕따의 피해자로 지목됐던 화영이 퇴출당하는 식으로 정리되자 일부 네티즌은 ‘티진요(티아라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모임)’를 결성했다. 오프라인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티아라 사태가 이처럼 관심을 끈 것은 그것이 사회문제로 비화된 ‘왕따’가 K팝의 주요 자산인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벌어져 팀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아이돌 그룹이 자생적으로 결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획사의 계산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불화의 소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사실 왕따까지는 아니어도 팀 내 불화라는 것은, 굳이 아이돌 그룹뿐 아니라 성인 그룹에서도 왕왕 벌어지는 일이다. 심지어 영국이 자랑하는 그룹 오아시스는 친형제 간의 불화로 팀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오아시스의 열혈팬인 축구선수 메시가 2010년 월드컵에 나가면서 오아시스 재결합을 바라며 골을 넣겠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다.

사실 이번 티아라 사태에서 가장 이례적인 부분은, 왕따설이 흘러나오게 된 계기가 바로 팀원들이 SNS에 무심코 남긴 글들이라는 데 있다. 보통 이처럼 팀을 위기로 만드는 불화설 등은 연예매체들의 보도로 알려지는데, 그와 달리 멤버들이 SNS에 불화를 암시하는 글을 올리고 이를 네티즌들이 ‘왕따’로 짜맞추었단 것이다. ‘왕따’를 입증하는 각종 동영상, 사진 들도 네티즌들이 찾아냈다.

아마 팀 내 멤버 그 누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면서 SNS에 글을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벼운 마음에, 친구들에게 은밀한 속말을 하듯이 푸념을 섞어 올린 글들이 왕따-퇴출-위기의 수순을 걷게 한 주범이 된 것이다.

공사의 경계를 허무는 SNS의 큰 특성은 자발성에 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심리상태, 소소한 느낌들까지 올린다. 페이스북은 유저들이 올리는 자발적인 글을 분석해 맞춤형 광고를 하고, 유저가 알 만한 사람, 좋아할 페이지를 추천한다. 페이스북은 웹상에 한 개인의 거대한 아카이브를 만드는 ‘타임라인’이라는 프로그램도 유저들의 동의 없이 일시에 적용시켰다. 말하자면 페이스북은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사이버에 구축한 엄청난 개인정보의 거대 망이다. 그것이 언젠가 자신에게 족쇄가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SNS의 가공할 위력이고 말이다.

사태가 악화되자 티아라 소속사 대표는 초기에 멤버들 간 갈등을 관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재발방지도 약속했다. 그런데 혹시 그 재발방지를 위한 관리라는 게 어린 나이에 엄청난 경쟁 상황에 노출된 멤버들에 대한 심리적 관리가 아니라 자유로운 SNS를 못하게 하는, SNS 관리는 아닐지 그게 걱정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968747&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25

“폭력이 야기되지 않고 물리적 충돌과 부상이 없는 대응, 국내외 분쟁 현장과 아프간까지 다녀온 백전노장, 그러나 노조원들에게 더없이 인자하며, 노조원들을 때리지 않는 마음씨 좋은 분쟁 현장의 신사-컨택터스!”


경호·경비 전문업체인 컨택터스의 인터넷 누리집(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자사 홍보 문구다. 정예인력, 첨단장비, 임무 수행전략을 보유한 자신들에게 ‘일’을 맡겨 달라고 기업들에 선전한다. 문구만 보면 노사분쟁 현장의 해결사로서 흠잡을 데 없는 회사다.


그런 컨택터스가 지난 27일 새벽 자동차부품업체인 에스제이엠(SJM)의 노조 농성 현장을 덮쳤다. 얼마나 ‘인자하게’ 노조원들을 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노조원 30여명이 머리가 터지고, 입술이 찢기고,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두들겨 맞았다. 컨택터스의 이번 폭력은 외견상 그동안 재개발 현장이나 노조 농성장 등에서 숱하게 봐왔던 ‘용역 깡패’의 행태를 그대로 빼닮았다. 하지만 컨택터스의 폭력은 그 성격상 기존의 용역 폭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폭력이 기업화되고 첨단화됐다는 점이다. 컨택터스의 보유 장비를 보면 경찰 뺨칠 정도다. 최신 헬멧이나 진압봉 등 개인장비는 물론 수력방어 특수차량(물대포차)과 시위대 항공채증을 위한 무인헬기까지 갖추고 있다. 노사분쟁 현장 등에 최대 3000명까지 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사실상 사설 경찰력이다.


이는 국가의 독점물이었던 합법적 폭력(공권력)을 민간이 보유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기업들이 자신의 이익 수호를 위한 사적 폭력조직의 동원을 일상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폭력의 민영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공권력이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보다 자본의 이익 수호에 지나치게 경도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공권력이 사실상 자기편임을 확인한 기업들이 공권력의 묵인 아래 좀더 효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줄 ‘민영화된 폭력’을 찾게 된 것이다. 결국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할 국가가 자본에 경도됨으로써 ‘폭력의 민영화’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준 셈이다. 친기업 반노조 성향의 이명박 정부에서 이런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폭력의 민영화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들게 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제1의 목표로 한다. 국민은 이를 전제로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다. 그런데 국가가 합법적 폭력을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자본 이익 수호를 위해 사용할 뿐 아니라 자본을 위한 사적 폭력이 횡행하도록 방조한다면 그런 국가는 국민과 적대적 관계가 불가피해진다.


불행히도 이런 폭력의 민영화 현상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우위 현상이 강화되는데다 자본의 대변자로 전락한 국가 또한 사적 폭력을 통제할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폭력사태에 대해서도 컨택터스는 “정상적인 업무 수행 중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며 폭력을 정당화하고 나섰고, 경찰도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몰랐다”고 발뺌하고 있다. 컨택터스는 심지어 “(컨택터스가) ‘허가 취소’ 등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앞으로 사업장에서 어떠한 불법행위가 일어나도 사업주는 속수무책이 될 것이며, 외국계 기업은 한국을 떠나고, 국내 기업들 또한 기업경영 의욕을 잃어 기업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국민을 겁박했다. 자신이 마치 국가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공권력이나 되는 것처럼.


이처럼 괴물이 돼 가고 있는 ‘민영화된 폭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국민은 이미 자본 편이 돼 버린 공권력의 횡포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 사적 폭력이란 이중의 폭력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 사안은 또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의 성패와도 직결돼 있다. 경제민주화의 본질이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회복인데, 자본의 사병 역할을 하는 사적 폭력을 방치한 채 자본을 통제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경제민주화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정치권이 이번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지 유난히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5262.html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21

2009년 7월 16일 서울 태릉선수촌. 로마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최선을 다해 우승하겠다”며 기자회견을 한 박태환에게 나는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물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자유형 400m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박태환이 훈련을 등한시했다고 생각하고 “이런 상태로 어떻게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느냐”는 질책성 질문을 한 것이다. 

그때 노민상 당시 대표팀 감독이 답을 대신했다. “박태환은 이제 스무 살이다. 국민적인 관심에 얼마나 심적 부담이 크겠느냐.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니 질책보다는 격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박태환을 발굴해 키운 스승의 말 한마디에 더는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노 감독은 말은 안 했지만 ‘선수도 사람이다. 어떻게 훈련만 하고 사느냐. 박태환은 훈련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당시 박태환은 로마에서 전 종목 결선 진출 좌절이란 부진한 성적을 내고 돌아왔다. 일부 언론은 ‘로마 참사’라고 대서특필했고 국민들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박태환에게 로마 악몽은 실패가 아니었다. 인간 박태환이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할 성장통이었다. 

박태환은 1년 뒤 광저우 아시아경기에서 3관왕에 올랐다. 지난해 상하이 세계선수권에서는 자유형 400m를 제패해 2007년 멜버른 대회 이후 4년 만에 챔피언에 복귀하며 2년 전 로마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부정 출발로 헤엄을 쳐보지도 못하고 고개 숙인 채 걸어 나왔던 실패를 4년 뒤 베이징에서 금메달이란 결실로 만들었듯 박태환은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섰다.

스포츠심리학에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분석한 결과 올림픽 이듬해에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간절히 원한 것을 얻은 선수들이 ‘꼭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하나’란 회의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목표를 정하거나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즐겨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잊혀지게 된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박태환은 수영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박태환은 자유형 400m 예선에서 조 1위를 하고도 어이없는 실격 판정을 받았다. 올림픽 2연패를 위해 4년을 준비했고 ‘세계신기록도 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박태환에게 실격 판정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실격 판정 번복이란 변수가 없었다면 금메달도 가능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박태환은 결선에서 최선을 다해 레이스를 펼쳤고 라이벌인 중국의 쑨양에 이어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다. 목표로 한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박태환은 “영광스러운 올림픽 메달을 걸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날아간 금메달은 벌써 잊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박태환은 “수영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일찌감치 4년 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도 출전할 뜻을 비쳤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 한국 수영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마린 보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3년 전 “왜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몰아붙였던 기자는 박태환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당부한다. “태환아. 이젠 쉬엄쉬엄 하렴.”

양종구 스포츠레저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0731/48227302/1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20

지금까지 성장일변도 정책의 결과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해결할 수 없는 정도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세계시장과 경쟁할 수 있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성장기반을 억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수도권 억제를 통한 지역 균형발전 전략보다 지역의 자생적 발전을 이끌어내 동반성장을 도모하는 새로운 정책패러다임을 발굴해야 한다.

이제까지 지역 발전의 성장기반으로 인프라 구축에 주력해 왔다. 이제는 인프라보다 지역 인재를 확보해 지속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재를 발굴해 잘 교육하고 산업·서비스·행정 등 지역의 각 분야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자생적 지역 발전의 기본 전제다. 이런 관점에서 지역 대학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역 대학은 수도권과의 상대적 격차로 여러 부문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다. 지속적인 지역 인재 육성은커녕 정반대로 가고 있다.

대학입시 과정에서부터 지역 두뇌들이 수도권의 상위권 대학으로 빠져나가는 문제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도권에 주요 기능이 집중되고, 고급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는 등 지역 인재를 유인하고 있다. 교통과 정보인프라의 발전도 고급 인재 유출을 부추기고 있다. 이는 대학원 과정에서 한 번 더 반복된다. 정부의 연구중심대학 관련 각종 시책이 수도권 일부 대학에 치우쳐 그나마 잘 키운 고급 두뇌들마저 수도권에 흡수돼 버린다.

지역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고급 인력을 지역에 착근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지역 대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첫째, 지역 대학이 산업발전의 동반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역 산업체와 긴밀한 협조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기업가정신을 배양하고, 창업과 적극적인 산학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가진 지역 기반 강소기업을 육성하고 지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과 지역 혁신을 뒷받침해야 한다.


둘째, 지역 대학이 지역 거버넌스 구축의 동반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지역 문제를 지역 주민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관리하며 해결할 수 있는 ‘주민참여의 장’이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있다. 학생회와 각종 시민운동을 통해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장차 책임있는 지도자로 육성하는 역할을 지역 대학이 해야 한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지역 경영의 실제 경험이 국가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평가지표가 된다.


셋째, 대학은 지역의 창조적 발전에 견인차가 될 수 있다. 각 지역이 비슷한 수준의 인프라가 구축된 상황에서 지역 나름의 문화, 서비스, 역사 등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인 발전은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는 또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21세기 새로운 성장산업의 하나로 문화와 관련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창조산업의 육성이 새로운 관심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 동반성장을 위한 대학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때마침 ‘지역 대학 시대를 열다’라는 슬로건으로 교육과학기술부는 내년부터 각종 사업추진을 계획하고 있다. 지역 대학은 새로운 교육 및 사업을 확보하려는 좁은 시야에서 관심의 영역을 넓혀 지역 동반성장의 기회로 본 사업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실제로 대학이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에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관련 기관, 지역 산업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산·학·연·관 협력모델로서 본 사업이 시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상철 충남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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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22:15

2007년 한 토론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물었다. 공식적인 전과 기록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학생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다.’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뒤 4년 반 동안 이 사회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기막힌 일들이 숨가쁘게 터졌건만, 좌절과 고통의 비명들이 곳곳에서 들려왔건만, 나는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다. 촛불광장의 뜨거운 열기를 급냉동시켜버리는 몸으로…. ‘냉소주의’로 비난받아도 상관없었다. 따져 묻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침묵은 길어졌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농락하고, 역사를 비웃고, 자폐증 환자들을 양산하는 놀음들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살아야 했다. 최소한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안철수’는 생소했다.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래를 저당 잡힌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또 하나의 ‘신바람’ 정도로 가볍게 넘기고 싶었다. 어차피 이 땅의 ‘정치’는 그 어떤 것이든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역겨운 패거리 싸움들만 난무하게 될 테니까. 더 큰 절망만 주면서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소모전으로 끝날 테니까. 그래도 한구석 궁금은 했다. 큰마음 먹고 생전 외면해온 예능 프로에 눈을 돌렸다. 설사 웃음과 이미지 선전을 위한 프로였다고 해도, 가식과 진면목을 구별할 수는 있었다. 안철수는 ‘인간성’, ‘진정성’에서 큰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사람’ 그 자체를 믿게 하는 진지함도 느껴졌다. 장인정신으로 엄청난 열정과 공을 들이고, 개인의 이름보다는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의 행적에서는 삶과 역사를 대하는 보기 드문 신중함과 성실함이 묻어났다. 지금까지 ‘사람’이 문제로 드러나곤 했던 바로 그 지점들에서 안철수는 거꾸로 ‘사람이 희망’임을 보여주었다. 반가웠다.


그런데 그 ‘희망의 사람’이 무참하게 짓밟힐까봐 걱정이 된다. 그러나 한편 그가 정치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보다는 정치권이 사람에 대한 희망을 또다시 저버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훨씬 더 크다. 정치권이 ‘희망의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 자체를 버리는 ‘식물정치’를 지속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칼에 내치는 것은 ‘쇄신’과 ‘수혈’을 공허하게 외치는 정치권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권력놀음이 아닌 장인정신으로 걸작의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을 영원히 추방시켜버리겠다는 것과도 같다. 이 문제가 더 엄중하다.


그래서 안철수가 고맙다. 사람과 정치를 새로운 희망으로 만드는 역사적 실험에 자신을 바치려는 아주 큰마음을 먹고 있기에 든든하기만 하다. 그가 후보로 나선다면, 그 정치판은 불가피하게 기성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문법과 상상력을 담아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면, 바로 그 때문에 안철수가 절대로 필요하다. 진작에 폐기처분되었어야 할 현실정치의 횡포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할 미래정치의 소중한 싹들을 잘라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약자를 배려하고 사람의 가치를 드높이고 사람과 소통하는 정치를 창조하는 지난한 작업에 감히 도전해보겠다는 그 의지를 꺾지 말자. 그는 지금 국민에게 절박하게 묻고 있다. 진정 정치를 살리고 싶은가를.



이영자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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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22:11

최고경영자(CEO) 후보가 100명이라면? 자질만 갖췄다면야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인재가 넘쳐흘러 좋은 일이다. 잘되는 기업엔 인재가 즐비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KT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 같다. KT 안팎에 ‘백인회’가 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이석채 KT 회장. “마지막 봉사라는 심정으로 일한다”며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백인회가 나를 흔들고 있습니다.”

KT CEO가 되고 싶은 100명을 일컫는 말이다. 그만큼 회장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CEO 후보가 많기로 유명한 기업은 GE다. 사업부마다 매니저와 리더급 이상 가운데 두세 명씩 의무적으로 후계자로 선정된다. 리스트에 들어간 인재들은 집중 관리 대상으로 분류돼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잭 웰치는 1994년 23명의 후보를 검증했다. 4년 뒤 여덟 명으로 압축하고, 그해 연말 다시 세 명을 추렸다. 이후 완벽에 가까운 경영능력 평가를 했다. 2001년 최종 낙점된 사람은 당시 45세의 제프리 이멜트. 강성욱 GE코리아 총괄대표는 얼마 전 필자와의 점심식사 때 GE의 기업문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People first, strategy second.”

사람이 우선이고, 전략은 그 다음이란 얘기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여러 명의 왕 후보가 나선 때가 명종이 후계자를 고를 무렵이다. 명종은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러나 열세 살 때 병으로 사망했다. 명종은 다른 왕과 달리 후궁도 한 명밖에 두지 않았는데, 그나마 아들이 없었다. 후사가 없자 과음하는 일이 잦았다. 조그만 일에도 벌컥 화를 내며 내관들을 벌주기 일쑤였다. 결국 위로 거슬러 올라가 왕 후보를 찾아야 했다. 그중 선택된 후보들이 중종의 7남 덕흥군의 세 아들이었다.


어느 날 명종은 이들을 대궐로 불렀다. 왕은 정무를 볼 때 머리에 쓰는 익선관을 벗어 “너희들의 머리가 큰지 작은지 알아보려고 하니 써보아라”고 권했다. 위의 두 형은 아무 생각 없이 썼다. 막내 하성군은 “이것이 어찌 신하 된 자가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며 어전에 도로 갖다놓았다. 얼마 뒤 명종은 위독할 때 하성군을 불러 간병케 하면서 후계구도를 암시했다. 하성군이 바로 조선 14대 왕 선조다. 영리한 그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왕권을 거머쥔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최악의 임금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당쟁과 왜군 침입을 불러일으킨 무능한 군주로 낙인찍혔다.

국가 CEO, 대통령을 뽑는 작업이 한창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 후보로 나선 숫자가 제법 된다.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 지켜보는 국민은 즐겁다. 반대로 누굴 찍어야 할지 헷갈린다. 이럴 때는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사람부터 솎아내 보자. 말하자면 ‘선조형’ 후보를 골라내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질도 없이 머리 회전과 눈치만 빨라서야 나라를 망칠 가능성이 매우 크니 말이다. 명종이 후계자를 선택할 상황은 누가 차기 왕이 돼야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되지 말아야 하느냐가 더 중요한 순간이었다.

IBM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기업들은 입사 인터뷰보다 퇴사 인터뷰를 보다 중시한다. IBM의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임직원들이 회사를 떠날 때는 거의 퇴사 면접을 봅니다. 만약 퇴사자가 재입사를 원할 경우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별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매니저는 해당자에게 X 표시를 해두죠. 그 사람은 다시는 못 돌아옵니다.”

전 세계가 위기다. 차기 대통령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기업 CEO들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면할 것이다. 잘나갈 때라면야 모르겠지만 요즘 같아서는 기교만 부리는 리더는 곤란하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기업을 망하게 한다. 누구를 뽑을지보다 누구를 뽑지 말아야 하느냐가 더 요구되는 시기다. 100명의 KT CEO 후보와 십 수 명의 대통령 후보에서 ‘하성군들’을 걸러내야 할 때다. 유능한 후보들이 많이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영 아닌 사람부터 GE처럼 솎아내고 IBM같이 X표 치고 볼 일이다.



정성구 산업부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901766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01

유신 때 만들어진 긴급조치들은 하나같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력하고(수업거부를 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다), 믿을 수 없이 뻔뻔스럽고(긴급조치에 의한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비판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지만(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역시 백미는 고려대학교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면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잡지에 연재하던 칼럼에 이 조항을 인용했더니 오타가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독재정권이 대학교에서 데모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 수는 있었겠지만 설마 특정한 대학을 꼭 집어서 그 학교 교내에서의 집회·시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었겠느냐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 촌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조항은 1975년 4월8일 제정된 긴급조치 7호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커녕 서글플 정도로 상식에 맞지 않는 법이 존재하던 때가 유신시절인 것이다.


이미 폐지된 지 오래된 긴급조치 얘기를 꺼내게 되는 것은 5·16에 대한 몇몇 인사들의 언급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분들은 “쿠데타가 아닌 군사혁명”이라고 하거나, “우리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를 줬다. 쿠데타이면서도 동시에 혁명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현역 군인들이 총칼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점에서는 쿠데타로 보아야 하지만, 그 후 산업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는 부정적인 평가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유신을 낳은 5·16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 어떻게 보수주의와 통할 수 있는지 지극히 의문이 든다.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전통적인 가치와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절대적 진리 혹은 선의 존재를 믿고 현존하는 통치체제와 법질서를 긍정한다. 철학적으로 불가지론적 성향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이 기존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데 비해서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체제 내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진다는 점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용기있는 행동일까. 겁에 질려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가치있었고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가치있을 것들을 위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인가.” 이 말처럼 보수주의자가 가질 수 있는 긍지를 잘 표현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그전부터 가치있었고 앞으로도 가치있을 것들을 지키는’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새는 양 날개로 난다는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진보와 보수는 때로는 서로 대립하고 때로는 서로 조화하면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두 개의 유효한 시각이다. 어느 한쪽이 완벽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편협한 생각이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진보가 필요한 것만큼 건강한 보수가 필요하다.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고 법질서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보수를 자임하는 모습은, 고려대학교에서 집회를 하면 처벌하겠다는 ‘법’을 보는 것만큼 슬픈 일이다.



금태섭 변호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47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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